옥희가 아닌 누군가에게
- Diamonds and Rust
정기석
별일은 없고 속은 쓰리오.
아침이자 저녁으로 전복죽을 먹었소.
무려 전복이오, 희멀게서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소.
새벽녘엔 금성을 보았소. 둥근 후광이 골목 끝에 문짝처럼 떠 있었소. 그 길을 쭉 따르면 워프홀을 건너, 드디어 도달한 외계가 어쩌면 그리도 그리던 과거일지,
그래서 그것이 지금인지,
지금이라면 과거가 된 지금도 그리워할지 모른다고,
하여 어쩌면 문을 계속 도는 것으로
새벽이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소.
바라마지 않던 외계가 가장 지긋지긋한 오늘일지 모른다고,
우리는 지나온 빛을 잃고, 어제를 또 하루 망각한 채 맹서 같은 금성을 비로소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고.
눈이 따갑소. 담뱃불은 작은데 연기가 온통 눈 속에 그득하오.
내가 무엇을 태운 것인지는 아직 보이지 않소.
그럼에도, 무탈한 하루인 것이 죄스러울 따름이오.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말기를*,
그리 바란 것은 진심이오, 진심의 편편이 너무 약소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오. 그 말만큼은 네 세상인 세계를 온통 네 편으로 욱여넣고, 나는 바깥 편에서 또다른 진심을 탕진하오.
여기, 후각은 나침반의 작동을 잃고 서서히 자전뿐인데,
당신과의 일만은 선명해, 나는 모호함을 기다리오.
불을 지피오. 뜨끈한 눈알이 초점을 방기하오.
목로주점 고드름 너머 수미산이 비치오.
그 어딘가 네가 있단 걸
아직 믿고 있소.
거기 멀리, 많은 이들이 떠나가오.
코끝을 스치며, 지상의 빈자리를 마련하오.
아름답지만은 않소.
북행北行의 배가 떠나는 시간을 초 단위로 재고 있소,
이번만큼은 타야겠거니 다짐하면서, 부두까지 달려도 배를 놓칠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다 더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오늘치의 수치이자 수-움이오.
배가 떠나면 산책을 할 참이오.
산책을 바라며 전복만 궁굴리겠지.
모호함이 너무 분명해, 속이 쓰리오.
* 이상이 동생 옥희에게 쓴 편지 중.
저글링
1.
인간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지칭한다면
끄트머리에 서있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나는 북쪽 끝으로 가기로 한다.
2.
인간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지칭한다면
음악은 항상 가운데 있다.
음악이야말로 인간의 현시다.
음의 파동이 희미하게 번져가는 끝
음악에 한해서라면
우리는 때로 인간을 초과한다.
분해된 채로 점프하는 입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부터 돌아오는 캐치볼
둘의 사이일 때 환상은 현상이 된다.
3.
하지만 허기가 진다.
살이 고프다.
4.
밤 맨드라미 저수지에 담은 두 발을 까딱이며 리듬을 맞춘다.
뿌리를 타고 올라가면 두 몸의 중심은 음악이다.
물결이 일렁이고 서늘한 복숭아 같은 음악이 재생된다.
음악 안에서 물과 달이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낸다.
5.
내가 북쪽의 끝으로
방향을 상실할 때까지 가기로 하였을 때,
너는 몰려드는 시간의 수문장으로서
시간을 붙드는 덫이 되어 시간과 함께 패망하기로 하였지,
네가 불 꺼진 유원지 저수지에 발을 담그고
달이 그윽한 먼지로 흩어지길 기다릴 때
또 다른 나는
폐장한 유원지의 타코야키 장수
약속장소는 모든 방위의 끝이지만
끝의 선 몇몇은
손에 손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우면 좋겠어
미래의 끝에 놓인 내 아름다운 타코야키 마차
살아남은 모두의 끝이 여기일 때,
뜨거운 알 하나 쥐어주기로 한다
6.
발이 시리구나, 생각할 때
저수지 끝 어딘가로부터
퍼지는 다이빙 소리
저수지에 던져진 복숭아는 사라지고
물 위엔 찢어진 달만 덩그러니 흔들린다.
같은 물속에 뿌리를 둔
음악이 동서남북의 바깥으로 떠내려간다.
7.
폐장을 종용하는 음악이 연거푸 울리고
거의 들리지 않는 멜로디를 붙들던 사람들은
허밍하는 미아가 된다.
남은 타코야키를 쥐어주는 손
8.
돌아오는 캐치볼
의도된 비효율성은 예술이 된다
지난 유월, 며칠 교토에 있었다. 호텔 프런트에서 직원에게 체크인을 하는데, 마지막 절차로 체크인용 키오스크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키오스크에 대해 설명할 시간에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마무리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괜히’ 불편함을 감수하며 일을 두 번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간사이 공항에서 교토까지 오는 길에 느꼈던 미묘한 불편감, 딱히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어딘가 같은 자리를 한번 더 맴돌게 하는 듯한 이상한 위화감이 있었는데, 그것이 호텔 프론트에서 구체적인 모양새로 드러난 것이었다. (다른 예, 식당 메뉴판에, 한자로 잔盞, 배盃 또는 병瓶으로 쓰거나, 영어로 Glass나 Bottle을 쓰는 것도 아닌, グラス[구라스], ボトル[보토루] 등의 가타카나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 당신이 이런 말을 한다. “의도된 비효율성은 예술이 된다.”
그 말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그 문장을 가지고 괜한 의미나 과잉된 수사를 덧붙이진 않는다. 당신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을뿐더러, 이국에서 풍경을 걷는 것만으로 의미는 넘쳤으니까. 다만, 그 문장을 한 번씩 되삼키니, 이국의 불편들이 썩 견딜 만한, 아니, 꽤 좋은 것이 되었다. 예술이 뭐라고, 예술이라는 단어를 붙여놓으니 제법 그럴 듯하지 않나. 단지 문장이지만, 그런 문장은 걸음에 보탬이 된다. 어떤 불편은 거기에 붙여둔 표지만으로 기꺼이 감수할 만한 것이 된다.
함성호 시인은 건축가의 자격으로 2019년 스웨덴 예테보리 국제 도서전에서 한국관 부스의 기획자로 참여한다. 그는 한국관 부스의 ‘바닥’을 경사지게 설치한다. “이 전시장 바닥은 약 1% 기울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 기울기 위에서 인간의 불편한 조건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부스 입구에 적혔고, 안내대로 1% 기울어진 지대 위에 의자가 설치되었다. 기획자의 의도는 아마 편리와 효율만 추구하는 세계에 대한 작은 ‘지연’이었을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나 ‘지젝’의 문구를 차용하면 ‘불편함과 함께하기’이겠다. 의도된 불편은 예술이 된다. 이는 동어반복이다. 예술은 불편함 속에서 피어날 뿐만 아니라, 불편함을 야기하는 것이 그 목적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그 기획이 시인 함성호에게도 어떤 창작적 기반이 되었던지, 시인은 몇해 뒤 「운명의 경사」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한다. 몇 평의 부스에서 느꼈을 불편의 체험을, 시인은 인간 삶의 조건으로 확장하려 한다. 시인은 이렇게 적는다. “슬픔이 인간의 조건이라면 / 우리는 모두 운명의 경사에 놓인 / 기울어진 의자에 앉아 있을 것이다”(「운명의 경사」, 『로 여는 세상』 2022년 봄호).
어떤 알고리즘의 작동인지 알 수 없으나, 유튜브의 썸네일에서 ‘왜 [지금은] 저항 시인이 없는가’ 라는 문장을 스치듯 보았다. (영상을 눌러보지 못했고, 이후 다시 뜨지 않았다.) 그 문장을 “어째서 시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가” 라고 바꿔 읽는다. 무도한 시대에도 여전히 시는 어떠어떠한 가치를 지녔고 등의 이야기가 아니다. 역으로, ‘저항’씩이나 가지 않더라도, “시는 사라짐을 당할 만큼 불편하지는 않은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모든 불편한 것들, 비효율적인 것들이 열심히 축출되고 추방되는 시대에 어째서 시는 안온한가.
의도된 불편은 예술이 된다. 그런 말은 잔뜩 지친 여행의 걸음 중에 잠시 체력과 여운을 충전하기 위해 곧 다다를 카페 그늘이나, 거기서 쉬며 나누는 한담에 대한 예견처럼, 지금의 걸음을 더 감수하게 하지만, 막상 카페에 다다라 머물며 숨을 돌리는데, 옆자리 앉은 한갓진 누군가 그 문장을 듣고, 그것 참 ‘시적詩的입니다’라고 하면, 그가 앉은 의자를 걷어차고 싶을 것이다.
교토의 쇼핑몰 한 코너 천장에 ‘’(여름의 풍물시)라고 적힌 표지를 보았다. ‘풍물’을 보고 무슨 축제 같은 걸 홍보하는 것인가 생각하다가 시詩가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풍물시’는 “계절 느낌을 잘 나타내는 사물, 풍경, 이벤트 등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글이 보였다. 코너 아래엔 부채, 우산과 그 외의 팬시한 여름용 물건을 팔고 있었다. 획기적으로 경량화된 우산이 눈에 띄어 살까 하다가 도로 두었다. 그것이 ‘시’인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