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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산을 그리다(2)-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
37.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1곡 방화계(傍花溪)
조세걸(曺世傑, 1636~1705 이후), 조선 1682년, 22면 첩,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각 42.6×64.6cm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 1624~1701)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유거지와 그 주변의 곡운구
곡을 그린 것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 주희(朱熹, 1130~1200)의 은거지인 무이
구곡(武夷九曲)을 전거로 그린 그림으로, 조선 17세기 실경산수화의 이른 예로서 한국회화
사에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다.
김수증의 호이자 구곡의 이름인 곡운은 주희가 은거했던 ‘운곡(雲谷)’에서 따온 것이다.
김수증은 화가 조세걸과 직접 구곡 곳곳을 다니면서 각 장면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것처럼 하도록 주문했다고 한다.
화가 조세걸은 평양을 기반으로 한 양반 가문 출신 화가로 중년 이후에는 서울과 평양을 오
가며 활동했으며 본관은 창녕, 호는 패주(浿洲)이다. 아버지 조흥종(曺興宗)의 시와 서, 조
세걸의 그림이 뛰어나 조씨삼절(曺氏三絶)로 불렸다. 태조어진 모사, 숙종어진 모사에 참여
했던 화가로 초상화에도 능했다.(이혜경)
다산 정약용은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운(韻)을 차운하여 곡운구곡시(谷雲九曲詩)를 지었
다. 구곡의 순번은 김수증의 그것과 다르다. 방화계(傍花溪)는 망화계(網花溪)라고도 하였
나 보다.
일곡이라, 시냇가에 배를 매지 마라 一曲溪頭菓繁船
망화 비로소 달리는 내로 나가려 하네 網花纔肯放奔川
뉘 알리 백첩의 영원 안에 誰知百疊靈源內
푸른 산기슭 곳곳에 연기가 날 줄을 靑起山根處處煙
38.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2곡 청옥협(靑玉峽)
다산은 청옥협을 4곡 청옥담이라 하였다.
사곡이라, 맑은 물결 흰 바위 잠기는데 四曲澄泓浸雲巖
매달린 담쟁이 잎이 간들간들 드리웠네 垂蘿高葉裊𣰦毶
여울물은 댓결같이 급히 흐름 기운 삼고 湍如竹節抽爲氣
돌은 연꽃 같이 빙 둘러 못 이루었네 石似蓮花拱作潭
39.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3곡 신녀협(神女峽)
신녀협은 정녀협(貞女峽)이라고도 했다.
오곡이라, 봄산은 깊고 또 깊은데 五曲春山深復深
냉랭한 패옥소리 빈 숲을 울리네 冷冷環佩響空林
이로부터 정수의 소원 이루리니 自從立得貞修願
인간의 온전치 못한 마음 백번이나 씻어주리 百洗人間未了心
40.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4곡 백운담(白雲潭)
칠곡이라, 맑은 물 쏟아져 여울 되니 七曲琳琅瀉作灘
구름 피듯 눈 끓듯 사람의 눈을 끄네 崩雲沸雪要人看
신선 속인 관계없이 仙凡雅俗何須問
이곳에선 찬 기운 뼈에 사무치네 只是當時徹骨寒
41.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5곡 명옥뢰(鳴玉瀨)
팔곡이라, 반석이 비스듬히 깔렸는데 八曲盤陀側面開
옥을 굴리듯 맑은 물소리 변함없네 琮琤玉溜故潔洄
자연의 묘한 음악 지금 이와 같으니 勻天妙樂今如此
험한 길을 거쳐 온 것 한스럽지 않네 不恨從前度險來
42.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6곡 와룡담(臥龍潭)
구곡이라, 신령한 소 물이 맑은데 九曲靈湫水湛然
상마 우거진 옛 마을 맑은 시내 끼었네 桑麻墟里帶晴川
늙은 용 인간에게 비 내릴 것 안 살피고 老龍不省人間雨
곡식 기를 시절에 깊은 잠만 자고 있네 春睡猶濃養麥天
43.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6곡 농수정(籠水亭)
44.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7곡 명월계(明月溪)
이곡이라, 하늘을 나는 듯 아련한 산봉우리 二曲天飛縹緲峯
날아내리는 여울 위아래 다투어 단장하네 風湍上下競修容
구슬 병풍 옥벼랑 신선이 노닐던 곳 瑤屛玉壁仙游處
구름다리 건너놓아 한 겹이 막혔다네 已道雲梯隔一重
45.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8곡 융의연(隆義淵)
육곡이라, 잔잔한 물결 굽이굽이 푸르른데 六曲平漪翠一灣
혼연한 그 강 빛 가시 삽짝을 비치네 渾如江色映柴關
나는 여울 급한 폭포 그 무엇 때문인가 飛湍急瀑誠何事
징홍의 자재함에 미치지 못해서라네 不及澄泓自在閒
46.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9곡 첩석대(疊石臺)
삼곡이라, 구당협은 배 물리치려 하는데 三曲瞿唐欲退船
봉산과 약수 도리어 아득해지네 蓬山弱水轉茫然
꼭대기길 바라보며 몇 사람이나 포기했나 幾人望斷碕頭路
머리 긁적이며 주저하는 모습 가련하기만 하네 搔首踟蹰也可憐
47.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심씨정자(沈氏亭子), 양주구계(楊州龜溪)
정수영(鄭遂榮, 1743~1831), 조선 1796~1797년, 횡권,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24.8×1575.6cm 한강과 임진강을 따라 유람하면서 그린 두루마기. 뱃길로 한강을 출발하여 원주 흥원창(興 元倉)에 이르는 여정을 비롯하여 경기도 영평, 금천, 도봉산, 삭녕, 황해도 토산(兔山) 등 경 기 부근을 여행하며 그린 스케치풍의 실경산수화이다. 정수영은 평생 그림과 시에 심취하였고, 특히 중년 이후 여행을 즐기면서 그린 실경산수화에 서 그의 개성을 발휘하였다. 그는 잘 알려진 명승, 명소의 경관보다 자신의 눈으로 포착한 이 미지를 중시했다. 강세황의 아들 강관(강관, 1743~1824)도 그림을 본 소감을 두루마리 곳곳에 적었다. 강관의 글에는 인장이 없고 이름 또는 호 월루(月樓)를 적었으며, 장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 이 된다.(장진아) 48.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양주구계(楊州龜溪), 우미천(牛尾川) 牛尾川爲船人小留 聊店繫舟之所 (우미천에서 뱃사람이 만류하여 배를 묶어둔 곳에서 잠시 쉬다) 49.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재간정(在澗亭) 50.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여주읍내(驪州邑內) 청심루(淸心樓) 51.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여주 휴류암(鵂鶹巖) 52.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여주 신륵사(神勒寺) 53.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왼쪽은 용문산과 추읍산(趨揖山), 오른쪽은 여주 고산서원(孤山書院) 54.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왼쪽은 미호(渼湖) 55.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신륵사 동대(東臺) 56.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신륵사 동대(東臺) 동적석(東積石) 57.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원주 흥원창(興元倉) 58.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여주읍내(驪州邑內) 59.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용당우(龍堂隅) 60.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수청탄(水靑灘) 헌적별업(軒適別業) 61.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 소청탄(小靑灘) 62. 필운대상춘도(弼雲臺賞春圖) 정선(鄭敾, 1676~1759), 조선 1740~50년대, 액자, 비단에 엷은 색(絹本淡彩), 27.5×33.5cm 필운대는 인왕산 남쪽 자락, 지금의 배화여고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육 각현(六角峴)과 함께 봄의 흥취를 만끽하는 최고의 나들이 명소였다. (육각현은 필운대 옆 에 있던 고개로서, 큰 집이 있어서 담의 둘레가 길고 여섯 모가 난 집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 름이다. 육각현 위의 집은 담의 길이가 길다 해서 만리장성 집이라고 하였으며, 이 마을을 장 성동이라고 하였다.) 이 그림은 사직동에서 인왕산을 향해 오르면서 필운대를 바라보며 그린 것이다. 오른쪽 청색 선염으로 나타난 뾰족뾰족한 암산은 관악산이다. 원경을 근경의 필운대와 거의 같은 동일선 상에 둔 구도는 정선이 구사한 독특한 화면방식이다. 원근의 풍경들은 모두 아우른 시점은 필운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왕산 북쪽 중턱 옥류동 언덕이나 창의문 근처로 생각된다. 관악산 아래의 이층 누각의 숭례문도 보인다. 그 왼쪽은 남산으로 정상에 소나무 한 그루가 또렷하게 서 있다.(문동수) 63. 우화등선 웅연계람도(연강임술첩, 羽化登仙 熊淵繫纜圖 漣江壬戌帖), 우화등선 정선(鄭敾, 1676~1759), 조선 1742년, 액자, 비단에 엷은 색(絹本淡彩), 각34.5×95.7cm 이 화첩은 1742년(영조 18) 10월 보름, 경기도 관찰사 홍경보(洪景輔, 1692~1745)가 경기 도 동부지역을 순시하던 중 삭녕(朔寧)의 우화정(羽化亭)에서 연천의 웅연(熊淵)까지 뱃놀 이했던 일을 그린 것이다. 이때 동행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시인 연천현감 신유한(申維翰, 1681~1752)과 최고의 화가 양천현령 정선이었다. 정선은 그 추억을 <우화등선>과 <웅연 계람>에 담아냈다.(문동수) 신유한은 본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두루 유람하며 기걸한 기상을 기르는 것을 도와 그 것으로 그윽한 정서를 표출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 한 편을 들어본다. 진주 촉석루에 대한 시 「제촉석루(題矗石樓)」이다. 시 중의 세 장사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함락과 함께 죽은 창의 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ㆍ본도 병마사 최경회(崔慶會)ㆍ충청 병사 황진(黃進)를 말한다. 晉陽城外水東流 진양성 밖엔 강이 동으로 흐르고 叢竹芳蘭綠映洲 울창한 대숲 아름다운 풀은 모래섬에 푸르다 天地報君三壯士 나라에 충성한 건 세 장사련만 江山留客一高樓 나그네 머물린 건 이 높은 촉석루로다 64. 우화등선 웅연계람도(연강임술첩, 羽化登仙 熊淵繫纜圖 漣江壬戌帖), 웅연계람 65. 해인사도(海印寺圖) 정선(鄭敾, 1676~1759), 조선 18세기, 패널,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23.6×67.6cm 정선은 금강산과 한양 외에 경상도(영남) 지역의 빼어난 절경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여러 차례 지방관을 지내면서 현지의 명승지를 여행할 때마다 그곳을 빼놓지 않고 그렸다. 그의 나이 46세 때인 1721년(경종 원년)에 첫 벼슬길인 하양현감에 오른 이후, 51세인 1726년에 6년간의 임기를 마쳤다. 당시 정선은 경상도 일대의 명승고적을 즐겨 그려 ≪영남첩≫을 완 성하였다. 그 사이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2)가 일어났고 정선의 후원자였던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이 사사되었다. 당시 그는 화도에만 전념하여 정변을 운 좋게 모면하였다. 해인사의 경관은 그가 하양현감 시절에 그린 것으로 가야산에 위치한 해인사의 가을 풍광을 부채꼴 모양에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가야산 주변에 위치한 암자들은 금선암(金仙庵)과 보 현암(普賢庵)이다. 암자 동편의 능선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와 같은 전경을 볼 수 있다. 정선 이 그림에 담은 주변 풍광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게 변한 곳도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문동수) 66. 세검정도(洗劍亭圖) 정선(鄭敾, 1676~1759), 조선 18세기, 축,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23.0×62.0cm <세검정도>는 정선 나이 73세 때인 1748년(영조 24)에 고쳐지었던 것으로 보아 노년작임 을 알 수 있다. 세검정은 한양 도성의 창의문 밖 북한산과 북악산 사이에 있던 정자로 멀리 가지 않고 좋은 경치를 누릴 수 있어 서울 문인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였다. 정선은 세검정과 그 주위로 흐르는 홍제천, 주변의 판판한 돌과 산기슭을 높은 곳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렸 다.(이혜경) 67. 진주담도(眞珠潭圖) 김윤겸(金允謙, 1711~1775), 조선 1756년, 편화,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24.8×62.1cm 진주담은 내금강 표훈사에서 마하연으로 올라가는 약 2km 구간의 만폭동계곡의 여덟 못 (八潭) 중 분설담(噴雪潭)과 구담(龜潭) 사이에 위치한 못으로 수려한 계곡미를 자랑한다. 김윤겸은 화면을 가로로 반분하는 거대한 반석을 넘어 쏟아져 내리붓는 맹렬한 계류와 그것 이 만들어 낸 진주담의 소용돌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넓은 바위에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 그 아래 소용돌이치는 물의 형세를 리듬감 있게 포착하였 다. 못가 너럭바위에 시동을 거느리고 앉은 처사는 폭포의 굉음에도 아랑곳없이 고요히 앉아 있는데, 여기에는 작가의 초연한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아울러, 이 지점은 화가가 경관을 바 라본 시점을 은유할 뿐 아니라 관람자가 그림 속에 몰입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김윤겸은 서화에 식견이 높았던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서자로 자 는 극양(克讓), 호는 진재(眞宰), 산초(山樵) 등이다. 50대 초반부터 음직으로 몇몇 하급직 을 거친 후 1765년 무렵 경상도 진주 인근의 소촌찰방(召村察訪)을 지냈다. 그에 대해서는 몇 개의 관직 경력이 확인될 뿐 생애의 많은 부분은 알려지지 않았다.(오다연) 68. 송파환도도(松坡喚渡圖)
김윤겸(金允謙, 1711~1775), 조선 18세기, 축,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23.9×60.6cm
송파진(현재 석촌 호수 근처)은 한강의 상류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입구이자 도성을 나와
경기도 광주로 가는 길목의 나루터였다.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왕실은 이곳에 관아를 두어
사람들의 통행을 감독하고 물품을 조사했으며 수어청 소속의 무관 별장(종9품)과 진군 병사
들을 주둔시켰다.
부채의 중앙에 한강이 흐르고 그 위쪽에는 언더 위에 위치한 송파진의 관아와 대모산이 그
려졌다. 수평적 구도로 눈에 보이는 경치를 간결하게 담아냈다. 오른쪽 아래에 찍힌 주문방
인 ‘의춘산인(宜春散人)’은 화가의 것이 아니라 소장자의 것으로 추측된다.(오다연)
첫댓글 화악산 넘어 사창리에 있는 곡운구곡은 옛정취는 간 곳 없고 평범한 계곡에 지나지 않네요. 그러고 보면 산천의구라는 말도 믿을 게 못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