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찬금(語嘿囋噤)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잘 분간해야 한다.
語 : 말씀 어(言/7)
嘿 : 고요할 묵(口/12)
囋 : 기릴 찬(口/19)
噤 : 입다물 금(口/13)
세상사 복잡하다 보니 말과 침묵 사이가 궁금하다. 침묵하자니 속에서 열불이 나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신흠(申欽)이 어묵편(語默篇)에서 말한다.
當語而嘿者非也, 當嘿而語者非也.
마땅히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다. 의당 침묵해야 할 자리에서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必也當語而語, 當嘿而嘿, 其惟君子乎.
반드시 마땅히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마땅히 침묵해야 할 떄 침묵해야만 군자일 것이다.
君子之嘿也. 如玄天, 如深淵, 如泥塑.
군자의 침묵은 현묘한 하늘 같고 깊은 연못 같고 진흙으로 빚은 소상(塑像) 같다.
其語也, 如珠玉, 女蕙蘭, 如鐘鼓.
군자의 말은 구슬 같고 혜초(蕙草)와 난초(蘭草) 같고 종과 북 같다.
군자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잘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감히 말해야 할 자리에서는 꿀먹은 벙어리로 앉아 있다가, 물러나 뒷자리에서는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으면 소인이다.
여기서 들은 남의 험담은 금세 저기 가서 옮기고, 함께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남들이 알까 걱정한다. 말해야 할 때 말하기와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기가 참기 어렵다.
사람들은 맨날 거꾸로 한다. 말해야 할 때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때 떠든다. 세상 살며 생겨나는 많은 문제들이 여기서 비롯된다.
끝 모를 아득한 하늘,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연못, 진흙으로 빚어놓은 소상 같은 침묵을 내 안에 깃들이고 싶다. 구슬처럼 영롱하고, 혜란(蕙蘭)처럼 향기나며, 종고(鐘鼓)처럼 맑게 울리는 그런 소리를 내고 싶다.
이항로(李恒老)가 말했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은 진실로 굳센 자만이 능히 한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굳센 자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한다.' 굳이 말한다면 침묵 쪽이 더 어렵다는 얘기다.
當言而言, 固强者能之.
當默而默, 非至强不能也.
조현기(趙顯期)도 '말해야 할 때 말하면 그 말이 옥으로 만든 홀(笏)과 같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면, 그 침묵이 아득한 하늘과 같다'고 했다.
當語而語, 其語如圭璋.
當嘿而嘿, 其嘿如玄天.
공자가 말했다. '함께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말하면 말을 잃는다.' 할 말만 하고, 공연한 말은 말라는 뜻이다.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맹자(孟子) 진심하(盡心下)에는 이렇게 적었다. '선비가 말해서는 안 될 때 말하는 것은 말로 무언가를 취하려는 것이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낚으려는 것이다.' 꿍꿍이속이 있을 때 사람들은 말과 침묵을 반대로 한다.
未可以言而言, 是以言餂之也.
可以言而不言, 是以不言餂之也.
김매순(金邁淳)의 말이다. '물었는데 대답을 다하지 않는 것을 함구(噤)라 하고, 묻지 않았는데도 내 말을 다해주는 것은 수다(囋)라 한다. 함구하면 세상과 끊어지고, 말이 많으면 자신을 잃고 만다.'
問而不盡吾辭, 其名曰噤,
不問而惟吾辭之盡, 其名曰噤.
則絶物, 則失己.
정경세(鄭經世)는 호를 일묵(一默)으로 썼다. 쓸데없는 말 만 마디를 하느니 차라리 내처 침묵하겠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침묵만이 능사가 아니다. 바른 처신이 어렵다. 말과 침묵, 둘 사이의 엇갈림이 참 미묘하다.
어묵찬금(語嘿囋噤)
잘 쓰이지 않는 어려운 한자로 모은 이 성어는 모두 말과 관계가 있다. 語(어)는 말하다, 嘿(묵)은 입을 다물어 고요하다, 囋(찬)은 기리다 외에 시끄럽게 떠들다, 噤(금)은 입 다물다, 닫다란 뜻이다.
말하는 것과 입 다문 것을 나란히 세워 말하는 것도 중요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니 자리를 잘 분간하여 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입은 모든 재앙의 문이라며 구화지문(口禍之門), 화생어구(禍生於口) 등을 비롯한 많은 성어가 말을 조심하라고 가르쳤다.
반면 침묵이 아무리 금이라 하여 입 무거운 것을 훌륭하다고 떠받들어도 말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한다는 성어도 적지만 있다.
말을 해야 할 자리에 입을 꾹 닫고 있는 모습을 비꼬아 찬바람 맞은 매미처럼 다물고 있다고 한 금약한선(噤若寒蟬)이 그것이다.
공자(孔子)가 仁(인)에 대하여 제자 안연(顔淵)이 묻자 답한 내용에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것이 있다.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는 것은 무턱대고 입 다물지 말고, 말하는 것에 신중을 기하여 이치를 따져 보고 말하라는 것이다.
말하기와 침묵하기에 대해 여러 조선 문인들의 가르침을 소개한다.
먼저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申欽)이 상촌고(象村稿)에서 말한다. ‘말해야 할 때 침묵을 지키는 것도 그르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하는 것도 그르다. 반드시 말해야 할 때 말을 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만 군자라 할 수 있다(當語而嘿者 非也 當嘿而語者 非也 必也當語而語 當嘿而嘿 其唯君子乎).’
조선 후기의 유학자 이항로(李恒老)는 그의 문집 이항로(華西集)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은 진실로 굳센 자만이 능히 한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굳센 자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한다(當言而言 固强者能之 當默而默 非至强不能也).’
조선 후기 덕행과 문장으로 유명했던 학자 김매순(金邁淳)은 결론짓는다. ‘물었는데 대답을 다하지 않는 것을 함구라 하고, 묻지 않았는데도 내 말을 다해주는 것은 수다라 한다(問而不盡吾辭 其名曰噤 不問而惟吾辭之盡 其名曰囋/).’
속에 온갖 계획이 들어있다고 해도 말 안하면 귀신도 모른다. 말 잘 하는 사람이 나서 온갖 주장을 늘어놓을 때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용자다. 침묵이 무조건 미덕인 것만은 아니다.
▶️ 語(말씀 어)는 ❶형성문자로 语(어)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언(言; 말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吾(오, 어)로 이루어졌다. 吾(오, 어)는 서로 말을 주고 받고 하는 일이, 나중에 吾(오)를 我(아)와 같이 나 또는 자신이란 뜻으로 썼고, 서로 이야기한다는 뜻인 때는 말이란 뜻을 나타내는 言(언)을 붙여 따로 語(어)를 만들었다. ❷형성문자로 語자는 ‘말씀’이나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語자는 言(말씀 언)자와 吾(나 오)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吾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나’를 뜻하는 吾자에 言자가 결합한 語자는 ‘나의 말’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본래의 의도를 명확히 알기 어렵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뜻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語(어)는 명사 아래에 붙어 그것이 어떤 말인가를 나타내는 말로 ①말씀, 말, 이야기 ②새, 벌레의 소리 ③논어(論語)의 약칭(略稱) ④기뻐하는 모양 ⑤말하다, 논란(論難)하다 ⑥알리다, 고(告)하다 ⑦발표(發表)하다 ⑧의논(議論)하다, 모의(謀議)하다 ⑨이야기하다, 담화(談話)하다 ⑩대답(對答)하다 ⑪깨우치다 ⑫가르치다 ⑬설명(說明)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말씀 언(言), 말씀 화(話), 말씀 설(說), 말씀 담(談), 말씀 사(辭), 말씀 변(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말이 궁하여 답변할 말이 없음을 어색(語塞), 낱말의 수효 또는 낱말의 전체를 어휘(語彙), 말의 한 토막이나 말의 마디를 어구(語句), 언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어학(語學), 말의 조직에 관한 법칙을 어법(語法), 말의 가락이나 말하는 투를 어조(語調), 낱말이 생겨나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근원을 어원(語源), 한 낱말의 중심이 되는 요소로서 더는 가를 수 없는 부분을 어근(語根), 훌륭한 학자나 지도자들이 한 말을 간추려 모은 기록을 어록(語錄), 말의 뜻을 어의(語義), 글이나 말에서 낱말의 놓인 차례를 어순(語順), 사람이 생각이나 느낌을 소리나 글자로 나타내는 수단을 언어(言語), 국민 전체가 쓰는 그 나라의 고유한 말을 국어(國語), 사용하는 말을 용어(用語), 같은 음이나 비슷한 음을 가진 단어를 반복적으로 결합한 말을 첩어(疊語), 보통 회화로 쓰는 말을 구어(口語), 문장의 주체가 되는 말을 주어(主語), 글로만 쓰고 말로는 쓰지 않는 말을 문어(文語), 정도에 지나치게 심한 말을 격어(激語), 동아리끼리 저희들만 알도록 특정한 뜻을 숨겨 붙인 말을 은어(隱語), 남이 못 알아듣게 넌지시 하는 말을 밀어(密語),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말을 내놓음 또는 그런 말을 방어(放語), 새로 말을 만들어 냄 또는 그 만든 말을 조어(造語),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어불근리(語不近理), 말을 삼가지 않고 함부로 함을 어불택발(語不擇發), 사람을 부리는 것이 말을 부리듯 노련함을 어언여마(語言如馬), 말이 하나의 일관된 논의로 되지 못함을 어불성설(語不成說), 하는 말이 재미없다는 어언무미(語言無味) 등에 쓰인다.
▶️ 嘿(고요할 묵)은 형성문자로 黙(묵), 默(묵)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黑(흑, 묵)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嘿(묵)은 ①고요하다(조용하고 잠잠하다) ②말을 아니하다 ③입을 다물다 ④잠잠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말하기를 삼가해서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음을 근묵(謹嘿), 말없이 잠자코 있음을 유묵(幽嘿), 입을 다물고 말 없이 잠자코 있음을 폐묵(閉嘿) 등에 쓰인다.
▶️ 囋(기릴 찬, 지껄일 찰)은 형성문자로 讚(찬)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앞으로 보내다의 뜻을 가지는 贊(찬)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을 치켜올려 권하는 말이다. 그래서 囋(찬, 찰)은 ①기리다 ②찬양(讚揚)하다 ③찬조(贊助)하다 ④돕다(=贊) ⑤인도(引導)하다 ⑥먹다, 마시다 ⑦밝다 ⑧문체(文體)의 이름(공덕을 칭송하는 말) 그리고 ⓐ지껄이다, 시끄럽게 떠들다(찬) ⓑ고(告)하다(찬) ⓒ비난하다, 욕(辱)하다(찬) ⓓ조롱(嘲弄)하다, 희롱(戱弄)하다(찬) ⓔ북소리(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일컬을 칭(稱), 기릴 포(褒), 기릴 예(譽), 기릴 송(頌)이다.
▶️ 噤(입다물 금)은 형성문자로 吟(금)과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禁(금)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噤(금)은 ①입을 다물다 ②닫다 ③열린 문짝을 닫다 ④주걱턱,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아니함을 금구(噤口), 중풍으로 인해 입을 꼭 다물고 열지 못하는 증세를 구금(口噤), 추위에 몸이 얼어 입을 다뭄을 동금(凍噤), 주문을 외어 병을 고치고 잡신을 물리침을 주금(呪噤), 이질로 말미암아 입맛이 없어져서 먹지 못하는 병을 금구리(噤口痢), 입을 다물고 혀를 감춘다는 뜻으로 말을 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금구수설(噤口囚舌), 매우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크게 뜨고 바라보며 입을 꽉 다물고 말을 하지 못함을 목당구금(目瞠口噤), 굶주린 까마귀가 울지 않는다는 뜻으로 신하가 임금에게 할 말을 하지 못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기오지금(饑烏之噤)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