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日記(고독)
TV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를 자주 본다는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일본을 방문하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드라마에 등장했던 긴자거리의 식당에서 만찬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고독한 미식가'는 일본의 작가 쿠스미 마사유키가 1994년부터 2년간 연재한 만화로 한 회사원이 한가한 시간에 다양한 맛집을 찾아 혼자서 가미(嘉味)를 즐기는 내용이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잔잔한 재미를 안겨줘 인기를 끌었고 이후 TV 드라마로도 재현됐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최근 1인가구의 비율이 전체 가구수의 40%를 넘어서면서 혼밥, 혼술이라는 신조어와 함께 나홀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더우기 개인주의 문화가 짙은 일본에서는 아예 혼자 먹는 식당이나 술집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과거와는 달리 혼자 밥을 먹거나 술을 먹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져 혼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 점차 생겨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이처럼 '나홀로족'이 늘어나면서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고립감, 우울감, 외로움, 고독 등과 같은 사회심리학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와이스(Weiss, 1975)는 고독은 부정적인 형태가 아닌 특정 상황에 대한 개인의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설명하면서 고독에는 사회적 고독(social loneliness)과 정서적 고독(emotional loneliness)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또 인본주의 심리학자 클락크 무스타카(Moustakas, 1961)는 여기에 죽음으로부터 오는 고독을 부가했다.
사회적 고독은 사회관계의 부족에서 오는 것으로 가족, 친구,직장동료,단체 등 사회적 귀속감의 결핍이 원인이다.
흔히 가족의 상실과 관계의 감소, 사회적 역할 상실 등으로 인한 고독이다.
정서적 고독은 다른 사람과의 정서적 연결이 없는 상태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가족, 친구, 혹은 동료 등으로부터 정서적 지지를 얻지 못할 때 느끼는 고독이다.
또한 주변에 친구가 많더라도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거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로 '군중속의 고독'이 이에 해당된다.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독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고독이다. 이것은 인간들에게서 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된다는데서 오는 두려움, 공허감, 슬픔 등으로 이해된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릭프롬(Eric Fromm, 1900-1980)은 고독을 본능적인 문제로 이해하하면서, 어떤 대상으로부터의 분리에서 오는 고립과 사회적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하게 될 때의 상태를 고독으로 보았다.
인간의 절실한 욕구는 이런 분리 상태를 극복함으로써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해석한다.
역설적으로 혼자 되는 능력이야말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독은 전적으로 역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기능으로도 작용한다는 것이 통설적 견해이다.
비근한 예로 고독은 창의성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예술가들을 비롯한 위인들의 성취가 고독속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으며, 심리학자들도 고독의 긍정적 가치를 연구해 왔다.
21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고독은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위해 필요한 활동을 창조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고 말한 바 있다.
독일의 철학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인 폴 요하네스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을 때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하여 고독의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강조했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은 금광을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하여 고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위대한 일은 한결같이 시장터와 명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진다.”라고 해 고독의 가치를 찬양했다.
사람은 만년(晩年)에 이를수록 고독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은 거의 숙명적이라 할 수 있고, 고독을 견디는 것 자체가 일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독일진대 이에 대한 본질적 탐구와 극복, 나아가 즐기는 단계로 승화(昇化)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고독은 의존적이라기 보다 독립적 감정이기 때문에 자기 의지로 외부와 단절하여 나를 만나고, 사유(思惟)를 통해 성찰하며, 새로운 것들과 연결점을 갖고, 참된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보다 더 자신의 성숙(成熟)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고독은 슬픔, 불안, 두려움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내면의 평화 영적 고양의 기회, 행복, 진실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는 말에 수긍이 가고,
'우리의 삶은 고독이라는 어둠 속에서 진정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아가며, 이 넓은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때로는 고독으로의 침잠(沈潛)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에도 공감이 간다.
황동규 시인은 그의 시에 ‘홀로움’이란 신조어를 선보였다. ‘홀로’와 ‘즐거움’을 합성한 말이다. 시인은 홀로움이라는 단어를 ‘혼자 있음의 환희’라고 설명한다.
세상에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고독의 노예가 되어 고통의 삶을 살다 갈것인지, 고독을 지배하고 창조적 삶의 길을 모색 할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어미품을 그리워하는 애기짐승처럼 오랫만에 지리산을 찾았다.
첩첩산중 중산리 별밭골에 봄볕이 드니, 헐벗은 나무들이 겨우내 서로 얼싸안고 부벼서 음습한 고독의 비늘을 털어내고, 시지프스처럼 다시 일어서, 팔소매 를 걷우고 파릇한 잎눈을 튀우면서, 계절의 새로운 장(章)을 열기 위한 옹알이를 하고 있다.
머지않아 나무들이 눈을 뜨고 말문을 열면 지난 겨울 쇼펜하우어랑 하이데거랑 나누었던 지독한 고독이야기를 조근조근 풀어놓겠지.
고독은 나무처럼 자존의 그늘에서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자존은 곧 고독이고 고독 또한 자존이다.
그사이에 삶이 있고 죽음이 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삶을 모르고 어떻게 죽음을 생각할것이며, 죽음을 모르고 어떻게 삶을 설명할 것인가.
이양하는 그의 수필 '나무'에서 나무를 고독의 철인(哲人)이라고 했지 않았던가.
'나무는 고독을 안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을 즐긴다.'
그리고 이어서 시인은 '스스로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 한다.
나무도 고독을 이기고 즐길 줄 아는데 하물며 ......
지리산 중턱 별밭골에서 池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