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가정방문
새학기가 시작되고 3월 중순쯤 되면 선생님들의 가정방문이 있다. 새로운 학생을 담임하게 되었으니 학생의 가정환경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때에 「교육과정 설명회」라 하여 학부모 초청 설명회가 열리고 담임과 면담이 필요한 학모님은 미리 면담 신청을 하여 이날 상담을 한다. 전처럼 가정환경을 알아보기 위한 가정 방문은 하지 않는다.
내가 교직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던 1971년 3월, 역시 가정 방문이 있었다. 그때는 학교에서 육성회비로 매월 약간의 돈을 받았는데 가정환경이 좋지 않은 몇 명은 면제를 해 준다. 그 대상을 선정하는데 직접 가정을 방문해서 알아보기도 하고, 학생의 부모와 학생에 대한 여러 가지를 직접 면담을 통해서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그때 나는 불과 20세 초반으로 새파란 나이였지만 산골의 순박한 학부모들로부터 자기 자녀의 담임이라 하여 깍듯한 대접을 해 주었다. 초등학생을 둔 가정이면 부모는 나이가 적으면 30세 중반에서 많게는 60세 가까이도 있었지만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존대해 주고 방에 들어가도 아랫목에 앉도록 권하곤 했다.
70년대 초의 농산촌은 매우 어렵게 살고 있었지만 지금에 비하여 인심도 후했고 사람들도 매우 순박했다. 가정방문을 할 때마다 집집마다 거의 꼭 대접 받는 것이 계란과 막걸리였다. 계란은 집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것이고 막걸리는 동네의 구멍가게에서 받아오기도 하지만 좀 잘 사는 집에서는 집에서 담근 가용주도 내 놓았다. 그래서 그날의 가정 방문이 끝날 때쯤이면 얼굴이 붉어지고 술기운이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80년대쯤 도시 학교에서부터 가정방문이 잘못 변질되어 학부모에게 부담이 된다는 몇 차례의 신문이나 방송으로 보도된 뒤부터 가정방문은 중지되었는데 2000년도 경부터 학교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나는 교사의 경력이 33년(교직 총경력은 43.5년째)이나 되지만 가정방문을 통해서 학부모로부터 뇌물의 성격이 있는 그 어떤 것도 받은 바 없다. 어쩌다 성의 있는 학부형으로부터 한 끼 식사 정도는 몇 번 받았다. 도시지역에서나 흔히 오가는 촌지 이야기가 나오면 사실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그럴 때마다 같이 손가락질을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에도 3월 중순경이면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차 집에 찾아오신다. 가정방문이 있는 날에는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학교 일과를 끝나고 보내준다. 집에 가면 담임선생님이 온다는 말씀을 드리고 집을 비우지 말라는 말씀도 하신다. 농촌 지역은 3월부터 일손이 바빠져서 집을 비우고 논밭으로 일을 하려고 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그때, 담임선생님이 집에 오신다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동네에 선생님 모습이 보이면 벌써 가슴부터 벌렁벌렁하면서 선생님을 직접 만날까봐 두려워 부엌이나 헛간으로 숨은 기억도 난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교사로 있을 때, 가정방문을 가면 나처럼 숨어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학생(주로 여학생)도 몇 명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집 저집 다 알려준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남자이면서도 여자 이상의 지나친 순진함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
담임선생님은 우리 집에 찾아 오셔서 어머니와 몇 마디 말씀을 나누고 역시 어머니께서 주는 달걀 몇 개 중에서 한 개 정도를 잡수시고 가신다. 물론 나는 선생님이 어머니와 말씀을 하시는 동안에도 부엌에서 나오지 못하고 콩콩 뛰는 가슴만 진정시키고 있어야 했다.
우리 집에 찾아오신 선생님을 왜 반갑게 맞이하지 못 했을까. 내가 교직에 있으면서 선생님을 어렵게 아는 그런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듯 나 자신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3월이 되어 새학기가 시작되는 이 때, 나의 초등학교 시절 새학기에 가정방문으로 우리 집에 오신 이문식 선생님을 생각하며 적어 보았다. <끝>
첫댓글 가정방문에 대한 추억담
구 구 절 절
지금 친구가 쓴 글을 보니
아름답고 즐겁고
필요했던 것중의 하나였지않나 싶네...
헌데
나도 참 싫어했거든
왜냐고?
엄마가 안계시다는 사실을 알리기 싫어서...
친구의 추억담 나와도 연관시켜보며
즐겁고 고맙고
또한 그시절을 그리며
행복한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잘~~~봤어
많이 많이 정말 많이
고~~~마워!!!
" 선생님의 가정 방문 " ~~
글 을 읽으면서 잊혀졌던 추억이
새록 새록 기억될수 있도록 자상하고
섬세한 내용과 표현 너무나 고마워 ~
1학년때 담임은 김 수자 선생님.
2.3학년때는 주 영옥 선생님.
4학년때는 정 소복 선생님.
5.6학년때는 최 만식 선생님
2반은 이 문식 선생님
박 기환 교장 선생님 까지~~
그 옛날 아련한 추억속에 한참을
머무르며~ 참으로 고맙고 감사 ^♡^
옥진이는 1학년 때 담임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그 기억력이 무척 좋다는 것을 알 수 있구먼.
1학년에 입학이 안 되어(나이가 어려서- 집나이로는 여덟살인데 호적으로 5살밖에 안되니)
국민학교 내에 있었던 공민학교에서 1학기 내내 가갸거겨고교... 만 죽도록 외운 기억이...
2학기때부터 1학년으로 편입되었었는데 담임은 기억이 나나네.
4학년때 정소복 선생님 5,6학년때 이문식 선생님이 담임을 했었지...
참 아련한 추억일세.
학교에 같이 다닌 하동, 해평부락 친구들도 하나둘 머리에 떠 오르네
마을은 팔왕부락이었으나 우리집 뒤로 하동, 해평부락 가는 길이 있어
그 마을친구들과 같이 다녔으니까...
하마터면 놓칠뻔한 소중한 추억을
돌아보며~~ 다시한번 하늘 같으신
스승 의 은혜를 우러러 되새기면서
마음 깊이 감사를 드려봅니다.
언제나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로~
또한 이렇게 일깨워준 우리의
지기님 ! 거듭 고맙고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