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수준
오래전,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떤 크리스천 잡지에서 읽었던 유머가 있었다.
배경은 미국의 야구 경기.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홈플레이트를 툭툭 친 후 그 위에 십자성호를 그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역시 그리스도인이었던 포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화를 내며
그 성호를 발로 지운 후 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자네와 내가 동시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드시겠나? 하나님은 그냥 게임이나 즐기시게 놔두지?”
수능의 폭풍이 또 다시 나라를 뒤덮었다.
모든 종교단체들은 이 특별한 계기를 맞아 정성어린 기도를 모은다. 수험생을 위한 ‘특별’ 기도들이 교회와 사찰에 넘쳐난다. 아니, 어디 종교인들뿐이랴. 서울대에서 만들었다는 일명 ‘서울대 초콜릿’은 이미 부적의 지위에 올랐다. 수험생을 자녀로 둔 모든 부모의 염원이 매서운 찬바람을 뚫고 하늘 끝까지 닿을 기세다.
그런데 문득 이 스펙터클한 기도의 대향연에서 저 유머에 등장한 투수와 포수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이렇게들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누구를 떨어뜨리고 누구를 붙여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의 제목들은 정확하게 나의 신앙 수준이 어디쯤인지를 알려주는 바로메타가 된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제목에서
나와 가족을 위한 기도제목을 모두 제하고 남는 것이 바로 우리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모든 이기적인 기도제목을 버리고 남는 것, 순수하게 이타적인 간절한 기도의 마음, 바로 그것이 내 신앙의 수준이다.
과연 얼마나 남을까? 아니, 남기는 남을까?
신학생들과 수업을 할 때마다 던지는 질문이 있다.
“여러분이 목사가 될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저는 지옥에 보내셔도 좋으니 대신 하나님을 모르는 저 불쌍한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주십시오.”
이것은 구원론에 관련된 조직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타적이어야 하지 않은가에 관한 물음이다.
바울이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한이 없겠다고 말했을 때(롬 9:3),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탄원하며 그들의 죄를 사하지 않으실 바에는 차라리 주의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간청했을 때(출 32:32), 그들이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신앙의 수준이란 이런 것이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하나님께 칭얼대는 모습을 장려하다니, 속된 말로 쪽팔리는 일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신앙의 자존심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크신 은혜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고작 램프의 요정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나?
내가 믿는 진리를 이렇게 수준 낮은 것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나?
언제까지 징징대며 젖먹이 아이처럼 하나님께 칭얼거릴 참인가?
언제까지 나만 천국 가면 그만일 텐가?
주님께서 친히 기도의 문구까지 일러주신 기도는 이런 식의 기도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만 어른으로 자라야 하고, 이제 나의 신앙은 나야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저들을 살펴주시라는 호기로움이 필요하다.
그때에야 세상은 교회를, 교인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모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이다.” (마 6:31-32)
이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