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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3a 울산강의-창세기49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창세기 49장.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했는데 여기 28절에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이렇게 돼있지요. 49장에 보면,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후일에 당할 일이란 예언이 있죠. 예언한다 해놓고 28절에 보니까 “그들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복’이라 하는 것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그 복을 우리가 ‘이런 복 주세요, 저런 복 달라’고 할 수 없어요. ‘복 주세요’는 되는데 그 복의 내용에 관해서는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은 복인 줄 아시고, 그 복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게 무슨 복이냐’라고 짜증을 내지 마세요.
하나님이 복이라고 주시면 우리가 새삼스럽게 그걸 ‘이건 복답다, 이건 복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따질 입장이 못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은 그냥 그대로 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복의 내용이 뭐냐 하면, 49장에 보니까 ‘장차 그들에게 일어날 당할 일이다’ 이 말이죠.
이 두 가지를 정리해보면 이런 감이 오지요.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그것을 열두 지파 아들을 통해서 일하심,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복이 된다 이 말이죠. ‘내가 너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너희를 사용하여서 내가 세상만방에 알리겠다.’ 그게 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림을 하나 그리면, 여기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있다면, 열두 지파 속에 하나님의 복이 담기죠. 이걸 빨간 걸로 그리겠습니다. 복의 분량은 다 다르죠. 내용이 다 다르죠. 이 복이 이렇게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복이 담겨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에 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되면 이 복을 받게 되고, 만약에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되면 이 받은 복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저주가 주어지는 복이 있어요. ‘건드리면 맞는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건드리면 그러니까 저주받는 그런 식의 성질의 복이 성도 안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를 건드리면 저쪽엔 저주가 오게 돼있어요. 건드리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그렇게 때문에 복의 내용이 뭐냐 하면, 복과 저주를 확산시키는 그러한 내용이 이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위에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열두 지파에게 나눠준 게 있어요. 빨간 걸로 돼있지요. 복인데 이 복의 내용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걸 무시하고 저주하면 저주하게 돼있고, ‘야 저게 바로 하나님의 본 뜻이구나. 하나님 뜻이 저런 거구나’ 하고 동의하면 그들도 같이 빨간 복을 받게 돼있습니다.
오늘 할 49장이 무슨 내용이냐 하면, 복을 지금 아버지가 주거든요. 아버지 야곱 전체가 하늘의 복으로 돼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야곱이 축복을 하게 되면 열두 개의 야곱이 되는 겁니다. 열두 개의 야곱, 야곱 하나가 열둘로 확산되고 야곱입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된 이유가 계속 야곱이 그 야곱이 되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야곱이나, 이스라엘이나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자기 인생 자기 마음대로 못 사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못 살고 주님께서 주신 미래에 당할 복의 내용대로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야곱이 받은 복을 열두 지파가 받았기 때문에 야곱이 받은 복대로만 생겨난 것이 이스라엘이란 국가입니다. 그래서 이걸 더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야곱이 축복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곧 ‘야곱이 새끼를 깐다.’ 또는 ‘야곱이 야곱을 만든다.’ 사실은 하나님이 만들죠. 하나님이 한 사람의 야곱을 가지고 열두 개의 야곱을 만드는 거예요. 손오공이 머리털 하나 뽑아서 훅 불면 똑같은 손오공이 무수히 나오죠.
하나님의 복은 뭐냐 하면, 야곱을 새끼치기, 야곱 같은 사람들을 퍼뜨리기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이스라엘 지파 같으면 그 사람들 역시 뭡니까? 동일한 복을 받기 때문에 그들도 이스라엘에 편입되겠죠.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걸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확정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야곱이 내려줬던 그 복이 이미 들어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게 뭐냐 하면, 복의 내용이 뭐냐? 다른 말로 하면 장차 이들은 어떤 인생을 사느냐? 장차 당할 일이니까. 하늘에서 주신 복 덩어리를 밑에 역사라는 발판 속에 얇게 깔아버리자. 밀가루 덩어리를 밑에 깔아버리죠. 깔아버리면 이게 역사가 되죠. 야곱에 준 복이 굴러굴러 가면 나중에 이 복이 성취가 되면 역사는 끝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여기 굴러가는 이것이 복이니까 붉은 복이 계속 굴러가는 거죠. 이 복이 굴러가면 여기서 다른 사람의 평가는 뭡니까? 복과 저주가 계속 바깥으로 발산되는 거죠. 하나님이 야곱에 준 복이 그 내용이 단순히 자기들 식구만 좋으라고 한 복이 아니고, 인류의 모든 역사의 흥망을 관통하면서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겁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죠. “너를 축복 자에게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받으리라”라는 말을 우리가 듣게 되면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우리가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도 받습니까?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이래 돼야 돼요. ‘네가 뭔데? 아브라함, 지가 뭔데?’ 이러면 안 돼요. ‘아, 아브라함이 하늘로부터 인수인계 받은 게 있구나. 이제 아브라함이 그것을 나줘 줄 모양인데 나줘 줄 때 아브라함이 어떤 복을 가지고 나눠주느냐? 그게 궁금하다’ 이 말이죠.
오늘 본문 창세기 49장 들어가기 전에 이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우선 이 예언의 결과부터 말씀드릴게요. 열두 지파한테 이야기한 모든 축복의 내용의 결과가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3장에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 복은 뭐냐 하면, 잘 아는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복 받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요. 이게 야곱이 자기 열두 아들에게 새끼 치듯이 나눠줬던 그 열두 새끼들, 열두 야곱들, 열두 이스라엘들, 그들에게 담겼던 복의 내용의 결론이 뭐냐 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거다. 상당히 엉뚱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 창세기 49장에 보면 그런 내용이 전혀 없지요. 그러니까 이래 보시면 돼요. 여기 열두 지파 자리가 나와 있는데 지금 제가 복이 어떻게 성취되었느냐 중간과정은 전부다 생략하고 결론부터 이야기한 거예요. 49장에 처음 복 이야기하고 결론 이야기하고 엎어놓으면 이렇습니다. 점선으로 할게요. 안에 있는 복의 알맹이가 ‘믿음으로 의롭다’ 행함이 아닙니다. 이 내용과 여기 창세기 49장에 보면, 복 된 사람들, 열두 사람이 둘러 쌓여있죠. 그러면 이 열두 명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복이 굴러가는 역사를 통해서 빙빙 돌면서 결국 뭐로 골인한다는 말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이렇게 되겠지요. 아시겠습니까?
49장에 아버지한데 받은 당한 일이 결국은 소용돌이치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누구를 믿을 것이냐? 어떻게 믿을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런 문제가 나온다 말이죠.
지금 창세기 49장의 주석들 보면 이런 내용들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전혀 이 사람들은 정답을 몰라요. 지금까지 나온 주석들 보게 되면 창세기 49장의 예언을 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풀어야 풀리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어려워요. ‘믿음으로 의롭다’ 할 때에 누구를 믿을 것인가? 자기를 믿는 건 아니죠. 그건 행함이니까. 믿는 게 아니니까. ‘보이지 않는 누구를 믿을 것이냐’ 하는 그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이야기한 앞으로 내가 너희에게 일어날 일을 하겠다 야곱이 하는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3장에 결론부분과 중간에 연결시켜 보면, 어떤 결론이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 여기는 누굴 믿으라 합니까? 예수를 믿어라. 그게 복음이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자. 이게 갈라디아서 3장이라면,
야곱의 창세기 49장은 중간에 무슨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우리도 예수 믿을래’ 이게 아니라 전쟁이야기 나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이 딜레마에 빠지는 거예요. 창세기 49장에 축복은, 보통 교회에서 축복하면 개인적으로 챙기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미리 짐작하고 있는 축복, 하나님의 축복은 이런 거다.
사람의 축복에 두 종류가 있어요. 내가 원하는 걸 축복이라고 이야기하고, 성경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축복인데 둘 중에 어느 게 정답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축복이잖아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축복이라 하는 것은, 이걸 믿지 않으면 저쪽에 저주가 내려줄 수 있는 게 축복이에요.
‘난 이것 기도해서 이번에 아 장가보낸다’ 할 때 이것이 축복이 아닌 이유는, ‘아들 딴 데 장가가라 해라’ 이런다고 그 사람이 저주 받습니까? 아니지요. 상대방이 안 믿을 경우엔 저주가 주어지는 내용만 축복입니다. 분명히 아셔야 돼요. 나에게 어떤 주어진 그것이 하나님께서 온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경우에 반드시 저주가 주어지는 내용이 되어야 이쪽에 축복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축복은 반드시 저주와 쌍을 이룹니다. 저주 없는 축복은 없어요. 한쪽이 축복 받으면 반드시 저주를 받는 쪽이 있기 때문에 내 쪽이 축복을 받을 거예요. 새순교회가 구원받는다면 다른 교회는 반드시 지옥을 가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너무 복음적으로 사시면 다른 교회들이 죽어요. 저주를 받습니다. 반드시 연결되게 돼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지금 자기 개인적인 욕심으로 원하는 걸 가지고 축복으로 여기기 때문에 남한테 자랑하고 싶은 것 있잖아요. ‘나 하나님께 이것 받았다. 약 오르지.’ 그것 자랑하고 싶어서 축복이라 하는데, 그것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뭡니까? 해답 나왔네요. 야곱이란 인간이 갖고 있던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갖고 있던 자기 나름대로의 축복이라는 그것이 축복이 아니면 저주거리가 된다는 것을 내부적으로 싸워야 할 필요성이 있는 그 전쟁이 바로 이스라엘이 가야 될 전쟁입니다. 너무 길다. 어렵지 싶다. 쉽게 합시다.
이스라엘이 장차 예수님처럼 되려면 내부 조정이 일어나야 돼요. 어떤 조정?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저 내 안에는 예수님의 뜻, 하나님의 뜻만 남게 하옵소서’라는 내부 조정이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야 되겠죠. 왜? 그래야 하나님의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써 반듯하게 설 수 있는 진짜 이스라엘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오늘 49장에 쭉 보면, 예를 들어봅시다. 3절에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끊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렵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그 다음에 7절에 보면,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것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 족속에게 저주를 내리고 비난한 겁니다.
이렇게 할 때 백이면 백 이 본문을 본 사람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고, 아버지 니는 잘했나? 세상에 자식한테 저주가 뭐고? 자식이 잘못해도 다 용납해주고 용서해주는 게 아버지의 자세지, 그래 큰 아들이 나쁜 짓하고,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이 나쁜 짓했다고 해서 거기다 대놓고 자식을 저주 하는 그런 아비가, 그래 야곱 너는 잘했나?’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 생각이 들 때 이 본문해석자체가 전혀 되질 않는 거예요. ‘아버지, 지 꼬라지는 너나 잘하세요. 자기는 엉망이면서 아들 잘못했다고 그걸 저주하다니.’ 그런 예가 또 있지요. ‘노아, 자기는 술 먹고 아들이 얼레리꼴레리 했다고 저주해.’ 그런 경우 있잖아요.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너무나 자기 편의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야곱은 지금 내가 잘했기 때문에 축복을 하는 게 아닙니다.
참 어려운데 다시 해볼게요. 야곱 안에 빨간 복이 있지요. 그럼 이걸 어떻게 한다? 열두 개의 야곱을 만들죠. 빨간 걸 집어넣지요. 붕어빵 속에 앙꼬 있지요. 지금 야곱의 앙꼬를 집어넣는 게 축복이라 말이죠. 그럼 야곱의 앙꼬가 야곱의 선행입니까? 아니죠. 그럼 야곱의 착함입니까? 아니죠. 그럼 야곱이 노력하고 잘한 겁니까? 아니란 말이죠.
야곱 안에 들어있는 것은 야곱의 자기의 죄, 저주받을 것, 그 모든 것과 결합된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그 벌이 드러나면 자식들도 야곱의 속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되겠죠. 물려받아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 작용해서 이들을 야곱처럼 인간 만들어 나가죠. 그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복 받았잖아요. 복 받은 그 순간부터 우리는 남들은 모르지만 자신이 아는 하나님이 아시는 우리 죄를 발각되기 시작합니다. 그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남들은 그냥 지옥 갈 사람은 방치할 그런 것도 ‘이것도 죄구나’ 하고 낱낱이 들춰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알게 하는 복을 받게 하십니다. 벌써 결론 나오면 안 되는데.
갈라디아서에서 복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어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보통 아담의 의는 죄 안 짓는 게 의인데, 로마서 3장에서 말하는 의라 하는 것은, 의를 주고 또 주고, 또 주는 거예요. 바께스에 물 담아놓았는데 구정물이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맑은 물이 넘치고 넘치는데다가 또 넘치는 거예요.
우리는 염치가 있어서 죄 지은 것만 용서 받으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 정도로 멈추는 분이 아니에요. 용서받은 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우리 보고 마구 의를 뒤집어씌워버려요. 그것도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의를, 사람들이 어떻게 행할 수 없는 의를, 예수님만 행할 수 있는 의를 우리한테 폭설 갖다 붓듯이 소방수가 호스로 드라이아이스 퍼붓듯이 허옇게 눈사람을 만들어요. 그래서 나중에 미안해서 ‘왜 자꾸 주십니까?’ 이래요. 이게 내 의다. 내가 너에게 공짜로 의를 줌으로 말미암아 나도 의롭고, 너도 의롭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의를 나타내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의 인형이에요.
예를 들면 비타500이 있는데 비타500이 생각하기를 ‘나도 좀 하얗으면 좋겠다’ 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스키장에 쓰는 눈 만드는 기계 있잖아요. 그 제설기로 퍼붓는 거예요. 그러면 비타500이 나도 하얗다고 기분 좋잖아요. 계속 퍼부어보세요. 나중에 눈에 파묻히죠. 그때 비타500이 생각하기를 이 주어진 의는 내가 원했던 ‘나는 의인이 되고 싶어’ 나는 의인이 되고 싶어서 주어진 의가 아니고 이거는 내 소원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서 완전히 눈 속에 파묻히듯이 예수님의 의에 파묻히는 사람으로 날 갖고 노시는구나. 하나의 비바인형처럼.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얗게 눈송이 된 비타500이 가는 곳마다 누굴 자랑하겠습니까? 지는 하나님 의 속에 파묻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 퍼부어지는 로마서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고, 갈라디아서 3장 보면 그것은 오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그 내용입니다. 그렇게 풍성한 의가 되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가요. 천국이 만만한 곳이 아니에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부적인 전쟁이 일어나요. 그리고 내부적인 전쟁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남들 앞에 복의 기준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치루는 전쟁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그 전쟁은 어떻게 이뤄지느냐 하면, 외부적인 적들로 인해서 이뤄지는 겁니다. 외부적인 적들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다가 안 되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믿을 때, 하나님의 거룩을 믿을 때 그 의와 거룩으로 말미암아 적들이 물러가죠.
그럴 때 이스라엘은 뭐가 남습니까? 이번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의와 거룩이야말로 우리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런데 그 믿음과 의는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 ‘내 안에 누구 있다.’ 그걸 믿는 거예요.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다.
그래서 야곱이 주는 축복을 설명하는데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안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안에 사람들만 있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 문제. 새순교회에 교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새순교회에 교인들 가운데서 주님이 있다는 것을 새순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아느냐 그 문제입니다. 있으면 믿지요. 있으면 날 안 믿고 그분을 믿는데 그게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겁니다. 보통 어려운 문제 아니지요.
여러분 입체사진 봤습니까? 참 신기하죠. 제가 둘로 나눠보겠습니다. 보통 사진하고 입체사진. 보통 사진은 원판 보면 그냥 어떤 물체가 대상이 나와 있어요. 사람이 같으면 사람이, 화분 같으면 꽃이 있으면 꽃이 있죠. 꽃이나 동물이나 그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입체사진을 보면 원판이 얼룩덜룩하죠. 이렇게 보면 입체로 보이잖아요.
지금 창세기 49장의 내용을 왜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나 주석가들이 풀질 못하느냐 하면, 입체사진이기 때문에 그래요. 입체사진을 보통 사진처럼 풀려고 하니까 맞질 않아요. 여기 49장의 내용이 아무리 성경 뒤져봐도 뒤의 내용이 여기에 부합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주석하는 사람들이 그냥 얼버무릴 뿐이에요. 참 풀질 못해요.
입체사진하고 보통 사진은 어떻게 찍느냐 하면, 보통 사진은 사진기가 있고 렌즈가 있고 여기에 꽃이 있다면 빛이 여기 들어와서 대상에 비친 빛이 렌즈를 통해서 뒤에 거꾸로 필름에 되잖아요. 현상하면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선은 빛이 꽃이란 물체에 비친 이것만 렌즈로 들어와서 거기에 보면 꽃 하나만 보이는 거예요. 이게 보통 사진이에요.
그런데 입체사진은 홀로그램이라 하는데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빛이 비춰서 거울을 거쳐서 필름에 오고 있고, 그 다음에 또 하나의 빛은 꽃에 비춰서 그대로 들어오는 거예요. 두 개의 빛이 같이 들어와 버려요. 입체사진의 빛은 레이저입니다. 레이저가 거울에 비춰서 필름에 들어오고 한쪽은 레이저가 대상에 비춰서 들어오게 되면, 이 레이저가 바로 거울에 비춰서 오는 걸 ‘순수 광선’이라 하고, 빛에 비춰서 오는 이걸 가지고 ‘불순 광선’이라 해요.
지금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광선에 보면 두 가지 빛이 있으니까 불순 광선이 오게 되면 둘 사이에 ‘간섭’이 일어나요. 내 하는 일 간섭하면 싫잖아요. 간섭을 하게 되면 이게 무슨 물체인지 몰라요. 한데 비춰보면 입체로 보여요. 신기하게. 그런데 그냥 보면 흐리멍덩해서 이게 뭐야, 색깔이. 잘 안 보인다고. 간섭하죠.
지금 창세기 49장 내용이 뭐냐 하면,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과 인간들이 갖고 있는 야곱의 불순성, 인간성의 불순함이 서로 간섭을 이루니까 이게 예언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혼동이 되서 해석이 불가능해요. 해석이 되려면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해석이 되는 거예요.
보통 사진 그러니까 보통 예언 같으면 ‘이번 칠 월 달에는 동쪽에서 귀인이 올 겁니다. 기다려보세요. 이 부적을 붙이시면 대학에 붙습니다. 반드시 아 장가보냅니다. 유 월 달에.’ 아주 뚜렷하게 그 대상만 나와요. 아들이면 아들, 아들이 대학 가려면 대학, 딸을 시집보내려면 시집. 딱딱 대상만 되는데
하나님의 축복은 뭐가 있느냐 하면, 분명히 사람에게 복을 하는 것 같지만 흐릿하게 숨어있는 순수하신 어떤 분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수함이 인간의 인생을 통해서 뒤에 밑받침되어 나오니까. 나올 때 뚜렷하지 않은 이유가 뭐 때문에 그렇다 했습니까? 우리네 인생이 뭘 간섭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순수한 축복을 가로막고 간섭하기 때문에, 불순한 광선이 순수한 광선을 흐려놓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이것이 ‘아이고 인생 망하는 것 아닌가, 내 인생 실패 아닌가?’ 만날 자기 실패한 것만 생각나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순수하게 일했다 하는 것은 안 들킨다 이 말이죠.
홀로그램 제작가지고 설명하니까 여러분 이해하십니까? 보통 사진은 선이 하나밖에 안 나오기 때문에 국소적이란 말이죠. 국소적이란 말은 장소적이다. 사진 보니까 ‘이것 내 남편이네.’ 딱 보이지만 만약에 홀로그램이라면 ‘이게 누구지? 누구야. 도대체 모르겠어.’ 불순한 남편과 순수하신 예수님이 함께 찍히니까 알아먹질 못하는 거예요. 알아먹질 못하는데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보니까 주께서 하셨어. 아, 이 사진이 내 남편의 사업을 망하게 해서 배후에 숨어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그러한 사진인 것을 아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광선이 이쪽에 하나인데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언과 축복은 광선이 하나인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축복이란 것은 광선이 두 개인데, 단순히 두 개가 아니라 한쪽은 순수하고, 한쪽은 불순하고. 그 불순한 것이 순수한 것을 간섭해서 흐리멍덩하게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흐리멍덩한 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거는 불순한 거다. 알겠지? 이거는 순수한 거다. 가려내기
그 가려내는 방법이 바로 이스라엘 전쟁을 통해서 가려냅니다. 외부에 의해서 내부적 전쟁을 일으켜요. 이스라엘 공격하는 적들 이기는 것, 이길 때 좋다 했지요. ‘하나님 뜻으로 이겼습니다.’ 그 전쟁 이기라고 이스라엘이 있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은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순수한 빛만 있는 그러한 복과 저주의 기준점 되라고 해놨는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고 전쟁 한번 이겼다고 좋아 까불다가 어떻게 됩니까? 또 나중에 타락해서 사사기에 보면 벌 받고 이러지요. 자꾸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왜? 인간이니까. 야곱의 더러운 속성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큰 아들 저주하고, 둘째 아들 저주하고, 셋째 아들 저주할 때 ‘아이고, 아버지 너나 잘해라. 자식이 아버지 닮는데 아버지가 개판이니까 그런 아들 나오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자기 새끼를 그렇게 저주하느냐? 해도 너무하다.’ 이렇게 비난하겠지요. 그것은 개인적인 간여할 문제가 아니고 바로 순수함을 위해서 아버지가 알고 있는 홀로그램, 입체사진을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물려준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신앙생활 지가 알아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가 함께 있습니까? 나는 사실은 불순한 인간이고 이 불순한 인간을 용서하시고 의롭게 만든 의를 주고, 의를 주고, 의를 주시는 순수한 의의 원천은 우리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함께 있어야 간섭이 일어나야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죄까지 아는 그 순수함과 죄가 섞였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우리와 같이 그 사람도 구원받는 겁니다.
‘나는 저 집사가 잘 되는 것 보고 예수 믿어야지’ 이렇게 하지 아니고, ‘나는 저 집사가 잘 되든 망하든 간에 저 집사님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나도 구원받을 수 있다’ 하고 순수한 광선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 이거에요.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지옥 갈 쓰레기를 모으기 위해서 그렇게 교회를 크게 짓는데 지어봐야 쓰레기만 오는데. 교회 짓자 하는 것이 복과 저주의 기준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우리를 의롭게 했습니다’라는 걸 증거해야 다른 사람에게 저주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저주 받을 수 있는 기준이 되고, 복 받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게 홀로그램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만의 순수함을 깨버리고 ‘우리 예수 믿으니까 이렇게 잘 됐다’ 자기의 보통 사진, 자기의 증명사진을 갖다 대버리면 예수님의 증명사진은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아까 질문, 그렇다면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피곤하신 분이 좀 있는 것 같아서 크게 쓰겠습니다. [차이] 차이를 통해서 알아요. 차이 속에 새 생명이 나와요. 여러분, 남자하고 여자하고 차이가 나죠. 차이가 나기 때문에 거기서 애가 생겨요. 차이가 없으면 애가 안 생겨요.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에요.
차이가 나되 너무 차이 나도 안 좋아요. 돌멩이하고 코카콜라하고 둘이 결혼해도 애 안 낳습니다. 차이 나도 너무 차이 나면 애 안 생겨요. 닮아야 되면서도 차이가 날 때 그때 애가 생겨요. 남자, 여자하고 다 똑같아요. 다른 점이 몇 군데 있기 때문에 몇 군데에서 애가 생깁니다.
‘차이’는 다른 말로 하면, ‘틈’이죠. 틈을 만들어서 거기서 생명을 일으킵니다. 여기에 창세기 49장에서 두 종류의 틈이 나와요. 르우벤이란 장자와 다른 열한 명의 형제들과 틈이 생깁니다. 장자가 장자 값을 못했습니다. 장자 값을 못하면 장자 값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가 홀로그램 돼야 되니까 순수 광선이 있어야 되니까, 그러면 르우벤은 무슨 광선됐습니까? 불순 광선.
불순 광선은 하나님의 순수함을 다 흐리게 만들죠. 흐리게 만든 장자가 갖고 있던 것을 두 개로 나눠져서 유다한데 하고 하나는 요셉한데 가버려요. 유다하고 요셉은 차이 납니다. 하나가 이가 됐지요. 이가 일이 돼요. 유다와 요셉 틈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요. 그래서 창세기 49장에서 이상하게 장자권이 봉우리가 두 개 같아. 하나는 유다에게는 하나님이란 왕이 등장하고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나와요.
그런데 우리가 알기에는 왕이나 목자나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한테 모이는데 어떻게 그게 장자 하나에서 둘로 나눠지고, 어떻게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되느냐 이 말이죠. 하나에서 둘되어야 차이가 져야 양쪽 다 아니고 그 차이에서 빠져나온 것이 예수님의 새 생명이 나온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차이라 하는 것은, 차이가 되려면 반드시 앞에 A와 B가 서로 마주서는 게 있어야 되죠. 같지만 완전히 같진 않고, 다르지만 완전히 다르지 않는 게 있어야 되죠. 그래야 틈이 있잖아요. 어렵구나. 어렵습니까? 여자, 남자가 다르지만 완전히 다른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완전히 같지도 않지요.
‘차이’란 말이 뭐냐? 비스무리한데 완전히 똑같진 않다 이 말 아닙니까. 차이지는 그 사이, A와 B 그 사이에 골이 있어야 되죠. 그런데 사람들은 차이가 안 지고 같이 보는 거예요. 같이 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복이 뭐라 했습니까? 사람은 믿음으로 복 받죠. 믿어야 될 분이 행함으로 찾을 수 없는 분이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은 A나 B나, 유다나 요셉이 와버리면 누굴 믿게 됩니까? ‘난 유다.’ 저쪽은 뭡니까? ‘야 유다가 뭐야? 요셉.’ ‘왜 요셉인데?’ ‘창세기 49장 24절에 봐라.’ 야곱이 축복하기를 요셉이 강건하고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오죠. 어디에서? 요셉에서. ‘요셉, 요셉.’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은 요셉 후손들이고, 남쪽은 유다 후손이죠. 그럼 남쪽에서 무슨 소리냐? 창세기 49장 10절 봐라.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나오죠. ‘유다, 유다.’ 저쪽은 뭡니까? ‘요셉, 요셉.’ 정답은 둘 다 아니죠. 그 틈 사이에서 나옵니다.
유다에서 보면 아직까지 서양 이천 년 역사가 풀지 못한 문제가 나옵니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도 풀지 못한 문제가 10절에 나오는데,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 ‘실로’가 누구냐 이 말이죠.
어느 주석이 해답 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르겠다’가 정답이라는 거예요. 왜 실로란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모를 수밖에요. 왜? 유다를 믿으니까. 모를 수밖에. 왜? 요셉을 믿으니까. 요셉도 믿지 말고, 유다도 믿지 말고 그 틈 사이를 믿어야 되는데. 잇사갈과 스불론의 틈 사이가 아닙니다. 갓과 아셀의 틈이 아니에요. 뭐가 틈이라고? 유다와 요셉 사이의 틈이에요.
결국은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둘로 나눠질 수밖에 없어요. 나눠져야 남쪽 나라도 아니고, 북쪽 나라도 아니고 진짜 실로가, ‘실로’란 분이 뭐냐 하면, 바로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가 올 때까지 유다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대상으로써 남아 있어야 돼요. 언제까지? 실로가 오실 때까지 메시아 올 때까지 유다는 메시아 돼야 되고, 실로란 왕이 올 때까지 그들은 왕인 양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름이 실로에요. 실로가 뭐냐 하면, 실로라 하는 것은 장소가 요단강 있고, 사해, 갈릴리 바다 있는데 이 남쪽에 보면 실로가 있어요. 실로가 뭐하는 곳이냐 하면, 하나님 만나는 장막이 있는 곳이에요. 거기서 모든 회의를 했어요. 땅을 분배해주고 하나님 앞에서 물어서 한 거예요. 실로라 하는 곳이 최초의 하나님의 장막이 서있는 곳이에요. 최초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할 그 당시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장소가 실로였고, 나중에 세겜으로 옮기지요. 첫 번째 있던 장소가 실로였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성전이 밀려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막이 밀려오는 것. 하나님 자신이 왕이 되서 올 때까지 누가 돼야 된다? 유다 족속의 왕이 왕으로 있어야 될 것이 바로 장차 유다 지파가 담당해야 될 예언이 되는 겁니다. 자기 역사가 되는 거예요. 유다가 왕이 될 때는 처음이지만 왕이라는 직책이 올 때까지 누가 담당하는가? 요셉이 담당해요. 요셉이 장자 노릇을 해야 돼요.
어쨌든 르우벤이 장자 값을 못하니까 장자의 권한이 누구한테 넘어갑니까? 한쪽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고 두 쪽으로 넘어가죠. 한쪽은 요셉으로 넘어갔고, 장차 왕의 주도권은 유다한테 넘어갔어요. 나중에 오실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합치는 거예요.
그런데 르우벤이 왜 장자권이 박탈당했느냐? 박탈당한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7장 봅시다. 29절.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여기 ‘어미’가 나오죠.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진짜 하나님의 장자, ‘장자’란 말은 축복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 요셉 같은 경우에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죠. 축복을 받았기에 장자권이고, 유다 같은 경우는 축복을 할 수 있는 권한이기 때문에 장자고,
르우벤의 장자권은 축복을 받은 자가 되는 동시에 장자권은 축복을 받은 자도 되고 축복을 받았기에 또 나누어주어야 될 권력을 가진 사람인데 르우벤의 경우에 장자권이 둘로 나눠져버렸어요. 요셉은 축복을 받았어요. 곱빼기나 받았고 유다는 축복을 해주고. 왕으로써. 이렇게 나눠지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 아브라함에 있어서 자식은, 첫 번째 인간적인 육적인 자식은 이스마엘이죠. 그 다음에 진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은 이삭이죠. 축복은 어디로 갑니까? 이삭으로 가죠. 다시 합니다. 축복이란 뭐다? 일 번, 복을 받았다. 이 번, 받은 복을 나눠줄 수 있는 권한. 양쪽 다 갖고 있는 거죠.
그럼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는 뭐 때문에 갈라졌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어미’의 차이점이죠. 어머니의 차이에요. 이스마엘의 어머니는 하갈이고, 이삭의 어머니는 물론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을 대신해서 아기 낳은 사라가 엄마가 되죠. 지상에는 엄마에 의해서 언약이 한쪽은 지옥 가는 언약과 한쪽은 천당 가는 언약으로 바뀝니다.
결국은 남자는 허수아비고 진짜 여자가 누구냐, 여자 문제에요. 창세기 3장 15절에 진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에서 태어나요. 그런데 유사 여자, 가짜 휘발유를 조심하세요. 가짜 여자가 있고 진짜 여자가 있다는 거예요. 엄마가 누구냐에 따라서 씨가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 정신에 의해서 야곱에게 아내가 몇 명이에요? 두 명 되죠. 사실은 네 명이 되지만. 네 명의 여자를 통해서 그러니까 나누면 두 명의 여자를 통해서 열두 명의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49장에 축복할 때 제일 먼저 레아 계통을 축복하고 나중에 끝에 가서 라헬 계통을 축복했는데. 르우벤은 아빠의 자리보다 엄마의 자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누구하고 통간했습니까? 빌하. 빌하가 누구냐 하면, 라헬의 몸종이죠. 빌하는 라헬과 한 몸이에요. 라헬이 자기가 불임 여성이니까 빌하를 낸 거예요.
르우벤이 빌하와 통간함으로 말미암아 무슨 질서가 깨져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순수 광선. 하나님의 언약의 질서가, 인간적인 르우벤은 누구 자식이에요? 야곱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받은 축복성이 간섭을 일으켜서 르우벤이 엄마의 질서를 혼잡스럽게 만들었죠. 그게 바로 저주에 해당되는 거예요.
저주가 뭐냐 하면, 자기의 출생의 어머니를 성령에게 두지 않고 육적인 것에 둘 때 그게 바로 저주 받은 인간들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걸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행함으로 종교성으로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구원받겠다는 건 전부다 어디 속하느냐? 이스마엘에 속하고, 엄마를 잘못 골랐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던 르우벤은 장자권이 박탈되는데 그것은 바로 숨겨져 있는 순수 광선의 어머니의 중요함을 아들이 간섭했기 때문에 장자권이 박탈된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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