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은 성경의 내용인 아담과 이브의 에덴의 동쪽을 다시금 재조명 하여 매력적인 묘사와 교묘한 이야기로 나타낸 소설로서 관용과 인간애가 물씬 풍기는 소설이였다. 처음 책을 펼치자 마자 프롤로그 형식의 작가가 남긴 작은 문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상자를 자신의 작품열정의 크기로 비교하여 적은 탁월한 묘사였다. 이미 거기서부터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자신의 상자는 크지는 않지만 그 상자 안에 꽉 들어찰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만든 글이라는 것을 넌지시 던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이지만 작품의 배경은 작가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샐리너스 계곡을 바탕으로 아이슬랜드에서 이민 온 해밀턴 일가로부터 시작되는데, 해밀턴 일가가 바로 작가의 외가쪽을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작품에 꽤 중요한 요소로서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인 ‘리’ 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자신의 가치관을 투영하여 자연스럽게 글을 전개한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이 점들이 이 작품의 색다른 관점에서의 특별한 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소설은 현재 우리네들의 삶의 가치와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듯한 노력이 뚜렷이 내비치면서, 계속되는 질문을 작가는 제시하고 있다. 인간 원죄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마지막에 팀셀(뜻에 따라)라는 말을 남김으로써 20C 현대인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 한 듯 하다. 더불어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그의 작품 전개 능력 또한, 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그가 가진 사상의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항상 빨려들어 갈 듯한 세밀한 묘사는 마치 사건을 설명 하듯이 하였고, 보지 않고서도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폭넓고 풍부한 감성을 지닌 체 그 세계를 그리려 하고 있었다.
사무엘 해밀튼 家의 이민으로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무엘의 눈에 빚친 캘리포니아주 샐러너스의 계곡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광대한 지역으로서, 따사로운 햍볕과 무르익는 곡식들이 드넓게 펼쳐지는 곳이다. 사무엘은 집안에서는 뛰어난 손재주 꾼이지만 그것으로 돈을 버는 일은 없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차분하고 조신한 여인이다. 그에게는 아홉명의 자녀가 있는데 여기서 여덟 번째인 올리브는 서술자의 어머니로 등장한다. 전형적인 19C 이민가족의 모습으로 차분한 느낌으로부터 시작된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같은 동네에 사는 주변인물로서 생각되어지지만 글 전개의 중요한 부분에 영향을 미치면서 작가의 체계적인 구성에 감탄할 따름이다. 주인공인 아담 트래스크와의 이야기와 무리없이 연결되어 자연스러움을 더해준다.
주인공인 아담 트래스크의 아버지인 사이러스 트래스크가 처음 등장한다. 여기에서 는 단순히 군대를 신봉하고 고지식한 인물로서 표현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마디로 자격지심에 빠져있는 인물이다. 군인의 성향이 짙은 인물로서 아담에게 급기야 기병대에 입대 하라는 강요를 하게 된다. 아담의 어머니는 내성적인 인물로 아담을 낳자마자 자살을 하게 되어, 사이러스는 어리지만 신중한 앨리스라는 여자와 재혼하게 된다. 여기서 한살 아래인 찰스라는 이복동생이 아담에게 생기게 된다. 여기서부터 성경의 에덴의 동쪽의 원죄인 형제살해가 시작이 되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비록 이 소설 어디에서도 직접적인 형제살해는 나오지 않지만 후에 죽게 되는 아담의 첫째 아들인 아론의 죽음을 거슬러 올라가면 찰스와 아담의 관계에서부터 발단인 것이다.
사이러스는 아담에게 그의 편향적인 희망을 아담에게 강요하면서 이상하리만큼 관심을 쏟아 붇는다. 아마 자신의 고집스런 인생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찰스에게는 그가 비싼 돈을 주고 산 독일제 칼로 대변되어지는 그의 사랑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아담에 대한 편애는 바로 찰스의 일탈로 이어진다. 그 이후 결국 아담은 아버지의 억지에 이끌려 기병대에 입대하게 된다. 여기서 찰스와 아담은 편지를 나누는데 아담은 섬뜻하리 만큼의 두려움을 받게 된다. 이에 아담은 5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하사관으로 재입대 하게 된다. 그 이후 소위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접촉하면서 사이러스는 엄청난 재산과 부를 축적하게 된다. 아담은 상사로 전역한 이후에도 끊임없는 방황을 하면서 진정한 자신에 대한 자아를 찾고 싶어 한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고하면서, 또한 자신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지만 계속된 방황만이 그에겐 해답이 될 뿐이다. 그 무렵 사이러스는 사망하게 되고 엄청난 재산에 의아해 하면서 아담과 찰스는 재산을 동등히 물려받게 된다. 사이러스는 바로 그런 인물이다.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인물로서 아담의 비극적인 결말에 원인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샐리너스 계곡에 돌아와 찰스와 함께 한적한 생활을 잠시 가진다.
이다음 이 소설의 또 하나의 낙인찍힌 악마의 대명사로 캐시 에임즈 혹은 캐더린 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등장하게 되는데, 찰스와 이 여인은 바로 성경의 표현을 빌려 악마라는 표현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인물은 아담의 입양아들이자 하인인 중국인 리 와 같이 소설의 중요한 인물로서 가늠지어 볼 수 있다. 무남독녀인 캐시는 금발의 매혹적인 미녀로서 표현되어지면서 이브의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다. 여기서 성경의 금단의 사과를 따먹는 죄를 두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린시절 동네의 사내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장면과, 나중에 아론과 카알을 낳고 뛰쳐나가면서 그녀를 막는 아담에게 총을 쏜 장면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또한 이브의 에덴의 동산에서의 추방을 그리는 장면일 것이다. 캐시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가히 엽기적인 악마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의 이면에 알 수 없는 적막을 드리운 악마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상상되어진다. 또한 후에 아론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말해주는 것이다. 뒤에 말하겠지만 성인군자 같은 아론의 모습이, 캐시의 악마 같은 모습과 연계되어지는 끈으로서 20C 현대인에게 적합지 않은 인간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올바른 현대인의 모습은 소설의 끝부분에서 심도 있는 여운으로서 느낄 수 있지만, 계속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나름대로 해답을 알 수는 있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작가는 지속적으로 이런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같은 악마의 이미지인 찰스가 마지막에 캐시와 결혼하는 것을 말리는 모습에서는 소설의 전반에 걸친 악마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을 가끔 내비치는 것이 관용적인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더하여 캐시 또한 후에 아들이 되는 카알과의 대화에서 제대로 대화를 잊지 못하는 모습과, 죽는 시점에서는 자신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을 가지는 것이 관용적인 시선일 것이다. 작품속의 너그러움에 느낀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캐시는 갑작스럽게 아담과 찰스의 집에 부상당한 채로 등장하게 된다. 아담은 그의 성인군자 같은 성격처럼 극진히 그녀를 간호하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한다. 그여자를 사랑하게 됨으로서 아담은 자아를 잠시나마 깨닳게 되고 열정적으로 농장을 가꾸면서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캐시는 그러 아담의 노력에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상적인 에덴의 동산으로 대변되어지는 그 열정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린다. 쌍둥이를 낳자 마자 이름도 짖지 않은채 엄청난 죄를 저질러 버린다. 그 이후 그는 창녀촌인 페이의 집에 케이트라는 이름으로 가게 된다. 물론 악의 대명사로서 창녀촌을 작가는 택하였는데 여기서 후에 캐시는 창녀촌의 주인을 꿰차게 되어 다시금 악의 화신으로 확인시켜준다. 아담은 이에 크게 낙심하여 다시 방황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이후 아담은 리를 만나 원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게 된다.
그의 마음은 피폐해지고 농장은 황폐하여 지고 두 쌍둥이는 리의 손에서 자라나게 된다.
사이러스가 아담과 찰스에게 그랬듯이, 아담은 아론과 카알에게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너무나도 자신과 비슷한 아론에게 더욱 관심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아담은 아론에게만 사랑을 전해주고 신뢰를 느끼지만, 카알에게는 어쩌면 사이러스보다 더하게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서 카알은 찰스가 그랬듯이 아론에 대해 질투를 느끼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갈망 하면서 비뚤어져만 간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점은 낙인이다. 찰스와 캐시에게는 찍혀있는 낙인이 같은 이미지인 카알에게는 찍혀있지 않다. 이것은 작가의 너그러운 세상에 대한 시선으로 원죄에 대한 용서를 시도하려는 것일뿐더러 바람직한 현대인의 모습을 카알로서 드러내고 있다. 카알은 내면의 자아와 끊임없는 갈등을 하게 된다. 이 또한 운명지어진 악의 꼬리표에 지속적으로 상대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다.
그 이전 쌍둥이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해주는 어머니를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를 만나게 되고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한채 혼란을 가중시키기기만 한다. 여기서 어김없이 악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캐시와는 다르게 카알은 매몰차게 그녀를 노려보면서 혼란스러움 속에서 새롭게 자신의 자아를 알게 된다. 바로 카알로서 대변되는 현대인의 가능성을 보여준 장면이다. 이후 성경과는 달리 간접적인 존속살인, 즉 형제살인이 등장하게 된다. 카알은 아론을 전쟁터로 가게 만들어 전사하게 한다. 아버지에게 선물을 거절당하고난 카알은 질투심에 못 이겨 급기야 아론에 대한 미움을 복수의 명목으로 자신들의 어머니가 창녀라는 사실을 밝히게 된다. 그에 아론은 정신적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대학을 그만두고 군에 입대하여 때마침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중에 참전하여 전사하게 된다.
에덴의 동쪽이라는 대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꼽는다면 계속적으로 보조 역할을 담당했던 사무엘이 왜 이 소설에 등장하는지에 대한 의문의 해소 시점에서다. 물론 리 라는 인물이 이 소설에서 가지는 중요한 점도 극명히 확인되는 시점이다. 소설 중후반부에 두 쌍둥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일화를 이야기한 열 줄 남짓의 성경구절을 가지고 리 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인간의 죄는 분노로 인하여 생기며 분노는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데서 생겨난다. 즉 다시 말해 애정의 거부는 범죄를 일으키고 죄를 낳는 사슬을 가진다는 것이라고 리 는 말하고 있다. 카인과 아벨의 일화는 우리네들 누구에게나 상대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인간의 내면속에 원초적으로 상주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솔직히 이것이 과연 이 소설의 전부인가? 명쾌한 해답은 무엇인가? 이게 무슨 의미인데 이렇게 말이 어려운가? 라는 내안의 혼란에 빠졌지만 결국 그 불안함은 말끔히 씻어내지게 된다. 리의 어록을 곰곰이 되집어 보면 조심스럽게 서광이 내 머릿속을 빚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으로 몇해가 지난 후 사무엘은 딸의 전신을 받고 딸의 집으로 떠나 거기서 죽게 되는데 떠나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였는지 아담에게 작별인사를 하러간다. 그 자리에서 리는 10년전 창세기 4장에 대한 일화를 다시 나누게 되면서, 그동안 그 4장중의 한구절을 놓고 자신이 꾸준히 생각해왔던 과정을 이야기한다. 사무엘은 계속된 그 구절에 대한 해석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리와 사무엘의 대화에서 새로운 해석이 나오는데 그 구절의 뜻이 인간에게 죄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또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 팀셀이라는 단어를 들어 우리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언과 명령을 넘어서 인간이 지닌 이러석음과 나약함으로 비롯된 죄악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인 선택에 의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라는 기회를 신이 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원죄에 대한 작가의 너그러운 시선에서 나아가 현대인에게 바람직한 생활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소설에서 마지막에 아담이 남기는 팀셀(뜻에 따라)라는 말이 카엘을 용서했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생명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부분이 아마 너무나 어려운 이 소설에서 내가 가져온 보물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세밀한 묘사들과 폭넓은 구상을 느끼는 것도 한 묘미였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던 것은 일차원적으로 “너무 어렵다” 라는 것 이였다. 그다음으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 이였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에 어려운 소설인 에덴의 동쪽에 감사를 하게 되었다. 어쩌면 간단한 해답일지도 모른다. 굳이 해답을 찾으려 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가 작품에서 계속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아론처럼 숙명에 빠져 마낭 선량하거나 낙인찍혀진 찰스나 캐시 같은 현실세계에서는 내면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찰스나 캐시같이 악마의 운명을 타고 났어도, 악에 빠져들면서도 아직 인간의 길을 선택한 가능성을 가진 자, 즉 카알의 캐릭터만이 현대인으로서 살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인이는 것에 리 즉 작가는 후반에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낙인은 벌을 주기 위해 찍은 것이 아니라, 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찍었다는 것이다.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회개에 대한 여분을 남겨두는 것에 대해 나에게 또 우리에게 엄청난 절대자에게서 받은 행운이 아닐까 한다.
구지 잘라서 결론을 말하자면 현대인의 가능성을 이야기 한 것이다. 나는 이 가능성에 흠뻑 취해 자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찬미 할 따름이다. 인간의 자아인식에 대한 의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이소설이 성경의 한내용을 배경으로 한 아류작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스스로 그러함으로써 지각의 능력을 지니고 올바른 선택의 가능성을 확인할 때 가치를 지닌다는 것일 것이다. 꾸준히 이 소설에서는 이러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많은 인물들이 내면의 자아와 갈등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작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의 도출이 고통과 시련의 과정으로 엄청나게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광의로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 꾸려나가는 세상을 바라는 것이 나와 작가의 소망일 것이다.
또한 현실에서 언제나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느낀 것처럼 선택은 엄연히 자신의 권리이자 자유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과 함께 성숙한 사람으로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한 요점으로 다가온다. 지속적인 공황상태로 살아가는 아담은 마지막에 비록 깨닫는 듯한 말을 남기지만, 자신이 죽는 시점에서는 의미 없는 말이 되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명언이 되어버린 “뜻에 따라” 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제3자의 맘대로 해라는 식의 망발로 들릴 수 있겠지만 결코 그런 뜻이 아님을 나는 안다.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내 삶의 주체가 내가 되어, 나의 가능성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 것이 현재 나의 미션임을 느낀다. 지속가능한 발전상태로 내 자신을 만들어야 함을 명심하게 된다.
잘 읽었습니다 준수한 청년님.^^ 독후감 대회에 응모할 거라니.... 부주제를 다는 것이 좋겠습니다. 님의 독후감의 핵심이라 생각할 될한 부주제를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긴 문단은 내용에 따라 나누는 것이 좋겠고, 부적절한 조사의 사용과 문장이 매그럽지 못한 부분이 잇습니다.
첫댓글 이번 학교 독후감 대회에 낼꺼랍니다..어제 오늘 새벽까지..하루죄일 한글에서 놀았내요..;; 상금 50마논인데..될까^^
잘 읽었습니다 준수한 청년님.^^ 독후감 대회에 응모할 거라니.... 부주제를 다는 것이 좋겠습니다. 님의 독후감의 핵심이라 생각할 될한 부주제를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긴 문단은 내용에 따라 나누는 것이 좋겠고, 부적절한 조사의 사용과 문장이 매그럽지 못한 부분이 잇습니다.
참고로....첫번째로 눈에 띈 것이라 말씀 드리면....둘째줄에 '소설이었다/소설이다"가 맞습니다. 소설이다가 좋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 좋은 결과있길 바랍니다. 잘 쓰셨네요.^^
채팅용어 찌든 우리들,,;맞춤법이 제일 어려웟어요..;; 한글에서 쓴거라 서론.본론2개.결론 빼곤 다 붙어있네요..원래 한 단락마다 앞부분 다 띠웠는데..어쨌든 땡스요
전 제임스 딘이 생각나네요 그 우수에 찬 눈동자~ 사랑을 갈구하는 그 눈동자~~, 사랑 받고 싶어하는 그 맘이 생각나네요~
그 영화도 유명하다죠..전 영화는 못봤는데 소설하곤 제법 틀리다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