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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말,
당시 현대건설 조선 사업부로 시작한 현대중공업 초창기 멤버들은,
임대한 천일고속 뻐스 2대로 서울시청 뒷켠에 있던 빌딩에서의 일을 마치고,
울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본격적인 울산-현대중공업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었지요.
6시간여 걸려 울산 전하동에 위치한 '독신자 숙소'에 짐을 내려놓은 초창기 현대조선 Men들은
기혼자이건, 미혼자이건 모두 독신자 숙소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지요.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조선소는 한창 토목공사와 건축공사가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토목과 건축이라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현대건설의 공사 현장이다 보니, 여기 또한 유능하고 부지런한 우리 동기들이 없을 수 없는 곳이었지요.
우리나라 최초로 시공되고 있는 30만톤급 Dry Dock의 토목공사의 기초측량을 마치고, 남해안 고속도로 현장으로 간 '변홍근'이의 뒤를 이어, 정말 오랫만에 만나는 '이의신'이가 특유의 벌건 얼굴을 하고 조선소 건설 현장을 누비고 있었습니다.
반갑게 만난 둘은 "야, 임마, 너 여기 있었구나." "야, 너 언제 왔니...?" 하면서 울산 방어진의 조그마한 횟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회포를 풀었지요.
객지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밤은 그렇고 그러하게 깊어가는 늦가을의 밤이 길지 않은채로 깊어갔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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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바쁘게 생활하는 탓에 , 간혹 식당에서 만나는 외엔 특별하게 둘 만의 시간을 갖는 일이 별로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현대건설 조선 사업부는 '그리스의 최대 선박왕인 '리바노스 家'로 부터 26만톤급 원유운반선(260,000 Tons Crude Oil Carrier) 2척을 수주한 터 였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 건조한 선박은 먼저 번에서 이야기한 대한조선공사의 18,000톤급 Bulk Carrier가 제일 큰 선박건조 실적이었습니다.
헌데, 그 이상의 실적이 전무한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세계에서 몇 안되는 대형 선박을 건조한다는 것이 완전한 꿈과 같은 것이 었습니다.
울산 - 전하만과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을 들고 수주하였다는 26만톤급 원유운반선(V.L.C.C.=Very Large Crude Oil Carrier)은,
그 규모가 당시나 지금이나 엄청난 것이랍니다.
선박-화물선에서 이야기 하는 톤(Tons)은 일반적으로 적재톤수(D.W.T.= Dead Weight Tonnage)를 일컫는 것인데,
평균 우리나라 사람들의 몸 무게를 50 Kg으로 가정하였을때,
260,000 Tons는, 260,000,000 Kg이니까. 260,000,000 /50 = 5,200,000 명이 되지요.
즉, 그 배 한척에 5백2십만명을 동시에 실을 수 있다는 계산이지요.(무게로 따지면,..)
당시 서울 인구가 약 8백만이었나요? 아마,...
그러니까. 현대조선에서 건조하려는 배 한척에 서울 인구 2/3를 실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하여튼 엄청나게 큰 배였습니다.
길이가 230M. 폭이 52M 높이가 24 여 M로 기억되는데,..............
그 배의 설계는 영국의 '리스고우' 조선소에서 100% 조달 한 것이고요,
건조 기술은, 완전한 우리나라 기술자들에 의해 연구하고, 실험하고,... 하면서 건조하였지요.
그 조선소 초창기의 지난 일들 중에는,엄청난 에피소드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 중에서 몇가지만 소개할께요.(우리와 직접 간여되는 것들,,,,,,,,
조선소의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어느날, 아마도 울산에 내려간지 1년 정도 지난 때 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의신'이는 '임무 끝!' 하고 다른 건설 현장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변홍근'이가 조선소 건설 현장에 왔습니다.
당시 조선소에는 현장이 하도 넓다보니(그 당시에는 100 만평, 현재는 더 넓지요), 회사에서 배려한 것이,
과장급에게는, 49 cc. 오토바이를 지급하였었고, 각 부서에는 자전거 2~3대씩 지급하여 업무 능률을 기하곤 했었습니다.
건설쪽 에는 주어진 업무에 따라 개인별로 자전거가 지급되어 있었고요.
'변홍근'이도 특별대우로 자전거 한 대를 지급받아 그 자전거로 현장을 다니곤 하였었지요.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참 별난 인간들이 많은 현장이었습니다.
한 번은 홍근이가 자전거를 타고 다른 현장 사무실앞에 세워놓고 일을 마치고 나오니,
지급받은 새 자전거가 없어졌더랍니다.
변상은 물론 앞으로 현장 다닐 생각을하니 한심스런 생각과 "어떤 놈이야. 잡히기만 해 봐라.."하면서 일찍 숙소에 들어와 침상에 들어 누워 있는데,.
그 방에 함께 있는 친구가 싱글벙글하며 들어오더니, "변 형! 나 오늘 자전거 한대 수입 잡았다."하는 거랍니다. 누구는 잃어버려 화가 나있는데, 옆의 친구는 자전거 한 대 얻었다고 싱글벙글하고,,..
혹시나 해서,...후다딱 일어나서, "어떤 건데.."하고 , 물음과 동시에 그 친구와 함께 밖에나가 세워놓은 자전거를 보니..
" 야....이거................................." 자기 거 였답니다.
"야, 이거 어디서 났어, 이거 내꺼 아니야,..." 어안이 벙벙.....과 함께 웃는,....웃지못할 일이었지요.
비일비재한 일 중의 하나였답니다.
또 하나,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생산설계1과와 2과가 배구 시합을 했습니다.
지는 팀이 술값을 몽땅 계산하기로 하고,...
저는 당당한 심판이었습니다.(잘 아시다 시피, 아마츄어들의 시합엔 프로가 심판 보는거 아니겠습니까.?ㅎㅎㅎ)
3세트 시합이 끝나고 기분좋은 술 자리를 마치고 나오는 데.
그 동네 한 친구와 우리 설계과원하고 시비가 붙었습니다.
저는 용감하게 Dash하여 싸움을 뜯어 말리고, 각각 돌려 보냈지요.
그리고 월요일 오전이었습니다.
울산 방어진 파출소 순경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토요일에 싸움을 하던 그 동네 사람을 데리고요.....
다짜고짜, 그 사람이 저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하는 겁니다.
어디서 터졌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가지곤, 저한테 맞은거라고, 파출소에 신고를 한 것이 었습니다. 참 너무 기가 막히는 일이었지요.
지난 토요일에 싸움하던 것을 말린 사람이 자기를 때렸다고 하니,..내 원참...,
아마 작업복에 붙어있는 명찰을 보고, 제 이름을 기억 해 둔 것이었나 봅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않는 막 무가내였습니다.
그 술집 주모도, '이사람은 싸움을 말린 사람입니다'라고 경찰한테 말했지만,
그 시골 구석의 경찰은 '난 모르겠으니, 나중에 경찰서나 법원에 가서 이야기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하는 수 없이 그 인간이 요구하는 일금 30,000-원을 주고 합의하였지요.
생돈 30,000-원이요.! 당시 저의 한달치 급료가 40,000-원이었답니다.
세상에 환장한다는 말, 바로 이런것이 었지요.
'살다살다, 별 꼴 다 본다'는 일을 일찌감치 맛 봤지요.
'저 친구 억울하다'고 느껴주는 사람은 있어도, 나서서 해명해 주거나, 편들어 주는 사람은 없더라구요. 객지에서의, 혼자 독불인양 - '헛 똑똑'은 이렇게 큰 손해를 보면서도 가끔 정신을 못 차리곤 하였지요.
본격적으로 선박 설계의 검토와 생산설계가 진행되고, 현장의 작업준비와 자재 발주도 본격적으로 진전되면서 세계 굴지의 현대중공업은 힘찬 태동의 기지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그 중, 800 여명이나 되는 3층 설계부의 한 귀퉁이에서 선각설계 도면을 검토하고 재 작성하면서 어디가 끝인지 모르는 조선소의 일에, 저는 그나마 고참 설계기사의 실력과 기지를 한참 뿜어내는 시절을 갖게 되었었지요.
그리스 선박왕 '리바노스'의 발주에 의한 26만톤급 선박건조로 시작된 울산 현대 중공업은 그 뒤 KHI(가와사끼 중공업)의 놀랄만한 기술과 자료 제공으로, 또 KHI 방계회사인 K-Line의 23만톤급 2척의 선박과 J-LIne(Japan Line)의 2척의 선박 발주에 의하여 놀라운 속도로 안정과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
첫댓글 '참새가 방앗간 근처를 그냥 지나칠 수 없드시', 나 또한 '구성된 글씨를 쪼아보고 갔노라'고 흔적남긴당!!!!!
너는 좋겠다. 좋은세상의 지난 날에 너의 이름도 등장하니까,...ㅎㅎㅎ***참고 ; 촌장== 이의신.
지나간 추억이 아름답듯이 두사람의 우정이 아름답군요! 지금도 여전히 자주 만나고 오가는 말투에 뼈있는 친밀함도 여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