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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신.자.표.시.제.한.
-Written by.쪼꼬매.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정확하게 몇 년도, 몇 월, 몇 일이었는지, 그리고 정확하게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미치도록 머리속에서 지워내려 노력했던 당시의 내 노력 때문일수도 있었겠지만, 그 때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모든 걸 잊어버렸다는게 더 자연스러운 이유가 되어주리라.
그래, 그 날에 관해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덮어두려 하는건지, 아니면 마음 속 상처를 더욱 시리게 하기 위해서였는지, 그저 마냥 새하얀 눈이 잿빛 하늘속에서 떨어지던 날이었다.
마치, 결코 멈출 수 없던 내 눈물을 대신하던 것 처럼.
그 날을 떠올리면, 내게는 눈물되어 내 얼굴로 떨어지던, 수많은 눈송이들밖에 생각나질 않는다.
- Rrrrrrrrrr.
갑자기 그 때의 일이 왜 생각난건지는 나도 모를일이다.
아니,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당시로서의 내게 남아있는 기억은, 결국 지금 창밖에 내리는 것처럼 새하얀 눈밖에 남아있질 않았으니까.
그저 눈만 바라봐도 몸 안에 독소가 퍼져나가듯이, 그 날의 악몽이 스물스물, 내 머릿속을 집어삼켜왔다.
한숨과 함께 창가에서 시선을 뗀 후 일요일이라는 시간적 무료함에 쇼파에 기대앉았다.
라운드 테이블에 올려진 블랙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조심스럽게 입술에 갖다대자, 뿌옇게 흐려지는 안경과 함께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입 안 전체로 고르게 퍼져나갔다.
` 젠장……. `
하얗게 김이 서려 이제는 앞도 보이질 않게 된 안경을 쇼파위로 집어던지며 나도 모르게 짜증이 튀어나왔다.
건조하고 메마른 음성.
그래, 녀석은 쓴 맛을 싫어했다.
블랙커피는 녀석과 함께 있는 그 숱한 나날동안 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항상 어떤식으로든 일방적이었던 그 녀석의 입맛에 맞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마일드 카푸치노를 즐기던 우리였으니까.
` 쓴 건 싫어. 차라리 카푸치노를 먹어라.
오래도록 입 안에 단맛이 남으니까 더 기분좋아, 그러니까 너도 마일드 먹어. `
그런 녀석 덕분에 마일드 카푸치노의 단맛에 완벽하게 적응해버린 나였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언제나처럼 일방적이었던 녀석과의 이별후로 난 다시 블랙커피만을 마셨다.
…….
근데……. 근데, 왜…….
여태 잘 견뎌왔으면서!!
녀석이 내 곁을 떠난 이후로 필사적으로 마셔왔던 블랙커피였으면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쓴 거야!
희미하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지만서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마일드 카푸치노의 달콤한 향이 내 모든 사고회로를 헤집어놓았다.
이럴 순 없어……, 어떻게 해서 잊었는데…….
그동안 얼마나 죽을듯이 아파하면서 내 가슴속에서 지워버린 녀석인데!
" 왜 또 다시 날 괴롭히는거야!!! "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날 외면한 채 소리없이 내리는 눈때문에, 끊임없이 날 둘러싸는 마일드 카푸치노의 향 때문에…….
그리고 다 잊었다고 굳게 믿었지만 다시 희미하게 떠오르는 녀석의 얼굴때문에…….
격해오는 감정에 손에 조심스레 들고 있던 머그컵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결국엔 죽은듯이 하얗기만한 도시의 전경을 비추고 있는 거실의 창문을 향해 컵을 세차게 던졌다.
쨍그랑-
정막속에 날카로운 파괴음이 들려왔고, 그 소리에 오히려 내가 놀라서 정신을 가다듬었을 땐 창문에 부딪혀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거실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이미 녀석을 완전히 상기시켜버린 난 깨어진 유리가 발을 파고들어 붉디 붉은 피를 고여내도 미친듯이 거실창문을 쪽으로 달려가 온 힘을 다해 창문을 두드렸다.
제발……. 제발 멈춰줘……. 더이상 생각나지 않게 제발 멈춰줘!!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과 원한에 결국엔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눈 내리는 세상은 여기, 내가 있는 곳과 단절된 곳이었다.
제 풀에 지쳐서 창문에 기대 스르르 주저앉으면 그제서야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내가 정말 녀석을 사랑하긴 했구나…….
-Rrrrrrr.
무시하려했지만 계속해서 전화가 울려오자,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유리가 박힌 발이 아파왔다. 절뚝거리면서 쇼파로 다가가 대충 던져놓은 코트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
다시 한번 세상이 멈춰버린 순간.
세상의 모든것이 멈춘 가운데 살아있는 것은 녀석을 떠올리게 해 준, 투명함 속에 잔인함을 감춘 저 눈송이와 그리고 이 전화 한통뿐이였다.
순간 머리를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굳었다고 다짐했던 심장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고, 말랐던 눈물샘이 넘쳐 흐르는 와중에 핸드폰은 계속 내 손안에서 울려댔다.
-Rrrrrrr.
오래전에, 날 끝없는 슬픔의 수렁속에 빠져들게 했던 그 이름으로-.
발.신.자.표.시.제.한.
※.
뽀드득-
사람이 없는 거리에서 이제는 꽤나 쌓인 눈이 발밑에서 부서져내렸다.
손이 시려오면 이따금씩, 조심스럽게 수원이의 커다란 손이 무덤덤하게 꽂혀있는 주머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보았다.
3년이 조금 넘었다, 우리가 연인이란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된지도 어느새.
그 천 일이 약간 넘는 시간동안 함께 해왔으면서 조심스러울게 뭐가 있겠느냐고 하지만, 우린 조금 남달랐다.
항상 어느 한 쪽이 확실하면, 다른 한 쪽은 불안한 관계였다.
모든 것이 일방적인 수원이의 연애방식에 내 방식이 불완전했었다던가, 수원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내 마음에 비해 수원이의 마음은 아직도 불확신한다던가.
우리는 그런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관계여도 좋았다.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웃는것도, 먹는것도, 말투 하나하나에-
수원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일방적인 그에게 맞춰나갔다.
하지만 오늘처럼 조금은 어리광을 부려보고 싶은 날이면, 내심 걱정하면서도 정형화된 관계를 살짝 비틀려보곤 했었다.
" 추워? "
" 어? 아니……, 응. 조금 추워. "
아주 작은 스킨쉽도 싫어했는데 오늘은 왠지 따듯하게, 좁은 주머니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내 손을 잡아주는 수원이였다.
덕분에 내가 오히려 놀라서 멍하게 있자, 반대편 손으로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세상을 덮고 있는 하얀 눈마저도 모두 녹여버릴 듯한 아주 따듯한 미소까지.
미처 다물지 못한 입사이로 입김이 새어나오자, 많이 추운가보네, 라면서 수원이는 내 손을 주머니 더욱 깊은 곳으로 잡아끌었다.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다.
나이에 비해서 꽤나 심각한 생각도 많이 하고, 그래서 다소 냉소적으로 보이는 수원이였지만, 그런 모습이 좋았다.
나에게까지 차가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모습이 좋았고, 그래서 힘들었지만 그런것마저도 좋았다.
특히 오늘처럼, 벌써 한참전에 다른 사람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을 -이제는 새로운 눈이 쌓여 희미해져가지만- 따라 다시 내 발자국으로 새롭게 그리며 수원이와 길을 걷는다던지, 드물게 손을 잡는다던지.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수원이와 사귀면서 힘든 점들은 금새 잊혀질 수 있었다.
" 콜록,콜록- "
" 감기……, 언제 낫는거야? "
" 몰라, 곧 낫겠지. "
" 약은 먹어? "
" 남자새끼가 약은 무슨. "
" 그래도, 벌써 기침한지도 몇 달 된 것 같고……. "
" 신경쓰지마. "
겨울은 해가 금방 떨어졌다.
생각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우리 집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때에는 달조차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가로등의 불빛에 비친 모습들만이 내가 볼수 있는 전부였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은, 아직도, 게다가 눈송이도 더욱 굵어져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날이였다. 마치,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감추기라도 하는 듯이.
심지어 우리의 숨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그런 적막 가운데 가만히, 다소 쇳소리도 섞여있는 수원이의 기침소리가 메아리져 퍼져나갔다.
걱정이 되서 시무룩하게 바라봐도, 시선을 피하고, 신경을 쓰지 말라던 녀석.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아직도, 이 정도만큼도 수원이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건가…….
괜찮아. 원래 남자들은 약한 모습같은거, 보여주려고 하지 않잖아…….
혼자서 조그맣게 위로해보며 하- 하고 한숨을 뱉어보았다.
하얗게 뿜어져나오는 입김에 내리던 눈이 닿았는지, 점차 작아지던 눈송이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고개를 들어 수원이를 다시 바라보니, 아직 잔기침을 하고 있었다.
왜……, 나에게는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걸까…….
나 혼자 사랑해온 듯한 3년의 시간이……, 아직 수원이의 완전한 사랑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탓일까…….
항상 그랬듯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과 혼자서 느끼는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수원이의 손을 다시 꽉 잡았다.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또 다시 내 손을 꽉 잡아주는 따듯하고 커다란 손.
" 연하야……. "
" 응? "
" 최연하……. 새삼 느끼지만 이름 예쁘네. 최연하……. "
" 뭐야……. "
" 힘들지않아? 나랑 사귀는거. "
일 분, 일 초라도 더 함께 하고픈 내 마음과는 달리 어느새 집 앞에 다다르자 아까까지만해도, 그래도 섭섭했으면서 아쉬운 마음이 더 커졌다.
또 평소처럼 인사만 하고 돌아서겠지…….
그럴진 의문이지만, 그래도 혹시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먼저 수원이의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러자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끌어당기곤 날 꽉 끌어안은 수원이였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자근자근한 숨소리에, 그리고 얼었던 몸을 녹아내릴듯한 황홀경으로 데려가는 수원이의 따듯한 체온에 멍해있는 사이로 수원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그 목소리에, 말투에, 다시 불안해져오는 심장에 수원이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 살짝 밀어내려고 하자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살짝 힘을 주어 날 놓아주지 않는 수원이였다.
……힘드냐고.
그런 질문이,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해주진 않잖아…….
게다가 난, 힘든것도, 그 이유가 너라면 그것마저도 좋은데……, 힘드냐고.
무엇을 계획하고 뱉은 질문인지, 도저히 종잡을수가 없는 불안함에 살짝 손끝이 떨려왔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작은 눈송이가 내 눈꺼풀을 덮었고, 난 두눈을 꼭 감았다.
눈이 녹은 걸거야, 지금 내 볼에 흐르는 무언가는.
" 하나도……, 안힘들어. "
" 거짓말. "
" 넌……, 힘드니? "
" 아니. "
" 근데 갑자기 불안하게 왜 그래……. "
장난치는건가……. 아니면 이제라도 잘해주려는건가, 솔직히 그건 필요없는데.
떨리는 손끝을 진정시킬 방법이 없어서 두 손으로 수원이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잠시 오고가는 말이 없는 정적 속에서, 내 귓가에 들리는 건 수원이의 심장소리 뿐이였다.
근데, 나와는 달리 오히려 너무나 차분해서……, 그래서 점점 더 용기가 없어져만갔다.
설마, 아닐거야. 여태 아무일없이 잘 견뎌왔잖아.
미치도록 불안했었지만, 나 혼자 사랑한 시간이였을수도 있지만, 그래도……, 잠시라도 행복한 적은 있었을거잖아.
이런 와중에서도 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더 귀찮아하고, 정말, 그럴일 없길 바라지만, 날 떠나게 될까봐.
그래서 끊임없이 다시 저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눈물도 숨겼다.
" 항상 나때문에 불안하고, 가슴아파하고, 울고, 힘들어하잖아. 난 너 나때문에 그러는 거 싫어. "
" 그런 적 없어. "
" 그러니까 힘들면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해 "
결국엔…….
궁극의 불안이 드러나게 됬구나, 결국엔.
헤어지자는 말에 맥이 풀려서 잠시 몸이 휘청거렸다.
그런 내 몸을 지탱해주면서도 수원이는 장난이였다는, 거짓말이였다는 말은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할 뿐이였다.
내 대답을.
바보……. 내 대답은 뻔할 걸 알면서 뭘 기다리는거야.
내가, 내가 어떻게 너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해……. 죽기보다 힘든 일을……, 왜 나한테 떠넘기는거야.
" ……사랑하잖아. "
" 사랑하는데 왜 힘들어해 "
" 하나도 안 힘들다구! 난 너만 있으면 돼! 이런게 날 힘들게 하는거야……. "
" 언젠가는……. 언젠가는 헤어졌을거잖아. "
그제서야 수원이는 날 놓아주었다.
품에서 빠져나와 흐르는 눈물에 뿌연 시야사이로 수원이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말투만큼이나, 그 고요했던 심장박동만큼이나, 아무런 감정없는 표정이었다.
가슴아파하고, 울고, 매달리고, 구차해지는 쪽은 나뿐이었다.
언젠가는…… 헤어졌을거라고.
마치 헤어짐을 기다렸다는듯한 그 말투에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 녀석은……. 언제나 일방적이었던 녀석은 말 한마디 없이, 어떤 사인도 주지않고 이렇게 혼자서 이별준비를 해왔던거구나.
가끔 몇 년씩이나 함께 해왔으면서 헤어지는 연인들을 보면서 궁금했었던 적이 있었다.
도대체, 저들이 헤어지는 이유는 뭘까.
이젠 옆에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정들었을텐데 왜 헤어지는걸까, 어쩌다가 저기까지 가게 되는걸까.
그런 상황이 내게 닥친 지금, 난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정확한 이유가 뭘까.
하지만 한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준비된 이별이었다는 것.
" 눈……. 감아볼래? "
알고 지내온 시간동안에 제일 달콤한 목소리였다.
내 머리를 달래듯이 쓰다듬으며, 수원이는 조심스럽게 긴 손가락 끝으로 내 두 눈을 가렸다.
붙잡고 싶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일것 같아서.
두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붙잡고 싶다는 생각만이 마음속에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이끄는대로 따라가자, 라고 생각하며 이번엔 내쪽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지막 순간에서도 녀석을 믿고 따라가주는게, 내 진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길일거야.
혹은 내가 너무 불쌍해보여서……. 이제라도 장난이였다고 해줄지도 몰라.
두 눈을 감자 마음속에서 눈이 내리는게 보였다.
심장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다.
" 난……, 나 장수원은 최연하한테 아주, 많이 미안해. 미안했고, 미안하고, 미안할거야. 아마 죽을때까지…….
내가 많이 잘해주지 못해서 힘들어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일부러 그랬어.
운명인가봐. 너랑 나는. 미안하지만 헤어질 운명.
그래서 결국에야 오늘 헤어질 때, 힘들지 않게하려고 일부러 죽을만큼 사랑하지 않으려고 힘들게했어.
사실 더 빨리 헤어질 수도 있었지만, 나도 내가……. "
뒤에 이어질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눈물만 흐르던 내 얼굴에 무언가가 또다른 따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마, 코, 그리고 입술에서 조금 더 오래…….
당장에 일어나는 일을 자각하는 것 말고는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바보같이 울면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입맞춤이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눈이 내렸다.
" 눈 뜨지 말고, 내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있어줘 "
" ……난 너 보낸다고 안했는데, 갈거야? "
" 누구나 뒷모습은 쓸쓸해. 난 그런 모습 보여주기 싫다. 눈 꽉 감아 "
" 수원아……. "
" 안녕 "
입술이 떨어지고, 목소리가 멀어지며, 다시 뽀드득, 눈이 부서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뜰수도 있었고, 달려가서 붙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저 수원이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난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너무 절대적이라서, 네 존재가 하나님보다 커서…… 눈을 감아달라는 네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소리도 죽이고 수원이의 멀어져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거야. 다시 돌아와줄거야……. 제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들리는 건 오직 눈 내리는 소리뿐이였다.
마음에도, 가슴속에도, 머릿속에도 오직 눈이 내리는 소리뿐이었다.
아마, 그렇게 밤을 새웠나보다. 다음 날, 집 앞에 주저앉아 눈을 꽉 감고있기만 하는 날 엄마가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서 물었었다.
도대체 뭐 하는거냐고, 얼어죽기전에 들어가자고.
하지만 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또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에 대답했다.
` 수원이가 자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 눈 뜨랬는데……. 어떡해.
아직도 내 옆에 있는 것 같아. 사라지지가 ……, 않아. `
※.
-Rrrrrrrrrr.
벌써 녀석과 헤어진지도 일 년……. 그 이후로 내 삶에는 여러 변화가 일어났었다.
무언가에 열중해야만 녀석을 지울 수 있다는 생각에 회사에 취직해서 미친듯이 일에만 열중하고, 그런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혼자 살 아파트를 얻었다.
잠시라도 날 가만두지 않기 위해서 여러방면의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는 모두 연락을 끊었다.
혹시라도, 수원이랑은 아직도 연락해?, 라는 질문을 통해 녀석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될까봐.
그러면 분명히……. 여태까지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테니까.
내 마음에 눈이 내린 이후로, 단 한번도, 꽃이 핀 적은 없다. 마치 만년설처럼, 녹아내릴 줄을 몰랐다, 내 마음속의 눈은.
딱히 다뤄야 할 사항들도 없었지만, 생각할 것 마저도 사라지는 고즈넉한 밤에 책상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달칵거렸다.
무엇을 쓰는지도 모르고 그저 타자기만을 두드렸고, 이따금씩 입술이 말라오면 옆에 놓여있는 블랙커피를 마셨다.
-Rrrrrr.
" 여보세요 "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침대위에 대충 던져놓은 코트에서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와 확인을 해보니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알아서 끊겠지, 하고 무시하려고 다시 책상에 앉았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꼭 받아야 한다고, 날 애타게 부르는 것 같아서 잠시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액정에 떠있는 발신자표시제한이라는 문구,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해져 왔다.
결국엔 전화를 받았고, 말을 하기 전엔 블랙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여보세요-.
단순한 한 마디였지만, 굳이 일 년 전과 비교를 해보자면 무언가가 모자라다.
마치 생명이 없는 기계처럼.
- …….
" 여보세요 "
- …….
전화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세 번, 네 번 계속해서 불러보았지만 역시나 말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 이런 장난전화를…….
머릿속에서는 상대방을 욕하며 불필요한 전화는 빨리 끊고 다시 일에 집중하라고 명령했지만, 무언가가, 내가 이상했다.
일 년 전, 밤을 새면서 녀석을 기다리며 울 던 날 이후로 메말랐을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녀석과의 이별 이후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심장박동소리가 가슴 깊이에서부터 들려왔다.
상대방도, 나도 아무말은 없었지만……,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 잠깐만 기다려요 "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을 했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 베란다 쪽으로 달려 나갔다.
문을 열자 바깥의 찬바람이 확 느껴져 온 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카디건을 여미거나 할 겨를이 없었다.
…….
그토록 노력하며 잊어왔던 과거, 사람, …… 그리고 사랑.
맑을 하루일 거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달빛에 반짝이는 눈송이들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세상을 덮어버릴 듯이, 아주 고요하면서도 잔인하게. 녀석과 헤어진 이후로 처음 맞이하는 첫눈.
몸에 힘이 풀려서 벽에 기대섰다.
" ……너야? "
- …….
" 너니?……. "
- …….
" 응? 제발,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대답이라도 해줄래? 장 수원……, 수원이 맞아? 응? "
울먹이는 소리에 오히려 그 쪽이 내 말을 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전화기를 향해 말했다.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들리는 건 ` 삐- ` 라는 버튼소리였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탁 막혀오는 가슴에 숨 쉬기가 힘들어서 죽는 줄로도 알았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미친 듯이 뛰어오는 심장에,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눈물에 전화기를 꽉 붙들었다.
이럴 순 없는 거잖아!! 너를 잊기 위해서 여태껏 미치도록 죽은 듯이 살아온 나였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다시 나타나면…….
내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단 말이야…….
내뱉어지는 한숨이었지만,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녀석을 사랑한 마음이 아직은 있었나 보다.
" …… 나쁜 새끼. 그렇게 순순히 너라고 인정할거면 번호는 왜 숨겨. "
- …….
" 잘……, 지냈어? "
` 삐- `
마음 같아서는 욕도 하고 싶었고, 소리도 지르고 싶었고, 여태까지 힘들었던 모든 걸 다 뱉어내고도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바보같이 녀석을 먼저 챙기고 있는 나였다.
녀석임을 알고 난 이후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 감기는 다 나앗으려나 `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전화너머에서 다시 들려오는 버튼소리에 그래도 안심이 되서, 정말 오랜만에 미소가 지어졌다.
수원인……, 녀석은 아직도 이렇게 일방적이구나.
그래도 감사했다. 죽은 줄 알았으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걸 깨닫게 해줬으니까.
아직은 내 심장이 뛰고 있으니까.
" 나 버리고 가더니, 예쁜 여자 만났냐? "
- …….
" 바보같이……. 역시 나만한 여자가 없지? "
` 삐- `
혹시 길을 걷다가 우연히 수원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봤던 적이 있었다.
어색할까, 아니면 친구처럼 대할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하지만 지금 이렇게 전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 - 녀석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게 떠오르자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답은 아무것도 아니였어.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그것이었어.
그제야 밖에 내리고 있는 눈이 아름답게 보였다. 내 상처를 덮어주려는 듯도 보였다.
하지만 이제와서, 녀석이 걸어준 전화 한통에 내 모든 희망을 걸어도 되는 걸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 나……, 보고 싶어? "
` 삐- `
" 나랑 헤어지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았어? "
- …….
" 난 죽는 줄 알았어……. 너도 그랬니? "
` 삐- `
" 지금은 "
` 삐- `
" ……사랑해? "
일방적인 녀석과 그걸 맞춰줄 수밖에 없었던 나, 우리의 모습.
그런 정형화 된 틀을 깨트려버린 것이다. 여태 마음속에서만 묻혀왔던 말들을 꺼냄으로서 우리의 틀은 깨져버렸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 이후로 녀석에게 또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다.
단 한번이라도, ` 발신자표시제한 `으로 된 전화는 올 줄을 몰랐다.
잠시 수원이의 존재로 미쳐있었던 게 틀림없다.
눈은, 잔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
다 잊어왔던 걸, 겨우 아픈 상처를 삭혔었던 걸 다시 끄집어낸 게 그 전화였다.
괜찮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전화가 없었다면 정말 완전히 잊어버렸을 수도 있었는데……. 녀석으로부터의 전화가 내게 가져다 준건 더욱 힘들어진 수행뿐이었다. 녀석을 잊기 위한.
그런데……, 그 일이 있고난 후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전화가 온 것이다.
발신자표시제한…….
그 날처럼, 심장박동이 빨라져왔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내 손도 갈피를 못잡고 마구 떨리기만 했다.
이것도, 이 전화도……. 수원이인 걸까. 녀석도 어쩌면 아직 날 잊지 못하고 있던 걸까.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달콤한 마일드 카푸치노의 향기가 흘러들어왔다.
그래, 오늘따라 블랙커피가 썼던 건……, 미치도록 잊으려 노력했던 그 날이 떠올랐던 건, 녀석이 다시 생각나게 된 건…….
이 전화를 예감해서 그런지도 몰라.
" 장수원!!!! "
녀석이라고 확신해버렸다. 그리고 자꾸 헛짚는 손으로 플립을 열어 다짜고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전화너머에서 들려올 대답을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번에도 목소리를 못 들어도 괜찮아, 버튼소리여도 괜찮아!
그냥……. 그게 너이면 되……. 그럼 괜찮아질 것 같아.
하지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이 익지 않은 여자의 물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 맞나보네……. 최 연하 씨, 맞으시죠?
" ……아, 죄송합니다. 네, 제가 최 연하 맞는데요. "
- 저, 갑작스러워서 죄송하지만, 수원오빠 동생이거든요.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 연하 씨가 누구보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어제…… 죽었어요.
폐결핵이래요. 아마 연하 씨랑 만나는 도중에도 본인은 알았을 거에요.
저한테 말해준 적이 있거든요. 헤어질 걸 뻔히 아는데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어떡하면 좋냐고.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아마 연하 씨를 두고 한 말이었나 봐요.
자기는 죄를 지었대요. 그래서 죽는 거래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연하 씨 나중에 힘들 거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정말 죽기 전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대요. 사랑한단 말도 하고 싶었대요.
근데 연하씨 너무 착한 여자라서, 그러면 또 자기 때문에 울 거 뻔히 안다면서…….
맨날 전화기만 만지작거렸어요. 발신번호 숨겼으면서……, 그래도 용기 못 내고 항상 통화만 누르고 바로 끊던 오빠였어요.
여자는 미처 다 말을 잊지 못했고, 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도대체…….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수원이가 죽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디 있어! ……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냐구…….
녀석은 또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나를 완전히 떠나버렸다. 다시 되찾은 우리의 관계. 정형화된 틀.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와서 전화기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바닥을 기어가 깨어진 머그잔 조각을 꽉 쥐었다.
이제……, 이제 싫어. 혼자 아파하고, 혼자 사랑하고, 혼자 남겨지는 건……, 이제 싫어.
‘난……, 나 장수원은 최 연하한테 아주, 많이 미안해. 미안했고, 미안하고, 미안할거야. 아마 죽을 때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거야…….
미안할 거 뻔히 알면서, 언제까지 기다리고 아프게 할거냐구.
‘최연하……. 새삼 느끼지만 이름 예쁘네. 최연하…….’
두 눈을 꽉 감고, 유리조각을 손목에 갖다 대었다.
사랑한다고 그랬으니까, 내가 따라가면, 화 안내고 안아 줄거야, 웃어 줄거야…….
어차피 녀석 없이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 였으니까.
`그래서 결국에야 오늘 헤어질 때, 힘들지 않게하려고 일부러 죽을만큼 사랑하지 않으려고 힘들게했어.`
잠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비릿한 피비린내도 났던 것 같다.
두 눈을 감고, 여태 아프기만 했었던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드디어…….
수원일 따라가려는 지금.
눈이……. 그쳤습니다.
첫댓글 슬프네요ㅠㅠ 잘 읽고가요 정말 예쁜 글이네요...
신경 많이 쓰신거 같아요 모든 전반적인 부분에서, 그래서 마지막 대사에 숨이 탁 막힌다고 해야하나요? 아찔하네요. 정말 잘 쓰시는거 같아요. 다음 작품도 많이 기대할게요.
오 나 집에와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컴퓨터 켰더니 인터넷되드라! 로컬영역 연결? 하여튼 뭐이런 창 떠있구ㅋㅋㅋㅋㅋ 그래서 인소닷 들어왔지. 나 막 하나 하나씩 사소한 거 가지고 비평(이 아니라 비판 수준이지ㅠㅠ)해도 그래도 진짜 잘썼어. 처음 썼는데 이 정도면 앞으로도 나날이 발전하는 쪼꼬매님 되겠져?_ !ㅋㅋㅋㅋㅋ 기대할께:)♡
이잉자기:)♡ 공부말고, 인터넷 키면 딴거 하느라 바쁠텐데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날 위해 여기까지 찾아와줘서 너무 고마워 ㅠㅠ 너도 빨리 쓰길 바래 ㅋㅋㅋㅋㅋ 쫍쫍, 어쨌든 알랑♡
슬퍼요.. ㅜㅜ 사실, 기침 부분에서 이런 결말 살짝 예상은 했었지만.. 지루함도 못 느꼈고, 마지막 장면이 정말.. 위에 님 말씀처럼 아찔해요.. ^^ 님 글솜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ㅜㅜ 정말 멋있어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