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엔 무엇이 필요한가?
금생(今生)은 전생의 연속이며 무한한 내생의 연결이고
금생(今生)에 주어진 환경이나 운명은 전생에 지은 원인으로부터 맺어진 결과이며,
금생(今生)에서 선악 간에 하는 우리의 행동은 다 내생에 받을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됩니다.
이 육체를 가지고는 천 년 만 년을 살 수 없으므로,
육체가 부서지면 다시 소가 되고 개가 되고 사람이 되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나는 것도 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생에 지은 인연대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연이란 말은 묘한 뜻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무엇을 해도 친한 사람하고만 같이 합니다.
사람이 수천 명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구경하다가 헤어져 나갈 때도 친한 사람끼리 짝지어 나갑니다.
죽어 가는 길도 자기가 친한 길로, 인연 지은 곳으로 따라갑니다.
초면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만나면 재미가 있고 항상 얼굴이 보고 싶고
내 마음속에 상대방의 얼굴이 환히 드러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부터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이 아무리 미남이고 미녀라도 싫어집니다.
첫눈에 당장 싫어져서 주는 것도 받기 싫고 돈을 주어도 받기 싫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잘 모릅니다.
적어도 금생(今生)에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생(前生)에 인(因)을 지어서 금생(今生)에 과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생(今生)에 복을 지어서 당장 금생(今生)에 그 과보(果報)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전생에 복을 지은 밑천이 많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실 공자나 예수가 한 말과 생각과 행동은 ‘선(善)’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못 하고 죽어간 것이 예수, 공자입니다.
공자 자신도 말하기를 초상난 집 개처럼 푸대접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도 자기 제자에게 배신당했고 처참한 최후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다 전생에 죄만 많이 짓다가 금생(今生)에 왔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참회한다는 것은
전생이나 금생(今生)에 이미 저지른 과오(過誤)를 씻어내고 갚아버리는 수행입니다.
인과의 과보(果報)를 다른 방법으로는 벗어날 수 없으므로
오직 마음의 힘을 다해서 지극히 참회하고 마음을 깨쳐서,
큰 능력을 갖추신 불보살님께 발원하여 가피(加被, 구원)를 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금생(今生)에 아무리 기도해도 성취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생에 죄를 원체 많이 지어서 그럽니다.
이런 사람은 더욱, 더 참회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금생(今生)에는 날마다 기도만 하다가 죽으리라. 그래서 후생에는 팔자를 고치리라.
내생에도 안 되면 내생에는 기도만 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기도만 자꾸 하리라.
이렇게 결심해야 합니다.
참다운 기도를 해서 죄를 참회한 뒤에야 비로소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교를 잘 믿으면 내생에 극락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주 잘하면 금생(今生)에서부터 복을 받고 잘살게 됩니다.
욕심만 버리고 살면 됩니다.
우리는 오욕락이 필요 없으므로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없는 사람, 배고픈 사람 먹여주고, 헐벗은 사람 입혀주고,
병든 사람 구해주기 위해서 농사짓고 장사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아무것도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 청담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