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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에서 블루
홍상수의 영화를 보노라면, 1시간이 넘는 상영시간(<북촌방향>의 경우, 79분)동안 수 차례, 순간 환기되는 '틈'을 의식하게 된다. 어떤 때는 연극의 막과 같은 자막이 그러하고, 어떤 때는 내러이션이 그러하고, 어느 때는 줌인 샷에서 그러하고, 어느 때는 장소를 알려주는 간판에서 그러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 때 나는 영화를 벗어나 정지하게 된다. 문구를 한번 읽으며, 얼굴을 한번 보며, 저게 뭘까 싶으면서. 한 순간 한 순간이 이어져 흐름이 되는 영화인데, 홍상수는 그 흐름 사이의 한 틈으로부터 뭔가를 의식하게 해준다. 잠시 사유의 강이 흐른다고 할까. 그 짧은 틈에 영화 관객인 나는 생각하게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다른 어느 감독의 영화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영화 감상글이 많이 올라온다 평론가들도 한 두마다씩 거든다. 홍상수의 영화가 개봉되고 난 뒤면 어김없이 말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글들의 향연 펼쳐진다. 다른 영화와 달리, 영화 외 주변 얘기를 듣는 재미가 솔솔하다. 그렇다고 달라질 것고 없는 일상의 변주인데도.
지난번 영화 <옥희의 영화>에서 부터, 뭔가를 안 자의 슬픔이 느껴진다. 아니 어쩌면 <밤과 낮>에서부터 그런 것 같다. 웃어도 웃는 얼굴이 아니게 된다. 그러한 슬픔이 <옥희의 영화>에서 배가되더니, 이번 영화 <북촌방향>에서 또 다시 진동한다.
꿈과 현실, 현재와 미래 혹은 과거, 생각한 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삶 사이의 거리감에서 나는 어쩌면 슬픔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때까지는 몰랐던 과거와 달리, 순간 번득이는 섬광에 휘청거리는 생의 비의를 인식하는 얼굴이 영화 속에서 보인다. <북촌방향>에서 영화팬이라는 여자가 들이댄 카메라에 포획된 감독 성준의 얼굴에도, 뭔지 모를 놀라움이 배여있었다. 물론 그 슬픔과 놀라움이 지속되는 무엇은 아니라는 데서, 이 시간이 지나면 언제 알았냐는 듯, 또 모르는 듯 살아갈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이기에, 미래를 향한 생기는 여전하다.
<북촌방향(영어제목 : The Day He Arrives)>은 대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영화감독 성준이 상경하여 아는 형 영호(영화평론가)의 거주지와 비교적 가까운 북촌을 찾은 데서 비롯된 얘기이다. 과거에는 영화를 찍었지만 지금은 영화를 찍고 있지는 않다. 전작 <옥희의 영화>에서도 인상깊었던 시간의 변주는 <북촌방향>에서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옥희의 영화>에서는 화자에 의해 변주되는 시간인데 반해, <북촌방향>에서는 마치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살아가는 성준에 의해 시간은 변주된다. <북촌방향>에서 보여지는 성준은 매번 북촌에 처음 온 것처럼 살아간다. 사실 보면, 어느 순간이나 처음이 아닌 순간은 없는 것이니, 성준이 말하는 시간이 이상하다고 할 건 없다. 만약 이 영화 속에서 성준이 서울에 머물 예정된 시간 3박 4일이, 누군가의 한 평생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매번 반복인데도 매번 처음인처럼 사는 삶이라면? 어떤 곳(범주)에 머무르는 삶과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순간 했었다. 삶과 길과 방향이라는 데서, 더더욱 삶을 생각했었을지 모르겠다. 예전에도 들렀던 고갈비집, 오래전 걸었던 골목길, 한정식집 다정의 좁은 방안, 술집 소설로 가는 좁은 골목과 작은 홀 때문일까, 뭔가 길을 따라가는데, 마치 그 길이 홀려 따라가는 길, 끌려가는 길로 생각됐으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아침인줄 알고 눈을 뜨는데, 이미 살았던 어제 그러나 사실은 오늘이 되는, 매일매일이 어제와 똑같은 날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사랑의 블랙홀>의 홍상수 버전인가, 하는 생각을 순간 했었다. 물론 <사랑의 블랙홀>과는 확연히 다르다. 너무 같아서 꿈과 같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되는 <사랑의 블랙홀>과 달리, 같은 것 같은데 뭔지 달라 누가 꾼 꿈이 아닐까 싶은 <북촌방향> 이었으니까. 뭔지 모를 낯설음을 느꼈던 장면이 두번 있었는데, 한번은 성준이 경진을 집을 나온 후가 아침도 아니고 밤도 아닌 낮이라는 데서 그러했다. 나오자 마자 어제 만난 영화인을 만나는데, 그것이 좀 이상햇다. 뭔지 영화의 어떤 틈은 아닐까 싶었으니까. 그리고 또 한번은 성준이 팬이라는 여자의 카메라의 들어갈 때도 낯설었다. 뭐라 표현할 순 없지만, 기괴한 성준의 표정이었다.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사실은 거기에서 끝낼 의도가 아니라, 이후 팬인 여자와 술집에도 갈 예정이었다고 한다. 편집의 낯설음인지, 의미의 개입인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면서 낯설었던 두 장면이었다.
<북촌방향>은 우연과 필연, 의미과 무의미, 이유있음과 이유없음, 슬픔과 기쁨, 혼자와 둘과 여럿, 가능과 불가능, 좋음과 나쁨, 관심과 무관심, 비겁과 용기를 복합적으로 섞어놓는다. 영화 속 중원의 말, 극과 극을 잇는 말을 해주면 대부분 사람들은 동의하더라는 말을 빌어오면, 상반되는 무엇을 같이 놓으면 사람들은 그 사이를 알아서 유영하더라가 될까? 아직까지는 홍상수의 수수께끼가 재미있는 이유를 나는 여기에서 찾는다. 의미없을 수도 있는 무엇을 의미있다며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느껴지니까. 그렇다고 홍상수를 통해 나온 말들이 의미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어서, 더더욱 감독과 관객의 관계에 호응된다. 홍상수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홍상수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나열한 것들에서 관객은 각자 무엇을 찾아내는가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양측 사이를 유영하게 하는 요즘 홍상수 영화의 특징이 <북촌방향>에 잘 드러나있다.
우리 다 같이 생각놀이를 해볼까요, 하는 듯, 이모저모를 생각해보게 한다. 다른 어떤 감독보다도 영화 관련 글이 많은 영화가 홍상수 영화다. 다른 영화들은 영화를 보는 때의 재미가 중요하다면, 홍상수의 영화는 영화를 보고난 후, 복기하며 얘기하는 때도 중요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뭔가 있는 것처럼 모호하게 흩뿌려놓은 이미지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림이 보기좋다는 것도 일조한다. 색의 차이는 아니다. 색보다는 자태 혹은 표정이라고 할까. 오즈 야스지로 영화가 맘에 든 것도 색감이 아닌 구도나 사람 자체가 좋은 데서 그 이유를 찾는데, 홍상수 영화도 그렇다. 홍상수의 영화 속 사람들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뻔뻔하고, 치졸하고, 비겁하고, 황당하고, 어이없고, 생뚱맞는데도, 그들에게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 착한 구석이 있다.
홍상수 영화를 생각해볼 때, 그림(이미지)이 눈에 확연히 맺혀진다면, 의미들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만들지 못하도록 흩뿌려져있다. 이러한 의미없는 것들, 연결되지 않는 것들을 이어놓아(편집하여) 뭔가 연결짓고 의미를 찾게 하는 시나리오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시작했다. 아니 그 전 <밤과 낮>에서 서울로 돌아와 흰구름 그림 아래서 영호가 꾼 꿈에서 시작됐던 것 같다. 생뚱맞은 꿈은 관객으로는 잘 알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래서 알 것 같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영호를 결코 모를 영호로 만드는 무엇.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은 생뚱맞아 보이는 틈입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에서 더욱 커진 것 같다. 구경남이 후배 부상용의 집에 가 우연히 보게/듣게 된 유신의 목욕장면 이후에 부상용과 유신의 반응, 그리고 아무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구경남의 태도는 관객의 입장에서 쉽게 다 같이 공감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들을 어떤 캐릭터로 말해지는 하나의 역할을 맡은 누구라기보다는, 각기 영화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인물들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면, 이런 긴가민가, 누가 말한 것이 사실이지 하는 의문이 시작된 건, 그의 전작 <오, 수정>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각자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걸 기억하는 기억의 왜곡된 측면에서. <오, 수정>이 외골수적 기억의 편협성을 다뤘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후부터 홍상수는 <밤과 낮>의 꿈 장면이라는 생뚱맞은 장면을 넘어, 등장 인물들이 발설하는 말들의 진실성/부정확성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간다. 홍상수는 점점, 사실의 면면 혹은 시선의 협소함을 다루고 있다.
홍상수의 전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다섯 사람이 봤는데, 목욕하는 유신을 본 장면에서 각기 생각이 달랐다. 홍상수가 기대한 그대로, 어떤 사람은 용감하지 못한 구경남이 아무일도 없었다면서 비겁하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남편 부상용이 오해한다고 말했다. 아내의 순결성을 의식하는 부상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렇게 두 편으로 나눠 얘기가 진행됐는데,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구도 제대로 알 수는 없다는 게 정답이라며, 다섯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접었다. 각기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번 영화 <북촌방향>을 보면서 순간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떠올랐는데, 그 이유는, 청자와 견자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이유가, 사실은 보거나 듣는 입장에서 보면, 행위자(당사자)가 다 말해주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관점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데, 이미 과거가 된 한 사람을 누군가의 시선으로 다시 풀어쓴 일생처럼, 처음과 끝이 있을 수는 없다. 결국 지금 만나는/알아가는 한 사람에 대해 안다는 건, 맹인이 만진 코끼리처럼, 각기 어떤 일면 일뿐이다. 성준과 사귀었다는 경진은 도대체 성준에게 왜 그처럼 집요한 문자를 보내는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어보이는) 성준은 왜 우린 헤어져야 한다고 하는지, 성준이 말하는 공식적인 연애란 게 뭔지, 그러면서 왜 닮은 여자 예전을 쫓아가는지, 성준의 데뷔작 배우였던 중원이 사업하다가 쫄닥 망한 후 영화배우로 소개되는데 중원이 정말 영화배우인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영호, 선배라는 영호가 영화 평론가라는데, 그는 관객에게나 성준에게나, 단지 아는 형일 뿐이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렇듯, <북촌방향>에서는 관객이 내가 궁금한 것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지금 만나는, 옆에 있는 사람이다. 예쁜 사람, 착한 사람, 성질 나쁜 사람 등등의 사람일 뿐이다. 교수라는 보람이 왜 영호를 만나는지도 알 수 없다. 물론 짐작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짐작을 당사자에게 말하면 동의할까? 아마도, 아니라고, 거부하지 않을까. 물론 긍정할 수도 있다. 이것이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어떤 자리나 책임(소명)을 배제한 인물들이라고 할까. 단지 내가 아는 형이고, 내가 아는 선배이고, 내가 알고 있기겐 교수이고, 내가 알기엔 주인이기에, 나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과의 만남은 사실 이런 측면이 있다. 아는 사람인가 싶은 찰나적인 만남이다.
보람이 말한다. 지켜보겠다고, 성준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지켜보겠다고. 성준이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할거라고 말하자, 보람은 또 말한다. 그렇게 살 수 없으면서 왜 그렇게 말했냐고. 여기에서 관객인 나는 성준이 말한 '그렇게'가 무엇이고, 보람이 들은 '그렇게'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홍상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만 말한 게 아니라, 어쩌면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지> 시리즈판을 찍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이유는 제대로 알려주기에는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제대로 알려줄 수가 없어서일테다. 결국 관객이 잘 알지 못하는건, 감독이 제대로 말해줄 수 없어서 제대로 말해주지 않아서가 아닐까.
물론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의미가 이해못할 무엇은 아니다. 그러나 안다 모른다는 타자의 알고 싶지 않다와 주체의 알 필요 없다로 대응하는 건 아닐까. 홍상수 스스로 그의 다수의 영화 속에, 관객들이 이해하지 못할 영화를 계속 찍는 영화 속 감독들을 내세워, 영화감독인 자신의 무엇을 항변하고 싶을까 의문이 되는데, 홍상수 영화를 전부 봤는데, 홍상수의 전 영화를 본 관객인 나는 홍상수 영화를 이해하지 못할 영화라는 측면보다는 왜 홍상수는 이토록 끈질기게, 생활의 반복, 책임지지 못한 말들의 역사, 상실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꿈과 현실의 괴리감, 미래와 현재의 긴박한 간격, 과거와 현재의 밀착을 찍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거기에서 왜 굳이 홍상수의 영화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 사람과 볼 필요가 없다는 사람이 갈라질 것 같다.
나는 늘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반복되는 여러가지를 것들을 의문하고, 늘 답변을 찾는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나는 늘 킥킥 거리는 때가 있다. 그려면서도 늘 밀쳐내는 측면을 인식한다. 그러면서 묻게 된다. 아니, 그러면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홍상수가 본 세상이지 않겠는가 하고. 그렇다면 관객인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가 본 세상을 솔직하게 영화화 한 감독을 알게 됐는데, 그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홍상수는 <북촌방향> 후속작으로 <다른 나라에서>를 부안에서 찍었다고 한다. 영화 촬영을 막 끝낸 후, "아, 영화 찍고 싶다"라고 홍상수는 말했다는데, 내게 홍상수의 영화가 어떤 의미로 다가온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 또한 홍상수의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영화를 보고난 뒤,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나면, 어김없이, "아, 영화 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영화를 찍는 시간은 내게 영화에 대해 말하는 시간인 것인가?
물론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늘 내게 어떤 부채감에서 비롯된 거부담 또한 안겨준다. 세상에 나만 있는 게 아닌데, 홍상수 영화 속 사람들은 늘 자기만 있다. 의무감이 없다고 할까. 실상 당위나 의무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해야할 무엇이 있고, 무엇을 한다. 생각이 단지 말장난과도 같은 유희만은 아닌데, 홍상수영화 속 인물들의 생각은 참 힘없는 유희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와 더불어 (고정된) 역사가 없다. 삶이 결국 개인과 개인들의 만남으로 이뤄진 여행이기도 하지만, 큰 범주 속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개인이기도 한데, 홍상수는 부러 그걸 간과시킨다. 그것이 홍상수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하하하>에서 보여지는 부두의 거지에 대한 인물들의 여러 관점에서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정서적 취향으로서 장단점은 드러난다. 한 인간의 삶이, 자기 자신조차도 감당못하는 현실아닌가 하는 관점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나와 같은 너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관점이다. 그러나 홍상수는 너와 같이 사는 내가 너와 같이 살고자 애쓰는 일면을 똑 잘라버린다. 모방하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너는 별개이다. 나와 너가 연결될 때는 사랑할 때, 만날 때 뿐이다.
이 영화 <북촌방향>은 어떤 영화인가. 영화 감독 성준이 서울에 상경하여 아는 형 영호만을 만나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한다.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고 오직 영호형만을 만나겠다고 한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 인물들에서도 그렇듯, 의식한 한 가지만 할 인물들이 아니다. 영호 형만을 만난 후 다시 거주지로 슝슝 가겠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아주 발랄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영호의 계획은 어긋난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영화배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후 혼자 들어간 술집에서 낮술을 마시다가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된다. 시작이 이러하니 어쩌겠는가. 결국 영호를 통해 영호의 후배 보람, 영호도 알고 성준도 아는 배우(?) 중원, 영호가 잘 가는 술집 소설의 여주인 예전, 가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여인 경진, 세번에 걸쳐 우연히 만난 여배우인 듯한 한 여자, 낮술을 먹으면서 만난 젊은 영화전공자들, 과거 영화인 백종학, 기주봉,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분명 아는 사람인 영화음악인, 그리고 영화감독 성준의 팬인 한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지키지도 못할 다짐으로 시작한 성준의 서울 상경기가, 이 영화 내용이다. 흔히 시간을 흐름을 접하면서 마주하듯,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이라고 시간적 명기가 없다. 만나는 그들도 어제 만나고 오늘 만나는 게 아니라, 매번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물론 그럼에도 사람과 친해지는 데 있어 어떤 진도는 나아간다. 여배우와의 만남을 통해 과거와 현재임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예전의 반복되는 외출에 보람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통해 처음이 아니라는 걸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 외 사람들의 경우는, 굳이 과거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처럼 영화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이미 그들의 말과 표정 속에 드러나 있는 듯하다.
이처럼 성준의 며칠 혹은 매일 처음인 듯한 하루들은 의미짓기가 안된 삶으로 인해 부유하는 듯하다. 입구는 있었는데, 출구가 없어 보인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술에 취한 배우들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술집에 모여 밤을 세워 술을 마시는데, 그들이 참 멀쩡해 보였다. 알고 봤더니, 전작과 달리 실제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누구는 술을 못마시고, 누구는 몸이 안좋아 안마시고, 누구는 개인적 신념으로인해 술을 마시지 않고, 이렇게 기타등등의 이유로 그들은 홍상수의 전작과 달리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나니, 어쩐지 그래보이더라,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홍상수는 매번 어떤 주문, 각오, 명령을 영화 속에 드러내놓고 있는데, 이번에 등장하는 주문은 좋은 사람 만나라, 술 취하지 말라, 일기를 써라 였다. 영화 속 성준이 다짐하는 삶의 방식이다. 예전에게 전하는 성준의 이 말을 듣고서 관객들은 이렇게 생각할까. 그게 뭐 그리 중요해, 하고. 내가 당신 말을 들을 것 같소, 라고. 그러면서도 머리 속에 새겨놓을 것이다. 과거 그의 영화에서 들리는 말들--죽지 않으려면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겠다, 괴물이 되지는 말자, 어두운 곳을 피해라--을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모방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의 발견을 삶을 살아가는 그들처럼, 영화를 본 이들은 알게 모르게 홍상수의 주문과 명령이 귓가에 남게 된다. 이번에도, 술에 취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지, 일기를 써야지,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비록 다짐이 실제 삶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 모르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이상하게 사람들에게 반복될 어떤 반복을 예고하는 듯하다.
북촌방향인 이번 영화 제목을 잠시 음미해본다. 영화 감독이면서도 작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홍상수여서 그런지, 시간이 더 흐른 뒤, 홍상수의 영화는 의미들의 연결선이 될 것만 같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서 시작된 그의 영화 <강원도의 힘>(1998), <오! 수정>(2000), <생활의 발견>(2002),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극장전>(2005), <해변의 여인>(2006), <밤과 낮>(2008),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 <첩첩산중>(2009),<하하하>(2010), <옥희의 영화>(2010), <북촌방향>(2011)을 통해 죽 이어져오는 것은 의미화(영화화) 되는 어떤 날의 행진이다. 다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은 비슷한 사람들이 살아있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영화 제목은 의미화의 한 점이다. 이번 영화 제목은 북촌방향이다. 영어판 제목은 The Day He Arrives이다. 인생의 한 지점으로 제목을 의미화시켜보면, 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는 어디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의미, 그 근방(언저리)이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면, 영어 제목은 매 순간이 시작점이 되는 어떤 그날들의 인생이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홍상수 영화의 큰 테두리는 누구나의 꿈같은 한 삶이다. 머뭇거리며, 좌절하며, 두서없이 주절거리며,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발설하며, 자신도 잘 못하면서 뭔가를 조언하면서, 이번만큼은, 오늘만큼은 잘 살아보겠다고 매번 결심하면서 살아가는, 빈틈 많은 누구나의 한 삶이 아닐까. 아마도 나 역시 어떤 방향성 있을거라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언저리를 오늘도 서성거릴 것만 같다. 하나를 발견하면서, 하나를 수정하면서. 하하하 웃으면서. 그럼 또, 새롭게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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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오수정>과 <강원도의 힘>의 연도순서가 바뀐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해요. 또 이렇게, 오! 수정입니다.^^
제게, 홍상수감독의 영화적 특징은 무척이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우리가 간과한 일상의 안쪽에서 속삭인 미세한 말들, 현재의 결과적우리가 잊어버린 인과적우리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윗글의 '역사가 없다''의무감이 없다'라는 말에 공감을 던집니다. 그는 개인이라는 이물들이 만나서 튕겨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일반적인 영화의 경우, 우리는 히스토리의 인과와 향후예측에 습관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데(심하게는 이 법칙이 손상되면 영화로서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기 쉽다.) 그의 영화에서 만큼은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고 보여집니다. 틀이 없다는 것이 틀이라고 볼수있겠죠.
그의 영화는 스크린에서 나와서 그야말로 살아있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즉 배우가 아닌 관객을 상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었지만, 감독은 손가락으로 '그래 바로 당신에게 하는 말이야, 바로 당신얘기야!'라고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리고 할수있겠습니다. 그의 영화를 보고나면 개인적으로, 웃음과 함께 부끄러움과 나른함이 느껴집니다. 아울러 그 많은 입들이 했던 말중에 그런 말들을 건져낼수 있다는 것은 역시 그의 문예적능력이라고 보아집니다. 이창동감독과 비교하자면, 이창동감독은 그많은 사건들중에 '그런 사건'들을 건져올리는 탁월한 감각이 있다는 것과 견주어집니다.
사적인 견해이라서 보시기에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 홍상수감독이라면, '불편하든가 말든가~'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만.^^
ps:폭주님은 아이디만 보아도 건강하게 잘 지내실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불편하긴요. 홍상수 영화를 보는/본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책속에 님의 견해도 잘 들었습니다. 그래요, 이창동감독과 홍상수감독의 영화는 그런 차이가 있어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살아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말들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아이디만 봐도 건강하게 잘 지낼 것 같은가요? ^^네, 책속에 님의 생각처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책속에 님도 잘 지내시죠? 어느 정도 바쁜 시간이 지나셨으면, 비평고원에서 글로나마 종종 뵈면 좋겠습니다.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