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함길도 감사가 아뢰기를,
‘길주 이북에 눈이 깊이 쌓이고 풀이 묻히어,
들에 놓은 소와 말이 태반이나 굶어 죽었사온데,
회령(會寧)ㆍ경원(慶源) 두 읍이 더욱 심하여
새로 옮겨 온 백성들의 농우(농사일에 부리는 소)와
전마(戰馬, 전쟁에 쓰는 말)가 거의 다 죽었습니다.
이에 각 고을이 피(볏과에 속한 한해살이풀)와 콩을 나눠주게 하고,
다방면으로 풀을 베어 먹이게 하고 있사오며,
또 새로 이사 온 백성들이 길을 통행하지 못하옵기에
설마(雪馬)를 타는 사람들을 시켜
쌀을 가지고 가서 이들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67권, 세종 17년(1435) 3월 12일 기록으로
함경도 회령과 경원에 눈이 많이 와
설마(雪馬)를 타는 사람들을 시켜 쌀을 가지고 가서
이들을 구제했다는 얘기입니다.
설마는 우리말로 하면 썰매로 이에 관한 첫 기록으로 보이지요.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우리나라 북쪽 지방에서 겨울이 되면
사냥에 설마를 이용하여 곰과 호랑이를 잡는다.”라고 나옵니다.
또 서유구(1764-1845)가 쓴 백과사전 《임원경제지》에는
“설마는 좌우에 두툼한 판자를 세우고
바닥이 둥글게 휘어지도록 깎아 미끄러지기 쉽게 하고,
앞뒤 끝부분이 위로 향하도록 한다.
좌우 판자의 간격은 2척(尺) 정도로 하고 가로대로 연결하는데,
가로대는 6, 7개 정도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설마는 조선시대의 건축공사에 널리 사용되었는데
17세기의 창경궁ㆍ창덕궁 재건공사를 기록한 《의궤서(儀軌書)》 가운데에도
물건을 나르는 도구로 설마가 등장하며,
18세기 말의 수원성곽(水原城郭) 공사에도 설마는 9틀이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의 설마는 이처럼 지금 아이들이
눈 위나 얼음판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노는 기구 썰매와는
모습이 조금 다른 우마차 같은 운송 수단이었습니다.
그 설마가 일제강점기 전차나 자동차 같은 운송 수단이 발달하자
자연스럽게 놀이기구로 변했을 것입니다.
▲ 김준근의 <기산풍속화첩> 가운데
‘설매꾼(썰매를 타고 짐승을 잡는 사냥꾼)’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