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건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1994)
[작품해설]
이 시는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만나서 사랑하다 헤어지고 잊는 과정에 비겨 이별한 사람을 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안타까운 독백체의 어조로 노래한 작품이다.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핀 고창 선운사의 모습은 임과 이별한 시적 화자의 처지와 대비되면서 이별의 슬픔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흐드러진 동백꽃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에서 꽃과 화자의 관계는 비유적 이미지에 의해 자연스레 임과 화자의 관계로 치환된다. 그러면서 꽃이 피는 건 힘들지만 지는 건 잠깐이듯이, 비록 임을 만난 것이 오랜 세월이라 하더라도 임을 잊는 것 또한 한순간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복된 시어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소망만큼이나 임을 잊기 힘들다는 반어적 표현으로, ‘잊는 건 한참이더군 / 영영 한찬이더군’과 같은 반복을 통해 잘 드러난다. 비록 ‘산 넘어’ 떠난 임이지만, 그를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심경을 마치 이별의 상처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담담하게 표출함으로써, 오히려 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이 시는 이별한 사람을 잊지 못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한편, 그러한 인생의 보편적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는 ‘꽃’과 관련된 배경, 이미지, 시어의 반복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중심이 되는 시상의 흐름은 ‘꽃이 피는 건 힘들다’ ⤑ ‘꽃이 지는 건 잠깐이다’ ⤑ ‘꽃을 잊는건 한참이다’로 연결되는데, 이것을 임과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잊혀짐에다 대비시켜 보면 ‘임과의 만남은 길다’ ⤑ ‘임과의 이별은 잠깐이다’ ⤑ ‘임을 잊는 건 한참이다’와 같이 된다. 이와 같이 이 시는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인생의 보편적 이치 하나를 깨닫는 과정을 보여 준다.
[작가소개]
최영미(崔泳美)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및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서 시 「속초에서」 등을 발표하여 등단
시집 :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꿈의 패달을 밟고』(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