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중요한 이야기가 몇 가지 나왔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이후가 분명히 현실이라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 현실이 어떤 현실이라고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 중인데, 이 사이에 인간은 개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개입은 커녕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어느 쪽이든 지배받게 되어 있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지, 여기에 개입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게 현실이죠.
◈ 구원받은 사람은 창세기 3장에서 주님을 발견 !!
그러면 창세기 2장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에 놓여 있으면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려는 자체가 "뱀의 후손의 지배를 받는 자의 심성이다" 라는 말을 했지요. 그러면 성도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으로부터 영을 받아 구원을 얻었는데, 이런 사람은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디로 갑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창세기 3장에서 주님으로 가지요. 다시 말해서, 창세기 3장에서 주님을 발견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을 설교하면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창세기 3장을 설명하면서 "그러니까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 차이점을 잘 모르겠습니까?
창세기 3장이 우리 현실이잖아요. 이 현실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여자의 후손에 매여 있다는 것도 인정되어야지요. 그러면 창세기 3장의 현실 자체가 실망스런 현실입니까, 축복된 현실입니까? 둘 중의 하나인데, 축복된 현실이지요. 왜요? 예수님에게 매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된 일이냐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감사할 현실을 지닌 자가 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 성령을 받지 못한 자 - 여전히 창세기 2장을 그리워하며, 아담을 원망 !!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이쿠 이 어리석은 조상 아담아! 그 선악과를 무엇 하러 따먹었나? 당신 때문에 내가 죽게 되었잖아. 오! 신이시여, 제발 불쌍히 여겨서 낙원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저지른 일을 우리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냐고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은 마귀가 우리를 장악함으로 생긴 습관입니다.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늘 자립심으로 덤비지요. 자신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단 말이지요. 왜 그런가 하면, 처음 선악과를 따먹을 때의 유혹하는 그 내용물 자체가 "신처럼 되리라" 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신이야.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 잘하든 못하든 내 일은 내가 책임 질 거야" 라는 식이지요.
그래서 겸손을 빙자한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즉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라는 문화사명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나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제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간의 전쟁이 인류의 모든 것을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무리 "나는 자립해야 돼. 내 문제는 내가 책임져야 해" 라고, 스스로 어떤 행위를 하든 간에 마귀나 예수님은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은 뱀의 장악 하에 놓이게 되었어요. 그것이 창세기 4장에 나와요. 7절 후반부에 보면,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고 말입니다.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사람 죽이는 것을 취미생활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인이 동생 괴롭히는 재미로 사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동생을 미워하도록 자극한 분이 있지요? 누구냐 하면,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 가인과 아벨의 제사 - 악마를 드러내기 위해서 !!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구현하기 위해서 항상 인간을 둘로 나누지요. "네가 뱀의 후손이냐, 아니면 여자의 후손이냐?" 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개입하시는데, 그래서 가인의 제사는 안 받고 아벨의 제사만 받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안 받으니까, 가인의 배후에 있는 악마가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귀가 걸려든 것이지요. 그렇게 본색대로 행동하다 보니까 동생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동생 아벨의 제사도 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셨으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부러 편 나누기를 한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자극이 되도록 말입니다. "빨리 너의 본색을 드러내. 이래도 동생 안 죽일 거야"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자극을 해서 가인이 동생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다음 약속을 이을 셋을 주시는데, 이 셋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죽은 아벨의 계통을 따르는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악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악을 이기는데 그 안에는 여자의 후손이 들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싸움에는 그 승패가 처음부터 이미 결정이 났지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정도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친다고 했어요.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처럼 모든 전쟁의 승패는 확정된 채 바퀴처럼 굴러가는 거예요. 누가 이긴다구요? 여자의 후손이 이기고, 백날 달려들어도 뱀의 후손은 진다는 것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살아남아야 이기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미 이기었으니 자기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잖아요. 오빠가 죽었기에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 가정이 파탄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낼 때, 비로소 죽는 것이 패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나 죽으나 주님만이 부활이고 생명이 된 것, 그것 자체를 믿으면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빠의 죽음을 보고도 망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오빠가 죽는 것 자체가 뱀의 후손을 여자의 후손이 이긴 증거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시키겠다는 자립심을 포기합니다.
◈ 여자의 후손과 성도의 관계로 말미암아서 성도는 지금도 생명을 지탱 !!
믿는 자는 혼자가 아니라 그 배후에 여자의 후손이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 약속이 성도를 쥐고 사용해서 어떤 결과가 되던 상관없이, 그 여자의 후손과 성도의 관계로 말미암아서 성도는 지금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일어나던,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뭐가 된다구요? "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장을 한번 살펴봅시다. 8절 말씀입니다.
(고전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이 약속을 누가 성취시킵니까? 예수님이 성취시키지요. 그 결과가 뭡니까? "견고케 하실 것이다" 라는 것이란 말입니다. 9절에 보면, "너희를 불러" 라고 하는데, 누가 부른 거예요? 약속이 약속을 구현할 사람을 부른 것이지요.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노력하세요, 믿어주세요' 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렇게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만 나가주세요" 라는 겁니다. "행동을 똑바로 하란 말이야!' 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 여러분, 당신은 지금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이것을 묻는 거예요.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으로 교회를 부흥시킬 건가요?" 라는, 이런 것도 묻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의지합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에서 여자의 후손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믿는다면, "당신은 여자의 후손이 얼마나 위대한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 무엇이 진짜 현실인가?
지금 고린도전서 1장 8절과 9절을 강의하는데만 무려 2시간 20분이 지났어요. 지난 시간까지 합하면 더 길지요. 여러분이 제 이야기 가운데서 어디가 자꾸 걸리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에서 여자의 후손이 승리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흘러가는 그것이 과연 사실이냐?" 하는 점입니다. "정말 이것이 진짜 현실이냐?" 라는 말입니다.
어떤 가정의 딸아이가 아파서 누워있는 채로 교회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무엇이 현실입니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든 뭘 하든 간에 딸이 아픈 것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설교하시기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싸움을 하고 있는데, 싸움을 하나마나 여자의 후손이 이깁니다" 라고 했을 때, 갑자기 이것이 현실이 되어버렸을 때, 아이가 아픈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시한 현실이 되는 것이죠.
왜 그런가요?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에 의해 파생된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하! 내가 현실을 알았구나"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저렇게 딸아이가 아파서 힘이 들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부활이고 생명이란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주님의 작용이라는 말이지요. 별로 심각할 것 없어요.
그런데 목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무거운 마음 가지고 왔다가, 여전히 무거운 마음 가지고 돌아가니까, 이 사람은 결국 다음 주에는 아이 때문에 교회 못 나오게 되는 거예요. "내가 그런 환경 속에서도 지난 주일예배에 참석했는데 왜 계속 내 딸을 아프게 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것 뭐가 있습니까? 이제 교회 안 다니겠습니다" 라고, 이렇게 나오지요.
목사가 복음 전한다는 것이 이렇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 해석권은 누가 갖고 있다구요? 사도들이 쥐고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사도 바울의 어떤 편지는 함부로 해석하지 마라. 그것은 영을 받은 사람만 가능하다" 라고 했지요. 사도 바울의 편지 전체가 성경은 아니고, 그의 편지 중에서 성령에 의해서 성경이 된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 현실이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성경 속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 결과의 승리를 여기에서 찾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지혜로 찾아 낼 수는 없지만, "고린도전서에 깔려있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의 차가운 현실이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는가?' 라는, 그것을 다 설명해 줘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고린도전서를 제대로 봤다고 할 수가 있지요.
여기서 제가 어려운(?)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이렇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우는데, 여자의 후손은 구약이 진척되면서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등장합니까?
1) 영웅 2) 로봇캅 3) 베트맨 4) 슈퍼맨 5) 약한 자
이 중에서 몇 번입니까? 이것이 고린도후서 마지막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은 연약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했잖아요. 그럼 왜 약합니까? 뱀이 여자의 후손 발꿈치를 물었거든요. 그러니까 목숨이 날아가 버렸지요. 죽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마귀가 우리는 위협하는 것이 뭡니까? "너, 그러다가 죽는다" 라는 것입니다.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하는 우리들에게 마귀는 이렇게 항상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합니다. "죽으면 실패고 끝이잖아. 수단 것 살아야지" 라고, 계속 이렇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가지고 마귀가 예수님을 노렸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죽어버렸어요.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죽고 난 후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마귀가 최후의 카드로 사용한 그 무기가 성도에게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지요. 그분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됨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주신 사랑은 일체의 두려움을 이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했을 때,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첫째, 나는 범죄를 했다. 둘째, 범죄한 자에게는 저주나 징계가 온다. 셋째, 질병이나 사업실패나 가정의 우환 등등이 있는데, 가장 큰 징계는 내가 더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순서가 1), 2), 3) 이렇게 오는데, 이것을 커버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의 사랑으로 거저 생명을 준다. 징계가 없다. 사랑이 온다. 이 사랑으로 모든 죄를 이미 용서했다" 라는 겁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덮쳐올 때 감사와 기쁨이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이 전쟁을 지금 누가 하느냐 하면, 성령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되시는 예수님 옆에서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을 만지는... 찬송에 그런 것이 있지요. "네가 괴로울 때 십자가의 못 자국을 만져라" 라고 말입니다.
◈ 두려움은 과연 어디서 !!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며, 누가 두려움을 양산해 냅니까? 살펴보니, 저주와 징계, 이런 것들 찾아와서 자기의 위신, 체면, 명예 이런 것들이 무너질까봐 염려가 된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인간의 마음에 마귀가 잔뜩 집어넣어 놓았는데, 이런 것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고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말입니다. 왜, 약한 자 되기를 두려워합니까? 마귀가 심어준 마음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구약을 다시 봅시다. 아벨의 최후는 어떠했습니까? 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는 것이 있는데, 결국은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이렇게 사용하신 이유는, 현재 우리가 악마에 손아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악마의 손아귀에 있는 인간들에게, 여자의 후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히려 이런 우리들의 자립심과 명예심 때문에 누가 피해를 보느냐 하면, 그분이 피해자의 모습으로, 주님이 그런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위신과 체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지요.
◈ 선한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 - 강도 만난 사람으로부터 도망친 자들이 다 가해자이고 강도 !!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인데,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해주고 도와준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아시지요? 이 비유가 참 재미있는 비유인데, 강도를 만나서 초죽음이 된 사람이 있지요? 잘못은 누가 했습니까? 이 사람을 누가 쳤습니까? 강도지요. 그런데 강도는 거기에 없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강도에 대한 말은 전혀 없으니 말입니다.
그 대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제사장, 레위인들, 이런 사람들이 강도 만난 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강도 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상대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가해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한 사람을 강도 만나게 해서 결코 제사장, 레위인, 이런 사람들이 이웃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이런 인간들은 강도 만난 자를 안 도와준 것으로 피해를 입힌 것이 되요. 즉 인간은 어떤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천번 만천 들어도,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이웃은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주위에 있는 일을 책임 질 수 없는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제가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강 목사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연로하신 아버님이 기름 아낀다고 한겨울에 보일러를 가동을 안 해서 고장이 나서 50만원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춥게 지내니 몸이 아프고, 몸이 아프니 자식이 병원에 모셔가서 병원비 들고...
그러니 보일러가 들어왔으면 그 보일러에 대한 모든 지식을 정확히 알아야만 해요. 그것을 모르면 이 사회에서는 범죄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기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산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이 사회가 계속 법을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이 법은 뭘 유발합니까? 죄를 발생시키지요.
예를 들어서, 안전띠 매는 법규가 없으면 안전띠 착용을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이런 법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안전띠를 안 매면 40,000원의 벌금을 내야 해요. 예? 벌금이 30,000원이라구요? 그때그때 금액이 달라요. ㅋㅋ
◈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죄인이 안 되려면 새로운 정보를 계속 입수해야 되요. 쓰레기를 아름다운 봉투라고 해서 넣어 버리게 되면 벌금이 나옵니다. 왜요? 지정된 봉투에 안 넣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정보를 나이가 많은 독거노인 할머니가 알 턱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주며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화장실은 하나인데 식구가 5명이라면, 아버지가 아침에 혼자 화장실에 앉아서 신문을 읽으며 볼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들과 아내가 난리를 칩니다. 빨리 안 나온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난리를 쳐도 볼일이 안 끝났는데 어떻게 나옵니까? 끝도 안 났는데 나오면 찜찜해서 어떻게 합니까? 이러한 상태로 강단에 올라서면 설교가 제대로 안 되고, 그렇게 되면 교인들에게는 은혜가 안 되고...
이게 바로 현대 사회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말입니다. 학교 선생님이 밤에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다음날 학생들 죽었다고 각오해야 됩니다. 분위기가 살벌해요. 숙제를 안 했다고 작살을 내면서 "너희 아버지 어머니 뭐 하시냐?" 라고 하면서 난리를 쳐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거나 관리할 입장에 놓여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곧 현실임을, 그리고 우리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 이스라엘 - 여호와 전쟁에 의해 생긴 나라 !!
이것을 인정한다면, "내 힘으로 여자의 후손을 믿자" 라고 해서는 안 되고, "여자의 후손이 전쟁에서 승리해서 그 전리품으로 내가 뽑혀 들어왔구나"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여호와 전쟁에 의해 생긴 나라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 이스라엘 - 애굽이란 나라가 있어야 생겨나는 나라 !!
원래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없어요. 그런데 세상에 애굽이란 나라가 있어야 생겨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처음 듣는 말이지요. 애굽이란 나라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 애굽을 작살냈는데, 그러니 다 죽어야 마땅한데, 여기서 살아난 자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 때문에 말입니까?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이스라엘은 영원토록 어린양의 피에 종속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은 어린양에 종속된 나라가 아니라 인간에게 종속된 나라, 애굽을 가지고 뭐라고 하지요? 뱀이라고, 애굽 나라가 뱀이에요. 모세를 보고 지팡이를 던지라고 했지요. 그래서 지팡이를 던지니까 무엇으로 변했지요. 출애굽기 3장을 모르십니까? 뱀으로 변했잖아요.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해서 잡으니까 뭐가 됐습니까? 도로 지팡이가 됐지요.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서 "네가 치르는 전쟁은 애굽과의 전쟁이지만, 결국은 창세기 3장 15절의 구조에서 네가 못 벗어난다"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현실이란 말입니다. 이 현실이 그때그때 다양하게 나타나는 거예요.
모세가 애굽을 이기는데, 그 애굽을 이기는 방식이 뭐냐 하면 독립운동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처음 생각했던 방식입니다. 모세는 배울 만큼 배운 지성인입니다. 안중근 의사처럼 애국심도 있고, 열정도 있으니까 "40년을 하나님이 나를 키워주셨으니, 이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가 나설 때다" 라고 해서, 그렇게 나서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요.
◈ 이스라엘은 어린양에 종속된 체로 애굽에서 탈출 !!
이런 도망자를 하나님이 다시 불러서 무엇으로 구원하신다구요? 바로 할례의 피, 하나님의 약속의 피로 말미암아 "네 아들도 살고, 너도 살고" 라는 것입니다. 그 피의 구현체인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어린양에 종속된 체라야 애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보고 홍해가 갈라진 것이 아니고, 어린양을 보고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세울 때 요단강이 갈라졌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숲 속에서 호랑이가 지나가니까 모든 짐승들이 절을 합니다. 그런데 호랑이 옆에 있던 토끼지 모두가 자신을 보고 절하는 줄 알고 의시대면서 걷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착각들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우회를 만든 이솝이 참 대단하지요? 그리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가젯트 형제를 아십니까? 가젯트 형사가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개와 어린 소녀가 다 일을 해요. 그런데 폼 내는 것은 가젯트 형사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어린 양 때문에 구원받는 것을 모르고, 좀 평안하다 싶으면 어린양은 그만 잊어버리고 이방 나라와 연합해서 외교술로 나라를 굳건히 세우려 하는데, 그러다가 나라가 망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 역사이고 말입니다.
◈ 왜 사울 왕이 억울하게(?) 잘리는가?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 왕이란 작자는 예전에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블레셋이 물러갈 줄 알고 있는데, 그런데 적들은 쳐들어오는데 제사를 드릴 선지자가 오지를 않습니다. 사울의 본색을 드러내기 위해서 늦게 오는 겁니다. 그래서 대신 왕이 제사를 드렸지요. 제사를 드리고 나니 그제야 사무엘이 나타나서 "왜 당신이 제사를 드렸느냐?" 라면서 사울이 왕의 자리에서 잘릴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 사실 "시간이 촉박한데 당신이 나타나지 않아서 제사를 드렸어요" 라고, 사울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지요. 실제로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은 사무엘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상당히 억지 같지 않습니까? 약속을 안 지킨 사람은 사무엘인데, 사울 왕이 작살이 나니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 적은 언제나 내부에 !!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이 어떤 모습으로 나오느냐?' 라고 할 때,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약한 자, 즉 상처받는 자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이스라엘 외부에서 상처를 주다가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가 더 깊어지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애국심이 특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게 하지요. 즉 이스라엘 밖에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밖에 교회의 원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에 교회의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는 것도 이방인들이 아니라 여호와를 믿는 자들에 의해 당했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이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고린도전서를 하다보면 구약과 계속 관련된 것들이 나오니까, 지금 이쯤하고 다시 신약으로 돌아가 봅시다. 고린도전서가 중앙에 있다면, 앞부분에 창세기가 있고, 마지막 부분에 요한계시록이 있지요. 창세기에서 상처받는 자가 누구라고 했지요? 어린양인데, 처음에는 양이지만 나중에 이사야 53장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인격체, 어떤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뱀의 후손 역할 !!
여기에서 예수님과 이스라엘이 있으면 예수님은 뭘 이뤄야 됩니까? 여자의 후손의 일을 이뤄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게 중요한데, 그들이 뱀의 후손 역할을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바로 지금 우리가 이 역할을 하라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 편이 되고 싶지만, 그건 우리 희망사항이고 예수님 편이 되는 인간은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고 살해하는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뱀의 후손의 작용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이 와서 "아하, 내가 참 여자의 후손에 속한 사람이구나" 라고 했을 때, 그 모습이 자기 속에 뱀의 후손으로 있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형식으로서, 예수님께 속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한 아들이 나오는데 이 아들이 죽지요. 분명 죽은데 지옥에 가지 않고 어디에 간다구요? 그 육체는 죽고, 영혼은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지요. 이것이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아버지의 첩과 통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육체는 죽이되 영혼을 구원받게 했다니 말입니다.
(고전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전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고전 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고전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설명하려면, 고린도전서까지 오기 전에 예수님과 이스라엘 사람 전체를 비교해 보아야 되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때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전부다 입니다. 제자들도 도망쳤는데, 이렇게 도망친 것은 조금 전에 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도망친 자들 모두가 가해자라고 했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편들 인간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직접 못 박은 사람이나, 도망간 제자들이나,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승리에 대해 협력하거나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굳이 협조를 했다면 가룟 유다만큼 크게 협조한 사람이 없을 겁니다. 이 말에 웃어야 되지 않습니까? 가룟 유다를 한번 보세요. 얼마나 협조를 잘 했습니까? 돈 받고 예수님을 신고했지요. 그 신고 정신은 본받을 만하고, 양심이 얼마나 고운지 그 돈을 안 받는다고 하면서 반납했지요. 그래도 양심에 거리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살한 것 아닙니까?
◈ 베드로가 낫습니까, 가룟 유다가 낫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박수를 쳐줘야 할 사람 같은데, 주님은 그를 보고 마귀가 가야할 곳으로 갔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베드로가 낫습니까, 가룟 유다가 낫습니까? 사람들이 이걸 몰라요. 사실은 둘 다 동일하지요. 둘 다 동일하게 주님에게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지요. 그런데 왜 베드로는 구원받습니까? 베드로는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했고, 가룟 유다는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중에 버리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는 버려졌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이란, 우리가 사랑 받을 짓을 해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니고, 그 누구도 사랑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뽑혀 나온 사람만 사랑을 받고, 그 이외는 탈락이 아니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이걸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우린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악한 영의 통치를 받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권리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사모님, 조선시대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에 갔습니까?
지난주에 주일학교 학생이 제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모님은 잘 모르겠지만..." 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하는 말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에 갔습니까?" 라고, 이런 질문을 했어요. 사모님들 답변해 보세요. 조선시대 사람들 죽어서 어디에 갔습니까?
그 학생이 요구하는 답변은, 그들이 불쌍하지 않고 평안히 잘 죽었다는 늬앙스를 풍기도록 제대로 설명을 해보라는 것이지요. 제 아내도 어린 시절 그런 질문을 아버지께 했는데, 제 장인이 목사인데, 그분의 답변이 "그런 경우에는 양심의 심판을 받는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심의 심판을 받아서 천국에 간다면 제일 먼저 천국 갈 사람이 가룟 유다일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자살했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죽었어요. 뻔뻔스런 놈 같으면 자살을 안 합니다. 너무 양심이 고와서, 그 고운 것이 탈이지요. 이 양심이 바로 마귀 양심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양심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게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놀라면서 "사실이야? 진짜야?' 라고, 이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치원부터 어른이 되도록 공부를 하고 살아왔지만, 그런 주장과 발상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와서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신이 있든 없든 간에 인간의 양심에 따라 심판 받는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고, 이것이 진리이기를 원한다는 것이지요.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상을 못 줄망정, 최선을 다했는데 그에게 저주를 내린다면, 그런 신은 아예 믿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것입니다.
그러니 양심 심판을 한다면 사실 제일 꼴지가 베드로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주를 배반했어요. 그리고는 고기 잡으러 갔어요. 이런 자를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회개시키기 위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니, 전혀 자신 없는 말로 "사랑합니다" 라고 하지요. 그러자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너의 갈 길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 너는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가게 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책이 두 권이 있는데 하나는 '행위책'이고 또 하나는 '생명책' 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위책에 근거해서 누구는 지옥 가고, 누구는 천국 간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생명책이 이름이 없는 자는 전부 불 못, 즉 지옥 불에 가는데, 설명이 어떻게 되어 있는고 하니, "이런 나쁜 놈들은 모두가 다 지옥 불에 간다" 라고 하지 않고, "그들은 마귀가 가는 곳에 참여하리라" 라고 합니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잘못해서 인간을 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는데, 바로 이 악마가 있는 장소에 "너도 한 통속이니까 같이 가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할 때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한 세트로 되어 있는 악마와 결부해서 심판해 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싸움의 최후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성경에 있는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아예 안 들었으면 원상복귀라도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만약 원상복귀가 된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남는 신은 과연 무슨 신입니까? 그것이 바로 자립적인 자기와 자립적인 신과 흥정하는 그런 '종교' 이겠지요.
따라서 "신이 나에게 명령하면 그것을 지키는 분량만큼 복을 받고, 나쁜 짓 하는 것보다 좋은 일을 더 많이 하면 천당 가고, 나쁜 일이 더 많으면 지옥 간다. 그러기에 어릴 때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면, 나이가 들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되고, 만약에 어릴 때 착한 일 많이 했으면 나중에 늙어서 나쁜 짓 좀 해도 비축해 놓은 것이 많기 때문에 괜찮다" 라는, 이런 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나오는 사고방식이란 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라는 핑계가 나오지요.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를 공격했고,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통째로 "'인간의 죄는 반드시 자기 의가 나와서 예수님의 의를 모독한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0장 3절에 있습니다.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으니라
◈ 예수님의 의(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현실이 뭔가 하면, 인간을 놓고서 "네가 착했느냐, 안 착했느냐?'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이런 방식으로 신학을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의(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 나는 들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어" 라고 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 말하는 전체 이야기가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5분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