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17. <완도 고금 쏭카페 -충무사(이순신유적지)> -갑진년, 아들의 도전을 응원한다.-
갑진년의 새해 첫 날을 맞았다. 결이 다르고 색깔은 다르지만 늘 시작은 있었다. 그 처음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고 겪었을 청춘은 각자 다른 색깔로 나름대로의 추억이 있다. 몇 해 전만해도 우리 부부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12월의 마지막 밤을 설쳤는가 하면 일출을 보기 위하여 새해 첫날 새벽을 털고 먼 길을 나서기도 하였건만 그 또한 청춘이었기에 가능했었다. 이제는 찬란한 해는 내일도 모레도 계속 바다 수평선 위거나 산등성을 넘어 떠오르겠거니 무심해져간다. 뿐만 아니라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만 있다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처음이 있었다. 상대방의 단점까지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애틋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단점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모든 일상은 당연하게 생겨나고 해결되어지는 것이어서 함께 있으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는 서로가 공유하지 못한 가운데 힘든 일은 없었는지 전혀 궁굼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한 집에 살면서도 무심한 듯 데만데만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살아온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치부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나이 들어 보니 이제야 조금씩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진다. 함께 40여년을 살아온 부부라도 다른 성향과 성격을 지니고 각자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분명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헸었다. 이렇게 간단한 생각을 간단하게 할 수 있기까지 늘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항상 외롭고 쓸쓸했었다. 가정사의 큰 문제거나 개인적인 자잘한 일에 남편의 관심 없이도 매사에 그려러니 하면서 해결하고 때로는 묻히고 살다보니 세상은 늘 혼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 그 간절한 자리에 뜻밖의 아들이 있었다. 부부가 되어 엇박자였던 발걸음이 맞추어지고 무심함도 이해되기까지는 얼마만큼의 세월이 필요할까? 그토록 간절했던 그곳에 아들이 파고들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분명 있다는 것을 알게 했고 어떠한 경우라도 내 편 되어 줄 사람이 있어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그렇게 스윗하고 자상한 아들 덕분에 지난 한해도 충분히 행복했었다. 그리고 새해 첫날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들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이순신장군은 전쟁 중에도 어머니를 뵈러 갈 때에는 반드시 머리에 염색을 하고 가셨다고 하는데 자신의 나이 듦을 어머니께 보여드리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렇다. 아들의 한 올 한 올 하얗게 쉰 머리카락을 발견하게 되면 가슴이 아프다. 청춘들의 결혼이 늦어지는 시대라지만 내 아들이 이토록 결혼이 늦어질 줄은 몰랐다. 수시로 아들의 결혼을 생각하면 걱정과 염려가 되었었는데 문득 아직까지 미혼으로 있어 준 아들에게 감사가 되었다. 40여 년 동안 말 한 마디의 살가움도 인색한 것은 물론 전구 한 알도 켜져 있는지 눈을 감고 있는지조차 집안일에 무관심했었던 남편의 자리에 아들의 자상함이 파고들어 그 세월을 보상받게 하였다. 물론 늦은 나이까지 미혼으로 있어주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어릴 때 특별히 울지도 않았고 최소한 부모를 향해 화를 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매사에 거부는 물론 말대꾸 한번 해보지 않고 자라주었기에 내 아픈 손가락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아들이 “엄마가 원하면 다해줄게” 크고 작음이 아니고 많고 적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면 무조건 다해주겠다고 표현해주는 사람은 아들밖에 없었다. 내 돈 내산 하면 되는 별거 아닌 것이라도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 했을 뿐인데 기억해두었다가 언젠가는 이벤트처럼 맛보게 하고 소유하게 해서 가슴 벅차고 코끝까지 찡하게 만드는 아들이 턱 하니 있었다. 아들의 자상함으로 인하여 세상이 이토록 따뜻할 수 있음을 알았다. 힘들고 버거울 때 기대어도 된다는 것도 알았다. 내게 가족이 있어서 든든하다는 것도 알았다. 하마터면 인생 끝까지 혼자라는 생각으로 살아갔을 나에게 사람과 더불어 사람다움을 깨닫게 해준 아들이 일찍 결혼했었더라면 가정을 꾸리고 가장으로써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도 물론 좋았겠지만 결혼이 늦어진 덕분에 내가 받는 깨달음과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이다. 여전히 새해 첫 날이라며 달려와 주었다. 새해 첫날 맑은 날씨는 아니지만 툭 트인 바닷가에서의 차 한 잔과 드라이브를 계획하고 완도 고금을 찾았다. 인터넷으로 전망 좋은 카페에서 우리 세 식구의 새해맞이를 하고 그 곳에서 6km쯤 떨어져 있는 충무사<이순신유적지>를 방문하였다. 충무사는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에 있는 이순신(李舜臣) 유적지로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장군 이순신이 본영(本營)을 둔 곳이며 이를 근거지로 왜병 30만 명을 무찌른 전승(戰勝)유적지이다. 특별히 이곳을 찾은 이유는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했을 때 이곳으로 시체를 옮겨와 봉안하였다가 아산으로 이장할 때 거처간 곳이라 하여 뜻 깊게 여겨졌다. 충무사는 해안 깊숙이 들어 앉아 참 아늑하고 따뜻했다. 갑진년 첫날의 여행은 온통 평온함과 감사였으니 여우네 가족 모두의 건강 또한 뜨겁게 응원해 본다. 아울러 세상에는 참으로 힘든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남편이 되는 일과 좋은 부모가 되는 일 또한 그렇다. 그러한 힘든 일에 아들이 거침없이 도전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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