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변 여행을 한 후 생각나는 게 있어 여기저기 기웃거려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해 보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소수민족 조선족
1. 연변이란?
‘연변(延邊)’의 정식 명칭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연변은 중국 길림성의 동남부에 있는 중국 내 유일의 조선족자치주이다. 연길(延吉), 도문, 돈화, 화룡, 용정(龍井), 혼춘의 6개 시와 왕청, 안도의 2개 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족을 비롯해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고 동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북한과 맞붙어 있는 중국의 행정구역이다. 면적은 42,700㎢로 길림성 총면적의 1/4정도이며, 남한 크기의 절반에 못 미치는데 ‘연변’이란 지명은 연길(延吉)의 연(延)과 변방의 변(邊)을 합친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연변은 ‘연길 주변’을 통털어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연변의 총인구는 200만 명 정도이며, 그 중 조선족이 40%인 80만 명 정도로 중국 전체 조선족의 40%가 연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족(漢族)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소수민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그 비중에 따라 자치구와 자치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데 연변도 1952년 자치구로 편성되었다가, 다시 1955년에 자치주로 변경되어 조선족의 민족자치가 인정되었다. 연길(延吉.옌지)은 연변 지역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며 현재 인구 40만 명 정도로 한족과 조선족 등이 살고 있고 그 중 조선족이 50% 정도이다.
2. 중국의 소수민족 (참조 - http://blog.daum.net/biketravel/101)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은 중국 전체 인구의 7% 정도인데 최대의 소수민족인 장족은 1,600만 명이 넘으며 그 다음이 만주족, 회족, 묘족, 위구르족 순이다. 인구 백만이 넘는 소수민족은 17개이며 조선족은 그 중 13번째로 통계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현재 중국 내 조선족의 수는 200만 명에 채 못 미치며 그 중 90% 이상이 동북삼성에 살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漢族)은 중원지방에서 출발하여 황하문명을 이루며 중화문화의 우월성을 가지고 지금까지 주변국가에 많은 영향을 주고, 타민족들을 계속 흡수, 동화시켜 왔다. 중국의 민족 분포를 보면 93%가 한족이고, 나머지가 소수민족이지만, 소수민족의 인구수가 1억 명에 가까워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다. 더구나 중국은 남한 면적의 약 100배인 영토를 갖고 있지만 이 가운데 60% 이상이 소수민족의 거주 지역으로 이들 지역은 대부분 변방지역으로서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군사적 요충지여서 중국 정부로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중국의 행정구역은 22개의 성省(대만성 제외)과 북경, 천진, 상해, 중경의 4개 직할시, 5개의 자치구, 그리고 홍콩과 마카오 2개의 특별행정구로 되어 있는데 5개의 자치구인 내몽고, 신강위구르, 서장티베트, 광서장족, 영하회족자치구는 모두 소수민족이 그 지역의 대다수인 곳이며, 그 아래에 31개의 자치주와 자치현, 그리고 시가 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소수민족에게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하여 이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써 왔다.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여러 소수 민족이 국가 사무 관리에 평등하게 참여하게 했으며 자치지방정부의 주석은 모두 소수민족의 인원이 담임하도록 했다. 또 소수민족을 모욕하는 칭호나 지명 등을 모두 없애는 등 인종차별과 소수민족 압박에 반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소수민족의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소수민족이 그들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키도록 하고 있다. 현재 17가지의 소수민족 문자로 100가지 정도의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한 자녀만 허용하는 한족과 달리 두 자녀 출산도 허용하며, 소수민족의 정체성 보존에 우호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대학에 입학할 때는 우대점수를 주기도 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처벌하기도 한다.
중국정부는 이렇게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펴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족(漢族)을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꾸준히 이주시키는 정책을 통해 이들 지역의 중국화를 오랫동안 추진해 왔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중국인으로 살지만 중국인에게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몽고와 신강위구르, 그리고 서장티베트 지역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지난달에도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는 유혈충돌이 생겨 4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만약 이들 지역이 분리 독립한다면 중국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 이것이 중국 정부가 이들 지역에서 무력 진압을 서슴지 않는 이유다.
‘변경이 독립하면 중국 전체가 무너진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는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문제에 줄곧 강경한 입장을 취해 왔다. 1950년 티베트를 병탄하고 서장(西藏)자치구를 설치한 이후 60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티베트의 독립 요구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이 그 대표적 예다. 1959년에 일어난 대규모 봉기에서 희생된 티베트인은 8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수민족문제는 중국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으며 중국분열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최근 개방에 따른 민주화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은 갈수록 중국의 분열을 가속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3. 동북3성과 동북공정
그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족은 주로 동북부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살고 있으며 자체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 조선족은 18세기 중엽 이후 중국의 동북3성 지역으로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고 20세기초엔 일제의 압박을 피하여 다수의 조선인이 동북3성으로 이주하였다.
‘동북(둥베이)3성’은 랴오닝(요녕)성, 지린(길림)성, 헤이룽장(흑룡강)성을 말하며 중국의 동북부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의 최대도시가 랴오닝성의 선양(옛날 이름은 봉천)으로 인구 400만 명이며, 그 다음이 헤이룽장성의 하얼빈(250만), 길림성의 창춘(200만) 등이다. 동북3성은 과거에는 만주로 불렸던 지역이다. 현재 인구 약 1억 명으로 한족(漢族)이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외에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의 소수민족들이 거주한다. 지리적으로 북한과 인접해 있어 탈북자들도 다수 있다. 얼마 전에는 중국이 북한의 급변사태 시 대량으로 탈북하는 주민을 막기 위해 동북3성을 막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동북3성이 주목받는 이유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데다 지리적으로 러시아, 몽골, 북한 등과 인접해 있는 천혜의 교통여건을 지녔기 때문이다. 육상과 해상으로, 몽골과 남북한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동북아 물류거점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크다고 하겠다.
동북3성은 대다수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고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한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한족(漢族)과 한국의 한민족 및 여러 북방 민족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세워진 곳일 뿐만 아니라 중국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여진족)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동북3성은 청나라 멸망 이후에는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만주사변으로 한때 일본에 점령되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세워지기도 했으며 1949년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최근 들어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이름으로 향후 한반도에서 예상되는 정세 변화가 중국 동북 지역에 미칠 정치적, 사회적 영향과 충격을 차단해서 동북 지역을 안정화시키고, 동북아 국제질서에 적극 대처하기 위하여 중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완결하려 하고 있다. 조선족이 중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가져 동요하거나 이탈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방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고조선사, 부여사, 고구려사, 발해사는 모두 중국사’ 라는 논리를 일반화하여 ‘만주는 한민족의 고토(故土)’라는 한국의 역사인식에 대응하고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역 사이에 역사적 관련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역사왜곡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4. 간도(間島)는 어디일까?
오랫동안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일대를 <간도>라고 불러왔는데 ‘간도’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해 놓은 곳은 없다. 일설에 의하면 19세기 초부터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몰래 땅을 일구었는데 그렇게 일군 땅을 간토(墾土)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두만강의 중간에 굉장히 큰 모래톱이 생겨 조선농민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그 땅을 <간도間島>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 범위를 넓혀 연변 일대를 간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지금은 두만강 북쪽을 북간도(또는 동간도)라고 칭하고,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하류유역인지린성 창바이 조선족자치현에 해당되는 곳을 서간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간도지방이라고 하면 북간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간도(間島)’라는 지명은 이 지역이 청(淸)나라의 발상지에 가까워 청나라 왕조가 봉금(封禁)의 땅, 즉 만주족 이외의 이주를 금하는 무인지대로 삼았으므로, 간도란 이름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있는 섬과 같은 땅’이라 해서 붙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처음엔 조선족이 간도의 중국 땅으로 아침에 와서 농사하고 저녁에 돌아가고 하다가 나중에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 장기적으로 정착하여 거주하였다. 처음에는 황무지를 일구어 밭농사를 짓다가 1900년도에 용정 동북부의 세정벌과 용정남부의 대교동에서 벼농사를 짓는데 성공한 후로 연변에 벼농사가 보급되었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을 강박해 ‘을사보호조약’을 맺자 많은 의병과 애국지사 그리고 농민들이 망국의 슬픔을 안고 고향을 떠나 북쪽의 연변 등 중국의 동북3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906년도에 조선족 반일지사 이상설이 용정에서 반일사립학교인 서전서숙을 꾸리고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과 반일 계몽교육을 실시한 이래 명동, 창동, 정동, 광성 등 많은 조선족 반일사립학교가 연변 각지에 우후죽순처럼 건립되었으며 조선족의 반일투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간도는 조선민족의 항일독립운동과 투쟁의 기지가 된 것이다.
일제의 조선강점 이후 연변의 조선족 인구는 한때 동북3성 총인구의 60%를 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46년 중국공산당은 토지개혁에 뛰어들어 조선족 농민들은 연변 땅의 주인이 되었으며 1952년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 아래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정식으로 창립되었고 주덕해 초대주장(州長)이 자치구의 창립을 선포했다. 이어 1955년 12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고치었으며, 백여 년 동안 압박에 시달리던 조선족은 마침내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자치지방의 주체민족이 되었다.
5. 연변 여행의 감회
연변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모든 간판에는 한글과 한자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한글은 항상 간판의 위쪽에 쓰여져 있다. 어느 간판에나 한글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면 조선족자치법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더불어 이곳이 조선족의 생활터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조선 말기엔 경제적 이유로, 또 일제강점기엔 정치적 이유로 한반도에서 많은 민중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연변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또 민족교육의 현장으로 연변은 우리 근대사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기에 봉오동 항일전승지, 청산리 항일전승지, 일송정 등의 조선족 항일 유적지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한중수교 이후 취업과 결혼 등의 이유로 한국으로 나가는 조선족들이 늘어나면서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인구가 감소하여 일정 비율 이상의 소수민족이 거주해야 한다는 자치주의 규정에 따라 자칫하면 자치주의 지위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남한의 눈부신 경제 발전으로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의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하며, 한국으로 간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부쳐준 돈으로 연변의 경제가 좋아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수많은 조선족이 한국으로 나가게 됨에 따라 조선족의 가정이 붕괴되는 부작용이 생겼다. 한국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조선족의 지위를 위태롭게 한 것이다.
부모가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가고 조선족 처녀들이 한국으로 시집을 가면서 연변엔 장가 못가는 노총각들이 생기게 되고 그나마 남은 청년들은 경제적 기반이 약한 연변을 떠나 중국의 다른 대도시로 나가 시골에는 어린아이와 노인들만 남게 되었으며, 노인들에게 맡겨진 아이들의 교육문제, 청소년 비행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를 안내하던 조선족 가이드 청년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들의 결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10년째 한국과 미국으로 나가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씁쓸한 얘기 하나는 남한으로 돈을 벌러 갔다가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이 생기고 오랫동안 가족이 헤어져 지내는 탓에 가정이 파탄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근래 들어 연변의 조선족들이 남한을 그리 좋게만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연변의 조선족 청년 백청강이 ‘위대한 탄생’이란 TV프로그램에서 노래로 1등을 하는 것을 보고 중국과 달리 조선족을 차별하지 않는 남한에 대하여 다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연변지방으로의 중국여행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중국 내의 조선족과 대한민국의 현 위치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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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가네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정가네
첫댓글 샘, 이 글은 왜 경국모에 안 올려 주시는 겁니깡?
아, 맞아. 거기에도 올리겠습니다.^^
아 ~ 네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그렇군요 그 간도땅이 민족주의 사랍학교를 세워서
반일 계몽을 했었던 곳이 연변이었네요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참고로 하세요.
중국의 넓은땅은 정말 부러워요...백청강이 기여한 바가 크네요....^^
맞아요. 백청강이 역할이 정말 큰 것 같았어요.
정리는 아무나 하는게 아님을 알았습니다.
복습 잘 하고 갑니다.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조금은 도움이 되었길 빕니다.
우와
우선 너무 긴 글에 부담이 살짝
그래서 읽지도 않고 아래로 쭈욱
우선 댓글부터 읽는 버릇
제가 책을 뒤쪽부터 읽는 습관이 있거든요
엥이... 시간 날 때 한번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소수민족은 2명 자녀 허용해서 중국이 득을 본다고 합디다. 특히 조선족은 한국사람들 관광오면 가이드가 되므로 아주 큰 덕을 본다더군요. 당나라 때도 외국인 과거제가 있었죠. 최치원처럼...
조선족 가이드 자리도 이제 점차 한족 가이드로 바뀌고 있다고 해요. 관광가이드가 연길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직업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를 안내하던 조선족 청년의 말을 들으니 여름 한 철만 가이드 일을 하고 다른 때는 또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연변을 가기전에 읽어도 도움이 되겠지만, 저처럼 다녀와서 읽어도 더 새록새록 읽어집니다. 긴 버스여행에서 가이드 분이 열심히 이야기 할때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인지라 한국가면 울아이들에게 이야기 해 주려했는데 한국도착하는 순간 싸아아악 잊어버렸었는데 ....ㅎㅎㅎ 정가네님덕분에 아주 중요한 사실들이 재발견되었습니다. 프린트하여 울 아이들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늘... 항상.... 고맙습니다*_*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잘 다녀오셨어요?^^
정가네님 감사드려요
직원들중 십여명 이상이 조선족인데 직원 교육시 좋은자료로 사용할려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예견하심 대단하심니다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어이쿠, 이게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에도 특집 기사가 나왔더랬지요.
중국인 관광객이많아 양주 투어시 좋은자료감사합니다
아, 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