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 선잠 외 1편
나는 매번 목만 살아있어요
목 아래 몸은 암매장당했어요
목각 인형도 없는 침대에서 고양이가 분홍 책을 반복해 읽어요 길들여지지 않은 가구들이 나를 쏘아봐요 거울 뒷면으로
낯선 불의 통증 몰려와요
점차 목 위로 차오르는 갈증
발가락을 움직이는 데 생의 절반을 써야만 하다니
불면의 접시 위에서 누군가 삽질을 하고 있어요 그래도 난 잘 살고 있어요 악몽이라니요 악몽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눈알 같은 거잖아요 몇 그램의 의식이 잠시 멈춘 사이 의심이 목젖을 흔들어요
분홍에서 빨강까지
도착하지 않은 새벽이 장롱과 거울을 흔들어 깨우면
음악도 연민도 없는 피아노가 가위처럼 일어나요
오, 내가 죽은 건가요
오드 아이,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던 고양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요 옷장이 거울을 나서는 동안 눈과 눈 사이가 멀어져요
맙소사, 저게 내가 낳은 아이라니
곧 사라질 빛이 입을 틀어막아요
왼발이 오른쪽으로 까닥까닥 돌아누워요
꽃의 절벽
아무 날도 아닌데 꽃을 선물 받았다.
당신이 주는 순간
봄날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꽃의 절벽에
오래된 분노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기 한 마리에도 날밤을 새운 적 많았다.
첫눈의 무릎이 아플 때까지 당신을 차고 옆에 세워두기도 했다.
다 떠나서, 애들만 생각해요. 몸이
몸을 말리는 창가에서 축축한 당신의
저녁을 보았다. 파문을 만드는 낚싯대의 미늘도
툭툭 건드려 보았다.
같이 묶여 있으되 묶여 있지 않은 날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아무 날도 아닌데 선물 받은 스타치스가 벽에 걸려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날들이 쉽게 용서되지 않는
용서였다. 보푸라기 같은 날들이, 툭하면 부풀어 오르던 위태로운 삶이
귓가에 앵앵댔다.
물의 죽음이 꽃을 다 빠져나가는 동안
거꾸로 매달린 꽃이 꽃을 닫아버렸다.
― 김정수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 2020)
김정수
1963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출간. 제28회 경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