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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문열 “평생 그렸던 귀향의 꿈… 이제 잿더미가 됐다”
경북 영양 광산문학연구소 全燒
입력 2022.07.07
화재로 폐허가 된 광산문학연구소 건물이 있던 자리에 선 이문열 작가는“지금도 내 삶에 이런 일이 왜 일어났나 생각 중”이라며
바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40년 넘게 마음에 그렸던 집이, 20년 만에 이런 황폐한 잿더미로 돌아가다니…”
지난 4일 오후 경북 영양군 두들마을에서 만난 이문열(74) 작가는 잿더미가 된 광산문학연구소를 보며 참담한 심정을 밝혔다. 지난달 30일 화재로 전소된 이 연구소는 평생 타향살이를 하던 그가 21년 전 고향에 지은 집이다. 전통 목조 한옥 양식 건물 2개 동(418m²)이었다. 불이 지나간 자리엔 깨진 기와, 그릇 등과 잿더미가 남았다.
사라진 고향에 대한 상실(喪失)을 노래한 자신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0년)에서처럼 그에게 이 집은 고향이었다. 마당 한 편으로 나온 작가는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린, 집이 있던 자리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었다. 소설 속 고향이 회한과 그리움, 고통과 향수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의 집터가 회한과 그리움, 원망이 교차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으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소설에서 썼던 것처럼, 옛집도 이제는 기억 속에 남을 것이었다. 작가는 “다시는 이런 집 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4일 경북 영양군 광산문학연구소에 제 모습을 갖춘 건 물을 담는 큰 둑인 청동 '두멍' 뿐이었다. / 이영관 기자
제 모습이 남은 건 물을 담는 큰 둑인 청동 ‘두멍’뿐이었다. 그는 “쟁반을 만들어서 하늘에 비나니 / 물의 덕으로 (불을) 절제해달라”고 한자로 적힌 글귀의 내용을 읽어줬다. 바람은 하늘에 가 닿지 않았다. 작가는 “여기에 ‘방화수(防火水)’를 담아 마당에 뒀다. 한 조각가가 집에 불이 날까 봐 걱정하는 내게 ‘화마를 제압해달라’는 글귀를 새겨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화마는 제압 못하고, 지만 살아남았어. 다 소용없다.”
이 연구소는 작가가 평생 꿈꿔왔던 공간이다. 그는 세 살이던 1951년, 서울을 떠나 가족과 함께 재령 이씨 집성촌인 두들마을에 왔다. 당시 집은 연구소와 70여m 떨어진 곳에 있었다. 2년 뒤 집안 형편이 힘들어져 친척에게 집을 팔고 떠나야만 했다. 이후 안동·부산·대구 등 타지를 떠돌았다. 어린 시절 소년은 “지금 한 푼 없이 셋방을 떠돌고 있지만, 내 고향에 가면 ‘나의 성(城)’이 있다. 언젠가 돌아가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건 2001년. 그해 두들마을에 ‘광산문학연구소’를 지었다. 예전 집과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자비만 20억원을 들였다. 영양군 등의 지원은 4억원가량. 공사비를 마련하느라 서울 양재동 집을 팔고, 1980~1990년대 ‘작가 이문열’ 이름으로 얻은 수익의 대부분을 여기 쏟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완전히 들어가 산다고 마음먹고 지은 집”이라며 “이천에서 지내면서도 가족들과 여름마다 내려왔고, 혼자서는 거의 매주 왔다”고 했다. 그는 “20년 넘게 드나들면서 소중한 물건들을 옮겨놨고, 강당 등에서 다른 사람들과 쌓은 추억들도 많다”고 했다.
작가는 한숨을 쉬며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달 30일 밤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2시간을 넘게 달려 연구소에 도착했지만, 10분 만에 자리를 떴다. “텅 빈 그 자리가 참혹해 들여다볼 수 없었다. 다음 날 대낮에도 그 참상을 지켜볼 수 없었다.” 영양경찰서 관계자는 “CCTV, 주변 탐문 조사 등을 종합하면 식당 쪽에서 밤 10시 46분쯤 불이 났고, 화재 2시간 전부터 집을 드나든 사람은 없다”고 했다.
피해는 무척 크다. 고(故) 김지하 시인이 그려준 난초와 시화 등 문인들의 선물과 도자기 등 개인적으로 아껴왔던 물건들 대부분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나마 소장 가치가 높은 중요한 책은 개관 예정인 문학관 등에 옮겨 둬 피해를 줄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다.
화재를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는 목조 건물을 지으면서, 화재를 항상 염려했다. 전선을 목재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 고정시키고, 관리인을 따로 둬 건물을 수시로 검사하게 했다. 2010년 이번 화재가 발생한 식당을 새로 지을 때는, 목재 등에 ‘방화 페인트’도 일일이 칠했다. 화재 보험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그는 “목조 건물이라 보험 비용이 월 수백만원 이상 든다는 소식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어쩌면 이 큰 집이 나의 ‘오기’였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예전의 집을 되찾겠다는 욕심. 그래서 과거 집보다 2배 조금 안 되는 큰 규모로 지었다. “집을 짓고 난 다음에 ‘아차’ 싶었어요. 아이들도 방학 때밖에는 못 오고, 직계가족도 생각보다 많아지지 않았어요. 나는 옛날의 우리 집을 꿈꿨던 거죠. 이제 세월이 흘렀는데….같은 규모의 집을 다시 짓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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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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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순반대순관심순최신순
2022.07.07 06:25:12
안타깝네요. 목재는 화마에 취약하다지만, 작가에 평생의 꿈이 허무하게...
답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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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6:35:54
그나마 사람에의한 고의가 아니었다면 다행입니다 불순한 사람의 행동이었다면 선생님마음의 증오와 번뇌가 더해져 남은여생 집필도 불가능 해졌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액땜으로 생각하시고 부디 마음 추스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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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6:51:28
화재 원인을 못찾다니요~~~~ 방화 백퍼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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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7:53:11
이 사람들이 장난치나 내가 30년 집 지었어도 전기 화재 본 적도 없음 미국 캐나다 다 목조 주택인데 전기 합선 화제 못 봄 CCTV 맹신 하는데 불 지르려는 놈 못 막는다 내가 불 지르려 작정했다면 뒷산 타고 넘어와 싸지르지 이해 가냐? 이런 것 잡으라고 경찰 있는 것인데 밥그릇 챙긴다고 삭발 짓거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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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2.07.07 07:21:29
예전 이문열 선생의 책장례식 했던 자들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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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2
2022.07.07 07:22:04
정말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시겠습니다. 분명 정밀 조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어서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할것이다. 일과후에는 전원도 다 OFF를 하는데 식당에서 부터 화재가 시작되었으면 CCTV사각지대를 이용하지 않았겠는지 진입하는 입구나 주변 산이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정말 아쉬운 발생되지 않아야 할 화재로 답답하네요. 그래도 힘내시고 파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답글작성
100
4
2022.07.07 06:49:06
마음이 아픕니다. 어쩌면 우리들 인생이 이와 같은 虛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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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4
2022.07.07 06:52:43
건강추스리기를 바랍니다 !!!
답글작성
77
4
2022.07.07 08:20:19
힘내십시요..선생님, 마음이 한 없이 아프지만..이번일을 보고, 너무 억울합니다. 사고원인에 접근하는 경찰들과..주변, 관심.....안타깝습니다. 다시 일어나, 더 큰 일을 하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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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4
2022.07.07 08:42:03
이선생, 충격받지 마시오. 원래 진정한 영웅들은 그런 거요. 젊어서는 위대한 꿈을 꾸고 행동을 하지만 세월이 가면 <虛>의 우주적 진리를 마주하게 되지. 소인들은 죽을 때까지 <虛>를 직면조차 못하지만 영웅들은 뒤늦게 직면하지. 이 사건이 일어난 것부터가 하늘이 이선생을 특별히 여겼다는 뜻이오. 평생 문학을 한 사람이 그조차도 깨치지 못했소? 아니면 알고 있었음에도 그냥 무시했소? 선생의 소설 <금시조>에도 서예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다 불태우라고 유언했잖소? 그 말을 들은 제자가 확실히 불태워버렸고. 이미 <虛>의 의미를 잘 알았던 사람이 지금 와서 그깟 나무로 끼워맞춰진 하찮은 집이 홀라당 타버렸다고 상심한다면 어찌 도를 깨친 자라 할 수 있겠소? 차라리 불타버린 집마당에서 껄껄 웃으며 술을 마시고 춤을 췄어야지. 선생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일세의 영웅이니 이제 불타버린 그 터에 초가 한 채 지어 소박하게 지내며 뒤늦게 다시 깨친 진정한 <虛>를 글로 써서 보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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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4
2022.07.07 08:33:52
이문열 문학이 앞으로 불처럼 일어나서 온 세상을 감동시킬 징조로 생각하시고 용기를 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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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8:10:24
늙으막에 맘고생이 이만저만 아니겠군요! 어쩌랴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만고의 진리 앞에 하늘만 봐라 볼뿐! 인연이 여기 까지 인가 봅니다. 흙집 초막을 짓고 살다 생이 다하면 그 초막에 자신을 눕혀 화장하는 옛선인들 생각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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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7:43:19
원래 집은 주인이 살아야 내집되는 거죠' 목재집은 더 해요. 한옥은 부엌에서 사단이 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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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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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9:37:56
이문열 씨의 책을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지를 때도 가슴이 아팠는데, 고향에 지은 연구소까지 전소되니 참담한 마음이다. 좌파의 소행인지 CCTV만 확인하지 말고 철저하게 파헤쳐야 한다. 그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집단이다.
답글작성
25
1
2022.07.07 09:07:21
식당에서 불이 났다. 식당에서 왜 불이 났을까? 가스안전점검미비? 도시가스? LPG? 가마솥밥 지었나? 장작? 전기스파크? 뚜꺼비집 화재? 소방서는 뭐하냐? 방화인지 진짜 자연화재인지.. 식당에서 불났는데 자연화재이지는 않을것 같다. 수구좌파넘들중에 이문열작가 싫어하는 극렬빠가 몰래 불질렀을지도.. 주변cctv 확인해봐라.. cctv를 촘촘히 달았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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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
2022.07.07 08:55:57
오래전 부터 주사파 좌익 극좌파들이 이문열 작가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그들의 소행이 강력히 의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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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
2022.07.07 08:40:58
존경하는 이문렬 작가님, 이제는 무엇보다 cctv를 2중3중 설치 ,집과 별도 비치,녹화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끊임없는 극렬 좌파 일당들이 귀하를 노리고 있다고 봅니다. 방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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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9:11:20
아, 그리고 이 화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틀림없이 규명을 해야 될 사안이니 경찰은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 과연 이 화재가 인재인지 아닌지 조사해야 된다. <과학수사> 어쩌니 맨날 자랑질이나 해대고는 이런 화재조차 규명하지 못한다면 어찌 선진화된 경찰이라 하겠는가. 이 선생이 <虛>의 의미를 새로이 깨친 것과는 별외로 화재의 내막은 또 틀림없이 알아내야지. 이 세상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누가 휘발유 들고 저 산을 넘어와 불을 질렀는지도 모른다. 원래 좌좀들 중에 극단까지 가버린 자들 허다하다. 우좀도 문제지만 좌좀은 더 극단의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지. 그러니 첨단기술 동원해서 화재가 일어난 저 장소에 휘발유 성분이 감지되는지도 측정하고, 집 주변 최소 1km 도로들에 설치된 모든 CCTV들을 철저히 분석해라. 특히 외지 차량들을 유심히 조사해야 된다. 자연발화라면 그나마 다행이랄 수 있다만 몹쓸 의도를 가진 자가 저질렀다면 당연히 댓가를 치루게 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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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7:51:14
경북 지자체 인구수가 가장 낮은 곳이 울릉군으로 9,080여명이고 그다음 낮은 지자체가 바로 영양군으로 16,000여명이다. 군위군(23,400명)보다 더 적은 인구 수이다. 20여 년 후에 영양군의 인구 수는 지금보다 1/2정도 급격히 줄어들어 빈 마을이 가장 많이 생겨날 지자체로 예상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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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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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0:23:57
왜 이런 일이 이문열 작가에게 일어난다는 말인가? 좌 편항으로 기울어진 우리 문단에 남은 몇 안되는 우익 문사인 이문열 선생이 이 일로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의 말 뿐인 위로-그러나 선생의 소설과 글은 지난 세월 스산했던 삶의 부침 속에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지만 선생의 재기에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생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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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8:02:37
주사파 극렬 문빠 의 테러 인지 철저히 조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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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9:03:24
이작가는 다시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의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비록 건물은 불에 탔지만 작가의 작품은 고스란히 국민들 마음속에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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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9:17:20
고향은 정신적 자산이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늘 상존해 있는 객지생활, 나이가 보태질 수록 더 간절해진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는 절대적으로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 고향으로 가고자 큰 집을 짓는 순간 짓고나서 후회를 하게 된다. 자식들이 찾아올 것 같아 집을 크게 짓는 다면 그게 자식집이지 자신 집이 아니다. 순수한 마음을 견지한 삶을 생각해야한다.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근심이 쌓인다. 밭떼기에 푸성귀나 심어 먹으며..어릴적 다니던 정겨웠던 그곳을 찾아다니며 옛향기를 그리며 고향사람들과 향기를 나누며 살면 된다. 인생 한 순간이다
2022.07.07 09:44:50
이외수같은 이도 지원했는데 이문열 같은 대작가에겐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에서 그의 문학인생이 완성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복구 및 지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럴땐 누가 모금 운동이라도 벌인다면 십시일반 성금이라도 내어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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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9:01:41
불타서 소실된것도 있을텐데 저런 정도면 속상한 정도가 아닌거야... 전기누전으로 화재가 난걸까? 안타깝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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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7:47:50
공수래 공수거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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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0:05:02
누군가 재건축 모금 안하나요? 안타깝고 반드시 복구 되어야 할 국민적 자산 아닌가요? 문화단체가 나서주면 좋겠네요.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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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8:58:53
외국의 전문가라도 초빙하여 감식해야 할 듯...작가님의 욕심은 아니라 평생의 희망이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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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0:15:37
좌익들의 방화가 아닐까 의심이 된다. 별 의지도 없어 보이는 경찰이 이를 밝혀 낼 능력이 있을까, 너무 안타까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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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7:37:59
풍수를 알고 터를 잡아야 하는데... 그래서 팔만대장경판은 목재판이네 800년을 버티는 것을 보면 풍수의 비사를 아니라 할까요. 목생화 화생목 화생토 아닌가?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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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1:27:00
공존할 수 없는 좌파들에 의한 폐해가 너무 크다... 문재인을 포함해서 다 잡아다 능지처참으로 다스려야 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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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1:02:51
이번 방화는 인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경우이다. 본인은 마음의 좌절과 번뇌, 그리고 원망과 미움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업하다가 IMF와 리먼 사태로 수 많은 고통을 받아 보아서 우리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삶의 모든 흔적을 상실한 상처가 너무 깊어 아픔이 나으려면,, 세월과 시간이 마음의 평온함으로 바꿔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잡이 이다. 이 선생은 제 2 인생 갈림길에 서 있는 느낌일 겁니다. 너무 상심 마시고 끝까지 건강이라도 지켜야 합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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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7:44:57
아까운 것들이 화마에 사라졌다. 불을 통과하여 살아 남는 것만이 영원하다. 나무와 짚과 풀은 불에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금과 은과 보석은 불을 통과한다. 그 날에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으려면 오늘 금과 은과 보석이 되어야 하리라.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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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1:24:55
혹시 방화 ?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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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07.07 09:35:29
그런데 74세가 되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 언제 돌아갈 예정이었죠? 너무 심파 아니십니까?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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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2:33:20
좌파 홍위병이 불지른 거죠. 카메라 사각지대에서 불씨를 던지면 아무도 모르죠' 산뒷편에 숨어 있다가 발아물질을 투척한거죠. 식당 뒷편은 안보일 톄니 사전답사를했겠죠'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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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2.07.07 15:03:44
정말 저의 속도 상합니다,, 모금을 해서 재 건축 하시기 바랍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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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4:44:20
늙은이가 과욕인것 같소이다. 초가삼간은 그렇지만 스므댓평 짜리 집에서 만년을 보내소서.. ㅉ.ㅉ. ㅉ...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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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4:22:00
화재로 전소되었어도, 이문열 선생의 역작들이 주는 고뇌와 감동은 수백만 독자의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동시대를 사는 것이 참으로 고마우신 분. 존경합니다, 이선생님.
답글작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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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2:49:06
이열병장님!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래도 집을 잃은거니, 다행입니다. 구수한 입담, 그립네요.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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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2:41:34
중요한 것일 수록 가까이..
답글작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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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0:27:18
안타깝네요. 목조한옥은 비효율적인 점이 많은듯. 단점보완이 중요.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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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0:14:11
목재건축은 항상 화재의 염려가 있으니 활용도가 높고 주변환경에 잘 어울리는 현대식건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답글작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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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6:04:13
금시조 마지막 장면 생각나네요.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스승에 대한 반성으로, 자신의 모든 시서화를 불 살랐던 고죽. 그 불길속에서 홀연히 솟아오르는 한 마리의 거대한 금시조. 금시벽해 향상도하. 정말 큰 울림을 주었던 명작입니다.
답글작성
0
0
2022.07.07 15:21:36
탐정들을 고용해서라도 방화범과 그 배후를 반드시 알아내기 바란다.
답글작성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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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5:19:11
전국민이 뜻을 모아 천원 이천원씩 모아도 충분할껀데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학작가에게 먼저 국민들이 손을 내밀어주는건 어떨런지..,,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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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3:55:28
걍,이천에서 편안하게 지내십시요. 이천군민의 바램입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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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2:20:36
방화인지 알 수 없지만, 방화는 살인과 같은 아주 죄질이 나쁜 범죄입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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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07.07 12:01:48
꿈이 꿈을꿀때가좋치~~ 고향 누구나아련한 기억속에있는데~~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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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1:59:03
그게 벌써 40년 전 이야기구만. 그때는 왜 그리 시위가 많았는지. 매케한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찌르던 녹음이 우거진 푸르른 5월이었지. ===>>>주로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게 이문열 작품들이다. 화자(話者)가 아득한 과거 일을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조인 거지. 이문열 작품들은 거의 다 그렇다. 이 틀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리고 그 틀에다가 소설속 인물과 스토리로 살을 붙인 거지. 예컨대 현대차가 똑같은 엔진을 쓰면서 자체 디자인만 약간씩 바꿔서 신차 출시하는 상술과 똑같다.
답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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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1:51:08
언 놈이 그랬는지. 찾아내시길..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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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07.07 10:53:55
0 수래...... 0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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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1355] 이문열의 불에 탄 집
입력 2022.07.11
갈암 이현일(1627~1704) 이후로 재령 이씨 집안에서 배출한 전국구 문사(文士)가 이문열이다. 철옹성의 노론들에게 단기필마로 나가서 정면 승부를 걸었던 인물이 갈암이다. 결과는 엄청난 고초였다. 노론들에게 명의죄인(名義罪人·죄명을 따질 것 없는 무조건 죄인)으로 찍혔다. 갈암 이후로 재령 이씨들은 약 200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고 춥고 배고픈 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그 배고픔과 고독의 한이 뭉친 동네가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이다. 이문열의 고향이자 재령 이씨의 집성촌이다.
두들마을은 풍수적으로 볼 때 흥미로운 지형이다. 우선 동네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아래서 볼 때는 위로 올려다보아야 하는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상을 품고 있는 터라는 인상을 풍겼다. 양반들이 수백년 동안 살았던 동네들의 풍수를 살펴보면 각기 표정이 있고 개성이 다르다. 특히 동네 언덕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바위에 새겨 있는 ‘樂飢臺(낙기대)’라는 글씨도 나를 사로잡았던 기억이 있다. ‘배고픔을 낙으로 삼는 대(臺)라니. 이게 뭔 뜻이지?’ 나중에야 알았다. 갈암이 노론에게 대들었다가 그 보복으로 두들마을의 이씨들은 일체의 벼슬도 못 한 채로 200년 동안 배고픔을 견디고 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그 탄압과 고독의 한을 담담하게 견디자는 다짐이 ‘樂飢臺’라는 문구로 나타난 것 같다. 이것이 집권 여당으로부터 소외당한 채로 조선 후기를 살아야 했던 영남 남인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이 동네에는 300년쯤 된 오래된 상수리나무가 수십 그루 살아있다. 상수리나무는 뿌리가 깊이 내려가므로 가뭄에도 열매를 맺는다. 이 상수리 열매가 굶어 죽는 흉년에 구황 식품이 된다. 상수리 열매는 동네의 배고픈 사람들이 먹는 식량이었던 것이다. 갈암의 어머니인 장 부인(‘음식디미방’ 저자) 시대에 흉년을 대비하여 심어 놓은 나무라고 한다.
10여 년 전쯤인 것 같다. 이문열씨 형님의 안내로 이 동네의 ‘광산문학연구소’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아침 7시쯤 되었을까. 아침 식사 전에 문어를 살짝 데쳐서 빨간 초장과 함께 접시에 담아가지고 내가 자던 사랑채 방에 들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호남에는 없는 접빈객의 풍습이었다. 안동 일대에서 문어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풍습은 수백년간 내려오는 식문화이다. 이문열 작가가 인세 모아 지어 놓은 그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니 안타깝다. 나도 장성 축령산 휴휴산방에 불이 나 봐서 그 심정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