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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강의 : 이 근호 목사)
잠언 제 4강
‘성경에 나오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현대인들에게 힘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조’입니다. ‘구조냐, 아니면 주체냐’ 하는 이 갈림입니다. 구조라는 것은 창고, 혹은 집이라고 보면 됩니다. 창고 안에 어떤 존재가 들어 있으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은 그 창고, 그 구조가 쏟아내는 것들, 구조 안에서 어떤 혜택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인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 거대한 창고가 있다면 이 창고안의 어떤 인간은, 그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창고 안에 어떤 속성, 어떤 성질,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증인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사고는 ‘구조가 아니고 주체’거든요.
‘나에게서 무엇이 발생될 것인가? 나에게서 무엇이 확대될 것인가? 나를 어떻게 크게 만들 것인가?’ 항상 어떤 구조가 이미 있는 것이 아니고, ‘구조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 나가기 나름이다’라는 사고입니다. 여기 A라는 사람이 있고 여기에 B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 둘 중에 누가 더 잘났나’ 하는 경쟁체제에 있습니다.
이 체제는 누가 더 먼저 선점하고 점령하느냐에 따라서 그 세계는 나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속의 세계는 이미 세계가 고정되어 있고, ‘하나님이 만든 그 세계, 그 구조에 누가 합당한 사람이냐’를 따지면서 구조가 우선이지 사람이 우선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성경, 잠언의 말씀을 현대인들에게 이해시키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이미 잠언서에 담겨 있는 잠언서의 나오는 구조에 대해서 잠시 먼저 언급하고 계속 잠언을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전체를 보게 되면 두 가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 이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물의 구조는 언약, 무지개언약에 의해서 만듭니다. 이 세상 전체는 언약에 의해서 물의 구조 속에 들어갑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고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도 다 악하기 때문에 그 악한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살아 있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무지개언약, 악함에도 불구하고 은총 주신다는 그 자비의 구조를 이해하면 살아남고 이해안하면 죽는다는 것이 물의 구조입니다.
잠언 2장 21절을 봅니다.
잠언 2:21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이 땅은 물에 의해서 한번 심판을 당했던 그 땅입니다. 물의 심판이 거쳐갔던 땅이기에 그 땅에는 ‘까불면 맞는다. 너희 선배들은 이미 싹쓸이 당했었다. 정신 차려라’는 물의 심판이 지나가서 그 심판의 흔적이 남아 있는 땅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옵니다. ‘옛날에는 물로 망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5-7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면 누가 물로 싹쓸이 했느냐가 잠언서 3장 18절에 나오지요.
잠언 3:18,19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렇게 물로 싹쓸이 했다는 것은 그 땅의 주인이 따로 있었고, 그 땅주인이 어떤 땅 주인이냐 하면, 생명나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생명나무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그 지혜라는 분이 그 땅의 주인이었으며 그 분께서 화가 나서 물청소 하듯이 물 심판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땅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라.’ 다시 말하면 그 땅, ‘물의 구조를 아는 사람이 되어라.’ 이래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잠언서의 절반정도가 ‘지혜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구분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이렇게 될 것이요 지혜로운 자는 이렇게 될 것이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자는 이렇게 될 것이요…’라고 할 때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글쎄요. 제가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자가 됩니까?’라고 만날 우리는 묻는 것이 그겁니다. ‘지혜로운 자는 이렇게 되고 어리석은 자는 저렇게 된다’는 그런 잔소리는 그만 해대고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될 테니까 지혜로운 자가 되는 방법이나 이야기 해 주소’라고 만 날 우리는 그렇게 나오는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조 자체가 지혜로 된 것을 네가 인정하고 수용하라’는 말입니다.
목욕탕에 옷 입고 들어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옷을 입고 목욕탕에 들어가는 사람은 목욕탕의 구조와 속성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아, 알아서 기라’는 말입니다. ‘지금 너는 너 밖에 모르지? 너를 덮어쓰고 있는 그 은총이 지혜에서 쏟아진다는 것을 알면 너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해.’ 다른 말로 하면 이 지혜로 말미암는 구조를 파악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자로 삽니까?’ 라고 자기발산 하지 말고, ‘네가 속한 동네의 속성을 알라’고 합니다. 분위기 파악하라는 말입니다. 중세 때까지 서양역사, 서양철학에서는 하나님의 존재하심 그 자체에 의해서 인간들이 기가 좀 죽었어요. 그런데 윌리엄 오캄, 데카르트를 거치면서 과학의 발달이후에 보면 거기서 ‘주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주체 = 근대시민 사상.’ 국가가 왕 제도에서 시민사회로 바뀌면서 그 국가에 걸 맞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자율적인 인간형이 등장하고 어떤 모든 권위에 대해서도 도전하고 모든 권위에 대한 촛불집회 하고 모든 권위를 배격하면서 자율적인인간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교회의 권위도 제켜버리면 교회의 신의 권위와 함께 성경의 권위도 날아가 버립니다.
첫 번째, ‘신의 음성, 신의 계시는 자율적인 나와 직접 상대한다.’
두 번째, 신의 뜻을 내가 파악한다.
세 번째, 신이여, 그냥 가만 계소서. 내 쪽에서 알아서 찾아 갈 테니까.
‘신은 어른으로서 높은데 계시고 우리 쪽에서 윤리 도덕으로서 신에게 찾아 갈 테니까 당신이 나에게 개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당신이 원하는 나라를 가져다가 바칠 테니까 거기 그냥 계세요.’ 그래서 18세기부터 나온 것이 복지사상, 복지국가론이 나옵니다. 사적으로 하던 이웃사랑을 국가적인 법령으로 제정해서 이웃사랑을 해 버리는 겁니다.
이 복지국가사상이 등장하고 여기서 나온 것이 복지법입니다. 모든 사회보장제도, 의료보험, 이렇게 이웃사랑이 법으로 규정되면 이웃사랑은 법에 예속되는 겁니다. 법에 예속된다는 말은 이웃사랑이 법에 의한 통치에 의한 이웃사랑, 쉽게 말해서 ‘네가 이웃사랑 하더라도 법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그 이웃사랑도 위법이 되고 위법이 되는 것은 복지국가의 취지에 어긋나기 때문에 위법 곧 죄인’이 되는 겁니다.
법률국가에서의 죄라는 것은 법에 위반할 때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이 개인적인 주체의식은 타인과 나, 각자가 갖고 있던 법의식이 서로 궁합이 맞을 때, 이것이 바로 시민계약사상인데, 서로 의사소통이 될 때 서로 서로 지킬 수 있는 규약, 법칙에 예속되어 적용을 받아요. 이것이 국가가 되면 그 국가는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 생물체가 됩니다.
생물체의 특징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그것이 커야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말의 어떤 독일의 학자는 ‘국가는 하나의 생물체다’라고 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국가는 하나의 유기체다’라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생물체’입니다. 생물체라는 것은 움직이고 꿈틀거립니다. 꿈틀거리는 것은 그냥 꿈틀거리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서 계속 커나가는 거죠.
그러면 모든 법 아래서의 조직체는 생물체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른 채 무조건 커야 됩니다. 모든 단체가 무조건 커야 됩니다. 대한요식업협회, 무조건 커야 돼요. 대한야구협회, 무조건 커야 됩니다. 한국용역협의회, 무조건 커야 돼요. 안산 부곡동D아파트협의체, 무조건 커야 돼요. 이것이 지역이기주의 아닙니까? 무조건 커야 됩니다.
알튀세르는 이것을 심급이라고 합니다. 대한의료협회, 대한한의사협회, 약사협회, 전부 다 각자 무조건 커야 되니까, 이것이 경제사회에서 하나의 심급으로서 각자 각자 괴물처럼 있는 겁니다. ‘이것들이 서로 서로 의사 타협과 조정을 통해서 유지된다’는 것이 근대국가의 협의체입니다.
항상 미완료이고 불안정성을 가지고 있고 촛불집회를 할 가능성이 많아요. 축산농가협회, 사료공급협회, 심지어 지하노래방협회, 전국편의점연합회, 안마사협회같은 것도 있어요. 구조라는 것은 내가 만들기 나름 이예요. SBS앞에 가서 데모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듣자 하니 SBS 때문에 기독교 무너질 판이라지요.
그놈의 기독교가 얼마나 허약했으면 그깟 SBS 하나 때문에 무너집니까? 무슨 복음이 SBS한테 무너져요. 사람들은 성경의 구조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물의 구조 속에서 인간의 감추어진 그 악마성, 주체죠, 천상천하유아독존, 나, 자기밖에 모르는, 영 어리석고 교만하고 거만하고, ‘누가 창조 했는가’는 아예 안중에도 없고 누가 창조했든지 나는 커야 되겠다는 그 일념, 아주 독한 마음, 그것밖에 모르는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두 번째 구조가 있어요. 불의 구조로 처리합니다. 물로서 싹쓸이했던 것을 이제는 불로서 싹쓸이 해버립니다. 전에 그것을 시범조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보여줬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땅에 불 심판 나기 전에 롯의 딸들과 정혼했던 두 사위가 있었는데 그들이 불의 심판의 그 구조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창 19:14).
왜 그 사위들이 불의 구조를 농담으로 여겼는지 그 심보를 파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 그들이 불의 구조를 농담으로 여겼는가 하면, 물의 구조에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은총, 생존의 은총이 보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과거가 누적되어서 현재의 인간이 되거든요. 현재의 자아상이란 과거가 누적된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한 대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거예요. 시간은 제자리에 분진처럼 쌓이고 있는 거예요. 시간이 흐를 때는 반드시 거기서 해체를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노인들입니다. ‘얘들아, 지난날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미 해체과정을 겪고 보니 지난날의 잘나갔던 과거가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젊을 때 인기 좀 끌었던 나이 좀 들었던 가수들이 인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 가면서 노래하는 젊은 가수들 보면서 하는 말이 ‘네가 인기에 얽매이지 말고 인간이 되어라. 인간아!’라고 합니다. 인간이 되려면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과거가 누적되어서 현재의 자아를 대변하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는 것은 결국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왜 과거에 연연해야 되느냐 하면 ‘과거가 없이는 현재 내가 없다’ 그 말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일가친척들이 나의 시신을 깊은 산속 새소리만 들리는 곳에 파묻고 아주 후련하다는 듯이 자기들은 서둘러서 집에 가지요. 그런데 관속에 누워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그동안 ‘나’라는 것은 나의 가족과 친지들 속에서의 나입니다. 그들과 대화함으로써 ‘나는 이런 나다’라는 것을 파악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 자식들에게 김치를 담가주고 손자들 돌봐주는 가운데서 늙은 어미로서 존재의미를 찾았던 거죠. 그런데 죽고 난 뒤에 그들과의 대화는 끝났어요. 그들은 그들만의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관속에 누워 있어요. 그러면 관속에 있는 나는 어떤 관계에서 나의 의미를 찾아야 되는데 혼자 땅 밑에 누워 있는 그 나가 대체 누구입니까? 혼자 누워있는 그 시체를 박테리아가 뜯어 먹고 있는데 그 나는 뭐예요? 그때의 실감나는 이름이 뭐냐? 아담, 흙 아닙니까? 최 아담, 박 아담, 이 아담, 박 흙, 이 흙, 최 흙. 전부 다 흙입니다.
원래 흙이었는데 되도 않는 기억 때문에 흙이 흙이 아닌 척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 구조는 나를 흙으로 만드는데 나의 주체는 흙이 되어서 반항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그 흙이 생명을 얻으려면 다른 구조를 알아야 되고 다른 구조를 믿어야 합니다. 그 구조가 지혜로 집을 지은 그 구조입니다.
사람이, 저 같은 목사의 경우에 목사가 언제 사는 보람을 느끼느냐 하면 한명의 교인이라도 자기설교를 들어줄 때 그 관계성 속에서 ‘나는 목사답다’는 자긍심을 느껴요. 평소에 교인이 세 명 나오는데 갑자기 세상이 미쳤는지 열 명이 나왔다, 그 목사 설교 잘됩니다. ‘역시 나는 주의 종이 맞구나’라는 착각이 들게 해서 열 막 냅니다.
그런데 늘 상 20명이 나오다가 갑자기 세월이 잘못되었는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숫자가 줄어서 10명이 되었다, 똑같은 숫자 열 명이 나왔는데 목사 때려치우고 싶어요. 똑같은 숫자 열 명인데 ‘내가 열 명을 앞에 두고 설교를 해야 되나?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가?’ 왜 그런 생각이 들어가느냐 하면 숫자 20명 나올 때 그것이 자기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현재의 자아상을 고정시켜 놓은 거죠.
‘나는 역시 20명짜리야. 20명이 꽉 들어차 줘야 나는 목사야.’ 그런데 그 다음날 열 명이 나왔다, ‘나는 죽으련다. 나는 이제 목사 안 해. 나는 삐졌어.’ 자기의 과거 속에 속아 넘어가는, 자기의 과거 때문에 매일같이 좌절하고 낙담하고 실망하고 자살충동을 느끼고 자기에 속아요. 그러면서 ‘너는 누구냐?’ 하면 인간은 관속에 누워서 혼자 남게 되고 심심해 지기 전까지는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요.
깊은 산속에 새소리가 들려와도 그게 한 두 번이지 재미 하나도 없지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고요. 제가 아침마다 산책을 합니다. 일상의 탈피,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사사로운 정을 탈피한다 해서 그것을 피정이라고 하지요.
새벽에 일상을 피해서 호젓한 산속에서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 과연 나는 누구이며 내 할 일은 무엇이며 내 사명은 무엇이며 나는 어디서 왔는지, 그런 것을 사색하면서 ‘하나의 지혜이지요, 지혜에 둘러싸여서 지혜라는 구조 속에서 그 지혜의 자식으로서 아들로서 그 지혜의 어떤 혜택을 입고 사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 산속에까지 올라와서 라디오를 켜서 현철의 유행가를 틀어놓고, 그냥 이어폰 끼고 혼자 듣는 것도 아니고요, 그것을 거기까지 와서 누워서 듣고 있어요. 그 산속까지 산 밑의 기억들을 다 끌고 가져와요. ‘나는 그것 없이는 못살겠다’는 거죠. 심지어 골프 좋아하는 아저씨는 골프 중계하는 것 다 들어가면서 그러고 있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람이 밥 못 먹어서 못사는 것이 아니고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못 산다’고 하잖아요. 평소에 얼마나 지혜하고 교류가 안 되었으면 지혜를 대신해서 지혜도 아닌 것들을 상대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잠언서에서는 그것을 어리석은 여자라고 합니다.
잠언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9층 매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여기서는 어리석은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잠언 9:13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계속 떠들어야 돼요. 11층에 미련한 여자 또 있습니다. 11층 매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잠언 11:22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인물은 반듯한데 행동하는 것은 자기밖에 모를 때 그것은 돼지라는 겁니다. 구조를 모르고 자꾸 주체로 몰려가요. 그리고 그 근대주체사상, 근대시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와서 하는 말이, ‘교회를 누가 만들었으면 그 구조가 뭔지’를 생각 안하고 자기의 소망을 무조건 이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예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 했지요. A에서 자기가 바라는 소망의 모습이 B인데 B에서 B′, B2′, 계속 축적, 확산, 확장되는 그걸로 무엇이든지 헌금이든 봉사든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중보기도를 해주든지 뭘 로 하든지 해서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되게 해 달라’고 들이대고 있어요.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은 구조를 이야기합니다.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로.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에서 양쪽 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분이 ‘아들’입니다. 아들만이 살아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 때 밝혀졌어요. 아들이 아닌 자는 다 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빼놓고는 다 죽여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만드는 작품 외에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어떤 아들이냐 하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만든 모든 지혜와 창조를 같이 감사하고 그것을 고마워하고, 그것이 하나님 경외인데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자만 따로 자기들끼리 모여서 천국을 이루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그 모든 창조의 작품을 영광스럽고 좋은 것으로 경외하고 감사할 줄 아는 그런 아들, 아들을 섬기는 그런 지혜로운 아들만이 생명나무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거예요.
물에서 만든 땅에서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신약성경에 가면 그것은 불에 태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남을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간 그것이 진정한 인간 하나님의 아들다운 인간입니다. 그 구조를 아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구조론에서 보게 되면 지혜로운 자는 본인이 어떻게 지혜로울까를 새삼스럽게 나서는 것이 아니고 내 위에 설치되어 있는 모든 구조가 지혜 그 자체로서 설치되어 있음을 수용할 때 그게 바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샤워시설이 없었을 때는 목욕할 때 물을 떠서 자기가 자기 몸에 끼얹어야 합니다.
목욕을 하다 보면 목욕한다고 땀납니다. 자기 몸에 물을 계속 끼얹다 보면 헉헉거리면서 힘들어 하면서 목물이 끝나요. 그런데 지금은 위에서 그냥 내려오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샤워장에다 집어넣고 ‘네가 만들어내는 것 말고 위에서 쏟아지는 것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한 고집하잖아요. 우리도 어리석고 죄인이기 때문에.
제가 아까 이야기 했지요. 잠언을 볼 때 우리를 어리석고 교만하고 악한 자 쪽에서 다 보라고. 지혜롭다고 나온 그 쪽은 보지도 말고 악한 자 쪽을 보면 딱 우리라. 잠언에서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전부 우리 사는 본성과 똑같아요. 우리는 위에서 쏟아지는 지혜를 또 어리석게도 내 것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시도하죠.
잠언에서 일어나는 이 충돌이 잠언자체에서는 해결이 되지 않고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해결이 됩니다. 우리가 그 쏟아지는 지혜의 샤워장 앞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고집을 굽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나 스스로 구원되려는 그 시도를 합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거거든요, 왜? 구조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하여튼 신이고 예수고 무조건 신 쪽에 관련된 것은 다 거부하는 거예요. 천사고 성령이고 뭐고 나는 다 듣기 싫다고 합니다. 그러면 잠언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어리석은 자다’라고 공박하는 거예요.
어리석든 저주를 받든 어떤 협박과 공갈을 하든지 간에 여하튼 내 본성은 감출수도 없고 숨길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잠언 본다고 인간 달라지는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수련회 기대하지 마세요. ‘이번 수련회에서 잠언을 공부하니 인간 될 것이다’라는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다만 이것 하나 기대하세요. ‘아하, 성경하고 나하고 전혀 상관이 없구나.’ 그것 하나 아시면 건지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구조라지만 그 구조가 내 몸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그냥 스며 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구조를 거부하는 ‘너는 너밖에 없어’라고 자꾸 부추기는 악마적인 요소가 이미 우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악마를 요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가 나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복음이 들리든 뭐가 들리든 하나님에 대한 뭐가 들려오든 간에 들려오는 그 강도만큼 내 안에서 그걸 더 센 강도로 그것을 반발하고 거부하는 것이 내 속에서 튀어 나온다니까요. ‘내가 잠언 열 번 봤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한테 해 준것이 뭐가 있어요? 잠언 안본 사람보다 더 못하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우리가 악하고 악한 것을,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우리가 성질이 더럽다는 것이 아니고 악한 지배세력, 악한 지배구조가 우리를 덮쳐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여기 있고 그 위에 시커먼 뭐가 덮였는데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어디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습니까? 죄와 사망의 법(갈 3:10). 죄라는 샤워기로 우리를 누르니까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이 바깥으로 벗어나서 이것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7장에 가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오호라!’ 합니다. 감탄사 아닙니까!
‘오호라, 나는 저주받은 놈이다. 나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기는 원하지만 내 속에 다른 구조 다른 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이 악함에서 내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오 통재라! 어찌하면 좋을꼬!’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또 감사로 바뀝니다. 구조위의 구조를 또 본 거예요. 이미 우리가 어떤 구조위에 갇혀 있음을 익히 아시고 그것을 이해해 주시고 그것을 나무라는 쪽이 아니고 충분히 이해해주시고 그 구조마저 철폐해 버리고 새로운 구조로 주시는데 그 구조가 뭐냐, 긍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준다.’
여호와의 본성입니다. 긍휼은 아무나 주는 것이 아녜요. 은혜 줄자에게 은혜가 돌아가고 긍휼이 돌아갈 자에게 긍휼이 돌아가는데 그 은혜와 긍휼이 도착하는데 그 어떤 것도 방해에 성공하는 세력은 없습니다. 이걸 믿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을 찌라도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을 찌라도 구조 안에서, 물의 구조 안에서 그리고 마지막 종말의 불의 구조 안에서는 외양간의 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포도나무의 열매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에요. 마지막 진노의 날에 제물이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구원하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나는 감사하리로다.’ 이 구조를 알 때 그 감사가 나와요.
하박국 3:16-19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것이 구조론입니다. 이 구조론이 우리의 주체론을 이겨요. 그래서 이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 사이에서 주님께서는 이 긍휼을 베풀어 줌으로 말미암아 다시 잃어버렸던 긍휼의 구조 사랑의 구조 안에 우리를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 이야기를 신약성경에서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구약은 어렵지만 신약은 쉽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무척 수상합니다. 구약부터 쓰여 진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아담이 죄를 지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십자가를 졌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담 뒤에 아브라함이 와야 되고 예레미야도 와야 된다고요.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했을 때 뭐가 죄냐’라는 것을 밝히면서 죽 나가는데 사람들은 구약성경은 떼어버리고 신약성경에 뭐가 왔다고 하니까, 주님의 긍휼과 사랑이라고 하니까 그 긍휼과 사랑 속에 내가 속해있다고 생각을 안 하고, ‘긍휼의 구조는 크고 나는 먼지만큼 작다’고 생각을 안 하고, 긍휼과 사랑 앞에서도 자기가 그보다 더 커서 긍휼과 사랑을 자기가 소유하려고 해요.
‘공짜라면서? 값없는 생명수를 준다면서?’(계 22장) 이러고 있어요. 주체는 그대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그 주체가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까지도 소유하려고 하는 겁니다. 믿음도 소유, 소망도 소유, 사랑도 소유, 삼켜 버리죠. 자기를 헐크처럼 더 크게 만드는 병에 걸려 있어요. 저는 이 전체를 ‘병’이라고 보고 싶어요. 인간은 전부 다 자기 밖에 모르는 환자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서 ‘나는 신약성경이 감동이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겠는데 ‘신약성경이 굉장히 쉽다’ 이렇게 되면 ‘아하, 신약성경을 몽땅 또 삼키려 드는구나. 자기가 구조고 신약성경은 자기의 졸개가 되는구나.’ 그런 식이 되는 거예요. 딸이 귀신들렸던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를 개라고 합니다(마 15:21-28) .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주어지는 떡을 개한테는 안준다.”
“제가 개 맞는데 아들이 먹다 남은 것 좀 뜯어 먹읍시다.”
이렇게 나와요. ‘저는 아들이 아니고 개 맞는데 그래도 어떤 혜택은 받을 수 있느냐? 아들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개 되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아들이 먹다 남은 부스러기는 제가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내 은총의 구조를 아는구나’라고 합니다.
아들이란 아들이라는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아들을 하나밖에 주지 않는 이유, 예수님만 아들이 되어야 할 이유가, 우리는 양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우리는 아들이 될 자격이 없고 단지 아들 되시는 분에 의해서 붙잡힌바 된 그런 사람으로서만 우리가 영생을 얻습니다.
그게 바로 신약성경의 구조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가난에 대해서 봅시다. 잠언에서는 막상 ‘인간이 무엇을 해야 되느냐’ 이것이 한 절반정도 있으면 그 나머지 절반은 어리석은 자, 지혜로운 자를 나누는 구조 쪽으로 그렇게 어떤 덩치로 모아서 분류하는데 집착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걸지 않게 하고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미 지혜로운 자가 된 자는 어떤 자고 어리석은 자는 어떤 자인 것을 구분하는 쪽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땅 이야기를 했지만 마태복음 5장에 나오지요. 온유한자가 무엇을 얻으리라 했습니까? 그것이 지혜 아닙니까?
지혜의 언어로써 불의구조를 천국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본 기독교라 해서 부동산투기 이야기 같은 것이 나옵니다. 물의 구조로 끝날 것 같으면 제가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물의 구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불의 구조도 남아 있습니다. 잠언서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장수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불의 구조에서 보면 우리는 옛 땅에 불과해요. 그러면 새 땅은 어디냐?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미 너희는 땅에서 죽었고…’ ‘웅이 아빠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감취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는 자기를 죽게 한 것에 대해서 신경 뚝 끊으라는 말이거든요.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 골로새서 3장 1절부터 나옵니다.
골로새서 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절대로 이런 이야기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 안 나옵니다. 거기는 현대주체시민사상이 기초가 되어 있고 ‘우리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괴물과도 같은 생물체가 얼마나 커지느냐, 메달을 몇 개나 따느냐’ 여기에 온 사원들이 몰두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이것은 이 사회시민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땅에 없고 하늘에만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소리 할 때 ‘아직도 한쪽 시민권은 땅에 있다’는 그런 소리를 한 것이 아니에요. 시민권이 두 개 있다는 소리는 대학교 선교단체들, 네비게이트 같은 단체들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양쪽 다 사명감당하라는 식으로 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은 그게 아니에요. 이미 여기는 철거 한 거예요. 성령의 오른팔에는 완장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 완장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철거반원.’ 성령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너는 땅에서 죽었고.’ 안 죽으려고 하는 우리를 자꾸 죽으라고 독촉하는 것,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 자기를 미워하라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산다’고 쫓아내는 거예요.
모델케이스가 있어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입니다. 만날 쫓기고 만날 굶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산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고후 6:7-10) 여기서 ‘부요하다’는 것은 잠언서에 나오는 ‘네가 부자가 된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어요. 구조적으로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불의 구조 하에서 ‘부요하다’는 것은 남을 부요하게 하는 것이 부요한 거예요. ‘이 땅의 것에 대해서는 네가 오래 산다, 부자 된다’는 뜻이에요.
가난에 대해서 봅시다(교재 2쪽). 가난의 이유가 첫 번째, 게으름입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그런데 달인들을 보니까 별로 부자라는 느낌이 안 들어요. 봉투 잘 접는 달인, 접시 잘 닦는 달인, 동대문 상가에서 짐 옮기는 달인들, 카펫 잘 까는 달인들, 별로 재벌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재벌들의 특징은 골프 치는 달인, 포커 치는 달인, 이런 사람들은 좀 사는 것 같은데 기능적인 달인들은 잘 사는 느낌이 별로 안 옵니다. 그 이유는 잠언 당시의 달인들은 농업형 경제구조입니다. 현대는 산업형경제구조입니다. 차이는 에너지시스템의 차이입니다. 농업형경제구조는 땅 위에서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어서 신이 주신 혜택을 입어서 생산물이 나옵니다.
땅 위에서만 있는, 인간노동에너지 + 대기가 주는 빛에너지, 자생에너지들을 활용하는 범위가 좁은 제한된 경제구조입니다. 그런데 산업형경제구조가 되면 에너지의 범위가 넓어져요. 에너지가 지하로 내려갑니다. 지하에 두 가지 에너지가 있어요. 석탄과 석유에너지죠. 농업형 구조에서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이런식으로 표면적인 거예요.
그러나 지하에서 석탄 석유가 나오면 막대한 에너지가 나오면서 그 생산된 에너지가 확대 되어 버립니다. 확대가 되면 제일 먼저 이것이 무기로 적용됩니다. 칼에서 총 총에서 더 발달된 무기가 생산 되면서 국가는 생물체니까 남을 집어 먹게 되는데 그 에너지가 인간의 욕망과 만나서 그 넘치는 욕망을 달성하는데 에너지가 집중되어 버립니다.
S기업이나 다른 대기업들이 순이익이 늘어나면 그것을 그냥 갈라먹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너지를 계속 누적해서 다른 업체와 경쟁하고 사업체를 확장하는데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제가 거창하게 S기업을 예로 들었지만 미술학원도 마찬가지고 음악 학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아노레슨 하다가 음악학원 차리고 음악학원 하다가 그것을 체인점으로 만들어 갑니다.
‘아줌마, 닭 맛있게 튀긴다’고 누가 그러면 갑자기 ‘체인점이나 해볼까’ 합니다. 인간의 자아가 확대한다고 했죠. 산업형구조에서는 모든 것을 확대하다 보니까 많은 생산에 필요하고 많은 인구에 필요한 발명품이 나오면서 기계문명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던 것을 다 기계가 담당하게 되고 나머지는 다 서비스업종으로 가게 됩니다.
모든 에너지가 다 서비스업체로 가요. 서비스업체가 주류가 되고 농사짓는 사람은 그 비율이 점점 줄어갑니다. 지금은 열심히 땅 판다고 부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증권회사의 증권의 거래동향을 파악해서 얼마나 증권거래를 잘 하느냐, 거기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런 식으로 큰 아파트에서 살고 카지노에 들락거리면서 돈 버는 사람이 60대 중에서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루 종일 증권시장 객장에 앉아서 주식투자해서 번 돈입니다. ‘부지런한자가 부자된다’고 하는데 현대산업형경제구조, 이런 서비스업종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에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제일 부지런한 사람을 꼽으라면 아파트 가스 배관타고 15층에 올라가서 도둑질 하는 사람.
여러분이 더운 여름날 한 번 해보세요. 얼마나 고생 심한지 그것은 외국인 노동자도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 지역 지리를 훤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대리운전 하고 난 뒤에 집 멀어서 뛰어 올 때. 잠언 당시와 오늘날이 부지런함의 의미가 달라졌어요. 잠언시대인 농경사회에서는 토지가 정직합니다. 박경리가 이야기했죠. 땅은 정직하다고.
땅은 속이는 것이 없어요. 잡초는 뽑아주면 되고 옥토로 가꾸면 생산되게 되어 있어요. 토지에서 부자되려고 하는것이 다른 산업체에서 나온 에너지가 전에는 텃밭 두마지기 하면 밥은 먹고 살았는데 다른 많은 서비스업체에 취직해서 자식들이 돈을 버니까,
“아부지예, 아직도 농사 지십니꺼? 그거 해서 얼마나 버능교?”
“야야, 그거 두마지기 갈아서 밥은 먹는대이.”
“요새 밥이나 먹는 게 짐승이고 개지 그게 사람입니꺼? 요새 우리 집 개도 밥은 먹심더. 아부지 호강 할라카믄 농사 때리치고 마 여기에 펜션 지야 안 합니꺼?”
이미 부지런함의 정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자본시대와 농경시대의 부지런함이 달라졌어요. 부지런함이 육체노동의 부지런함이 아니고 정보를 머리에 입력하는 부지런함, ‘어떻게 하면 돈을 벌수 이나’ 하는 그 돈의 흐름의 정보를 추적하는 그 부지런함이 있어야 돼요. 여기 우리 정 석훈 목사님이 계시는데 몇 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여기 중국에, 칭따오에 오니까 참 돈 벌 것이 무지 많습니다.’ 한국인이 보기에는 한국 같으면 그게 다 돈 되는 일인데 아직까지 그 지역 중국인들은 그것을 잘 몰라서 놓치고 있다는 거죠. ‘내가 목사만 아니면 돈을 좀 벌 낀데.’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기 애 한테 ‘내가 이번에 잠언 공부하는 수련회를 다녀왔다. 게으르면 가난하게 되니까 지금부터 방청소 부지런하게 하란 말이다.’ 이렇게 교육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지런하게 학원 다녀라’고 해야지요. 같은 부지런함이지만 영어 학원 열심히 다니는 부지런함이지 ‘열심히 방청소 해’, 그런 부지런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놀지 마라’하는 그것도 그 밑바탕에 이런 경제구조가 박혀 있기 때문에 의미가 다 달라졌어요. 어쨌든 어떤 시대이든 간에 게으른 인간은 가난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교재 3쪽)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24:33-34)
왜 게으른 자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고 합니까? 1) 잠이 와서. 2) 결과만 따먹기 위해서. 몇 번입니까? 2) 번이죠. 지혜라는 것이 율법에서는 어린양의 피를 믿으면 됩니다. 우리의 공로 없이 어떤 결과를 그냥 따내면 됩니다. 그런데 지혜의 노선에서는 지혜 자체가 우리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놈아! 이 지혜안으로 들어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같이 고생해야 돼.’ 지혜가 우리를 끌고 들어오기 때문에 어떤 결과물을 따먹으려면 지혜가 걸어간 그 고생길을 우리가 같이 가야 돼요. 그냥 결과만 따먹자고 하는 것은 게으른 자에 속하는 겁니다. 몸소 우리 일생 속에 지혜가 어떤 작용을 했는가를 같이 동행하면서 가야 돼요.
잠언 6장 6-11절을 봅시다. 거기에 개미 이야기가 나오죠.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이것은 초등학생이나 유치원 애들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애들 동화책, 이솝이야기에 나오죠.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솝이 ‘ㅇ’과 ‘ㅅ’ 아닙니까? 이솝의 ‘ㅇ’과 ‘ㅅ’이 예수라는 거예요. 예수 이야기가 이집트까지 건너가서 이솝이야기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솝이야기의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에 보면 베짱이는 기타치고 놀고 개미는 땀 뻘뻘 흘리면서 일했습니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자 눈이 폭폭 쌓일 때 기타 치면서 여름 내내 놀던 베짱이는 뒤에 눈발자국을 남기면서 조그만 대문을 두드리면서 ‘개미 씨, 밥 좀 주소.’ 제가 이야기 했죠. 다시 이야기 합니다. 왜 우리는 개미가 아니고 어리석은 자, 베짱이 쪽을 원하는가? 주체가 원하는 것은 행운으로 결과만 따먹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원래 고생해도 싸다’ 하는 고난을 그 구조 속에 집어넣어서 같이 겪게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체가 아니고 그 구조 속에 함께 섞여서 돌아가야 하는 그런 세상 속에 네가 놓였다는 것을 잠언은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2008-08-13 07:18:16 녹취 : 오용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