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燕山君) 무오년(1498) 7월 17일에 전지(傳旨)하기를, “김종직(金宗直)은 보잘것없는 시골의 미천한 선비였는데, 성종(成宗)께서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두었으니 은혜와 총영(寵榮)이 더없이 컸다고 하겠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 안에 부도(不道)한 말로써 선왕조(先王朝)의 일을 무함하여 기록하였고, 또 그의 스승인 김종직이 조룡(祖龍.진시황)을 세묘(世廟.세조를 말함)에 견주고 의제(義帝)를 노산(魯山.단종)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싣고서 김일손이 그 글을 찬양하기를, ‘이 글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고 하였으니, 형명(刑名)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얼인데, 몸이 날래고 기운이 세며 마치 원숭이처럼 높은 곳을 잘 타고 올랐다. 소를 올려 자천(自薦)하였는데 세조(世祖)가 그의 사람됨을 장하게 여겨 발탁하여 등용하였고, 또 무자년(1468)에 고변(告變)한 공으로 훈봉(勳封)을 받았다. 곧이어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이극돈(李克墩)이 당시 조정에서 권세를 쥐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금세 그에게 알랑거리며 아부를 하였다. 일찍이 함양(咸陽)에 놀러 갔다가 시(詩)를 지어 판자에 새겨서 매달아 두었는데, 김종직이 이 고을을 맡아 다스리게 되었을 때 이 현판(懸板)을 보고는, “웬 놈의 자광(子光)이 이 따위로 현판을 하였을까.”라고 말하며 혹평을 한 까닭에 유자광이 이를 갈았다. 김일손이 또 소(訴)를 올려 이극돈을 논죄(論罪)하자 이극돈이 크게 노하였는데, 사국(史局)을 열게 되자 이극돈이 당상(堂上)으로 있으면서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고서 이것을 기회로 앙갚음하고자 총재관(摠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말하였으나 어세겸은 오랫동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유자광에게 모의를 하니 유자광이 팔을 걷어붙이며 말하기를, “이 정도면 어찌 확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게다가 왕(王.연산)이 또 시기를 잘하고 난폭하여 유난히 문사(文士)를 미워한 까닭에, 남빈청(南賓廳)에서 죄수를 국문(鞫問)하도록 명하고는 내시 김자원(金子猿)으로 하여금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자 유자광이 옥사(獄事)를 자임(自任)하고서 일망타진(一網打盡)할 꾀를 꾸몄던 것이다. 이날 비가 마치 물을 쏟아 붓듯이 내리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모래가 날렸다.
註: 사초(史草)가 계기가 되어 있어났기 때문에 이 사화(士禍)을 사화(史禍)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