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3. 큐티
마태복음 2:19 ~ 23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씀을 이루심
관찰 :
1) 헤롯이 죽은 후에
- 19절.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 아기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이 죽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올 것을 요셉에게 꿈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요셉은 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영적으로 아둔한 사람이 꿈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 20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이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습니다. 헤롯과 그를 추종하며 다른 왕을 제거하려던 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동방박사들이 말한 왕으로 오신 아기를 찾는 자들이 없게 되었습니다.
- 21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니라” =>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 민감했던 요셉은 천사의 인도하심에 성실하게 반응했습니다. 부담스러운 명령에 대해서도 순종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데려오라는 명령에도 순종, 이집트로 가라는 명령에도 순종, 다시 돌아오라는 명령에도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지켰고, 인류 구원의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2) 나사렛 사람 예수
- 22절.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거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가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 아켈라오가 그 아비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기원전 4년에 죽자 로마 황제(아구스도)는 헤롯의 아들들을 분봉왕으로 세워 헤롯의 영토를 나누어 통치하게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헤롯 아켈라오가, 나사렛이 자리 잡고 있는 갈릴리 지역과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디바가, 요단 강 동편 중 북쪽 가울라니투스(Gaulanitus) 지역은 헤롯 빌립이, 요단 강 동편 남쪽 데가볼리 지역은 로마의 시리아 총독이 다스렸습니다. 아켈라오는 헤롯 대왕이 말다게라는 여인에게서 얻은 장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잔혹하고 억압적인 통치를 일삼은 왕이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귀족들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대표단을 파견해서 아켈라오의 폭정을 알리고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하여 아켈라오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아켈라오는 기원후 6년에 권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요셉이 아켈라오를 두려워해서 유대 지역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자신과 마리아가 살던 나사렛으로 발길을 돌렸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 23절.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본문과 일치하는 본문은 구약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렛이라는 동네의 이름을 통해서 몇 가지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가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네체르’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인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메시아, 즉 예수님을 가리키며, 예수님이 나사렛에 거주하심으로 성취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둘째, ‘지키다, 지켜보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차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 ‘망대’ 또는 ‘지키는 장소’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면으로 높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위치와도 연관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셋째, ‘나사렛 사람’의 그리스어 ‘나조라이오스’가 ‘보존된 자, 보호된 자’라는 뜻하는 히브리어 ‘나초르’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기 예수께서 헤롯의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가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의 눈을 피해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게 된 것과 더불어 높은 언덕으로 둘러싸여서 보호를 받았던 나사렛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그러한 의미를 이해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은 온전히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이라는 관점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실제였습니다.
가르침 :
1) 요셉의 순종이 아기 예수를 위험에서 보호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생각이 있었겠지만 순종함으로 주님의 일을 이루었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권력을 이용하여 어찌하던지 예수님을 죽이려 들고, 아기 예수님의 보호를 맡은 요셉과 천사들은 그것을 막아서서 보호하고자 애쓰고 있고... 이런 그림이 보이게 됩니다. 너무나 드라마틱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역사였고,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드라마였습니다.
2) 나사렛은 변방입니다. 이방 사람들과 접경지역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서 이방의 빛이 되셨고, 또한 이새의 줄기에서 난 가지가 되셨습니다. 그 뿌리에서 나온 한 가지가 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폴 피어슨 교수는 “교회의 부흥과 확장이 대부분 그 새대 교회 권력구조의 변두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변두리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나사렛이야말로 변두리였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모략을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변방에서 자라시면서 종교의 주류세력과 섞이지 않으면서 말씀의 본질을 파악하셨고,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하나님 아버지의 본심을 그 변두리에서 이해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의 빛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사명과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셨던 것입니다.
3) 주님은 순종을 통해 역사를 이루십니다. 요셉은 두려웠지만 순종했고, 요셉의 마음을 아신 주님이 갈릴리 지방을 떠나갈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란 나사렛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 11:1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것을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냐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이들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을 알았던 동일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분명히 이들은 구약의 메시지를 자신들의 판단에 의존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마태는 그가 율법학자들에 비해 구약의 지식이 부족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적용 :
1) 하나님의 말씀은 작위적이거나 스스로가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전통을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선지자들의 해석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기에 자신만이 깨달은 바나 특별한 비밀을 깨우친 것 같은 것은 다시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 사설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 가운데 해석함에 있어서 끊임없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전통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바른 해석의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바쁘고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사역을 감당했듯이 나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적은 말씀일지라도 그 말씀을 묵상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족할지라도 그런 자세를 견지하는 주님의 종을 살아계신 주님께서 어찌 소홀히 여기시겠습니까?
2) 순종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임은 언제나 동일한 원리입니다. 요셉의 순종은 요셉이 어리석거나 영적으로 둔해서 그냥 무조건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사람이었고, 매우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명확하게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순종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목숨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요셉으로 인해서 아기 예수와 마리아가 보호를 받게 되었고,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큰 일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함으로 저 역시 하나님의 큰 일에 동참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3)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고,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저와 아내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의 의미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순종함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믿고 소망합니다. 그렇기에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