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7월6일 [(녹)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8,4-6.9-12
복음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 [서울]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다들 바쁘게 걷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제가 된 후에 아침 출근을 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사제관과
성당이 같은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구청에서도 출근 때문에 바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숙소와 사무실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 세상 사람들이 바쁘게 살고 있으며,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딱 2년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2005년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아침을 준비하고,
치우고 학교에 가는 길이 무척 바빴던 기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출근하는 그 시간만큼 저도 주어진 일에 더욱 충실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조지 캠벨은 신화가 가지는 4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과 자본으로는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가 가지는 4가지
특징은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화가 주는 첫 번째 특징은 ‘신비함’입니다. 무지개는 단순히 빛의
프리즘이 아니라, 하느님과 맺는 새로운 계약의 표징이 된다는
신비로움입니다. 수선화는 예쁜 꽃이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꽃말이 있습니다. 탄생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죽음은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다는 것 또한 신비로움입니다. 신비로움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은 풍요 속에서도 빈곤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신화가 주는 두 번째 특징은 ‘우주적 힘’입니다. 신들의 세계에서 보면
지구는 아주 작은 별에 불과합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국경이
없는 둥근 별입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한마음, 한 몸과
같습니다. 내가 나의 몸을 돌보듯이, 우리는 같은 지구별에서 사는
이웃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싸우는
일이 없듯이, 내 몸의 지체들은 한 방향을 향해서 나가듯이 지구별에
사는 우리는 모두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신화가 주는 세 번째 특징은 ‘사회적 합의’입니다. 신화는 모두
‘권선징악’을 이야기합니다. 신화는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문화와 제도는 신화의 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계명과 법전은
신화의 토대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문화와 문명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서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화가 주는 네 번째 특징은 ‘생명의 존중’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지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많은 생명의 멸종을
가져왔습니다. 생명의 멸종은 결국 인간 역시 지구에서 살 수 없도록
할 것입니다. 꽃, 나비, 새, 물, 바다, 하늘을 존중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쩌면 이 지구에 아주 짧게 머물다 가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지구의 환경과 생명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신화가 가지는 특징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자신만을 위하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웃의 것을 빼앗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역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재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화가 주는 특징을 가르침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들의 꽃도 아름답게 입혀주시고,
하늘의 새도 먹이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장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해 준 것이, 지금 가장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인과 죄인임을 아는 이
2018년 나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죄인과 죄인임을 아는 이>
복음: 마태오 9,9-13
제가 아는 분이 얼마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갈비뼈 두 개에 금이
갔습니다. 폐차를 해야 할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상대 차가 옆을 박았는데 운전석 10cm 뒤에 박아서 그
정도만 다치셨습니다. 상대방 차가 운전석을 받았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한 것입니다.
저도 군대 있을 때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큰 군용트럭을 몰고 가는데,
길가로 지나가는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빨간 불이라 갑자기 정차를 하려했지만 네 바퀴 중에 한
바퀴만 브레이크가 작동되어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꽤 긴 거리를
밀려가서 앞에서 나오는 프라이드 승용차를 박았습니다. 꺾는다고
꺾었지만 상대 앞바퀴 쪽을 쳤고 프라이드는 산산조각이 나며 인도로
떨어졌습니다.
처음 낸 사고다보니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이게 현실이
아니기 만을 바랐습니다. 경찰은 상대 운전사의 뼈에 금이라도 가면
상당히 심각해진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큰
사고였음에도 온 몸에 타박상만 들었지 뼈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상대방 타이어가 충격을 많이 흡수해 준 것 같습니다.
그분이 또 천주교 신자라 선처를 해 주셔서 병원비와 차 값만을
물어주고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군용차는 보험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개인이 합의금을 낼 수 없다면
영창을 살아야만 합니다. 만약 그 때 바퀴가 아니라 10cm 뒤쪽으로
사람을 쳤다면 저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고 그러면 가난한 저희
집에서 합의를 할 수 없게 되어 저는 오랜 기간 영창을 살아서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뼘 차이로 살인자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죄인과 의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고 의인이
죄인이 되는 것은 한 뼘 차이입니다. 그러니 죄인이라 실망할 것도
없고 의인이라 우쭐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죄인과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죄인밖에는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죄인은 심판관이 되어
타인을 판단할 것이고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죄인은 모든 이를
자신보다 낫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적당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일까요, 아니면 죄인임을 아는 의인일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서로 비난하고 질책하고 판단한다면 거기는 하늘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가장 비천한 죄인도 안고 품어줄 수 있는
자비가 넘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의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아는 사람을 찾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인 마태오도 당신 사도 중 한 사람으로
뽑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자비롭지 못한 이유는 자신도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타인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재를 묻히고
다니면서 똥을 묻히고 다니는 개를 나무랄 수 있을까요? 전쟁에서
50보 도망간 사람이 100보 도망간 사람을 나무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면 그것 자체가 자신은 의인의
자리에 서겠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선인지는 판단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 사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한 여자 앞에서 그
여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의인이었고 나머지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심판하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을 부르러오셨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나그네를 따뜻이 맞이합시다!
2018년 나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나그네를 따뜻이 맞이합시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일거수일투족은
그야말로 파격과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율법, 특히 율법주의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셨습니다. 어겼을 경우 현행범으로 몰리던 안식일 규정을
백주대낮에 보란듯이 ‘개무시’하였습니다. 당대 잘 나가던 유다
고관대작들, 뒷목이 뻣뻣하던 지도자들의 악행과 이중적 생활을
공개적으로 힐난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죄인들의 대명사였던 세리와 창녀들에게도 희망이
있으며, 그들에게도 구원에로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고 명백히
선포하셨습니다. 인간 존재로 취급받지 못하던 이방인들과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며 사랑해주셨습니다.
당대 인간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와 언행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름 ‘한 공부’ 했다고 어깨에 힘 좀 주던 율법학자들이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상종해서는 안될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단에 가입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 마태오의 송별연에
참석하셔서, 자연스럽게 세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던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을 향해
따졌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마태오 복음 9장 11절)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세리들은 죄인 중의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삶의 중심이자
지주였던 모세의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존재, 율법이나 신앙생활, 더 나아가서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짐승같은 존재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단의 일원으로 떡
하니 뽑으셨을뿐만 아니라, 세리들의 잔치에 참석하셔서 그들과
포도주 잔을 함께 기울이시니,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점입가경이라고 예수님의 대응은 더욱
충격적이어서, 마치 시원한 사이다 한 컵 마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또 다른 한 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80세 생신 때,
교황청 안팎의 고위성직자들이나 유력 정치인들은 내심 기대했을
것입니다. 교황님의 생신 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장이 올거라고.
그러나 교황님께서는 당신 생신 만찬에 노숙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취임 후 첫 공식 외부 방문
행사 장소로 이탈리아 남단에 위치한 람페두사 섬을 찾아가셨습니다.
물론 이동하실 때는 최고급 방탄이 되는 벤츠나 BMW가 아니라
20년된 낡은 중고차를 이용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지중해 상 ‘난민들의 섬’으로 유명한 람페두사를 첫
방문지로 선택하신 이유는 곤경에 처한 난민들을 만나고, 국제사회에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람페두사는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이 발발한 이후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든 섬이었습니다.
지금 제주도 역시 500여명의 예멘 난민들이 들어와있습니다.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예멘 난민에 대한 지나치게 부정적 시각의
언론 보도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이방인이셨던
예수님, 그리고 난민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보시고 통탄하실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멘 난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거부감, 다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 그리스도인들만큼은 그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보면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
(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예멘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런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우리들의 처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예멘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예수님께서는 우리모두를 아끼십니다.
죄인에게도 문을 열어주시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죄인이기에 엉엉 울며 애절히 통곡하게 됩니다.
우리모두는 회개할 자격이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손가락질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와 기도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의인도 죄인도 함께 가야할 사람들이며
함께 살아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심판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사랑의 치유입니다.
다시금 살아간다는 것이 무언지를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만나게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시간은 의인이라 자만하는 착각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에 감사하는 회개입니다.
죄인의 슬픔이 아니라 죄인의 기쁨을 다시 우리에게 안겨주십니다.
딱 잘라 단정짓는 판단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죄인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앞에서 처음으로
우리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모두는 다시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회개할 아름다운 권리를 다시 되찾게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회개의 주인공이 되심을.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하나님 앞에 당당한 엘리사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7월6일 금요일
하나님 앞에 당당한 엘리사
오늘은 “하나님 앞에 당당한 엘리사”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 8절 말씀에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큰 나라이면서 적국의 군 사령관인 나아만 장군이
‘병을 고쳐 달라’는 글을 읽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해달라’고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엘리사는 우리가 평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칭호를 붙이기까지 그냥 되었을까요?
평소에 엘리사가 얼마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적을 일으켰고 또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활을 했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식되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의 별명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붙임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생활 속에 삶 속에 그의 삶이 녹아진
별명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엘리사처럼 손색함이 없는 당당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주님 품 안에 모두가 잘난 사람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마태9,9-13)
주님 품 안에 모두가 잘난 사람
우리는 기왕이면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합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돈도 있어 보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총이요 복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밥맛인
사람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너무도 달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도 참
소중한 사람인데 담을 쌓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는 마태오라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부르셨다는 것은 하루하루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길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현장인 이세상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세상은 간이역입니다. 종착역은 하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악명 높은 사기꾼이나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 집의 식탁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과 의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기가 번 돈을 가치 있게 쓸 줄을 몰랐던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 받고 따돌림
당하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안목이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예수님의 품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영적성장이 멈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돌림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떠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은총의 날, 진정한 행복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옛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주를
탈피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큰 품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희생제사가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될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 연민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