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썼던 글인데(『세계의문학』 1995 겨울호)
소 이야기입니당. 이명님 글 보니 생각이 나설랑.
문장도 옛날투고 넘 길어서 눈이 좀 아플 겁니다.
복사해서, 프린트해서 보시면 좀 편할라나.
우선 문단마다 한 줄 띄워 둘께요.
여긴 왜 파일 첨부가 안 된담, 에궁....
<푸줏간의 물고기>
퇴근길, 정육점에 들러 쇠고기 한 근을 산다. 오늘 저녁 그 붉은 고기는 알맞게 구워지거나 싱싱한 육회가 되어 식탁에 오를 것이다. 어른들은 큰 덩어리를 골라 된장을 바르고 마늘을 넣어 쌈을 싸 우걱우걱 씹고, 아이들은 작은 놈을 집어 아작아작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즐거운 저녁 식탁에서 우리의 대화는 고기의 의미나 그것이 애초에 가졌던 생명과는 먼 곳에 있으리라. 아무도 그것이 소의 시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문득 그 생명을 안스럽게 생각하고 씹던 고기를 뱉아내는 일도 없으리라. 일상의 배후에 도사린 피의 냄새는 맛깔스럽게 요리된 쇠고기의 부드러움에 묻혀버린다. 현대인의 일상사란 그런 것이다. “뒤틀어 짠 문명의”(함민복, 「한강유람선」) 한가운데를 살아가지만, 현대인은 의외로 그러한 사실에 무심하다. 우리는 자본의 논리에 너무나 잘 길들어 있어서 그 음모를 파헤치기는 고사하고 거기서 벗어난다는 생각조차 두려워한다. 일상인들에게 고기가 음식 이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불안하다. 그것은 단지, 감미롭게, 부드럽게 씹히면 되는 것.
그러나, 시인이 씹는 고기는 질기다. 시인은 “원통형으로, 타원형으로, 나선형으로 턱뼈를 돌리며 질긴 고기를 씹고 있다”(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4」). 때로 “질긴 고들개 씹다가…가만히 뱉아”(송재학, 「고기」)내기도 한다. 시인들의 고기는 질기다. 그것은 고기 이미지가 다른 존재의 생명마저 아랑곳않는 “먹고 싶다는 지긋지긋한 욕망”(엄원태, 「내 병, 욕망의 아이러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배후에는 자본주의적 삶이 도사리고 있고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이 숨어 있다. 욕망을 파는 정육점은 “공장들”(송찬호, 「무제 3」)과 동의어며, “世紀末의 발광”(최승호, 「석양의 하루살이떼」)이 연출되는 무대다. 고기는 “처형당한 간첩의 시체”(이성복, 「易傳 1」)나 “함부로 지나친 삶”(장옥관, 「배시내 가는 길」), “좀벌레가 먹은 책”(하재봉, 「새로운 푸줏간」)에 비유된다. 이와 같이 고기 이미지는 한 시대의 질곡과 개인사, 정신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고기/정육점/푸줏간의 상상력이 한 시인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여러 시인들이 이와 관련된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1990년대 시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즈음의 시에는 “고기 굽는 연기가 듬성듬성 섞이”(조은, 「쓰레기 하치장 1」)는 정도가 아니라, “언제부턴가 숯불구이 고깃집이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장옥관, 「배시내 가는 길」)했고, “푸줏간 앞에 긴 줄을 서”(하재봉, 「푸줏간에 가기 위하여」)는 형국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은 시를 읽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1990년대 들어 시인들은 다양한 목소리로 수많은 이미지를 창출하여 현대시의 폭을 넓히는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었지만, 일부 시인들의 성공적 형상화 이면에는 그것이 공적 언술보다 사적 상징으로 읽히는 불안한 징후도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개성적 문체는 중시된 반면에 당대를 대변하는 시대적 문체는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는 1980년대에 비해 1990년대를 대체로 그렇게 읽어왔으니, 개별성/차별성은 중시되고 전체성/유사성은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셈이다.
고기와 관련된 이미저리는 이러한 시읽기의 편향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고기/정육점/푸줏간이라는 시적 대상이 단순한 소재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거느리는 이미저리와 의미망이 문체적 특성을 상당 부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인간화/반생명성으로 대표되는 고기/정육점/푸줏간 이미저리와 의미망은 시인의 개성적 문체와 만나면서 비애와 절망과 환멸, 자조와 독설과 풍자의 문체를 생산해낸다. 그것은 전통적인 서정성에서 한 걸음 비켜선 산문성/중얼거림/그로테스크/매저키즘과 배를 맞대고 있다. 이러한 문체적 특성은 당연히 당대의 시정신을 반영하는 것인바, “순간적 인식과 찰나적 망각을 종용하는…정서의 겉절이 시대”(함민복,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는, “나는야, 푸줏간 주인이 되어버렸구나”(진이정, 「생각에 대하여」)라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시인으로서의 천형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저주까지 함께 받은 시인들의 절망적 몸부림의 표출인 것이다.
그런데 왜, 고기/정육점/푸줏간이 1990년대에 와서 새삼스레 시적 대상으로 부각된 것일까? 도시적 삶이 확산되고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면서 고기를 먹는 일이 많아졌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일상적 경험이 시의 제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고기는 ‘먹는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과 사회적 구조를 상징하는 적절한 제재가 되기도 한다. 1980년대를 떠받치고 있던 이데올로기 문제가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나자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1990년대의 주요 테마로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고기의 육체성/반생명성은 그것을 형상화하는 중심 제재로 활용된다. 사육되고 도살된 존재,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망은 자본주의 사회의 실존적 상황과 맥이 닿으면서 인간의 일차적인 욕망인 식욕과 성욕을 아우르기 시작한 것. 1990년대의 정육점이 1980년대 유곽의 자리에 세워지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한 일이다.
화장한 문둥이 얼굴을 들고
미소 짓는 자본주의의 밤에
붉은 등 싱싱한 정육점에 걸려 있는
늙은 창녀의 고깃덩어리
피를 흘린다
ꠏꠏꠏ최승호, 「赤身」부분
“자본주의의 밤”을 배경으로 시인들이 차린 “정육점”은 1970, 1980년대 한국사회의 질곡을 상징하는 “유곽”의 계승처다. 정육점과 유곽은 여러 모로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둘은 순수함과 성스러움이 상실된 부정한 공간이면서, 식욕과 성욕이라는 원초적 욕망을 물질적으로 보상해주는 공간이다. 정육점과 유곽의 “붉은” 색은 그 욕망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음을 암시해준다. 붉음은 부패와 상처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절망으로 이어진다. ‘붉다’는 색채감은 고요한 서정성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검붉은 조명 아래 언어는 절망적으로 뒤틀린다. 들끓는 동사와 속화된 명사가 간음하는 공간이 유곽이고 정육점인 것이다.
그러나, 정육점은 유곽보다 한층 더 절망적이다. 유곽은 그래도 타락한/처절한 생명이나마 남아 있는 공간이지만, 정육점은 모든 존재가(주체까지도) 죽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이성복,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위해 노래할 실낱 같은 사랑이나마 있었지만, 1990년대에는 “줄줄이 꿰인 채 돌아가며 익혀지는 통닭”처럼 우리의 “삶이 이미 죽어 있”(최승자, 「서역 만리」)는 상태여서 그 어떤 희망도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유곽이 죽음이 유보된 ‘치욕’의 공간이라면, 정육점은 죽음의 냄새로 뒤덮인 ‘종말’의 공간이다. 하여, 유곽에서는 대상을 인식하는 비판적/반성적 자아가 존재할 수 있었지만, 정육점에는 왜곡되거나 무력화/물화된 자아, 대상화된 자아만 나타난다. “칠십년대는 공포였고/팔십년대는 치욕이었다”(최승자, 「세기말」)고 노래할 때 그 공포와 치욕은 저항과 치유의 가능성을 동반하는 역설적 의미를 품고 있었으나, 절망의 한계점에 다다른 1990년대의 죽음/부재의 의미망은 단지 그것으로 끝이다.
나무는 노을만 바라본 듯 금빛 가운데 무너져
저녁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네
저녁은 곧 베어먹을 수 있는 고기처럼 검붉어
낯설은 비애의 냄새로 가득한 정육점만
길가에 즐비하네
ꠏꠏꠏ송재학, 「오래 전부터 저녁은」부분
정육점이라는 공간이 만나는 시간은 “저녁”이다. “저녁”이라는 시간은 폭넓은 이미저리와 결부되어 있지만, 정육점과 만날 때 그것은 종말론적 의미망, 파탄의 시간을 가리킨다. 저녁은 “죽음과 비슷한 옷자락을 갖”(송재학, 「오래 전부터 저녁은」)춘 시간이다. 저녁은 “노을”로 상징되는, 상처가 문드러져 집결되는 시간이며 밤으로 가는 마지막 도정인바, 그 밤은 언젠가 새벽을 맞이하는 어둠의 알레고리가 아니라 영원한 끝/종말의 은유이기 때문에 저녁은 비애와 절망이 절정에 달하는 위태로운 세기말의 한 순간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정육점의 저녁에는 자연이나 유년으로 경사하는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이나 명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야말로 욕망의 광기만이 존재한다. 인간성은 훼손되고 삶은 무의미해진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뼈를 발라낸/도살당한 고깃덩어리와 씹”(이연주, 「유토피아는 없다」)을 하는 간음의 시간과 “사흘에 한 번씩 고기를 구하러 가는 일 외에는/그가 하는 일이라곤 지상에 아무 것도 없”(엄원태, 「정육점 사내」)는 무의미한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은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최승호, 「몸」)과 “채울수록 허기지는 쾌락”(김신용, 「하이에나의 숲」)에 힘입어 급속히 확산된다. “절로 들어가는 길”에조차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엄원태, 「표충사 가는 길」), “미미헬스클럽과 싸롱 장미빛 사이”에도 “정육점의 칼이 빛난다”(최정례, 「정육점에서 1」). “굶주린 식욕”은 “낮과 밤”(이연주, 「흰 백합꽃」)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시간은 저녁에 이르며, 세계는 유곽의 탈을 벗고 정육점으로 바뀐다. 세상의 모든 저녁, 욕망의 정육점에는 “몸뚱아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엽기적인”(김언희, 「트렁크」) 모습만이 인간의 자취로 남는다. 이같은 상황은 시적 대상을 물화하는 한편, 그러한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적 주체의 대상화와 해체를 수반한다. 주체조차 “푸줏간의 살덩이처럼/천만근 무거운 살주머니로/밤새도록 대못에 걸려/눈알을 디룩거”(김혜순, 「기다림」)리는 수동적이고 물화한, 마조히즘적 존재로 표현된다. 생명의 본질적 의미는 왜곡되고 주체와 객체가 전도되는 양상이 그로테스크한 몰골로 정육점 냉동실을 채운다.
……태어나보니
냉장고 속이었어요
갈고리에 매달린 엉덩짝이 나를
낳았다는데 무엇의
엉덩짝인지
아무도 모르더군요
지하식품부
활짝 핀 살코기 정원에서
고기가 낳은
고기
……날 때부터 고기
였어요
육회와 수육
창창한
肉切機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고
정다운 갈고리 아버지
나를 꿰어 들고
계셨어요
ꠏꠏꠏ김언희, 「태어나보니」전문
1990년대적 존재는 태어나면서 이미 “냉장고”/정육점에 던져진 사물에 불과하며, 어디서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생아다. 게다가 한 존재를 처음으로 세계와 대면시켜주는 “아버지”조차 “갈고리”라는 사물에 불과하니, 그의 미래는 단지 “창창한/肉切機의 세월”일 뿐이다. ‘고기’를 화자로 내세워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는 신성한 생명 탄생의 의미가 훼손된 불임의 시대, 인간을 딛고 물질이 주체로 나서는 왜곡된 현실의 모습이다. “낡아빠진 침대 스프링이/저혼자 자위를 하고/당겨올리면/착착 맞물려 올라오는 세기말의/크리넥스”(김언희, 「HOTEL ON HORIZEN」)가 보여주는 물화된 세계. 이런 세계에서 온전한 생명이란 처음부터 존재할 수가 없다. 삶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누구신가 내 코에/자동 오프너를 걸고/소란스레/내 뚜껑을” 열어, “단숨에”, “뼈째 먹어치”울지도 모를 운명에 처한 “꽁치 통조림”(김혜순, 「無作爲」) 같은 존재. 태어나보니, 이미, 통조림 고깃덩어리.
모든 존재가 사물화(事物化/死物化)하는 정육점의 배후에는 푸줏간이 있다. 푸줏간은 정육점의 이미지와 동궤에 놓여 있지만 보다 강력한 살육의 의미를 수반한다. 고기를 파는 정태적인 공간으로서의 정육점 뒤에는 살육이 무자비하게 감행되는 동태적인 공간으로서 푸줏간이 자리한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생명과 음식을 구별하지 않는다”(김기택, 「마장동 도축장에서」). “뼈는 토막쳐져 내장은 발발이 끄집혀 끌려나와”(이연주, 「흰 백합꽃」), “순서 없이 통과 리어카에 포개”지고 “쓰레기처럼 길가에 엎질러져 쌓”(김기택, 「마장동 도축장에서」)이는 곳이 푸줏간이다. 이곳에서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푸줏간의 경제원칙은, 누구나 죽어서 살코기를 남긴다는 것”(하재봉, 「푸줏간 앞에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죽어 고기가 된다”(하재봉, 「푸줏간을 위하여」)는 명제에서 인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 또한 “팔꿈치가 나가고 무릎뼈가 나가고/몸통의 통사구조도 머지않아 해체될 것이다”(이연주, 「성자의 권리 6」).
푸줏간 같은 이 세계에서, 결국 음식이 되지 않는 존재란 없다. “곰국 속의 고깃덩어리처럼/物의 열반에 취해 허우적거리는 우리들 욕망”(손진은, 「콩나물」)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심지어 인간까지도 원래의 본질을 물화/음식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음식은 인간의 모든 욕망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생존의 본능을 충족하는 차원에서 비켜나 자본주의 시대의 물적/정서적/지적 욕망의 대리만족 수단으로 왜곡되어 나타난다. 음식 중에서 고기는 특히 살덩이에서 파생되는 육체성/반정신성/비초월성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주 시적 대상으로 떠오른다. 하재봉의 작품이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정신의 축적인 책도 또한 욕망이라는 선상에서 음식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며, 그런 의미에서 서점/출판사는 푸줏간과 다를 바가 없다.
부드러운 살점과 염통이나 허파 같은 내장이 아니라
검은 잉크로 인쇄된 글자들이
<정신>과 <영혼>이라는 양념을 치고
<창조적 상상력>이란 수식어로 버물려서
누군가 빨리 먹어치우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ꠏꠏꠏ하재봉, 「새로운 푸줏간」부분
책읽기는 “먹어치우기”와 동의어다. 신간 서적은 “푸줏간의 뉴 스페셜 고기”.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것”일수록 “최고의 인기”(하재봉, 「새로운 푸줏간」)를 누린다. 책읽기도 하나의 욕망이며, 그런 까닭에 정신적 가치보다 교환가치에 얽매여 있다. “정신/영혼/창조적 상상력”조차 본질적 의미를 잃고 “양념/수식어”라는 “인기”에 편승하여 상품/음식의 소비에 기여한다. 더욱이, 우리가 먹는 음식이 살육의 칼날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는 고사하고 욕망의 대열에서 낙오될까 전전긍긍, “아귀처럼 아귀아귀 먹”는 일에 열중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한 시대. “온갖 양념들이 당신의 이목구비를 버무리는 세상이니”(최승호, 「아구찜 요리」) 일상에서 만나는 음식은 다만, 우리의 기갈든 욕망일 뿐이다. 음식/고기는 본질이 거덜난/왜곡된 존재의 표상이며, 푸줏간은 그것을 조직적으로 양산하는 공간인 셈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푸줏간에서 일어나는 살육 자체가 아니라 살육의 방법에 있다. 방법/과정의 비인간화는 상태/살육의 반생명성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고기맛을 위해 여러 가지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는 성석제의 「비엔나 숲의 이야기」, 「철판 위의 오리」 같은 동물시편들은 그 천연스런 화법에도 불구하고 섬찟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방법의 비인간화는 자본주의 시대의 일반적 현실로 통용되고 있다. 소에게 물을 먹이고, 닭의 산란을 부추기기 위해 빛을 조작하는 일은 일상사가 된 지 오래다. 그것이 “물 젖어 퉁퉁 불은 고깃덩이로 푸줏간 저울대에 올려져도”(김신용, 「소」)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교묘하게 신선한 것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고기의 신선도를 소비자들에게 강조하기 위해/살점에서 금방이라도 피가 뚝,/떨어지는 것처럼 연출하는/붉고 푸르스름한 조명”(하재봉, 「새로운 푸줏간」)은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소비 행태를 드러내는 상징인 것.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라면 타자의 고통이나 자아의 비인간화쯤이야 가볍게 외면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것을 풍자하기 위해 하재봉은 언어를 늘어놓고, 성석제는 능청스런 어조를 사용하며, 김기택은 냉혹한 관찰자적 시각으로 사물이나 관념을 주어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틈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갈증 속으로 물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음매에 슬픈 울음 속 떨림의 사이사이
깊고 가는 빈틈으로 물이 채워진다
이윽고 울음에서 떨림이 없어지고
헉헉거리며 울음에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목구멍을 틀어막은 완강한 힘이 울음을 채운다
울음은 이제 형식적으로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ꠏꠏꠏ김기택, 「소 2」부분
“형식적으로 입만 크게 벌리고 있”는 도살 직전의 소는 곧, 현대인의 자화상인 것. 살육 방법의 비인간화는 인간에게 본원적으로 내재된 광기를 자본주의 사회가 끄집어낸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그러나 그 피해자 또한 인간이라는 데 현대사회의 아이러니가 있다. 차창룡을 빌리자면, “나는 나를 구워먹고 있”(차창룡, 「까마귀」)는 셈이다. 그래서 최근의 시에 나오는 ‘고기’를 되풀이 읽다보면, 인간의 살코기 타는 냄새가 풍기는 듯하다. 우리 시대에는 누구나 가해자고 동시에 피해자인 것이다. 푸줏간이 보여주는 세계는 바로 그런 공간이다. 1980년대의 유곽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최소한 정서적/직관적으로, 혹은 계급적/계층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으나, 1990년대의 푸줏간에는 모든 게 뒤엉켜 있는 상태다. 거치른 산문투의 문체, 자조와 자학이 넘쳐나는 어조, 그로테스크하게 결합된 언어들, 서정적 자아의 약화, 자의적인 행갈이 등으로 일반화되는 일련의 시적 언술들은 이러한 현실인식을 반영하는 형식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를 씹고 있”(이성복, 「易傳 1」)는 상황에서 어찌 서정적 아름다움만 노래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푸줏간은 살육을 예비하고 조장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살육은 욕망 충족의 한도만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부추기면서 수요를 창출해낼 수 있을 만큼, 계획적/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생명은 살육될 만큼만 생산되는 것이다. 소나 돼지의 수는 적절히 통제된다. 과도한 생산으로 값이 폭락해서도 안 되며 부족하여 외국에서 수입하는 일이 많아도 곤란하다. 한 존재는 생명으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상품/음식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해골이 되려고 순대와 족발이 되려고/저것들은 당당하게 자궁을 열고 나”(김기택, 「마장동 도축장에서」)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모든 경제정책은 상품의 생산과 판매뿐만 아니라 인구정책과도 긴밀히 맞물려 있다. 산아제한 정책은 지구의 위기와도 결부되는 것이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시인들은 그것을 인공수정이나 종돈의 모습으로 풍자한다.
불알이 심장보다 커지면서
나는 섹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에 한 번씩 모돈들의 돈사로 갑니다
모돈들은 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일제히 일어나 오줌을 쌉니다
주인은 모돈의 엉덩이를 손호미로 눌러보고
뒷다리에 힘주는 놈을 케이지에서 꺼내 놓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짓을, 지긋지긋한, 생명부지를 위해
나는 매일 운동을 합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여
모돈이 내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나의 생은 끝
내 옆 케이지에서 나와 같은 생을 살아야 할
어린 종돈이 철없이 욕망을 키우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는 그분을 위해 묵은 자지를 물려줄 것입니다
불알이 심장보다 커지면서
나는 내 운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ꠏꠏꠏ함민복, 「종돈」전문
생명 탄생의 반자연성은 사실상 삶의 모든 가치를 뒤흔들어버리는 중대한 사안이다. “태어나보니” 이미 고기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삶의 가치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인공수정이나 종돈은 그러한 반자연성/반생명성을 대표하는 것인바, 그것은 한 존재의 삶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하나의 기능만 과도하게 커지도록 의도하는 또다른 살육의 방법이다. 조병화의 「의자」를 패러디한 함민복의 「종돈」은 생명의 상징인 “심장”보다 복제(탄생이나 풍요, 혹은 섹스가 아니라)의 기능인 “불알”이 더 커지도록 조작된 존재의 무의미한 삶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해학적 어조는 보편적인 인간 존재를 나타내는 「의자」의 화자에 겹쳐지면서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은근히 꼬집어주고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인간의 신생아실에도 벌써 “관 같은 요람”이 놓이고 “푸줏간의 비릿한 냄새”(이연주, 「신생아실 노트」)가 풍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긋지긋한, 생명부지를 위해”, 그러한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현대인의 딜레마가 있다. 푸줏간적 세계를 아무리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봐야 결국에는, “암퇘지가 앙버티고 있는 정강이의 힘으로 수퇘지가 씩씩거리며 내뿜는 거품의 힘으로 조카는 체르니를 치고 도락산 산신령, 형은 술 한잔 하고 어머니는 보청기 건전지를 갈고 나는 항우울제를 사러 병원에”(함민복, 「기록, 어설픈 하나님」) 갈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살육의 도마 위에 세워지는 일상의 평화!
푸줏간은 이러한 부조리의 대명사다. 시인들은 푸줏간을 생명 유지(음식의 생산)와 생명 파괴(살육)가 부조리하게 뒤얽힌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90년대의 실존적 상황이 후자에 훨씬 더 큰 시적 비중을 두게 만들었지만, 그러한 부조리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데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기를 사러 가거나 고기가 되러 가거나 간에 “우리는 누구나 푸줏간에 가지 않으면 안”(하재봉, 「푸줏간을 위하여」) 되는 것이다. 이곳은 소생이 불가능한 공간이다. 더 이상 나아갈 데도 물러날 곳도 없는 막힌 시공이다.
그러면, 푸줏간은, 현대시의 끝인가?
푸줏간은 현실적 공간의 은유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 상황에 빠져 있더라도 인간에게는, 시에는 꿈의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함민복의 형은 교회에 나가고, 송재학은 절로 걸음을 옮긴다. “피묻은 칼을 씻듯/마음 씻으러 교회 가는 길”, 비로소 “별이 밝다”(함민복, 「굵은 소금」). 이것은 종교적 믿음보다 푸줏간에서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아니, 단순한 죄사함, 벗어남이 아니라, “절의 한없는 정적과 피 뚝뚝 흐르는 고기의 환치”(송재학, 「절 2」)를 꿈꾸는 일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속언처럼, 푸줏간을 단번에 뒤엎는 시적 전략, “환치”의 꿈. 어쩌면 그것은, 무료하게 반복되는 절망의 틈을 비집고 현대인의 가슴 한 모서리에 이물질처럼 자리하는, 결코 버릴 수 없는 사회적/개인적 혁명에의 갈망인지도 모른다.
그 정신적/시적 혁명을 위한 환치의 매개물로 빈번히 나타나는 것이 바로 물고기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물고기는 종교적인 사물보다 훨씬 더 자주, 의미심장하게 푸줏간에 대립하는 시적 대상으로 부각된다. 똑같이 인간의 식탁에 놓이는데도 불구하고, 음성적 유사성을 넘어서 물고기는 고기의 대척점에 자리한다. 이 푸줏간적 세계에서 “쫒기다 쫒기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고 생각될 때……찰찰 흐르는 물소리로 거슬러오르는 물고기떼 만나게 되”(장옥관, 「꽃잎 필 때」)는 것. 그것은 쫒기는 주몽에게 다리가 되어준 자라와 물고기떼, 죽음을 마다않고 사랑을 맺어준 「명주가」 전설의 잉어처럼, 절망적 상황이 도저히 회복되지 못할 것 같은 파탄의 순간에 한 줄기 섬광으로 흘러드는 구원의 이미지다. 그래서 고기/정육점/푸줏간이 피/살육/해체/죽음의 이미지로 수렴된다면, 물고기는 물/생성/결합/부활의 이미지로 확산된다.
물고기와 고기의 이러한 양립은 먼저 두 사물에 누적된 전통적 상징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로부터 고기는 희생(犧牲)의 이미지 외에는 별다른 상징성을 갖지 못했다. 게다가 그것은 거의 시적 대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반면에 물고기는 고대 신화에서부터 현대 서정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면서 신성/생명/재생/불멸의 이미지를 쌓아왔다. 그림이나 조각, 불교와 무속에서도 물고기는 유사한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진 쿠퍼에 의하면 불족석(佛足石)에 그려진 물고기는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욕망이나 번뇌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고 한다. 비슷한 의미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현세의 물고기가 용으로 승천하거나 새로 변신하여 비상한다는 사유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런 맥락에서 일군의 시인들은 욕망과 살육의 푸줏간에서 한동안 시적 대상에서 소외되었던 물고기를 재발견한다.
1990년대 시인들이 그려내는 물고기의 이미저리와 의미망은 설화적 숭고미나 유유자적한 탈속의 경지보다, 밝고 경쾌한 역동적 서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물고기는 “맑은 물과 흔들리는 물풀 사이/등을 밝”(송재학, 「저녁 바다」)히는, “떠오르는 해를 가진”(신현림, 「나는 물고기가 될테야」), 가볍고(비상의 가능성을 지닌) 환한(생명의 환희를 표상하는) 존재로 표현된다. “햇살은 툭툭 이파리처럼 터지고…푸른 비늘 번쩍이며 잎새들 사이로 헤엄치는”(이경림, 「환상은 종양을 만든다 2」) 물고기는 우리말의 아름다움도 한껏 살려내고 있다. 거센소리/된소리가 울림소리와 부딪치며 쟁쟁거리는 맑은 소리는 휴머니즘적 꿈의 세계를 드러내는 주제와 어울려 역동적인 문체를 이룬다. 이곳에는 생명이 살아 물결치는 소리가 들린다.
사방팔방에서 눈부신 물고기들이 헤엄쳐 오가고
그 속에서 풋감 같았던
내 청춘의 뒤통수도 하나 보이는데,
ꠏꠏꠏ최승자, 「종로통 가을」부분
…알 수 없는 떨림 숲을 흔들고 일제히 풀려나 솟구치는 푸른 함성 물고기들이 춤을 추며 몸 속으로 헤엄쳐 들어왔습니다 앓던 막니가 환하게 불을 켜왔습니다
ꠏꠏꠏ장옥관, 「침묵을 견디다」부분
이와 같이 물고기가 거느리는 세계는 “푸른 함성”(푸줏간의 검붉은 비명과 대비되는)이 솟아나는 “풋감”처럼 싱싱한 공간이다. 물고기는 푸줏간처럼 닫힌 공간이 아니라 “사방팔방에서” 헤엄쳐다닌다. 죽임을 ‘당하는’ 고기의 수동성에 반해 물고기는 생명의 능동성을 표상한다. “환하게 불을” 켠 동사들이 피동의 옷을 벗고 능동의 “숲을 흔”든다. 그것은 또한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나타나 생명의 어우러짐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고기는 결코 복수로 나타날 수 없다. ‘물고기들’은 가능해도 ‘쇠고기들’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양으로만 규정되는 생명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성 유무는 당연히 이미저리와 의미망의 차이를 수반한다. 그래서 물고기의 문체는 “살코기의 공허함”, “괴로운 살코기”(신현림, 「활짝 핀 살코기의 공허함을 아세요?」)를 그려내는 푸줏간의 문체와 전혀 다른 차원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사실, 푸줏간의 문체는 우리말의 어법을 암암리에 훼손시킨 부분이 없지 않았다. 피동/수동의 남용, 번역투와 외래어의 남발, 비문(非文)의 증가, 자극적인 시어(욕설과 성적 표현 등)의 과용 들은 우리말의 바람직한 발전을 고려할 때 우려할 만한 사안이다. 현실 인식의 치열함이 과도하게 뒤틀린 언어를 양산하여 오히려 모어(母語)를 훼손하고 서정성을 왜곡시킨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물고기의 문체는 이러한 푸줏간의 문체와 상보적으로 만나면서 부정적 요소의 치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물고기 이미지의 역동성/능동성이 단순히 고기/푸줏간이 표상하는 부정적 이미지의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물고기가 껴안고 있는 이미지가 단순히 푸줏간에서의 탈출이나 회피/은둔이라면 그것의 시사적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물고기는 오히려 푸줏간을 와해하고 해방하는 적극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현실적으로 푸줏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시공간에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시인들은 현실적 변혁이나 구체적인 미래 전망의 제시가 아니라 환생/부활/윤회의 방법을 시적 논리로 선택한다. 특히 윤회는 시공간의 변이를 강하게 내포하는 개념인바, 송재학의 「수미단」이나 최정례의 「회귀」, 「내가 한 잎 나뭇잎이었을 때」 등이 보여주듯, 그것은 물고기를 통해 실현되거나 매개되고 있다. “고모부 제삿날”, 고모의 강렬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수억만리 헤엄쳐온…연어떼(의) 회귀”(최정례, 「회귀」)에는 윤회로서만 가능한 고모부의 시공간 이동이라는 사유가 깔려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이 물고기가 되고, 장차 어머니가 될 여인에게 먹혀 재생한다는 믿음이 있었다(『한국문화상징사전』)고 하는데, 이런 사유 체계가 시적 의미망으로 활용되면서 현실적 시공간을 극복하고 다른 시공간을 실현하는 전략으로 차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물고기는 푸줏간을 뒤엎는 존재, 푸줏간적 세계를 전복하려는 존재다.
그러나, 푸줏간에서 물고기가 잉태되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의 세월을 눈물로 용서”하고 “양성을 버린 동성, 한,/몸으로의 환생”(이연주, 「우리라는 합성어로의 환생」)을 실현하려면 육신의 고깃덩어리를/목숨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푸줏간에서 벗어나기/푸줏간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고통이 따르는 것. 그런 의미로 물고기는 자기 희생의 이미지를 껴안는다. 시인들이 노래하는 “물고기의 길”(장옥관, 「황금연못」)은 막연한 원망형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이 죽어서/먹혀서 “그의 뼈 그의 살 그의 피 되는 꿈”으로, “절절 끓는 피로 그의 몸 구석구석 흐르는 꿈”(이경림, 「환상은 종양을 만든다 2」)으로 표상된다. 내(현실)가 죽어 비로소 너(새로운 세계)에게 이르는, ‘소멸-재생’의 의미망을 안고 있는 이러한 사유는 자기 희생과 이타성의 발로인바, 절망의 끝에 이르른 푸줏간에서 오히려 새로운 휴머니즘의 꽃이 피어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푸줏간과 가장 격렬히 싸웠던 이연주의 다음 작품이 이러한 사실을 증거한다.
내가 죽어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주부의 손끝에서
비늘 벗겨져
내가 도마에 오른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서
등빛을 등에 달고 펄펄 끓는 솥에 들어가
살에 매운 고춧가루 박고
아이들과 그 아버지의 한때
즐거움이 되어서
그들의 잠자리에 내가 함께
내가 죽어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서
ꠏꠏꠏ이연주, 「즐거운 일기」전문
이연주의 시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맑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린 이 작품은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당대의 상황/푸줏간을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을 찾지는 못했지만, 정신적으로 극복해나갈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어쩌면, 물고기를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살아 퍼덕이는 존재로, 문명의 대척점에 선 자연의 대표적 존재로 파악하고, 욕망의 푸줏간을 와해하고 해방하는 유일한 출구로 인식했는지 모른다. 고인이 된 그가 환생의 열망을 실현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보여준 끔찍한 푸줏간의 모습과 그 속을 유유히 유영하는 한 마리 물고기는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로 실현되는 현실적 시공간의 와해/해방은 단지 시적 전략일 뿐 그것이 곧바로 실천적 삶과 연결되기는 어렵다. 물고기를 통한 푸줏간의 전복이 윤회라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적/보편적 경험에서 한 걸음 비켜선 비현실적/종교적 의미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관념/추상의 차원으로 떨어질 위험을 안게 된다. 아무리 많은 물고기를 키우더라도 시인은 현실 속에 거처를 둘 수밖에 없는 비극적 존재다. 그를 구원하는 것은, 아직은 없는, 현실 변혁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지금도 여러 시인들이 고기/정육점/푸줏간으로 표상되는 실존적 상황을 더 많이 노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연출하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한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몇 번의 윤회를 이루어야 거기에서 벗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푸줏간의 물고기는 1990년대의 현실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시적 기미, 혁명의 기미일 따름이다. 지금은 비록 “매운 고춧가루 박고” “펄펄 끓는 솥에 들어가” 있지만, 언젠가 “등빛을 등에 달고” 환생할 틈을 엿보고 있는 셈이다. 시인들이 끊임없이 절망의 푸줏간을 노래하는 것도 결국은, 좁고도 가파른 그 틈을 열기 위해 푸줏간의 칼날에 몸을 부딪쳐보는 행위인 것이다.
이명님 문학을 더 깊이 알고 싶으시다면 옴마니반메훔으로 오세요. 아직 개점휴업 상태지만 조만간 장사호텔을 새로 열어 소설도 실을 예정이고, 아리장부강에 시도 많이 띄울 계획입니다. 그곳은 문학판이라 달님이 좋아하실 텐데 손이 닿으면 손잡고 같이 오심 더 좋구요. 최근 지가 쓴 글도 있답니다.
첫댓글 끝 부분은 어디로 갔을까요? 물속에서 노닐다가 행방불명인가요?
엥? 증말 이놈의 물고기 꼬랑지가 어디로 뛰었담? 다시 볼께요.
툴툴툴...한참 집중해서 신나게 읽어내려가는데.. 꼬리를 짜르시다니.........심술.......
넘 길어서 뒤 꽁지가 저장 안 되고 떨어져 나갔나봐요. 다시 붙였습니다 (에궁, 뭔 네모는 왜 또 저리 나온담?)
그래 그리 시들이 거칠고 삭막하군요. 객관적 보편적인 상황을 노래하는 시들.. 현실이 그대로 배어나오는 시들, 가장 개인적인 경험이 가장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개인을 구원하는 것은 종교적인 경험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이미 있는 관념들이 아닌가요.
아 생각들이 나오려먼 한참 멀었습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관념이 개인을 구원한다? 그럴 수도 있지요. 개인의 경험을 집적한 것이 종교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에궁, 새삼 읽어보니 예전에 쓴 글이라 이상한 '-적'도 많고 괴상한 '-의'도 있고 번역투 냄새가 솔솔 나네여. 맘에 안 들어....쩝....
스승님 그래도 내용만 보고 있사옵니다. 옮겨놓고 보고 있지요. ~적을 쓰는 경우가 저도 대단히 많습니다.....참 나원..어찌 해야 할지..
전 아무래도 실존주의자에 가까운 모양입니다. 내부에 있는 관념이라...이런 생각들이 익어가고 있는 건지..뭔가 저 자신도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명님 문학을 더 깊이 알고 싶으시다면 옴마니반메훔으로 오세요. 아직 개점휴업 상태지만 조만간 장사호텔을 새로 열어 소설도 실을 예정이고, 아리장부강에 시도 많이 띄울 계획입니다. 그곳은 문학판이라 달님이 좋아하실 텐데 손이 닿으면 손잡고 같이 오심 더 좋구요. 최근 지가 쓴 글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