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는 산악숭배사상으로 경주 주변의 내력(奈歷: 경주)·골화(骨火: 경북 영천)·혈례(穴禮: 경주)등 3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다가, 삼국통일 후에는 토함산(東岳), 계룡산(西岳), 지리산(南岳), 태백산(北岳), 공산(空山: 中岳) 등 전국의 5악(五岳)에서 제사를 지내며, 이를 3산5악으로 중요시했다.
특히 대구광역시와 경북 영천군·군위군 사이에 있는 공산(1193m)은 부악(父岳) 혹은 동수산(桐藪山)이라고도 했는데,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와 벌인 전투에서 대장군 신숭겸, 김낙 등 8명의 장군을 잃은 뒤 팔공산이라 고쳐 불렀다.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은 팔공산에는 삼국시대부터 신라 왕실의 원찰지로서 동화사· 파계사· 은해사· 송림사 등 사찰과 염불암· 부도암· 비로암 등 많은 암자가 있었는데, 성리학의 나라 조선시대에도 은해사를 인종의 태실 수보사찰(仁宗胎室守譜寺刹)로, 파계사를 영조의 장수를 기원하는 원찰로 삼는 등 왕실의 보호를 받던 사찰이 많다.
임진왜란 때 유정 대사가 승군을 지휘했던 동화사는 현재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그런데, 팔공산 기슭인 대구시 동구 지묘동(智妙洞)은 고려 태조가 절묘한 발상으로 자기 대신 전사한 대장군 신숭겸(申崇謙; ?∼927)의 넋을 빌기 위하여 지은 절 지묘사에서 유래한 지명으로서 이곳에는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평산 신씨 시조인 장군의 사당 표충재(表忠齋)와 유적이 있다(대구시기념물 제1호).
유적관리사무소 |
순절단 입구 |
후삼국 중 가장 강력했던 후백제 왕 견훤은 927년(경애왕 4년) 10월 견훤은 경주에 쳐들어가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던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했다. 왕의 동생뻘인 김부를 경순왕으로 세운 뒤 회군할 때 신라의 긴급 지원요청을 받고 친히 5000 군사를 이끌고 출전한 고려 태조는 공산동수에서 후백제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으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을 맞았다.
그러자 대장군 신숭겸은 태조의 황금투구와 갑옷으로 갈아입고 수레를 타고 적군을 유인하는 동안 태조는 병졸의 옷으로 변장하고 달아나도록 했다.
후백제군은 고려군을 전멸시킨 뒤 대장군이 태조인 줄 알고 그의 머리를 베어갔는데, 전투가 끝난 뒤 태조는 머리가 없어진 장군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태조는 자기 대신 전사한 장군을 장사지내면서 순금으로 얼굴상을 만들어 함께 묻고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장군의 순금 두상의 도굴을 염려하여 장군의 세거지인 강원도 춘천시 방동, 황해도 구월산, 대구 공산의 격전지 등에 각각 3개씩 9개의 가묘를 만들었는데, 특히 장군이 전사한 팔공산 기슭에는 장군이 흘린 피가 스며든 흙과 의복 등을 수습하여 단을 쌓고 순절단(殉節壇)이라고 했다.
순절단은 표충단이라고도 한다. 그 후 성종 13년(994) 장군을 삼중대광(三重大匡)에서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태조의 묘정에 배향했으며, 예종은 15년(1120) 서경에서 팔관회를 열 때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신숭겸·김낙 두 장군을 추모하는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장군의 죽음은 고려왕조는 물론 조선왕조에서도 충신의 표상으로 받들어졌는데, 고향인 전라도 곡성의 양덕사(陽德祠), 대구의 표충사, 춘천의 도포(道浦)서원, 황해도 평산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 되었다.
순절단 |
충열비각 |
‘표충재평산신씨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 신숭겸 장군의 유적은 표충사(表忠祀) 혹은 표충재라고도 하는데, 입장료는 없다. 커다란 해태상이 지키고 있는 정문을 들어서면 경내가 온통 붉은 황토로 단장된 것이 이색적인데, 입구 왼편에 관리사무소가 있고, 홍살문이 있는 오른쪽으로 가면 담장 안에 순절단이 있다.
장군이 전사한 곳에 만든 순절단은 1.8m 높이의 사각형 석축인데, 그 옆에는 장군의 충절을 새긴 충열비각이 있다. 태조는 순절단 이외에 사찰 지묘사를 지어서 장군의 넋을 위로했지만, 지묘사는 조선조에 들어서 사라졌다.
선조 40년(1607)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지묘사 터에 장군을 기리는 사당 표충사를 짓고, 표충단과 충열비를 세웠다. 표충사는 현종 13년(1672) 사액서원이 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는데, 1988년 후손들이 사당 표충재를 새로 지었다. 표충문을 지나 사당에 들어서면 상절사에 장군의 위패와 함께 호피가죽 위에 큰칼을 짚고 서있는 장군의 영정이 있다. 서원의 동·서재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표충재는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고 단체관광객이 올 때에만 개방하는 것이 조금은 야속하다.
그런데, 표충문 입구 오른쪽에는 커다란 팽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밑에는 ‘태조 왕건 나무’라는 표지가 있다. 하지만, 장군이 순절한 해가 927년이고,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팽나무를 심었다고 하더라도 표지판에 적힌 수령 400년이라는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 오히려 팽나무 옆에 장군의 일생과 업적을 알기 쉽게 그림을 새긴 디귿자형 테마공원이 탐방객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홍살문 |
충열문과 상절사 |
태조왕건 나무 |
전라도 곡성 출신으로서 원래 이름이 삼능산(三能山)인 장군은 궁예의 기병장으로 있던 918년 6월 15일 배현경· 홍유·복지겸 등 4명의 장군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개경으로 천도한 어느 날 장군이 태조와 함께 황해도 평산(平山; 平州)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마침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을 본 태조가 기러기를 활로 쏘아 맞혀 볼 사람 없느냐고 묻자 장군이 나서서 “폐하! 몇 번째 기러기를 맞출까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태조는 날아가는 기러기를 맞추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몇 번째 기러기를 맞출까 장담하는 장군이 미덥지 않아 앞에서 세 번째 기러기를 맞춰 보라고 하니, 장군은 다시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출까요, 오른쪽 날개를 맞출까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태조는 “오른쪽 날개를 맞춰 보거라”고 했는데, 장군이 쏜 화살에 맞고 떨어진 기러기를 살펴보니 과연 오른쪽 날개에 맞았다고 한다.
장군의 활 솜씨에 감탄한 태조는 “저 기러기가 날아온 방향에서부터 날아가던 방향의 곳까지의 땅을 모두 가져라”며 평산 지방을 식읍으로 주고 평산을 장군의 관향으로 삼게 하는 한편, 신숭겸이라 하여 성과 이름까지 하사했다고 한다. 경내 한 가운데에 세워진 장군의 청동기마상은 기러기를 향해서 활을 쏘는 모습이고, 동상 아래와 뒤편에는 장군의 기러기 야사를 그림으로 새긴 조각이 있다.
왕건 길 테마공원 |
테마 전시물 |
팔공산 주변에는 후백제와 싸운 태조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수없이 많다. 우선, 지묘1동과 3동 사이의 나팔고개는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포위하는 신호로서 나팔을 불었던 곳이라 하고, 사당의 뒷산은 태조가 후백제군에게 쫓겨서 달아났던 산이라 하여 왕산(王山), 사당 앞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는 고려군이 후백제군에게 대패한 곳이라 하여 파군재(破軍峴)라고 한다.
또, 파군재 남쪽 산기슭인 봉무동 노인정 개천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태조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고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잠시 걸터앉아서 쉬었던 곳이어서 독좌암(獨坐岩), 태조가 도망치다 들른 마을에 어른은 한명도 없고 아이들만 있었다고 해서 불로동(不老洞), 달아나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반달이 뜬 것을 보고 비로소 안심하게 되었다는 반야월(半夜月), 안심(安心), 태조가 후백제군에 쫓겨서 사흘 동안 숨어있던 굴 은적사(隱寂寺) 등이 있다.
대구시에서는 태조 왕건의 이러한 팔공산 동수전투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 ‘왕건길 8코스’ 35㎞ 구간을 테마 길로 만들어 팔공산의 절경과 역사·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