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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2:8-15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2:8-15 / 헛된 철학에 속아 여러분의 신앙과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러한 철학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나 사상에서 나온 잘못되고 천박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9) 하나님의 온전한 신성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만 지니고 계십니다. 10)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는 완전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능력을 지배하는 최고의 지배자이십니다. 11)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악한 욕망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육신을 벗는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침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그 믿음으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죄에 가득 찬 욕망을 끊어 버리지 못해 죄 가운데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14) 여러분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사실을 기록한 명세서를 지워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목을 적은 명세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아 무효로 만드셨습니다. 15)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고발하는 사단의 세력을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없애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단 사상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결국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선포합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8-10)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철학 사상은 세상에 대한 초등학문을 이용하여 실재를 탐구하는 철학입니다. 우주에 대한 기초적 지식과 관념, 그리고 세상의 전통들을 근거로 삶에 대한 해답을 이 세상에서만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삶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과학이나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의 생활을 발전시켜서 더 편리하게 해주는 일밖에 없습니다. 삶에 대한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11-13) 유대인은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했기에 유대인은 할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과 안 받는 사람은 과거 우리나라의 천민과 양반의 차이만큼 유대사회에서는 큰 차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으로 구성된 골로새교회는 유대인이 아니기에 할례를 받지 않았고, 에바브로를 통해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세례만으로는 안 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너희가 받은 할례는 손으로 받은 할례가 아니다”(11), 믿음으로 할례(세례)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12). 그리스도인은 손으로 행하는 할례를 통해 죄 사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14-15) 할례는 유대인의 전통으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모세의 율법을 이방인인 골로새교회 교인들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14절에 법조문으로 쓴 증서는 모세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라고 말합니다(14). 즉 예수께서 율법의 법적 효력을 지우셨고, 효력을 없애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적용: 너와 나의 관계가 무엇으로 담이 막혀져 있는지요? 용서에 사랑을 더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에 평강을 나누고 서로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요?
식물은 좋은 열매를 맺기도 하고 나쁜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 원인은 그 식물이 어디에 뿌리를 내렸느냐에 따라 결실이 달라집니다. 메마른 땅에 뿌리를 내린 식물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반면 좋은 땅에 뿌리내린 식물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 역시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합니다.
< 설 교 >
신비는 있습니다
골 2:8-15 / 이한규 목사
어느 날, 유명한 설교가인 ‘템플 감독’이 캠브리지 대학교의 예배시간에 ‘기도 응답’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예배 후에 한 학생이 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요새도 기도가 응답된다는 미신을 믿나요? 우연히 이뤄진 우연의 일치를 기도 응답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닌가요?” 그때 템플 감독이 대답했습니다. “학생! 우연일 수도 있지. 그런데 기도를 그치면 그 우연도 그치니 정말 이상한 일이네.”
사람에게는 우연이라도 하나님에게는 필연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질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의 배후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이 있습니다. 그 손길에 의지할 때 기적적인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적과 신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기적과 신비 자체를 아예 외면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 구절을 내세워 어떤 사람들은 신비한 은사는 사도 시대 이후에 소멸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기 은사가 최고인 것처럼 자랑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은사가 소멸되었다는 주장도 잘못입니다.
물론 기적과 신비와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 가짜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적과 신비와 은사 자체를 외면하면 안 됩니다. 이제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도 기적과 치유의 은혜도 구하고 영적인 은사와 능력도 추구하십시오. 지금도 사단은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그 사단을 혼자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사단의 힘을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과소평가하지도 마십시오.
마태복음 4장 9절을 보면 사단이 예수님을 산꼭대기로 데려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단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줄 권세를 내세우는 것을 보십시오. 사단은 가볍게 여길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한시적이지만 사단도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호주의 한 침술사가 티베트 노인을 치료하는데 침술사의 바늘이 노인의 피부를 뚫지 못했습니다. 침술사가 “왜 그런지 영문을 모르겠다! 미안하다!”고 하자 티베트 노인이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미안합니다. 제 몸에서 부적을 떼는 것을 깜빡 잊었네요.” 그리고 자기 몸에 붙인 부적을 떼어 내자 비로소 침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 노인이 말했습니다. “오래 전에 한 라마승이 제게 중국인의 총알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며 이 부적을 붙이라고 주었습니다.”
사단도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능력을 무력화시켰습니다(15절). 그런데 왜 지금도 사단이 능력이 있어 보입니까? 필요상 하나님이 제한적인 능력을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단은 화살이 잔뜩 몸에 박혔지만 아직 죽지 않은 사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훨씬 흉포하게 날뛰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이 심히 혼란한 것은 사탄의 멸망 때가 가까이 온 신호입니다. 그처럼 분노로 날뛰는 사단을 이기려면 더욱 능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악령이 있습니다. 정욕과 거짓의 영, 원한과 분노의 영, 불순종과 불안의 영 등 수많은 영들이 지금도 활개를 칩니다. 이때 마음이 약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죄의식에 빠지면 악령이 틈타기 쉽습니다. 그 악령들은 신적인 능력으로 쫓겨나갈 수 있기에 참된 믿음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능력과 신비를 가장해서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비를 추구해도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 철학과 속임수를 주의하십시오 >
며칠 전, 한 검사가 한 사이비 종교모임의 지부장에게 자신의 3살짜리 아들이 폭행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았고 경찰이 그 상황에 대해 물어도 그 종교모임과 관련된 부분은 철저히 함구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힘 있는 검사도 영혼이 속박되면 영적인 노예가 됩니다. 실제로 사이비 단체 신도 중에도 판검사가 꽤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그곳에 있을까?”란 생각이 들지만 거짓 예언, 종말론, 신비주의 등으로 현혹하면 머리 좋은 사람들도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신앙과 사상을 늘 유의하십시오.
사도 바울도 그것을 주의시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이 구절에서 ‘철학과 속임수’는 초대교회에 만연한 영지주의를 뜻합니다. 영지주의는 “영혼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언뜻 보면 맞는 말 같지만 그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상이 아닙니다.
영지주의는 헛된 영성과 신비주의의 결과물로 천사숭배 사상 등을 끌어들여 영혼을 미혹했습니다. 그런 영지주의를 따르면 예수님은 악한 육신으로 오신 셈이 되기에 기독교는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영지주의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육신은 중립가치로서 육신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기에 거룩한 신성도 육신에 임할 수 있습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공리인 “육체는 악하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예수님이 실제로는 육체를 입지 않았는데 육체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는 가현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육체에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한 상태로 실제로 임했다고 주장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진짜 육신으로 성육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육신은 특별한 육신이어서 신성이 충만할 수 있었지만 보통 사람의 육신에는 하나님이 신성이 거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보통 사람의 육신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해지는 성령 충만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성도도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한 상태(성령 충만한 상태)’가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통치자와 권세’는 원어로는 당시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주장한 천사의 서열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천사들의 머리시기에 천사숭배 사상과 같은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하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할례’가 필요합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 구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는 유대인들의 할례 의식이 아닌 ‘마음의 할례’를 뜻하고 신약시대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고 구원의 백성이 되는 세례를 뜻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 구절은 성경에서 세례의 의미를 가장 명쾌하게 나타낸 구절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음을 공적으로 알리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영적으로 죽었던 존재가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함께 다시 살게 됨을 나타내는 표식이 바로 세례입니다(13절).
또한 세례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난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본문 14절 말씀에 나오는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는 율법을 뜻합니다. 그 율법이 사람을 속박하는데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면 그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세례는 십자가 안에서 자기 육신을 죽이고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사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 안에 승리의 최고 비결이 있습니다.
< 최고의 능력자가 되는 길 >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했다는 것’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한 최고 도구입니다.
능력을 얻는 최고의 길은 능력을 준다는 집회에 가서 능력이 있다는 사람의 안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헛된 망상과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영혼과 물질과 시간을 빼앗기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까지 빼앗기면서 그 인생이 비참해집니다. 믿음이 ‘체통과 품위를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믿는 사람이 ‘성경적인 원리 안에서 체통과 품위를 지키는 것’은 필요합니다. 최고의 능력자가 되는 길은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제일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도 없이 능력을 얻겠다는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사모하는 심령들마다 머리에서 평생 지우지 말아야 할 구절이 바로 ‘골로새서 2장 15절 말씀’입니다. 사단을 이기고, 귀신들을 이기고, 사단으로부터 초래된 수많은 문제들을 극복하기를 원하면 백번 천 번이라도 떠올려야 할 말씀이 골로새서 2장 15절 말씀입니다.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살다가 때로 너무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마음의 평안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 상처가 씻기고 고통이 사라지고 평안이 생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실이 얼마나 힘과 위로가 됩니까? 그처럼 십자가는 가장 소중한 영적인 자본이고 힘과 평안의 원천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입니다. 그는 휠체어를 탄 장애자였지만 그의 입에는 언제나 유머와 웃음이 넘쳤습니다. 그는 인생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과 기반이 없어서 힘들다고 할 때도 그는 항상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려는 믿음이 최고의 자본입니다. 저는 장애인이지만 미래를 향해 모험의 발길을 내딛지 않는 사람은 더욱 심각한 장애인입니다!”
절망의 눈으로 보면 길이 없는 것 같아도 희망의 눈으로 보면 반드시 극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가장 강력하게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하면 깊은 평안이 임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 자본인데 무슨 걱정과 두려움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묵상만 해도 능력이 나옵니다. 하물며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면 얼마나 더욱 큰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 나눔을 힘써 실천하십시오 >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십자가는 한 마디로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나눔을 실천하십시오. 목숨과 명예와 물질을 나눠주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의 핵심입니다. 결국 능력과 치유를 준다는 집회에 바람난 사람처럼 열심히 다니는 것보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필요한 곳에서 힘써 섬기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서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능력과 치유를 얻는 길입니다. 능력집회를 쫓아다니면 점점 영혼이 허무하고 곤고해지지만 섬길 곳에서 섬기면 점점 영혼에 보람과 기쁨과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재벌들도 나눔을 실천하면 욕먹는 삶을 청산하고 선한 이름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인도 행복하고 가족도 행복합니다. 반면에 나눌 줄 모르면 돈이 많아도 불행합니다. 자녀들도 나눌 줄 모르는 부모를 싫어합니다. <추적자>에 나오는 서 회장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둘째 딸이 아빠를 떠나면서 아빠의 나눌 줄 모르는 삶을 얼마나 안타까워합니까? 나누면 뭇사람의 존경과 행복을 얻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도 얻습니다.
이번 올림픽 도마에서 금메달을 딴 양학선 선수에게는 ‘아름다운 청년’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TV 사회자가 아름답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20살 어린 청년이 훈련비를 모아서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비닐하우스에서 어렵게 사는 부모님께 집을 사드리려고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개발한 체조기술이 그의 이름을 따서 생길 정도로 실력자가 되었고 마침내 하늘도 감동해서 올림픽 금메달을 땄습니다.
금메달을 딴 후 양 선수가 인터뷰에서 어렵게 운동할 때 <너구리> 라면을 즐겨 먹었다고 하자 그 라면 제조회사에서 <너구리>를 평생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그 쩨쩨함에 수많은 네티즌들이 공분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라면을 먹어가며 힘겹게 살아온 그에게 몸에도 안 좋은 라면을 평생 준다는 것이 곱게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네티즌은 “국보급 체조선수를 평생 라면 먹여 죽이려고 하느냐?”고 질타했습니다.
물론 좋은 의도로 말했겠지만 사리에도 맞지 않고 회사 사이즈에도 맞지 않은 언행입니다. 올림픽 역사상 첫 번째 대한민국 체조 금메달리스트가 수재민입니까? 재벌 회사의 의사결정이 거의 구멍가게 수준입니다. 돕고 싶은 마음을 가진 것은 좋지만 그래도 어떻게 라면에 올인을 합니까? 의도는 좋았지만 언행은 멍청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언행이 잠깐의 경솔함이 아니라 평소의 삶과 가치관의 반영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어떤 아파트 건설업체 회장은 양 선수 가정의 비닐하우스 생활을 청산시켜주겠다고 짓고 있는 아파트 한 채를 내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결단입니까? 어떤 그룹 회장은 현금 5억을 제공했습니다. 통 큰 나눔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은 나눔을 선도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의 제일 중요한 일도 나눔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통 큰 나눔을 실천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십시오 >
지금 세상은 돈이 권력과 사람값이 되는 세상입니다. 어떤 재벌은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줄 알고 경찰과 검찰에 손을 쓰고 그룹 차원의 대응을 합니다. 마치 세상 질서를 비웃는 것 같습니다. 그처럼 권력과 돈을 뻔뻔하게 내세우며 “억울하면 출세해라!”는 말로 사람들을 비웃고,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물불을 안 가리니까 얼마나 그 재벌이 욕을 먹습니까? 요새는 우리나라를 ‘성형 수술 공화국’이라고도 합니다. 그처럼 돈과 권력과 외모를 향해 질주할수록 내면은 가난해지고 불안감은 커집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육체로 심는 사람’과 ‘성령으로 심는 사람’입니다. 육체로 심는 사람의 기본 동기는 ‘욕망’입니다. 그 욕망은 만족을 모릅니다. 한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찾아옵니다. 결국 욕망에 이끌려 살면 바위산 위로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됩니다. 그처럼 욕심을 따라 살면 영혼이 나약해지고, 지혜는 막히고, 은혜는 사라지고, 평생 쌓은 인품이 무너지고, 병에 대한 면역성도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인생 자체가 허무해집니다.
1950년대에 노벨상을 받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명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이고 또 한 명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까뮈입니다. 당시 노벨 상금으로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 병원을 지어주었습니다.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반면에 까뮈는 파리 근교에 별장을 짓고 그 별장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얼마나 허무한 인생입니까?
진짜 능력 있는 삶을 원하면 나눔을 실천하십시오. 돈도 나누려고 버십시오. 그리고 말과 생각으로만 선교하지 말고 실제로 호주머니를 털어 선교하십시오.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돈을 벌면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돈을 독점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에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돈을 버십시오. 가난이 한이 되어 돈을 벌려고 하면 목적도 이루기 전에 영혼이 망가지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돈을 벌려고 하면 목적도 이루고 영혼도 지킬 수 있습니다.
록펠러는 젊었을 때 가난이 한이 되어서 부자가 되려고 물불을 안 가려서 노동 착취자란 악명을 얻었습니다. 결국 그는 미국 최대의 부자가 되었지만 53세에 노이로제, 불면증, 그리고 근육무력증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고 그때부터 나눔을 실천하면서 선교와 교육과 구제에 힘썼습니다. 그러면서 건강도 회복하고 98세까지 장수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나눔의 행복을 추구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기독교 선교연맹> 소속 교회입니다. 저희 선교연맹은 선교를 최고의 가치로 둡니다. 선교의 핵심은 ‘나눔’입니다. 나눔이 없는 선교는 선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나누기 위해 성장해야 하고 우리 교인들도 나누기 위해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할 때도 나눔을 끊임없이 다짐하고 기도할 때도 나눔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희 교회가 잘 나누는 교회가 되고 저희 교인들도 잘 나누는 능력 있는 교인이 되게 하소서!”
1929년 미국에 대공황이 찾아왔습니다. 극심한 경기침체로 각 교회마다 헌금도 급감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미국 사람들의 67%가 교회를 혐오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 교회들은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선교사가 더 증가했고 저희 선교연맹 소속 교회들은 자기 교회 건축을 과감히 포기하고 어려운 지역으로 선교헌금을 보내 어려운 나라들을 힘써 도왔습니다. 그때 인도네시아, 라오스, 태국, 아이보리코스트, 가봉에 새로운 선교기지가 생겼습니다.
대공황조차 우리 기독교 선교연맹 소속 교회와 교인들에게 있었던 나눔의 열정을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 영성을 이어받아 우리도 나눔을 실천하는 복된 교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저도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제단이 한국에서 나눔의 모델교회가 되게 하소서! 네트영어를 후원할 후원자와의 거룩한 커넥션도 기적적으로 이뤄져 네트영어가 통 큰 나눔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나눔은 건강과 은혜와 축복의 기초입니다. 그처럼 나눔을 통해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를 가장 능력 있고 복된 인생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미국의 가이드포스트에 소개된 패트 번즈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가 점점 교인 숫자가 줄었습니다. 어느 부활주일에도 적은 성도만 모였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은 교인들을 다 보낸 후에 우울하고 외로운 마음으로 교회 현관의 계단에 서서 멍하니 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꽃을 팔러 다니는 한 할머니가 접근해 왔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주름살도 많았지만 만면에 미소가 가득 찬 표정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좋은 일이 있나요?”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아니요. 요새는 경기도 어렵고 힘들 때가 많아요. 그러나 힘든 일이 있어도 저는 예수님처럼 사흘을 기다려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힘드셨지만 사흘 뒤에 부활했잖아요. 그것을 생각하면 항상 웃을 수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목사님은 자신이 최근에 사람 숫자만 바라보고 실망에 빠져있었던 삶을 회개했습니다. 그때부터 목사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목회하면서 늘 평안과 기쁨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왜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합니까?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사람과 환경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예배와 기도와 사랑과 선교의 씨앗을 충실하게 뿌리십시오. 그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고 충성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잘 나눔으로 큰 기쁨과 보람과 평안을 얻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교회에 도전하는 사상들
골 2:8-10 / 백구영 목사
저는 몇 일전, 한 장의 호소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예장고신측 한영교회의 원로 장로시고,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이며 현재는 한국 정경연구소 소장인 김경래 장로님의 글입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런 것입니다.
"존경하는 목사님께, 목사님께 외람된 글을 올리게 됨을 관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부시행정부는 미군을 휴전선 이남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는 이미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2. 다국적 주재원들의 일부도 철수하고 있습니다. 화란, 벨지움, 독일계 기업과 미국의 자본도 일부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3. 김정일은 돌이킬 수 없는 벼랑끝에서 핵보유국 선언을 할 것이고, 재일 미군은 노동1호로, 미대륙 일부도시는 노동2호로 위협할 것입니다.
4. 누가 선제 공격에 나설지 알 수 없으나 오판과 만용이 억제되지 않는 전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5. 주변 정세는 이러함에도 한국사회는 참으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노아때와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현상들이 심화되고 있건만 선지자들의 외침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여수룬이 배부름에 발로 찼도다"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들이 배부르고 소유에 취한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6. 나라의 위기를 절감한 분들이 뜻을 같이 하여 오는 3·1절 정오에 서울 시청앞에서 국민대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1부는 목사님들의 주관으로 기도회를 갖고, 2부는 재향군인회와 황장엽씨등 탈북인사들이 주관하는 국민대회로 이어집니다.
7. 목사님, 교회에 적극 광고해 주셔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친북좌경세력과 성령 떠난 기독교 운동권의 거센 반발이 예상됩니다.
8. 참전 16개국과 온 세계앞에 우리민족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섰음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님의 협조와 참여를 호소합니다."
이런 우국충정의 격문이었습니다. 지금, 세계언론은 "한국은 이상한 나라","한국 국민은 이상한 국민"이라고 의아해 합니다. 세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북핵문제를 지켜보는데, 정작 이 백성들은 태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애국의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기에 더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어-, 하고 있는 사이에 세상은 바뀌어가고 교회는 이상한 풍조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길들여진 일상을 잠깐 멈추고 자신들을 깊이 성찰해야 할 위기앞에 서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세속적인 사상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시편33:8-12의 말씀은, 시편 150편중에 그 저자를 알 수 없는 시입니다. 대부분, 다윗, 솔로몬, 아삽, 헤만등과 같이 그 저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데 본시에는 저자의 이름이 없습니다.
또한, 그 형식도 단순 명료하여, "명령, 하나님의 능력, 인간의 태도 그리고 축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33편 전체도 이런 형식이지만, 오늘 봉독해 주신 8-10절도,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하신 명령으로 시작되어 "말씀하시매 이루었고 명하시대 견고히 섰도다"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지라"라는 인간의 태도와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는 축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열강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며 이 사실을 믿는 백성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골로새서 2:8-10의 말씀은 철학에 대한 바울 사도의 태도입니다. 신약성경에 단 한번 사용된 이 "철학"이란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세상의 모든 철학을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당시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철학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는 일에는 세상 철학이란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가 되신다고 증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위의 두 본문에서 온 세상에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고 모든 정사, 모든 권세의 머리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절대 권위에 도전하는 사상들을 생각해 보면서 경각심을 갖고자 합니다.
첫째, 교회에 도전해 오는 사상은 무신론입니다.
시편 33:9에 보면,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명령으로 자연을 운행하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것을 부인하는 풍조들이 만연하고 범람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이란 거창한 이론이나 사상적 체계를 가져야만 무신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과 생활 속에 무신론이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교육을 통해 일방적으로 받아드린 "진화론"이 무신론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교인들이 "진화론"이란 가설을 믿고 창조론은 하나의 신화나 상징으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물질을 최고의 가치에 두고 살아가는 유물론이 무신론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을 부인하고, 돈 몇푼 때문에 인명을 해치는 것이 유물론자요 소유를 위해서는 양심도, 도리도, 예의도 저버리는 것이 무신론입니다.
역사상 가장 조직적인 무신론은 공산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칼 막스는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든 정신적 허구"라고 망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100년도 못가 공산주의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공상의 낙원이 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은연중에 물들어 오는 무신론은 이신론과 종말론적 긴장이 제거된 물탄 기독교와 좌경화되어 가는 기독교사상입니다.
이신론이란 자연의 원리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이 살아지면 하나님도 살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관은 이신론이 아닙니다.
예컨대,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이 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그 그림안에는 화가의 사상과 영혼과 숨결이 담겼습니다. 그렇다고 그림이 없어지면 화가도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론적 긴장이 제거된 물탄 기독교란, 천국과 지옥, 회개와 구속, 심판과 재림, 사탄과 영적 싸움같은 무거운 교리는 버리고 다만 신앙을 인격 수양이나 정신 안정을 위한 도덕적 종교로 만들어 버린 긴장 잃은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무신론입니다.
또한, 좌경화된 기독교란, 강자와 기득권자는 무조건 악이고 약자와 가난한 자는 무조건 선이라고 착각하는 기독교사상입니다.
기득권자는 의무만 있고 약자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자가 나눔을 잃을 때 악해지는 것처럼 가난한 자가 겸허를 잃을 때 악해지기 때문입니다. 강자나 약자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 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무신론적 사상들은 미숙한 초등학문을 좇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범람하는 무신론적 풍조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시고 교회를 지키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에 도전해 오는 사상은 민족주의입니다.
시편 33:8에 보면, "온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온 땅"이요, "세계 모든 거민"입니다.
그러므로 열방의 국수주의적 도모를 피하시고 민족주의적 사상을 무효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으로 하나님을 독점하려 하였고,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우월성으로 세계를 제패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는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 형제주의와 만민 동포주의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는 오로지 "통일"에 최면되어 민족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세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정치가는 필요하면 민족주의도, 공산주의도 될 수 있지만 교회와 민족주의, 교회와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유신론의 기초 위에 서 있고 공산주의는 무신론의 기초 위에 있으며, 기독교는 유심론의 기초 위에서 있고 공산주의는 유물론에 기초 위에 서 있으며, 기독교는 능력에 따라 대접받는 공평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고 공산주의는 계급없는 평등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으며, 기독교는 세계형제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고 공산주의는 폐쇄적 민족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안에도 이런 민족주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불행히 훈련중인 미병사의 전차에 치어죽은 두 소녀의 부당한 법처리에 격분해 수만명의 전사자와 수십만명의 부상자를 낸 혈맹인 미국을 향해 미군철수를 외치며 성조기를 불태우는 일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불평등한 한미 SOFA 협정을 개정하라고 반미를 외치면서도 동티모르에 파견된 우리 장병들이 SOFA의 보호를 받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우리 군인이 보호받는 것은 괜찮고 우리 나라에서 미군이 보호받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 잘못된 민족주의입니다. 교회는 민족주의의 벽을 넘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백성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민족주의의 미몽에서 잠을 깨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교회에 도전해 오는 사상은 폭력주의입니다.
주님께서는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금 검을 쓰는 것을 정당화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1848년 칼 막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대중은 총궐기해서 봉건주나 기업주의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공동소유를 만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무산 노동대중이 잘 살 수 있는 계급없는 사회를 만들려면 계급사회의 산물인 국가와 교회를 전복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위험한 풍조를 만연시킨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정당화 합니다. 방화, 파괴, 살인, 거짓, 권모술수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인륜까지 배반하며 부모자식간의 관계도 파괴시킵니다.
이런 급진적 풍조가 언제부터인지 언어폭력, 언론폭력, 정치폭력, 경제폭력, 가정폭력,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이유없는 폭력으로 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스탈린이 숙청한 사람이 4600만명에 이르고, 모택동이 숙청한 사람이 6200만명에 이르고, 김일성이 숙청한 사람도 수백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600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죄를 독일은 지금도 빚진 나라들에 갚고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은 적반하장격으로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안에도 철없는 좌경세력들이 이에 동조하고 교회안에도 동조세력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폭력주의지만 교회는 비폭력주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적인 교회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사탄의 세력들에 대해 No!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십자가의 의미
출 2:8-15 / 박인걸 목사
“골퍼와 백만장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마크피셔가 썼으며 자기계발 소설에 에세이가 결합 된 독특한 형식의 책입니다. 골프는 성공한 비즈니스맨들의 스포츠입니다. 골프를 치면서 경영의 지혜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며 골프를 통하여 삶을 성공으로 이끌어 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전달하려는데 이 책의 저술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메시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성공한 사람은 열정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김연아가 세계 피겨스케이팅 대회에서 207점을 얻어 1등을 하여 금의환향하여 국민의 요정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리 국민들에게 엄청난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가 피겨여왕이 된 것은 무서울 정도의 노력, 세계적인 선수들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입니다. 둘째, 집중력입니다. 김연아도 집중력이 대단하더군요. 6세 때부터 피겨스케이팅을 탔는데 또래 친구들이 놀러 다니고, 집에서 응석부릴 때 얼음판에서 멍들고, 부러지고, 깨지고 터지면서도 끊임없이 스케이팅을 탔습니다. 피겨스케이팅은 총 17종 82도형이 있습니다. 중계방송을 들으면 (크로스 오버 전진, 후진, 백 스케이팅 양발, 한발, 포워드아웃 스케이팅, 인 스케이팅, 백 아웃사이드 세미서클, 인 서클, 쓰리 턴, 더블 쓰리 턴, 루프, 브래킷, 카운커, 록커, 모호크 턴, 왈츠 스텝양발 스핀, 버니 홈 점프 등등의 전문용어라서 보통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들을 모두 다 완벽하게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고강도의 훈련과 피눈물 나는 고통을 견디어 내야 가능합니다. 김연아 선수는 남다른 열정과 집중력으로 세계적인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된 것입니다.
“가장강한 것은?”이라는 제목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강한 것은 돌이다. 그러나 돌은 쇠가 깬다.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불은 물이 끈다. 물은 구름이다. 구름은 바람에 날려간다. 바람은 벽 앞에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벽을 쌓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죽음 앞에 무기력 하다. 그런고로 죽음이 제일 강하다. 그런데 죽음 보다 더 강한 것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겼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인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동의하고 인정하는 주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긴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하고 계십니까? 기독교의 상징물 정도로 보십니까? 고대 로마인들의 사형 형틀로만 보십니까? 여인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액세서리입니까? 드라큐라 영화에 나오는 귀신 쫓는 부적입니까?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 속성이 결정 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물론 주관적 해석과 객관적 해석이 있고 각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의미를 확실하게 정립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실 아주 처참한 죄에 대한 처형수단입니다. 아주 부끄럽고 수치스런 죽음입니다. 저주스런 죽음입니다. 자기 집안에서 누가 십자가에 처형을 받았다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고 수치스런 사건이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참혹하고 비참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구세주, 구원자라고 믿고 있으며 그분을 흠모하고, 사모하고 경외하고, 찬양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분만이 구원을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며 주님의 수난이 시작 되는 주간입니다. 우리는 오늘 십자가의 의미를 함께 생각하며 은혜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1. 대속의 십자가 입니다.(골1:20, 2:14, 고전1:18)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불리한 법조문을 쓴 증서(케이로 크라폰)”는 고소장, 자술서, 채무증서 등을 의미합니다. 물론 신학적 의미의 증서는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죄로 타락한 인간을 고소하여 죄의 대가로 죽음의 형벌을 받게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아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시고 우리에게 적용 될 증서를 모두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그 증서를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삭제한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증서에 있는 내용이 적용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증서에 기록 된 내용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고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대속, 속량, 속전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전1:18)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이면 소 임자가 당연히 죽어야 했는데 정해진 속전(ransom money)를 지불하면 죽임을 면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출21:30) 그런가하면 실화(失火)로 사람을 죽일 경우 배상 법, 상법, 장애물 배상법, 위탁받은 가축에 대한 손해 배상법(출22:6-13)등은 대속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노예를 자유하게 하는 속량 법(레19:20)도 대속에 해당됩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역시 대속의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하나님과 나의 죄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값을 치러야 하는데 예수께서 우리 죄 값에 대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법칙 금을 내 주셨습니다. 주님은 친히“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 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성자로 존경받는 성 카일스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아덴의 왕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배설물로 여기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수도를 위하여 떠날 때 어려서부터 기르던 암 사슴 한 마리가 어미처럼 따르기 때문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산 속에서 암 사슴을 자식처럼 여기며 돌봐 주고 사슴과 함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프랑스의 어떤 임금이 사냥을 하기 위하여 깊은 산속으로 들어 왔는데 바위 밑에 엎드려 있는 사슴을 발견하고 먼 곳에서 화살을 쏘았습니다. 사슴 곁에서 기도하고 있던 성자는 이상한 소리를 영감으로 깨닫고 눈을 뜨고 보니 화살이 자기가 아끼는 사슴을 향하여 날아오는 것은 보았습니다. 순간 손을 내 밀어 화살을 막았는데 화살이 성자의 손바닥을 뚫고 사슴에게 꽂혔지만 성자의 손에서 충격이 완화 된 화살을 사슴에게 상처는 입혔지만 치명적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자의 뚫어진 손바닥에서는 붉은 피가 콸콸 솟았습니다. 사슴이 죽은 줄 알고 달려온 프랑스의 임금은 자신의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으며 성자의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는 손이 연상 되면서 그 자리에 엎드려 울면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슴이 죽을 화살을 성자가 손바닥에 대신 맞고 사슴을 살렸듯이 우리 주께서 내가 죽어야 하는 죄 값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치룬 사건이 대속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내 대신 누가 밥값을 내 줘도 감사합니다. 내 대신 누가 무거운 짐을 져 주어도 감사합니다. 내 대신 누가 한 학기 등록금을 내 준다면 감사할 것입니다. 내 대신 누가 감옥을 살아 준다면 평생 그 은혜를 못 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대신 죽어준 사람이 있다면 평생토록 그 분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살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대신 죽을 뿐만 아니라 나를 구원하여 영원한 영생을 얻게 한 사건입니다.
(2) 겸비의 십자가 입니다.(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까지 낮아지심을 친히 실천하였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삼위일체론 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를 잠시 비우시고 이 땅에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을 몸소 체험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겸손의 극치요 겸비의 절정입니다.
겸비라는 말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다.”“겸하하다.”라는 말과 같고, 겸손의 뜻인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지만 겸손 보다 더 자신을 낮추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프로 중에 “삶의 체험 현장”이 있습니다. 국회의원, 장관, 대학 교수,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삶의 체험현장에 나가 낮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생활을 실제로 체험해 보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을 할 때 하루 동안 서울시 미화원이 되어 자신이 대학 다릴 때 실제로 청소 미화원을 하였던 이태원 시장에서 리어카를 끌며 쓰레기를 줍고 길을 쓰는 체험을 방송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하루 동안 미화원들과 함께 리어카에 쓰레기를 가득 싣고 언덕을 내려오는데, 아 정말 무섭더군요. 자칫 잘못하면 쓰레기 실은 리어카에 깔려 죽겠더라고요. 보통 기술이 아니고는 정말 힘들겠더군요. 하루 종일 하고 나니까 얼굴에 땀으로 얼룩지고 옷에서 냄새가 나고 옷이 더러워져서 서울 시장이 완전히 청소 미화원처럼 돼 버린 모습을 보았습니다. 방송을 위하여 하루 동안 체험을 했으니 다행이지 33년 동안 청소부로 살라면 아마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왕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 33년 동안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얼마나 큰 겸비입니까? 주님의 그런 겸비 때문에 우리가 죄악 가운데서 구원을 얻고 영원한 영생을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겸비하게 살다 가신 주님 앞에서 겸비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사에 자랑스러운 인물이 있습니다. 이 자익이란 분입니다. 그는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라는 섬 출신입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어릴 적에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집을 나와 전북 김제의 한 부잣집을 찾아가 머슴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집 주인인 조 덕삼과 함께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분들이 나가는 교회가 점점 성장하였고 주인과 머슴이 교회를 열심히 섬기다 보니 안수 집사가 되었고 세월이 흘러 교회가 장로를 선출하는데 집 주인인 조덕삼집사와 머슴인 이자익 집사가 똑같이 장로 후보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투표를 하고 보니 집 주인인 조덕삼 집사는 장로에 떨어지고 이자익 집사는 장로에 붙었습니다. 그렇게 되지 교회 분위기기 이상해졌습니다. 집 주인이 장로에 붙고 머슴이 장로에 떨어지던지, 아니면 두 사람 다 붙었으면 좋았을 텐데 결과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자신의 집 머슴이 장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덕삼 집사님이 교인들 앞에 나와서 “우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을 장로로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 많은 나보다 젊은 이자익 집사를 장로로 뽑아 주셨으니 우리 모두 함께 장로님을 잘 받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모든 교인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 조덕삼 집사는 장로가 되었고 이자익 장로는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평양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한국 장로교 총회장을 세 번이나 하였습니다. 한편 조덕삼 장로님 후손들은 복을 받아 자손 대대에 교회를 잘 섬기는 분들이 되었습니다. 참 겸손과 겸비란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겸비한지를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3. 헌신의 십자가 입니다(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 자신의 몸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것입니다. 우리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사자 성어를 압니다. 위령공편에 나오는 말로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어진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하면 우리는 순국열사라 칭합니다. 부하나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을 의사(義士)의로운 사람이라는 칭호를 줍니다.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죽게 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입니다. 주님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죄와 사단의 종노릇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 죄 값으로 내 놓고 친히 십자가에서 죽는 헌신을 통하여 우리 죄가 모두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한국 전쟁 때 있었던 일입니다. 눈물겨운 이야기 입니다. 한 군인이 지뢰를 밟아 터지면서 몸의 공중으로 치 솟았다가 떨어졌습니다. 몸과 팔 다리는 괜찮은데 그만 두 눈을 잃고 말았습니다. 군의관이 봉합 수술을 하면서 수술은 하지만 눈알이 없어 평생 앞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군인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의사는 앞을 못 보지만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면 강제로 마취를 시켜 수술을 하였습니다. 붕대로 눈을 감아 놓았는데 군인은 절망하면서 여전히 소란을 피웠습니다. 드디어 눈의 붕대를 푸는 날이 되었습니다. 의사가 병사에게 “자네는 분명히 볼 수 없었는데 자네를 위하여 한 쪽 눈을 준 사람이 있어 한 쪽 눈을 볼 수 있네”그렇게 의사가 말 했어도 애꾸눈으로 살면 뭐하느냐며 이 병사는 여전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눈의 붕대를 풀고 물체가 희미하게 보이더니 점점 더 밝게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한쪽 눈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하여 한쪽 눈을 주고 애꾸눈이 된 것입니다. 그때 아들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어머니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모습을 보며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겠습니다.”이 청년은 어머니의 애꾸눈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가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어머니를 통한 자신의 재발견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신 우리 주님을 보아야 하고 나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면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쳤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33세 젊은 청년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것입니까? 그리고 2,000년 역사 속에 그 수많은 인류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 아래 엎드려 예수를 구주로 섬겼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가치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며 동시에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번 수난절에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의 대속을 생각하고 주님의 겸비를 생각하며 주님의 헌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승리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십자가의 주인공인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사역
골 2:11 / 김영목 목사
서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됨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사람들하고 영어로 대화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면 미국 시민이 될까요? 미국 문화를 잘 알고, 미국 국가도 외워서 부르고, 미국 법에 대해서 익숙하면 미국 시민인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시민권을 받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미국 법을 통해 시민권을 받으면, 영어를 잘 못해도, 미국 문화를 잘 몰라도 누가 뭐라해도 미국 시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을 금하고 코셔푸드만 먹으면 될까요? 예를 들면 돼지고기, 새우, 오징어 안 먹고 살면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옷을 입고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유대인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은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간단명료하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 대해서 답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인이요 구원자로 진심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어떤 추가적인 선행이나 봉사를 더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우리 삶에 무엇을 더해야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식을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1. 그리스도의 할례 곧 마음의 할례를 받았음
1) 그리스도의 할례로 죄가 완전히 끊어짐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는 분명히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초대교회에서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다 하나님 백성인가?’ 아니면 ‘예수 믿고 나서 할례도 따라 받아야 하는가?’ 이와 관련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할례’란 무엇입니까? ‘할례’란 말은 ‘주위를 잘라내다’란 뜻으로 오늘날의 포경수술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의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시로 남자의 생식기를 덮고 있는 포피의 일부를 자르는 의식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 내에는 육체의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골로새 교회를 다니던 이방인 성도들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저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이와 같이 혼란스러워 한 이유는 유대인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율법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창세기 17장 10-1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창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 17: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 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창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할례를 받아야만 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성경에 적혀 있으니 골로새 교회 성도들도 유대인들의 주장이 신빙성 있어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에 따라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바울이 창세기 17장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할례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받은 할례는 유대인들이 해왔던 ‘육체적 할례’와는 성격도 다르고 종류도 다른 할례입니다. 그것은 손으로 행하는 할례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행해지는 할례입니다.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본래 할례란, 육체적 포피 잘라버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는 세상의 죄악을 끊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주께서 그들을 죄악에서 끊어 버리십니다. 11절에 “육적 몸을 벗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전에 예수 믿기 전 살아가던 모든 죄악된 것들을 벗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요, 마음의 할례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우리들의 모습은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원수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우리의 관계는 끊어져 버렸습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구원받기 위한 추가적 조치 필요 없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 즉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 누구라도 구원받는 일에 있어서 예수를 믿는 것 외에 추가적으로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저주를 받으라고 말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는 분명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반드시 세례도 받아야 하고, 온갖 성사와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도 인간의 선행이 더해져야만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왜 그토록 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으며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환원할까요? 구원받기 확실한 공로를 쌓고 죽겠다는 심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죽기 전에 확실하게 충분한 공로를 쌓고 죽겠다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도 자신의 선한행위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의 선한행위로 쌓은 공로를 통해 구원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사역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가 나의 죄를 씻어내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어떠한 것들을 추가적으로 더하려는 시도들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라는 영국의 유명한 목사님께서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기 위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한 번 질문해보겠습니다.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님들도 한 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지난 목회를 회상하며 자신이 수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아직은 충분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주저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제가 이 질문을 할 때 속으로 ‘난 아직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하고 생각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아침 교회에 오면서 남편 혹은 아내랑 차에서 싸운 분들은 제가 이 질문을 했을 때, ‘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엔 여전히 부족하지…’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바로 이 지점을 경계한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이러한 주저함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태도를 향해 “굉장히 겸손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악마의 거짓말이며,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구원을 받기에 충분히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백성이 될만큼 충분히 선한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핵심은 주님만이 충분히 선하시며 나는 그분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한다. 천주교는 말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선행을 행해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도 혹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무언가 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은 잘못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복음입니다. 이를 잘 정리한 문장이 있어서 한 번 발췌해 보았습니다. 뉴욕에 있는 리디머 교회의 ‘팀 켈러’라는 목사님이 쓴 [센터처치]라는 책에서 인용한 문장입니다. 저를 한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복음은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행해진 무엇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위해 행해진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를 다시 한번 따라해 주십시오. “복음은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행해진 무엇이며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다시 한번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하면 은혜는 복음이며, 선행은 복음의 결과입니다. 이 두 가지를 헷갈려서는 안 됩니다.
3) 믿음으로만 구원받음 그러나 믿음만 남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분명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으로 구원받습니다.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오직 믿음!”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sola fide”(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천주교와 다른 우리 개신교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죄 많은 인간은 한 가지 극단을 피하고는 즉시 또다른 쪽에 있는 극단에 치우치기 십상입니다. 한쪽의 극단에서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기에 선행이나 봉사와 같은 공로를 더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의 극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면 충분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율법폐기론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 예수님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난 이미 예수 믿고 있으니까 이제 아무렇게나 내 맘대로 내 인생을 살아도 되겠구나?” 이것이 바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빠져 살아가고 있는 또 하나의 잘못된 극단입니다. 물론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참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선행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은혜는 복음이며, 선행은 복음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마틴 루터가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받지만, 우리가 단지 믿음만 남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We are saved by faith alone, but the faith that saves is never alone.”)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 믿음은 믿음만 남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 삶의 선행으로 이어지는 살아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2.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가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바로 세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세례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세례’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밥티스모스’는 ‘씻다’란 뜻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는 물로써 부정한 것을 씻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씻다’라는 뜻 말고도 ‘담그다’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례를 줄 때 사람을 물에 잠기었다가 다시 나오지요. 이 장면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체를 잘 보여줍니다.
1)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을 의미
세례를 받을 때 이에 참여하는 사람이 물 속으로 잠기는 것은 그가 이제 죄에 대하여는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12절을 보시면 우리가 세례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를 나타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려 돌아가실 때 우리의 ‘죄 된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제는 땅에 완전히 매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 죄를 위한 죽음이란 것을 믿는 모든 자들이, 세례 때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우리의 옛 본성이 매장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저 사도 바울의 유명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 고백을 들어봅시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실제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 된 본성,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물 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는 것을 의미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 남자 생식기의 일부를 잘라냄으로서 자신들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이요, 하나님에 대하여 거룩하게 살도록 부름 받은 백성이 되었음을 나타냈습니다. 세례 또한 이와 동일한 상징적 의미로써 우리가 물에 들어갈 때 우리의 죄악된 본성에 따라 살던 옛 사람이 죽은 것이며, 이제 물에서 나올 때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장사한 지 삼 일이 지나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죽으심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에도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받을 때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을 상징하였듯이,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이제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장 4-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이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들의 죄 된 본성이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이제 우리들은 죄의 저주인 사망을 이겨내고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구속사역을 믿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소망입니다.
3. 그리스도의 완전한 죄사함
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모든 죄를 사하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복음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하심을 통하여 완전하게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3절에 죄라는 단어 앞에 있는 ‘모든’이란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들, 현재 우리가 짓고 있는 죄, 그리고 우리가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사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씻음 바 된 것입니다. 이 완벽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제가 20대 때 한참 죄에 대한 문제로 인해 제 영혼이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어찌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필립 얀시’라는 사람이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두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죄는 없다. 이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죄인도 없다.” 이 두 문장이 제 영혼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죄까지도 용서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인해 죽었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용서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채무 증서를 제거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통해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해 주셨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은 14절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4절에 등장하는 ‘의문에 쓴 증서’라는 말은 채무 증서를 의미합니다. 돈을 꾼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돈을 갚겠다고 법률적으로 계약을 체결할 때 직접 기록하여 만든 증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빚 문서’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이 빚문서에 갚아야할 빚이 늘어납니다. 우리 중 이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안 그래도 마이너스 통장인데 볼때마다 빚이 늘어나면 얼마나 절망스럽겠습니까?
14절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채무 증서를 없애 버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바울은 이 내용을 무려 3번이나 다른 표현으로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문에 쓴 증서를, 즉 우리의 죄가 다 기록되어 있는 채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도말하다’란 말은 하나의 흔적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제하여 버리다’는 말은 말 그대로 제거해 버리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죄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무효화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4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율법의 정죄가 다 무효화되었고 제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결말.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구속사역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삶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은 완전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 외에 무언가 더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무언가 더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행해진 무엇이며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우리 죄 된 본성은 그와 함께 이미 못 박혀 죽었습니다. 우리 죄는 완전히 사함 받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완전하신 구속하심을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언제나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며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충만하여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