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일반부 운문 대상작
책 / 심은정
-책을 옮기다-
오래된 관棺 뚜껑을 열 듯
조심스레 표지를 넘긴다
육탈된 뼈 사이로 차례의 행간이 흐르고
머리맡에서는 아버지 냄새가 났다
동백기름을 발라 번들거리며 대문을 나서던
살아생전 한번도 지은이가 되어보지 못한 당신이
찢어진 낱장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인생의 중요한 대목 마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놓고
한 페이지씩 연대年代를 넘기곤 했다
비록 본문 같이 유려하지는 못했어도
구차히 각주 따위는 달지 않고 살아왔다
이제는 형광등처럼 깜빡대는 기억 속에서
안데르센이나
플루타아크 영웅전은
아버지 최대의 선물이었다
마침내,
백지장 같은 유골이 함函 하나로 요약 되자
일행은 책장을 다시 덮어주었고
저마다 독후감을 얘기한다
나는 산을 내려가며
어릴 적 읽었던 헨젤과 그레텔이 생각나
빵 조각 대신
눈물방울을 떨구기 시작했다.
대학.일반부 산문 대상작
바람 / 정현수
집사람은 요즘 내가 바람이 났다고 자주 말한다. 그것도 늦바람에 유난히 악센트를 준다. 늦바람에서 풍기는 저속한 느낌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만 화를 낼 수 없다. 늦바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늦바람이다. 겨드랑이를 타고 올라와 뜨거운 입김을 내 뒷볼에 훅 하고 불어 넣었다. 나는 발끝까지 타고 내리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작년 가을에 직장인밴드에 가입했다. 밴드 연습실이 집 앞에 있었는데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내 속에서 뜨거운 것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40이 넘은 나이에 무슨 주책인가 싶어서 뜨거움을 애써 식히고 억누르기만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술기운을 빌어 밴드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때마침 베이스기타 연주자를 기다리고 있어서 나는 쉽게 가입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매주 월요일에 모여 밴드 연습을 했다. 주말에는 복지시설의 자선공연부터 동문회의 초청공연까지 섭외가 들어오는 대로 연주했다. 그때마다 집사람의 표정은 굳어간다. 차라리 춤바람이면 못하게 할 텐데 고상한 데가 있으니 그러지도 못하는 눈치다. 아이들에게 내는 짜증이 늘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내 지갑에 용돈을 넣을 때는 하지 않던 잔소리까지 했다. 그 뜨겁던 여름부터 이어져 온 어른들의 신경전에 아이들만 괜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고심 끝에 김광석의 노래를 혼자 연습했다. 연애시절 집사람에게 자주 불러 주었던 노래였다. 통기타를 치면서 수십 번 고쳐 부르며 음정을 다듬었다. 그 노래를 휴대폰에 녹음해서 집사람에게 보냈다. 나의 늦바람은 당신을 위한 것이라는 유치한 문장도 함께 보냈다. 노래 한곡 들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자 집사람에게서 문자가 왔다. 밖에서 방황하지 말고 일찍 들어오라는 다소 맥이 빠지는 내용이었다. 기타를 메고 연습실을 나왔다.
가을을 재촉하는 늦은 바람이 내 귓불을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고등부 운문 대상작
신발 / 김민선
입구에서의 생각이 자꾸 길어진다
두 해의 겨울을 보낸 낡은 신발을
이제 버린다
신발장을 열고
신발을 보냈다 일기 쓰듯
내 기억엔 없는 길마저도
신발은 일일이 적어주었는지
뒷굽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다
그러고 보니
길을 온전히 걸어온 건 내가 아닌
신발일 수도 있겠다 떠올리기 싫은
물웅덩이와 얼음의 시간
불 및 없는 어둠의 사연들마저도
신발은 전신 암각화로 새겨놓았다
신발의 이름으로 태어나
신발로 살다가
신발의 이름으로 사라지는
묘비명은 없지만
신발을 버린다 해서
신발의 여정마저 사라지는 것일까
신발을 버린다는 말이
말이 되는 말일까
나는 검은 비닐봉지에 신발을 넣고
봉분 다져 이름 없는 무덤 하나 마무리하듯
봉지 입구를 단단히 여며주었다
고등부 산문 대상작
선물 / 여희주
그의 일상은 창문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간혹 그와 시선을 마주친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때마다 거의 모두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귀신의 형상이라도 본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그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순전히 단짝 친구인 희영이 때문이었다. 희영이와는 학교에도 같이 가고, 방과 후 학원도 함께 다녔는데, 매번 희영이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길가에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희영이를 만나기로 한 장소가 105동 앞, 그의 시선이 머무는 장소였다. 그가 내려다보는 줄도 모르고 나와 희영이는 한참이나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는데. 아아, 거기에 그가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넘어질 뻔 했다. 희영이 역시 얼굴색이 변하며 어서 가자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층 창가에 앉아 우리들을 강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좀 마른 편에 얼굴 왼편에 상처가 드러나 보였다. 무릎은 담요로 덮여져 있었고 자세히 보니 그는 의자가 아니라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만 가자…….”
희영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거나 희영이의 말보다도 그가 먼저 창가에서 멀어졌다. 휠체어 바퀴를 뒤로 밀며 모습을 감췄다.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도 체육 시간에 피구를 하면서도 나는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별 사람도 다 있다며 잊어버리라고 했지만 그 눈빛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잊었다 싶으면 산 정상에서의 메아리처럼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굣길은 다른 때와 달리 나 혼자였다. 희영이가 학생회 환경부장인 바람에 남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 맞아보는 외로움에 애꿎은 가방끈만 꼬았다. 문득 혼자 사는 사람들이나 왕따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아파트 단지에 다다랐다. 잠시 잊혀졌던 기억이 오로라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결국 105동 앞에 섰다. 무의식적으로 2층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뒤로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을 창문에 닿을 듯 말듯하게 들이밀었다.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바로 그곳에서 발을 돌려 우리 집으로 뛰어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실종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나운서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반겼다. 숨을 헐떡이는 내 모습을 보며 엄마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뉴스 보도에 한층 더 심각해진 나는 엄마를 소파에 앉히고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참 나의 이야기를 듣던 엄마는 내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너, 학원가다 보면 폐휴지 줍는 할머니 볼 때 있지? 그 할머니 아들이야, 원래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했대. 그런데 학교에서 단체로 봉사를 가다가 버스가 뒤집혀 사고를 당했다고 하더구나.”
쾅,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뒤의 말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그런데 워낙 큰 사고다 보니 얼굴에 화상을 입고, 하반신 마비에 그 충격으로 말까지 못하게 되었다더구나.”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밖의 세상을 그리워하는 그를 마치 괴물처럼 등한시하는 사람들,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한 표정의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 그 자신은 밖의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또 새로운 만남을 위해 그는 휠체어에 앉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나는 알 수 없이 묘하게 이끌렸던 그의 눈빛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형편없지만 최대한 나의 마음을 담아 그에게 편지를 썼다. 사회복지사를 꿈꾸었던 그의 멋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며 그림도 그려 넣었다. 편지봉투 입구를 풀로 붙이고 보내는 사람을 쓰는 칸에 ‘새로운 만남을 받아들일 한 소녀가’ 라고 썼다. 편지와 함께 내 마음을 담은 소망과 사랑이 주제인 시집 한 권도 선물에 보탰다.
창문으로 그의 눈빛 같은 강령한 노을이 번지고 있다.
중등부 운문 대상작
핸드폰 / 김나율
9월이 개통됐다
앞산과 뒷산이 통화를 시작하면
시냇물은 통화연결음이 된다
녹음은 수신차단 되고
주소록이 붉게 물들어 가는
어느 가을날
요금으로 지불된 구름들로
유난히 깨끗한 하늘부터
내 몸이 파랗게 물든다
중등부 산문 대상작
가로등 / 조은진
내가 예전에 사춘기가 왔을 때에 밤마다 노래를 들으며 나의 꿈에 대해 생각 했었던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잘하는 건 무엇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그때, 과연 나는 커서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매스컴에선 매일 청년 실업률에 대해 뉴스가 나오고, 공부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을 보면서 혹시나 나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커서도 부모님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하나 생각하기도 하고, 하더라도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 친구들과 공부하고 집에 돌아가던 때,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가로등을 보았다. 우리 집에 가는 길은 어두워서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져 있다. 그 가로등을 보면서 나도 가로등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로등은 어두운 밤 어두워진 길을 밝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길을 안내가는 안내자의 역할이다. 내 인생에도 이런 가로등이 있어서 미리 앞을 보여주고, 길을 안내해주는 가로등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한치 앞도 모르는 미래에 불안할 때면 이런 가로등이 있어서 안전한 길로 안내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인생이 재미가 없으니까 그냥 지금은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은 한치 앞을 모르니까 성숙해지고 재미있는 거겠지! 나도 결국은 이대로가 좋다고 느꼈고,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고 이루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결국은 삶의 가로등은 노력과 경험인 것 같다.
초등부 운문 대상작
신발 / 황영민
꽃 속을 걸으면
꽃 냄새에 잠들고
숲속을 걸으면
영차, 영차 힘이 나고
돌길을 걸으면
아야, 아야 아파하고
눈 속을 걸으면
너무 추워
덜덜 떨고
흙 위를 걸으면
구름 위처럼
푹신하고
낙엽 위를 걸으면
바스락 바스락
소리에 기분이 좋다
신발장에 누운
내일은 어디를 갈까?
생각 하네
초등부 산문 대상작
선물 / 이아영
아빠께
아빠, 저 딸 아영이에요. 예전에 저는 가족들에게 무뚝뚝하시던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차라리 아빠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보았어요. 하지만 어느 날 아빠가 암에 걸리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조금 놀랐어요. 언제나 아무 일도 없으셨던 아빠가 암이라니……. 아빠가 암 때문에 치료와 수술을 받으시는 동안에 원래 일을 안하시던 엄마도 일을 다니시게 되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정말 힘들었어요. 특히 준혁이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일찍 일을 나가시던 엄마께선 준혁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일을 나가셔서 준혁이는 일찍 일어나느라 피곤했을 테고, 유치원에 갔다 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으니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이런 일이 반복 되면서 저는 우리 가족에게 아빠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아빠가 암수술을 받으실 때 제가 피아노 대회를 나갔었잖아요. 그때 엄마는 아빠와 병원에 가 계셔서 같이 갈 수 없었고, 저 혼자 피아노 선생님과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탔을 때 항상 옆에서 축하해 주시던 부모님이 안계셔서 기쁘지 않았어요.
아빠, 제가 시험 볼 때마다 “시험 잘 보면 선물 뭐 사줄 거예요?”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였는데 제가 정말 철이 없죠. 저에게는 아빠가 우리 곁에 계신 게 가장 큰 선물인데……. 지금은 우리 가족이 예전처럼 아빠하고 산에 가기도 하고 운동도 같이 하고,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는데 잠깐 잊었나 봐요. 제가 늦게 깨닫긴 했지만 앞으로 아빠와 더욱 가까워지도록 노력할게요. 아빠 앞으로는 아프시지 말고 가족들과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요. 아빠, 정말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