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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 구경
아 네모네 이현숙
기간 : 2016년 2월 28일 ~ 3월 19일
장소 : 미국, 멕시코, 쿠바, 파나마,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벨리즈
북미도 가고 남미도 갔지만 중미는 갈 기회가 없었다. TV에서만 가끔 보았는데 이번에 지인들과 쿠바를 비롯한 중미 국가를 여행할 행운을 얻었다.
샌프란시스코 ( 2월 28일 )
- 금문교 -
저녁에 인천공항을 출발했지만 같은 날 오전에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렸다. 날짜 변경선이란 무엇인지 시간도 거꾸로 돌린다. 지구가 거꾸로 도는 것은 아니니 단지 인간의 시간일 뿐이다.
예전에도 한 번 왔던 곳이라 친숙한 느낌이다. 차를 타고 길을 가다보니 아시안 아트 뮤지엄이란 건물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 이정문이란 사람의 기부로 지어져서 건물 이마에 CHONG-MOON LEE 센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어깨가 으쓱해진다.
금문교는 여전히 위용을 자랑한다. 예전에는 다리 위에서만 감상했는데 이번에는 유람선을 탔다. 바다에 떠서 하늘로 바라보는 금문교는 더욱 더 웅장하고 아름답다. 이어폰으로 설명을 들을 수 있는데 채널을 65번에 맞추면 한국어로 들을 수 있어 뭔가 대접 받는 기분이다.
유람선 관광을 마친 후 금문교 옆 언덕에 올라가 일몰을 감상했다. 석양을 받은 금문교는 그야말로 금색으로 빛난다. 금문교가 왜 금색이 아니고 붉은 색일까 의아했는데 석양을 받았을 때 금색을 띠도록 색을 칠했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 바로 또 공항으로 가서 멕시코로 향했다. 하루가 40시간으로 늘어난 데다 다리도 못 뻗고 연달아 두 번씩 기내 박을 하려니 초죽음이다.
멕시코 ( 2월 29일 )
- 해와 달의 피라밋 -
새벽에 멕시코시티 공항에 내려 곧장 떼오띠우아깐으로 이동하였다. 제대로 잠을 못자 비몽사몽간에 졸다 깨니 살이 익을 듯한 햇살이 내리 비친다.
해와 달의 피라미드는 십여 년 전 와 본 곳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대한 돌무더기는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졸고 있다. 심장까지 꺼내서 바친 사람들을 그들의 신은 왜 저버렸을까? 사실 신이 원하는 것은 이런 제사가 아닐 수도 있는데 인간이 공연히 오버한 것일 수도 있다. 무언가 슬픔을 간직한 피라미드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인생무상과 한 없이 작아지는 내 모습을 본다.
멕시코시티 공항을 출발하여 쿠바로 향한다. 한 낮의 햇볕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은 비행기를 타자마자 녹초가 되어 늘어진다. 쿠바 아바나 공항에서 짐을 찾는데 최사장님 짐이 자물쇠가 뜯긴 채로 테이프로 칭칭 감긴 채 나온다. 분실물 신고소에 신고하려니 문제가 생긴 사람들의 줄이 한 없이 길다. 아무래도 멕시코 공항에서 짐을 실을 때 내던져 터진 게 아닌가 싶다. 마냥 기다리다가 김사장님이 이러다 쿠바 가이드가 가버릴지 모르니 미숙씨와 나에게 먼저 나가보라고 한다. 둘이서 밖에 나와 TNT나 바른여행이라고 쓴 팻말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할까 하다가 다른 여행사 이름을 쓴 현지 가이드에게 물으니 모르는 눈치다. 여자 두 명이 나왔는데 우리 짐에 붙어 있는 이름을 보더니 자기 손님이 맞는다는 것이다. 우리 먼저 호텔로 가라고 하는데 기다리다가 같이 가겠다고 하였다.
넷이서 마냥 기다리니 모두 나온다. 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넘었다. 방에 와 모기장을 펴고 며칠 만에 두 다리 쭉 뻗고 잠자리에 누우니 온몸이 얼얼하다.
쿠바 코히말 ( 3월 1일 )
-헤밍웨이 저택-
코히말로 이동하여 그 유명한 헤밍웨이 저택을 찾았다. 세계적인 관광지 답게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집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구경하도록 줄로 막아놓았다. 길게 선 사람들 뒤에서 기다렸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잘 정돈된 거실 안에 벽에 걸린 액자와 책꽂이 등이 보이고 사슴을 박제한 것도 보인다.
그는 사냥을 좋아해서 아프리카로 다니며 사냥하고 그 짐승을 박제로 만들어 이렇게 장식했다고 한다. 다른 방을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그가 마시던 술병들이 놓인 탁자와 소파도 보인다. 책꽂이에는 그가 읽었을 손때 묻은 낡은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욕실에는 욕조와 양변기, 체중계도 보인다. 체중을 수시로 재었나보다. 그가 입었던 제복과 부츠도 가득하다. 큰 탁자에는 그 당시 읽던 책이 놓여있고, 의자 옆에는 휴지통도 있다. 원고를 쓰다가 맘에 안 들면 여기다 던졌겠지? 탁자 위에도 박제된 암사자 머리가 입을 벌리고 놓여있다. 스태플러와 수동식 연필깎이도 보인다. 그는 아침마다 연필을 여덟 자루씩 깎아놓고 오전에 집중적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고양이탑도 있는데 그는 애완동물을 좋아해서 오십여 마리의 고양이를 기르고 그 시체를 이 탑 지하에 묻었다고 한다. 개도 무척 좋아해서 죽으면 땅에 묻고 비석도 일일이 세워주었다. 고양이탑 위층에는 망원경도 있는데 여기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참치 떼가 보이면 낚시를 나갔다고 한다.
고양이탑 건물을 나가면 네그릿다, 블랙, 린다 등의 강아지 무덤이 보인다. 일일이 비석을 세워 이름까지 새겨준 그의 사랑이 애틋하다. 그가 사용하던 배는 아직도 탄탄하여 지금이라도 곧 출항할 수 있을 듯하다.
저택 앞에는 일종의 영빈관 같은 건물이 있다. 손님이 오면 자기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 싫어해서 여기서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가 와도 여기서 만나고 사는 집 안에는 들이지 않았다고 하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아들이 아무리 유명인사가 된다 해도 이런 대우를 받으면 엄청 슬플 것 같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테라사카페-
테라사 카페는 한적한 바닷가에 있는 작은 카페다. 벽에는 그와 절친한 친구였던 선장과 찍은 사진이 있다. 헤밍웨이는 이 선장을 모델로 하여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을 썼다. 이 선장의 이름을 딴 칵테일이 유명하다고 하여 다들 한 잔씩 시켜 맛보았다. 푸른색인데 상큼하고 깔끔한 맛이다. 백내장 수술로 눈의 실핏줄이 터진 나는 더 터질까봐 겁나서 맛만 보고 미숙씨에게 넘겼다. 바다가 보이는 탁자에 앉아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을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카페 밖으로 나오니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오래된 성채 같은 건물이 보이고 나무로 만든 긴 데크에서는 한 주민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바닷가에는 주민들이 만들었다는 헤밍웨이의 동상이 서있고 그 아래 어니스트 헤밍웨이 1898-1961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 당시 63세까지 살았으면 엄청 장수한 편이다. 부인도 몇 명씩 갈아치우며 바다로 산으로 누비고 다니면서 호화 생활을 누린 그는 천복을 타고 났나보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그렇게도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쏟아낸 것 같다.
- 정열의 도시 아바나 -
아바나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하는데 현지 여행사 사장이 한 아가씨를 자기 회사 직원이라고 하며 소개를 한다. 그녀의 외증조 할아버지가 독립 투사였다고 한다. 이렇게 먼 타국에서 독립투사의 후손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녀의 선조 같은 분이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어찌 존재했으며 우리가 어찌 이렇게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었을까?
식사 후 아르마스 광장, 성당, 구시가지를 보았다. 박물관 테라스에서 마침 광장으로 들어오는 무리를 보았는데 긴 장대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신기하고, 신나는 음악 또한 보는 이의 마음을 흥분시킨다.
한 카페 안과 밖에서는 한바탕 춤사위가 벌어졌다. 어느 누구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제 멋에 겨워 음악에 몸을 싣고 흔들어대는 쿠바인들은 음악과 춤을 사랑하는 정열적인 민족인가보다. 우리도 길거리에 서서 가이드 아까가 가르쳐주는 스텝을 따라하며 쿠바의 전통춤을 추었다. 카페 옆 벽에는 온통 많은 사람들의 낙서가 보였는데 우리도 키 큰 김사장님이 높은 곳에다 ‘TNT korea’라고 썼다.
저녁 식사 때는 현지 사장님이 쿠바 여자를 데리고 나와 인사 시킨다. 화려한 파티 복을 입은 글래머 여인이다. 남자들의 눈이 커지고 부러운 눈빛이 역력하다. 식사 후 파리지엔느 쇼를 보았는데 화려한 의상과 현란한 동작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눈이 따가워서 한 쪽 눈을 감고 보려니 반쪽 구경 밖에 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 입장료 반만 내면 안 되나?
쿠바 비날레스 ( 3월 2일 )
- 아까는 아까워 -
쿠바 가이드 아까는 한국을 사랑하는 아가씨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한국을 더 알고 싶어 서강대에 유학 가려고 했다. 입학 허가증을 받았지만 우리 정부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아 못 갔다고 한다. 혼자서 공부하며 한글로 쿠바를 소개하는 글을 써서 열심히 읽어준다. 발음은 부정확해도 눈치로 다 알 수 있다. 심수봉을 좋아한다며 심수봉 앨범 CD를 열심히 듣고 따라 부른다. ‘사랑 밖에 난 몰라.’를 특히 잘 부른다. 우리와 수교도 없는 사회주의 국가에 있는 한 소녀가 우리 가수를 이토록 좋아하는 걸 보니 한류의 거센 물결을 실감한다. 아까는 정말 쿠바에 두기엔 아까운 아이다. 속히 비자를 받아 한국에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사서 고생 -
유네스코에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록된 비날레스로 이동하다가 한 휴게소에 들렀다. 사람들이 카메라로 나무를 찍기에 자세히 보니 가운데가 불룩한 나무들이다. 이름이 임신나무라 한다. 정말 임신한 여인의 배처럼 통통하게 생겼다. 로스 야스민 전망대와 인디오 동굴을 보고 고대 벽화를 보았다. 고대 벽화라고 해서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그린 그림인 줄 알았더니 커다란 절벽에 요란한 페인트로 삼엽충, 공룡, 원시인들을 그린 것이다. 1959년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발견된 화석 등을 보고 그린 것이라 한다. 뭔가 사기 당한 느낌이다.
비날레스에는 커다란 호텔은 없고 카사라고 하는 민박 같은 집들이 많았다. 딱히 정해진 집이 없어 이 집 저 집 구경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잡고 말 트레킹에 나섰다. 말이라고 하면 어쩐지 어색하고 두렵다. 이 말이 나를 잘 받아줄지, 갑자기 튀지나 않을지 항상 심장이 두근거린다. 말을 타면 걷는 것보다 편해야하는데 더 무릎이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다. 한 곳에 내려 쉬면서 동굴 구경을 한 후 김사장님과 최사장님, 명수씨와 나는 걸어서 호수까지 가기로 했다. 내 발로 걸으니 세상 편하다. 미숙씨와 정연씨는 능숙하게 당당한 포즈로 잘도 탄다.
길 옆 호수에는 구름이 가득 담겼다. 다들 들어설 생각을 안 하는데 미숙씨는 옷 입은 채 풍덩 들어선다.
중간에 있는 휴게소까지 가서 사탕수수 즙을 먹었다. 즉석에서 짜주니 신선하고 달달하다. 휴게소 옆 공터에는 수탉과 강아지가 뛰놀고 평상마루 아래는 암탉이 병아리를 조르르 달고 다닌다. 이게 세상사는 낙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들여다보자 암탉이 병아리를 모두 날개 밑에 감쪽같이 감춘다. 닭 같은 미물도 모성애는 인간보다 극진하다.
여기서 숙소까지는 너무 멀어 걸어갈 수 없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말을 탔다. 말 타는 기쁨보다는 어서 빨리 내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도 말 위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땅바닥에서 보는 세상보다 더 멋지고 광활하다. 이 지역은 석회암 지대로 많은 지하 동굴이 무너져 생긴 카르스트 지형이라 산세와 들세가 기이하고 아름답다. 잔뜩 긴장한 채로 몇 시간을 버티다보니 어느 덧 마을이 나타나고 처음 출발점이 보인다. 이거야 말로 사서 고생이다. 원장님 말대로 말 안타면 김 사장 좋고 우리 좋고 모두 좋다.
쿠바 아바나 ( 3월 3일 )
- 올드 빈티지 카 -
비날레스에서 아침에 일어나 미숙씨와 동네 한 바퀴 도는데 웬 할아버지가 말을 탄 채 시가를 물고 달려온다. 아바나 카페 앞에서 춤추던 이빨 빠진 할아버지 보다 백 배 멋지다. 우리가 카메라를 들자 멈춰 서서 포즈도 취해준다.
비날레스를 떠나 담배공장에 들렀다. 담뱃잎을 말리는 건조장에 들어서니 구수한 냄새가 진동한다. 밖으로 나오니 마침 공작새가 날개를 펼친다. 담배고 뭐고 다들 달려가서 공작새 찍기에 바쁘다. 그 위풍당당한 위세가 수컷의 권위를 맘껏 드러낸다. 까우 까우~ 울 때마다 똥꼬가 벌렁벌렁한다. 얼마나 힘을 쓰면 똥꼬까지 움직이나 모르겠다. 목구멍부터 똥구멍까지 온 힘을 주며 발악하듯 우는 모양을 보니 자신의 유전자를 전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눈물겹도록 애처롭다.
아바나에 돌아오니 마침 하교 시간인지 빨강과 흰색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라 회색빛일 거라 생각한 것은 완전 착각이다. 어찌나 화려하고 활기찬 지 열대 지방의 화려한 꽃을 연상케 한다. 거리에 있는 조각상도 멋지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사람도 멋지다. 미숙씨가 조각상인 줄 알고 다가가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움직여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으니 모두 깜빡 속았다.
점심 식사 후 올드 빈티지 카를 타고 말레콘 해변과 미라밀 거리를 활보했다. 쿠바에는 옛날 차가 엄청 많다. 매연이 심해서 탈이긴 한데 모습만은 최고 명품이다. 머플러를 바람에 휘날리며 타야 더 멋지다고 다들 머리와 목에 휘감고 탔다. 한 달 월급을 다 줘도 청바지 하나 사기 힘들다는 쿠바에서 이렇게 빵 빵 대고 다녀도 되나 모르겠다.
저녁에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디너쇼를 보았다. 미끈미끈한 쭉쭉 빵빵 미인들과 카리스마 가득한 남자들의 탱고 쇼는 우리 영혼을 빼 가는 듯하다. 역시 한 쪽 눈으로 넋 놓고 빨려 들어갔다.
파나마 ( 3월 4일 )
- 눈물 바람 -
새벽 3시에 일어나 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아바나 공항으로 갔다. 아까와 만나 보안 검색대로 가기 전 또 스텝 연습들을 한다. 남들이 보면 약간 맛이 간 사람들로 알았을 거다. 4일 동안 아까와 정이 담뿍 들었다. 출국장 앞에서 아까와 이별하려는데 아까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눈물을 보니 저절로 눈물이 솟구친다. 모두 눈물 바람이 되었다. 20여년 해외여행 다녔어도 가이드와 헤어질 때 눈물 흘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 만큼 아까는 정이 많고 순수한 아이다.
- 목숨 걸고 오신 걸 환영한다고? -
파나마 시티 공항에 내리니 파나마 가이드가 마중 나왔다. 차에 타자마자 “목숨 걸고 파나마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고 인사를 한다. 지카 바이러스 때문에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취소를 했다는 것이다. 하긴 멕시코 가이드로 자기가 맡았던 한국 팀이 두 팀이나 취소됐다고 한다. 지카 바이러스 때문에 여행 업계의 타격이 큰가보다. 사실 출발하기 얼마 전 미숙씨도 집에서 여행 가지 말라고 야단이라고 어찌하면 좋겠냐고 문자가 왔다. 나는 “이 나이에 임신할 일도 없는디?” 하고 답장을 하니 기가 차다고 하였다.
- 파나마 운하 -
파나마 시내로 들어가 프란시아 광장, 산호세 교회, 독립광장 등을 보았다. 독립광장은 시몬 볼리바르의 파나마 독립을 기념하여 만든 광장이다. 볼리바르는 중남미 5개국을 독립시켰는데 볼리비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나라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파나마 운하를 보러 갔다. 미리 영상실에 들어가 운하를 만든 과정을 영화로 보고 실제 상황을 보려고 건물 테라스로 나갔다.
파나마 운하는 위쪽에 큰 호수가 있어서 그 호수 물을 바다로 흘려보내는 수로에 만든 것이다. 대서양에서 호수로 온 선박들이 운하 입구에 도달하면 뒤쪽 수문을 닫아 물이 흐르지 못하게 한다. 선박이 들어온 곳의 물을 아래쪽으로 흘려보내 위와 아래 수면 높이가 같아지면 수문을 열고 한 칸 아래로 이동한다. 여기서 다시 위쪽 수문을 닫고 또 아래쪽으로 물을 보낸 후 수면이 같아지면 한 칸 아래로 이동한다. 이렇게 네 번에 걸쳐 순차적으로 내려가 태평양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참 인간의 힘이란 대단해서 장차 어디까지 갈지 상상이 안 된다.
실제 상황을 본 후 박물관으로 들어가 실제 상황을 재연해서 시뮬레이션으로 운전하는 기관실로 들어가 다시 한 번 보게 한다. 우리의 가이드는 전직 갑판장 출신이라 설명도 실감나게 잘하고 운전도 잘 해서 실제 우리가 배에 타고 운하를 통과하는 기분이다. 저녁 식사 후 다시 공항으로 가 코스타리카로 향했다.
코스타리카 ( 3월 5일 )
- 해안선이 풍부한 나라 -
코스타리카는 해안이 풍부한 나라다. 코스트(coast 해안) + 리치(rich 풍부한)이 합쳐진 이름이다. 코스타리카 가이드는 커피집을 한다고 한다. 들을수록 커피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놀란다. 커피 원두 채취에서 볶는 법까지 모르는 게 없다. 그러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커피점에서 파는 커피가 재떨이 커피라는 것이다. 너무 볶아서 태우기 때문에 쓰기만 하다고 말이다. 우린 우리가 즐겨 먹는 커피가 재떨이라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 포아스 국립공원 -
포아스 국립공원으로 가다가 커피 농장에 들렀다. 커피 꽃은 지고 커피 열매도 별로 없는데 붉은 열매가 있나 찾아보라고 하여 샅샅이 찾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임도처럼 생긴 길을 따라가는데 커다란 바나나 뭉치를 머리에 이고 오는 여자가 보인다. 무척 무거워 보인다. 뙤약볕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보니 관광이나 다니며 룰루랄라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 되돌아오려는데 길가에 있는 커피나무에 빨간 열매가 보인다. 하나 따서 입에 넣으니 달달하다. 다른 사람들도 맛보게 하려고 여러 개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커피 열매는 원래부터 쓴 맛인 줄 알았더니 나의 착각이었다. 씨를 감싸고 있는 과육은 다른 과일처럼 단맛이다. 과육을 다 빨아먹으니 하얀 커피 원두가 나온다. 이걸 볶아서 갈면 우리가 먹는 원두커피가 된다.
세계 최대의 휴화산이라고 하는 포아스 국립공원에 이르니 분화구가 있는 정상(2574m)까지 넓은 길이 잘 닦여있다. 이런 저런 야생화를 보며 오르다보니 금방 정상에 닿는다. TV에서 익히 보던 흰 연기를 내뿜는 분화구가 발아래 펼쳐지자 감탄사도 안 나온다. 붉은 색 검은 색 회색 돌로 이루어진 화구 안에 연한 옥색의 물이 담겨 있고 흰 연기가 평화롭게 피어오른다. 분화구의 경이로운 모습에 정신을 뺏겨 한참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왼쪽에서 흰 구름이 몰려오더니 분화구를 다 덮어버렸다. 5분만 늦게 왔으면 아무 것도 못 볼 뻔 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발길은 돌렸다.
분화구에서 조금 내려와 ‘라구나 보토스’라는 곳으로 한 시간짜리 트레킹을 하였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가자 갑자기 환상적인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짙은 초록의 호수물이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 나비 공원 -
나비 공원이라고 해서 나비만 있는 줄 알았더니 온갖 동식물이 다 있다. 노랗고 까만색의 새가 있는데 사람들의 팔에 앉아 재롱을 부린다. 너도 나도 한 번씩 팔에 얹고 사진을 찍었는데 팁을 달라는 상자 위에 앉는다. 그 녀석 돈도 잘 벌겠다.
여기서 열대지방의 꽃에 대한 비밀을 알았다. 열대지방의 꽃은 향기가 없는 대신 색깔이 화려한데 이 꽃은 거의 모두 가짜 꽃이라는 거다. 벌 나비를 유인하려고 작고 초라한 진짜 꽃에 휘황찬란한 가짜 꽃으로 장식을 한 것이라 한다. 그야말로 화장발이 대단하다. 못 생긴 외모를 타고 났으니 어쩌겠나? 나도 한 수 배워야할 것 같다.
큰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 온갖 나비들이 날고 있는데 알에서부터 부화 직전의 번데기까지 별별 나비가 다 있다. 반쯤 나와 매달려 있는 나비는 생명의 숭고함 마저 느끼게 한다. 마치 뱀의 머리 모양을 한 나비도 있는데 이것은 천적에게 겁을 주어 살아남으려는 작전이라 한다. 자연은 보면 볼수록 신비롭고 경이롭다.
원숭이와 표범, 뱀 등 온갖 동물을 보고 돌아오다가 길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 다가가 보니 말똥구리인지 소똥구리인지 한 녀석이 똥을 굴리느라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참 먹고 살기 힘들다.
폭포까지 맘껏 구경하고 산호세로 돌아와 몬타나 호텔에 들었다. 여기서는 투숙객에게 빨간 리본으로 된 팔찌를 끼워준다. 방 호수까지 적혀 있는 팔찌를 차려니 어쩐지 죄수가 된 기분이다.
코스타리카 아레날 화산 ( 3월 6일 )
- 아레날의 형제봉 쎄로 차토 -
아침에 일어나니 집 앞에 흰 구름을 머리에 인 아레날 화산이 눈부시다. 호수에 비친 아레날은 신비 그 자체로 다가온다. 한국서는 아레날 화산에 오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그 옆의 쎄로 차토인지 쎄로 차버리는지 하여튼 그런 산에 오른다고 한다. 아레날 바로 옆에 있으니 아레날을 감상하기는 좋다.
한국서부터 위염 증상이 있어 며칠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설사도 하고 했더니 초장부터 맥아리가 없이 비실비실 댄다. 산에는 그야말로 난생 처음 보는 꽃들이 즐비했는데 이름도 모르겠고 성도 모르겠다. 길쭉한 꽃대에 분홍꽃이 핀 것은 고양이꼬리꽃이라고 한다. TV에서만 보던 벌레가 잎을 잘라 끌고 가는 것이 신기했다. 코스타리카는 그야말로 야생 동물의 천국이다.
분화구 꼭대기에 이르니 아래쪽에 ‘그린 라군’이라 부르는 산정호수가 보인다. 거기 내려갔다 온 사람들의 옷과 신을 보니 그야말로 개차반이다. 온통 검은 진흙이 묻어 떡이 되었다. 이거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는데 미숙씨가 성큼성큼 내려선다. 나도 현미차 찌꺼기로 허기를 면하고 얼른 따라 나섰다.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에 물에 젖은 미끌미끌한 진흙이라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나무뿌리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그야말로 사투를 벌였다. 신발은 흙이 붙어 떡이 되었다. 신발 무게가 두 배로 늘어 더 힘들고 옷도 흙투성이가 되었다. 죽기 살기로 한참을 씨름하다보니 어느 덧 호수가 보인다.
먼저 온 젊은이 몇 명이 놀고 있는데 너구리인지 족제비인지 모를 놈이 나타났다. 한 여자 아이가 빵을 조금씩 나눠주자 잘도 받아먹는다. 잘 받아먹다가 성이 차지 않는지 통째로 뺏어서는 나무 뒤로 숨어 만찬을 즐긴다.
나는 신발만 벗고 호수 물에 들어갔는데 미숙씨는 옷 입은 채 풍덩 들어가 수영을 즐긴다. 아무튼 온몸으로 즐기는데 천재다. 여기서 간단히 간식을 먹고 다시 기를 쓰고 올라왔다. 다들 가고 김사장님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앞 사람을 따라가려고 부지런히 걷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나뒹굴었다. 그렇지 않아도 땅강아지가 된 옷이 더 엉망이 되었다. 한참 가니 앞 팀이 보인다. 원장님이 여기서 호수로 내려가 기다리고 있단다. 함께 기다리다가 하산을 시작했다. 내리막길도 온통 진흙투성이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차를 타나 걱정했는데 마침 시냇물이 나타난다. 다들 신을 벗어 흙을 씻어내고 흙투성이 스틱도 깨끗이 씻었다.
넓은 길이 나타나 오랜만에 인간답게 허리 펴고 의젓하게 걷는데 꼭 페인트를 칠한 것 같은 나무가 나타난다. 왜 나무에 페인트를 칠했냐고 물으니 가이드 왈 칠한 게 아니고 원래 나무색이 그렇단다. 그래서 나무 이름도 페인트트리란다. 페인트트리에 가끔씩 푸른색 나무도막이 붙어 있는데 아마도 트레킹 코스 중 블루 로드를 나타내는 듯하다.
임도처럼 편안한 길을 따라 걷다가 숲을 벗어나니 갑자기 아레날 화산이 나타난다. 여전히 머리에는 흰 구름을 이고 있다. 8시간 걸린다던 산행이 여섯 시간 만에 끝났다. 저질 체력으로 어찌 산행을 할까 걱정했는데 무사히 마치자 한숨이 절로 난다.
- 아레날 호수 -
아레날은 원래 마을 이름인데 화산이 폭발하면서 마을 사람 모두가 화산재에 묻혀 죽고 말았다. 그 후 아래쪽에 댐을 만들면서 물에 잠겼는데 지금도 물속에 성당 같은 것이 보인다고 한다. 화산 반대쪽에 있는 마을은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했는데 그 후 이 마을 이름을 라 포르투나로 불렀다. 라 포르투나는 행운의 도시라는 뜻이다.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바라보는 아레날은 더 신비롭고 위용을 자랑한다. 감히 인간이 범접치 못할 위엄이 느껴진다.
호숫가에는 하얀 새들이 떼 지어 나르고 보트를 타고 물놀이를 하는 젊은이도 아름답다. 물가의 죽은 나무 가지에는 왜가리인지 뭔지 모를 검은 새가 새카맣게 달렸다.
호텔로 돌아오다가 타바콘 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이건 그냥 탕 속에 들어가서 온천욕을 하는 게 아니라 계곡물 전체가 온천물이다. 계곡을 내려오며 몇 개의 웅덩이가 풀을 이루고 아래는 커다란 온천 수영장이 있다. 수영장 안에는 맥주를 파는 카페까지 있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온천장이다.
맨 위 풀에서 온천을 즐기는데 가이드 김용철씨가 밖으로 나와 보라고 손짓한다. 가까이 가니 풀숲에 숨어있는 웬 도마뱀을 가리킨다. 자세히 보고 있으니 어디서 본 듯도 하다. 이 도마뱀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란다. 의아해서 쳐다보니 물 위를 걷는 도마뱀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성경에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는 데서 유래했나보다. 언젠가 TV에서 본 기억이 난다.
- 장의사는 짱이야 -
요즘 장미숙씨는 의사 노릇하랴, 약사 노릇하랴 정신없이 바쁘다. 룸메이트인 내가 골골 대자 아침마다 약 챙기랴 현미 차 준비해주랴 자기가 가져온 약 다 쓰고 있다. 거기다 최 사장님이 탈 낫다고 하니 정로환에 설사약에 효소까지 챙겨주기 바쁘다.
원장님도 비날레스에서부터 배탈이 났다. 하루에 스물한 번 설사를 했다고 한다. 요즘 아무 것도 못 먹는데 또 미숙씨가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챙긴다. 원장님도 미숙씨를 장원장이라고 부른다. 이비인후과는 이 원장님이 명의인줄 몰라도 민간요법에는 단연 장원장이 최고다.
코스타리카 ( 3월 7일 )
- 짚 라인 -
산호세로 가다가 짚 라인을 타기로 했다. 생전 처음 타보는 거라 잔뜩 긴장했다. 안전모와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두꺼운 장갑까지 낀 후 주의 사항을 들었다. 여기 짚 라인은 브레이크가 있어서 나무에 충돌할 일이 없으니 좀 안심은 되었다.
미국 할머니 세 명도 우리와 같은 조가 되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눈물을 흘리며 벌벌 떤다. 드디어 첫 번째 줄에 매달려 내려가며 “오 마이 갓”을 외치고 난리가 났다.
타잔 놀이도 했는데 긴 밧줄에 매달리면 짚 라인 가이드 둘이서 힘차게 밀어준다.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니 한 마리 새가 된 듯 기분이 상쾌하다. 마지막에는 수퍼맨처럼 엎드린 채 줄에 매달려 아래를 보고 달려내려가는데 수퍼맨까지는 못 되도 수퍼우먼이 된 기분이다.
짚 라인을 탄 후 아래쪽으로 트레킹을 갔다. 미숙씨는 모기 물릴까봐 모기장 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간다. 계곡에 달린 행잉브릿지도 건너고 열대우림을 한 시간 정도 헤집고 돌아다녔다. 코스타리카는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나라다.
- 맹그로브 숲 -
시간이 있어 일인당 10불씩 내어 맹그로브 숲을 보기로 했다. 배를 타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가는데 왜가리와 백로 등이 나르고 강가에는 악어가 납작 엎드려 일광욕을 하고 있다. 큰 놈이 있었는데 이름이 오사마 빈 라덴이라 한다. 갯벌에는 붉은 발을 가진 게들이 연방 들락거리고 맹그로브 나무가 수많은 뿌리를 수면에 내리고 있다. 펠리컨은 나무에 열매처럼 무수히 달려있고 수면 위를 유유히 나르는 새들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바로 여기라고 말하는 듯하다.
코스타리카를 만끽하고 부랴부랴 산호세 공항에 와서 과테말라로 출발했다.
과테말라 ( 3월 8일 )
- 나무가 많은 나라 -
과테말라는 나무가 많다는 뜻이다. 열대 우림으로 우거졌으니 나무가 많은 건 당연한데 이런 이름을 붙인 게 신기하다. 오전에는 호텔에서 휴식하기로 해서 호텔 밖으로 나가 시내 구경을 하였다. 과테말라시티는 수도답게 차와 사람들로 복작거린다. 육교 중간 벽에 이런 저런 물건을 걸어놓고 파는 상인도 있고, 출근하는 직장인을 상대로 주스나 빵을 파는 리어카 가게도 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다. 호텔로 돌아와 수영장에 가보니 원장님은 벌써 나와 수영중이다. 장의사 미숙씨 덕분에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나보다.
- 과테말라 두 번째 수도 안티구아 -
안티구아로 이동하여 먼저 산토 도밍고라는 남자 수도원으로 갔다. 예전에는 수도원이었지만 지금은 호텔과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인디오 가이드가 나와 열심히 설명해준다. 남자 수도원은 분위기와 건물이 어찌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지 여기 있으면 일부러 도를 닦지 않아도 저절로 도통할 것 같다. 동굴 같은 카페에서 맥주와 커피, 음료 등을 시켰는데 탁자와 실내장식, 정원 등이 어우러져 어찌나 멋있는지 갑자기 우리가 업그레이드 된 것처럼 기분이 으쓱해진다. 하얀 테이블보 위에 십자 모양으로 장식된 보라색 천이 어찌나 우아한지 그야말로 모두 귀족으로 환생한 기분이다.
안티구아 시내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옛 모습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곳이다. 라메르 세데스 성당 안 바닥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는데 카페트인 줄 알았더니 모래그림이다. 색색의 모래를 뿌려 만든 일회용 그림이다. 부활절이 되면 길 위를 온통 이런 그림으로 장식하고 사람들의 행렬이 이 위로 지나간다고 한다. 너무도 정교하고 아름다워 도저히 밟지 못할 것 같다.
시내에는 공동 빨래터도 있었는데 비스듬한 빨래판 모양의 공간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앞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수영장 크기의 물 저장소가 있다. 여기서 동네 아낙들이 빨래하며 담소를 나누었을 것 같다.
카푸치노 여자 수도원은 남자 수도원만큼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런대로 정감이 가는 곳이다. 요리에 쓰인 화덕도 보이고 한 사람씩 들어가 기도하는 굴 모양의 작은 방도 있다. 여기서 수도하던 모든 수녀님들이 천국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중앙광장에는 네 명의 여자들이 장식된 분수대가 있는데 젖꼭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 한 여자는 두 젖꼭지에서 힘차게 물줄기가 뻗어 나오는데 한 여자는 왼쪽 젖, 한 여자는 오른쪽 젖에서만 나오고 한 여자는 아무 것도 안 나온다. 원장님 왈 짝 젖이라 한쪽에서만 나오는 거란다.
과테말라 ( 3월 9일 )
- 마야 문명이 남았는 띠깔 -
과테말라시티 공항에서 1시간을 날아가니 플로레스 공항에 이른다. 여기서 차를 타고 마야 문명의 유적지 띠깔로 이동했다. 외국인들과 한 팀이 되어 가이드 할아버지와 함께 열대우림 속에 있는 띠깔로 가는데 영어로 설명하니 뭔 소린지 몰라 어리버리한다. 설명도 못 알아듣는데다 새벽부터 일어난 관계로 모두 마취약을 먹은 듯 잠에 떨어진다. 차에서 내릴 때가 되자 가이드 할아버지가 “Korea wake up!”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소스라치듯 일어났다.
띠깔에 도착하여 실물을 보기 전에 우선 그림에 그려진 모양을 보며 한참 설명을 한다. 칼을 들고 있는 건 통치자이고 손과 발이 묶여져 엎드려 있는 사람은 신에게 바쳐질 제물이라고 한다.
띠깔은 ‘Sound of the voice“ 소리의 반향이란 뜻이란다. 건물 벽을 향해 박수를 치면 되돌아오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국립공원으로 들어서자 세이버라는 큰 나무가 보였는데 껌나무라고 하는 이 나무는 과테말라의 국목(國木)이다.
피라미드 신전은 돌을 쌓아 계단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어찌나 가파른지 한 번 헛디디면 황천길로 가게 생겼다. 그래도 높이 올라가 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정글은 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그 속에 군데군데 널려있는 피라미드 신전들은 옛 마야 인들의 정신세계를 말하는 듯하다. 더 바라보고 싶지만 돌계단은 찜질방 수준이라 엉덩이가 익을 지경이고 내리쬐는 햇볕에 산 채로 바비큐가 될 판이라 서둘러 내려왔다.
마스크 사원과 메트로폴리탄 광장은 거대한 규모와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가슴이 콱 막혀온다. 한 번 풀어놓으면 다시 담기 힘든 우리 TNT 회원들은 이 구석 저 구석 다니며 구경하느라 돌아올 줄 모른다. 가이드 할아버지는 말도 안 통하는 우리를 모을 수 없으니 “Let’s go~”가 한국말로 뭐냐고 묻는다. “갑시다~”라고 가르쳐주니 “갑시다~ 갑시다~”를 연발하며 갈 길을 재촉한다. 같이 다니는 서양인들이 배고파 죽겠다는 것이다. 입구로 돌아와 허겁지겁 점심식사를 한 후 띠깔을 떠나 플로레스로 돌아왔다.
- 꽃보다 아름다운 플로레스 -
플로레스는 어쩐지 발음상 꽃(플라우어)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곳에 처음 정착한 사람 이름이라고 한다. 플로레스 ‘마야 인터내셔널 호텔’에 들었는데 호숫가에 별장처럼 지어진 아름다운 호텔이다. 갈대 지붕으로 된 호텔 로비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호수는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과테말라 가이드 차선생님은 어떻게 이렇게 좋은 곳에 숙소를 잡았는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게다가 연일 끼니때마다 진수성찬으로 먹여주니 황송하다 못해, 이렇게 퍼 먹이고 뭐가 남을지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된다. 거기다 우리 모두에게 과테말라 커피가 맛있다고 두 봉지씩 선물도 주었다. 이제 여행사 차린 지 1년 밖에 안 되었다는데 30년 베테랑 김 사장님에게 한참 배워야 할 것 같다. 남자들이 다 눈이 멀었나 이렇게 싹싹하고 애교 많고 능력 있는 사람이 어째 여태 싱글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숙소에 짐을 풀고 호수에 비친 석양을 바라보며 다리를 건너 플로레스 시내로 갔다. 플로레스는 활기 넘치고 매력 넘치는 도시다. 분위기 좋고 음식 맛 좋은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고 오토 릭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벨라 멋진 벨리제 ( 3월 10일 )
- 난생 처음 벨리제 -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 여명을 받으며 두 명의 어부가 그물을 건져 올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생업이지만 내가 보기에 한 폭의 그림이다. 그물에 고기가 걸렸는지 건져 올려 배 안의 플라스틱 양동이게 연신 털어 넣는다. 오늘 대박 났으면 좋겠다.
이번 중미 여행국 중 다른 곳은 이름이라도 들어봤는데 벨리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곳이다. 영어 발음으로는 벨리즈,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벨리제라 한다. 하긴 TV에 한 번 나오긴 했었는데 무심코 지나갔다. 그림 같은 마야호텔을 나와 버스에 올라 2시간 정도 달리니 국경도시 멘초르에 닿는다. 여기서 과테말라 버스에서 내려 짐을 가지고 벨리제 입국심사장으로 들어갔다.
눈치 빠른 차선생님은 수속이 늦어지자 현지에서 손님들을 도와주고 팁을 챙기는 어린 소년을 불러 벨리제 가이드에게 가서 이리 이리 전하라고 심부름도 시키고 우리들에게 화장실도 안내해주라고 시킨다. 이 녀석은 이 바닥에서 얼마나 굴러다녔는지 눈치도 100단 행동도 100단이다. 초등학교에 다녀야할 나이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는지 벌써 일이 몸에 착 감긴다. 우리가 짐을 가지고 가자 짐도 들어주고 벨리제 차에 싣는 것도 도와주고 아주 입의 혀처럼 논다. 이러니 누군들 팁을 주고 싶지 않겠는가? 우리 외손자 건희는 올해 중학교 들어가는데 여리디 여려 아무 것도 못한다. 이 녀석은 세상 어디다 던져 놔도 살아남을 것 같다. 대견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 카리브해의 산페드로섬 -
벨리제 시티에서 점심을 먹고 보트에 올라 산페드로 섬으로 갔다. 모터보트가 파도에 어찌나 튀는지 그야말로 엉덩이뼈 부서질 판이다. 조금씩 엉덩이를 들며 의자를 손으로 잡고 안간 힘을 쓰다 보니 산페드로 선착장이 보인다.
선착장에 내리니 작열하는 열대의 태양이 눈부시다. 모래밭에 트렁크를 질질 끌며 썬브리즈 호텔로 들어갔다. 이름 그대로 태양(sun)과 미풍(breeze)이 어루러진 아름다운 호텔이다. 호텔 앞에는 수영장이 있고, 야자수 밑에는 긴 의자가 놓여 있다. 침대와 화장실에는 빨간 작은 꽃으로 장식해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산페드로 섬 블루홀 ( 3월 11일 )
- 블랙홀 보다 멋진 블루홀 -
아침에 일어나 카리브해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나는 운동화를 신은 채 조심조심 걷는데 미숙씨는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파도에 발을 적시며 걷는다. 항상 몸으로 만끽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벌써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모래밭을 지나 등교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어린 아이답게 가다말고 모래밭에서 뭔가를 들여다보며 놀고 있다.
아침 식사 후 경비행기를 타러 비행장으로 갔다. 착오를 방지하려고 여기서도 서로 다른 색 리본의 팔찌를 채워준다.
경비행기를 타고 가볍게 창공으로 오르자 산페드로섬 선착장과 집들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산호초로 이루어진 바다의 색이 오묘한 푸른빛을 띤다. 꿈꾸듯 몽롱한 기분이다.
파도는 해안가에서만 부서지는 줄 알았더니 바다 한가운데서도 흰 파도가 친다. 산호초가 발달해 깊이가 얕아진 곳에 이르면 바닥에 있는 물은 마찰이 커져 속도가 느려진다. 위의 물은 진행속도가 빨라 위의 물이 앞으로 넘어가며 부서지는 것인데 실제로 보니 신비하기만 하다. 물이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곳곳에 있는 물 속 산호섬이 둥근 연잎을 보는 듯하다.
바람이 강해 비행기의 진행 속도가 느리다고 하더니 드디어 블루홀이 보인다. 밑을 알 수 없는 푸른 구멍이 그야말로 블랙홀처럼 우리 비행기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한 바퀴 돌고 가는 줄 알았더니 시계 방향으로 세 번, 반 시계 방향으로 세 번을 돌며 맘껏 보게 해준다. 커다란 블루홀 안에 있는 하얀 배는 한 조각 종이배처럼 보인다. 원장님이 팁을 두둑이 준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 배부르도록 블루홀을 만끽하고 기수를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초승달 모양의 산호초도 있었는데 여기는 작은 건물도 보인다. 등대라고 한다. 하늘에서 보는 카리브해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다. 날씨가 나쁘면 경비행기가 못 떠 블루홀을 볼 수 있는 확률은 50%도 안 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천복을 타고 났다.
경비행기에서 내려 현실로 돌아오려는데 정연씨가 비실비실 내리더니 담벼락에 기대어 땅에 철썩 주저앉는다. 멀미가 나서 토하느라고 정신을 못 차렸다는 것이다. 우린 블루홀에 정신 팔려서 뒷사람 죽어나가는 것도 모를 뻔했다.
한참을 기다려 휴식을 취한 후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 4시 배를 타고 나가기로 예약이 되어 무엇을 할까 의논했다. 스노쿨링을 하자니 나는 눈이 터져 못하고 최사장님은 스노쿨링을 못한다고 한다. 명수씨가 최사장님은 여태 스노쿨링을 못한다고 흉내를 내는데 “꼬로록 캑 캑! 꼬로록 캑 캑!” 하는 모양이 어찌나 웃기는지 다들 배꼽 잡았다.
다시 모터보트를 타려면 힘드니까 그냥 호텔 정원에서 쉬기로 했다. 썬브리즈 호텔 정원 긴 의자에 누우니 야자수를 통해 푸른 하늘이 눈으로 가득 들어온다. 말 그대로 썬(sun)과 브리즈(breeze)를 즐기는데 잠이 솔 솔 쏟아진다.
네 시 배를 타고 벨리제시티로 돌아와 웨스턴 호텔에 들었다.
- 남편 성토 대회 -
요즘 시간만 나면 차 속이고 땅 속이고 시도 때도 없이 남편 성토대회가 열린다. 명수씨는 자기가 눈 수술했을 때 남편이 밥 달라고 하여 썬글라스 끼고 밥 해줬다고 하자, 정연씨는 자기도 하루 세 끼 밥 챙기기 힘들다고 매일 도시락까지 싸서 병원으로 보내느라 꼼짝을 못한다고 푸념이다. 자기가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순간에도 도시락 싸놓고 죽으라고 할 거라고 열변을 토한다. 미숙씨도 활 활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으며 세 여자가 입에 거품을 문다. 나는 속으로 그래도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집에서 여자들이 받는 스트레스 보다 심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몰매 맞을까봐 꾹 참았다.
사실 내 남편은 물 한 잔도 나보고 가져오라고 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갖다 먹는다. 아들만 여섯인 집에 다섯째로 태어나 부모의 손길을 받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오래 앓다가 대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느라 아들 돌볼 틈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쌀이 없어 도시락도 못 싸고, 점심시간이면 어머니가 냄비에 국수를 끓여와 교문에서 받아먹고 다시 냄비를 주면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도 저도 못하는 때는 같은 반에 있는 육촌이 도시락을 반만 먹고 밖으로 나가면 자기가 나머지 반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니 무슨 찬밥 더운밥 가리겠는가?
우리 아들도 초등학교 2학년 때 일 해주던 할머니가 가자 혼자서 일어나 학교 가고 점심때는 빈 집에 혼자 와서 밥 먹었다. 먹는 것까지는 좋은데 설거지를 안 해놓는다. 퇴근 후 시장 봐서 집에 와 저녁 준비하려는데 빈 그릇이 싱크대에 가득하면 신경질이 치솟아 ‘쳐 먹기는 누가 쳐 먹고 누구보고 닦으라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니 그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설거지도 해 놓았다. 결혼해서도 빨래도 전담하고 설거지도 잘 하니 며느리가 나보고 아들 훈련 잘 시켜줘서 고맙단다. 어려운 환경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볼 때 최사장님이나 원장님, 미숙씨 남편까지 모두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뭘 몰라서 그러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바람을 피우나, 때리기를 하나 평생 죽기 살기로 벌어 먹이고 세계 방방곡곡 구경시켜준 죄 밖에 없다. 자꾸 이러면 그렇잖아도 시집가기 어려운 차선생님 환상이 깨져 혼삿길 막힐까 걱정이다.
미국 LA ( 3월 12일 )
- 짐 부치는 돈 내라고? -
새벽에 일어나 벨리제 시티 공항으로 가 짐을 부치는데 무조건 1개당 23달러를 내라고 한다. 아니 여섯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는데 무료로 한 개의 짐을 안 부쳐준다니 이럴 수가? 결국 이것도 김사장님이 부담하고 모기장 부치는데도 46달러나 썼다. 벨리제가 가난한 나라라더니 이런데서 티가 나나? 아니 비행기는 아메리카 에어라인인데? 알 수가 없다.
아침 식사도 못한 관계로 기내에서 햄버거를 돈 주고 시켜 먹으려는데 이것도 없단다. 참 서비스 꽝이다.
- 쇼핑은 무슨 재미? -
LA에 도착하니 다들 여러 번 온 관계로 구경할 것이 없다. 그냥 아울렛이나 가자고 한다. 무수한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나는 길 잃으면 출발점도 못 찾을 것 같아 미숙씨 뒤만 졸졸 따라 다녔다. 티셔츠 가게에 오자 미숙씨는 날 보고 이거 아저씨 사다 주라고 한다. 나는 ‘남편 사이즈 모르는데?’ 하니까 장난감 가게에 가서 이거 손자 사주라고 한다. ‘손자가 어떤 장난감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데?’ 하니 도대체 아는 게 뭐냐고 한다. ‘없는데~’ 하니 기가 차단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다. 남편이 순간의 선택을 잘못하여 평생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원장님은 우리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내 남편을 보고 저렇게 키 크고 잘 생기고 맘씨 착해 보이는 사람이 어이하여 나 같은 여자하고 결혼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요리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결혼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서 정연씨에게 ‘혹시 밤일을 잘하나?’ 라고 했다기에 다들 배꼽 잡았다. 낮일도 못 하는 내가 무슨 밤일인들 소질이 있으랴? 내가 생각하기에 밤일도 꽝이고, 내 최대 무기는 무관심인 것 같다. 도무지 관심이 없으니 바가지 긁을 일도 없다.
- 여기가 한국이냐고? -
코리아타운에 도착해 한인 식당으로 갔다. 여기로 아들네가 오기로 했다. 마침 원장님 부부와 미숙씨가 친구와 식사하겠다고 나간 관계로 아들네 세 명이 공짜로 식사했다. 오랜만에 손자를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아들은 여기서 한 시간쯤 떨어진 클레어몬트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 차 타고 오는 동안 손자가 잠시 잠이 들었는데 차에서 내리며 여기가 한국이냐고 묻더란다. 저녁에 할머니 만나서 식사할 거라고 했더니 잠든 사이 한국에 온 줄 알았나보다. 마침 오늘이 손자의 네 번째 생일이라 아들이 빠리바게트 케익을 사들고 왔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케익도 주니 신이 났다.
식사 후 옥스퍼드 호텔로 같이 왔다. 방에 들어와 그 동안 끌고 다니던 모기장을 침대 위에 펴주자 들어가서 방방 뛰며 신나게 논다. 할머니 들어와라, 엄마 들어와라 하며 같이 놀자고 한다. 이제 모기장도 필요 없으니 아예 집에 가지고 가서 놀라고 주었더니 갈 때 무슨 보물처럼 자기가 소중히 들고 간다.
미국 캐년 ( 3월 13일 )
- 그래도 개년? -
아침부터 그랜드 캐년을 향해 달린다. 미국 가이드 윤선생님은 직접 운전도 하고 가이드도 한다. 단단한 몸매에 다부진 분위기가 믿음이 간다. 저녁때가 다 되어 그랜드캐년에 도착해 림(rim) 트레일만 하기로 했다.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그랜드 캐년은 19년 전 왔던 때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그 때 가이드가 그랜드 캐년이 어려우면 그래도 개년으로 외우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이 안에 있는 호텔에 묵기로 했으니 캄캄하여 보이는 게 없을 때까지 보고 식당으로 갔다.
원장님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세계 방방곡곡 오지까지 다 다녀온 분이 처음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여기 오려고 할 때마다 일이 생겨 못 왔다는 것이다. 참 인간도 그렇지만 장소도 서로 인연이 닿아야 올 수 있는 듯하다.
미국 캐년 ( 3월 14일 )
- 마더스 포인트? -
아침에 일어나니 주차장 근처에서 사슴이 풀을 뜯고 있다.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다. 공원 안에서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마더스 포인트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마더라고 해서 mother(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와 무슨 상관이 있나 했더니 사람 이름 mather이다. 이 전망대를 만든 사람이다. 아침 햇살을 받고 깨어나는 캐년은 수억 년의 침묵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림 트레일로 만족하려 했지만 윤선생님이 위에서만 보면 안 된다고 중간까지 내려가 보자고 한다. 다시 셔들버스를 타고 카이밥 트레일로 갔다. 버스에서 커피 사탕을 꺼내 옆에 앉은 여자에게 주니 자기도 커피 사탕 좋아한다고 캐년 밑에 까지 갈 거냐고 묻는다. 자기는 조금만 내려갔다 온다고 하기에 나도 역시 그렇다고 했다.
카이밥은 인디오 말로 거꾸로 누운 산이란 뜻이다. 보통 산은 위가 뾰족하게 솟아있는데 캐년은 평평한 대지에 아래로 뾰족하게 내려가 있으니 산이 거꾸로 누운 모양이다. 내려갈수록 점입가경이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하도 좋은 경치만 보고 다니니 눈알이 머리꼭대기에 붙었다. 이제 웬만한 경치는 눈에 차지도 않으니 한국 갈 일이 걱정이다.
한참 내려가는데 셔틀버스에서 옆에 앉았던 여자가 올라오며 반갑게 인사한다. 아래로 더 내려가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계곡이 눈에 들어온다. 콜로라도 강에 걸린 다리도 보이고 개미처럼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전망대처럼 널찍한 바위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다 다시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선생님은 앞에서 찍고 뒤에서 찍고, 대포 같은 카메라와 무비 카메라, 핸드폰까지 삼박자로 찍어주느라 발이 안 보이도록 뛰어다닌다. 일중산악회 이대장님과 호선생님을 합쳐 놓은 것 같다. 한 개라도 더 보여주려고 안간 힘을 쓰는 건 대장님 닮았고, 대포 같은 카메라 들고 종횡무진 달리는 것은 호선생님을 닮았다.
- 기념비 공원 모뉴먼트 밸리 -
모뉴먼트 밸리는 서부영화에 하도 많이 나오고 TV에서도 무수히 보아온 터라 처음 보아도 낯익다. 이름 그대로 전승 기념비(monument)를 닮은 돌들이 우뚝 우뚝 서있다. 그랜드캐년은 광대한 대지가 이제 깎여 들어가는 중이고 모뉴면트 밸리는 다 깎여나가고 단단한 부분만 남은 거라 한다. 대자연의 거대하고 위대한 힘에 내 자신이 한 없이 작아진다. 바라보면 볼수록 수억 년의 무게가 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다.
인디오들이 운영하는 짚차를 타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타는 듯한 붉은 사암이 거대한 빌딩처럼 다가온다. 세 자매 바위는 세 개의 바위 기둥이 서 있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W와 V자가 보인다. 윤샘 왈 ‘Welcome Visiter’란다. 정말 기막힌 해몽이다.
모래바람을 맞으며 더 깊숙이 들어가자 호간이란 인디오 전통 가옥이 나타난다. 꼭 왕릉처럼 생긴 흙무더기 안에 살림집이 있다. 물 한 톨 없고 모래바람만 몰아치니 도저히 인간은커녕 풀 한 포기 살기 힘든 환경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아담한 방에 한 여자가 앉아 수를 놓고 있다. 여러 가지 수공예품도 판다.
다시 차를 타고 커다란 구멍이 뚫린 바위 밑으로 갔다. 태양의 눈이라는 이름대로 커다란 구멍으로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들어온다. 독수리를 찾아보라는데 아무리 봐도 독수리 모양이 안 보인다. 자세히 보던 명수씨가 ‘보인다.’ 하며 가르쳐주기에 보니 큰 구멍이 독수리 눈알이고 옆으로 뾰족한 부리가 완연하다. 원장님은 몇 번씩 가르쳐줘도 안 보인다고 한다. 실물로도, 카메라에 찍힌 영상으로도 아무리 설명해도 속수무책이다. 하긴 뭐든지 잘 하면 뭐하나 환자 하나 잘 보면 됐지. 이래서 세상은 공평하다.
다음은 선사시대 그림을 보러갔다. 이번에는 설마 쿠바에서처럼 사기는 아니겠지 하며 다가가보니 진짜다. 검은 색 바위를 긁어 지금은 볼 수 없는 여러 동물의 모양을 자세히도 그려놓았다.
두 개의 돌이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니 커다란 구멍이 있고 그 구멍 안으로 보이는 모뉴먼트 밸리의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환상이다. 가슴이 먹먹하다. 윤선생님은 요소요소 키포인트를 딱딱 집어 보여주는 명 가이드다. 어떤 곳은 언제 보아야 더 멋진지, 어디서 보아야 더 아름다운지 완전 족집게 과외를 받는 듯하다.
일몰 포인트에서 일몰을 봐야한다고 부지런히 달려 처음 위치로 돌아오니 어찌나 모래 바람이 몰아치는지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 일몰은 포기하고 호텔로 들어와 체크인을 하였다. 눈에 뵈는 게 없어야 집에 오는 것도 이대장님과 똑같다. 아쉬운 대로 복도 안쪽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사막으로 가라앉는 태양은 장엄하고 웅장하여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미국 캐년 ( 3월 15일 )
- 천마의 말발굽 호스슈벤드 -
아침에 일어나 사막에서 거대한 바위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감상한 후 말발굽 모양의 호스슈벤드를 보러갔다. 호스슈(horseshoe)는 말 그대로 말의 신발 즉 말발굽을 뜻한다. 벤드(bend)는 구부러지다, 굴곡이란 뜻이다. 즉 말발굽처럼 구부러진 지형이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황량한 들판을 지나니 갑자기 신천지가 안전(眼前)에 전개된다. 발밑으로 거대한 협곡이 나타나는데 천마가 내려온 듯 말발굽 모양이 뚜렷한 가운데 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근처 바위는 온통 붉은 빛으로 화성에라도 온 기분이다. 명수씨와 정연씨는 커다란 바위에 엎어져 밑으로 빠질 듯 들여다보고 미숙씨와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생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윤샘은 엔텔롭 가는 지프차 예약시간 다 되었다고 전전긍긍이다. 다들 나는 듯 달려와 엔텔롭 출발지로 향했다.
- 빛의 사기 엔텔롭 -
엔텔롭 캐년은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하도 봐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큰 곳이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빛의 향연이 펼쳐지리라 가슴이 부풀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수십 대의 차들이 늘어서서 손님을 불러 자기 차에 태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예약자의 이름을 부르면 당첨된 듯 달려 나간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달리더니 차에서 내리라고 한다. 우리 차의 가이드 할머니는 다른 설명은 안하고 카메라의 조리개는 얼마에 맞추고 셔터 노출시간은 얼마에 맞추고 하며 카메라 소리만 늘어놓는다. 잘 모르는 사람은 카메라를 주면 자기가 직접 맞춰준다. 붉은 사암이 괴물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린 속으로 들어가니 컴컴한 굴속에 먼지만 풀풀 날린다. 그런데 카메라로 보면 환상적인 색깔과 무늬가 나타나니 무슨 요술을 보는 것 같다. 붉은 사암의 틈새로 난 길이 마치 요르단의 페트라 가는 길을 닮았다.
그런데 그게 참 요상하게도 내가 찍으면 별 볼일이 없는데 가이드 할머니가 찍으면 악마의 목구멍처럼 뻘건 모양이 기막힌 예술 작품이다. 할머니는 족집게처럼 정확한 위치에서 정확한 각도로 찍는다. 사진 찍기의 달인을 보는 듯하다. 꼭 할머니가 보라는 곳에서 봐야 사람 얼굴도 보이고 곰도 보인다. 떠오르는 태양도 있고, 파도치는 붉은 물결도 볼 수 있다. 다들 엎어져서 찍고 자빠져서 찍고, 고개를 있는 대로 젖히고 보느라 목뼈 부러질 지경이다.
한참을 정신 못 차리게 요동을 치다보니 멀리 출구가 보인다. 미숙씨는 먼지 때문에 목 아프다 눈 아프다 빨리 나가고 싶다고 난리다. 한 달 넘도록 눈에 실핏줄 터져있는 나도 말씀이 아니다. 밖으로 나가 한 숨을 돌리니 다시 굴속을 통과하여 출발점으로 가란다. 이번에는 볼 것도 없고 찍을 것도 없이 최고 속도로 통과하는데 사람들이 몰려있다. 자세히 보니 안내 팜플렛에서 보던 빔이 보인다. 천장의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이 환상이다. 해가 이 자리에 올 때만 빛이 구멍으로 들어와 나타나는 현상이다.
피난하듯 달음질쳐 처음 입구로 나오니 무슨 요술에 걸렸다가 깨어난 듯 정신이 몽롱하다. 엔텔롭(antelope)은 산양을 뜻하는데 이 굴 속에 산양이 살았는지도 모른다. 원장님도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컸는지 이건 완전 사기라고 게거품을 품는다. 인터넷에 보면 어느 누구도 사진에서만 이렇게 보인다는 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굴속에 들어가면 맨 눈으로 이렇게 보이는 줄 알았다고, 이건 빛의 향연이 아니라 빛의 사기라고 결론을 내린다. 나도 동감이다.
파웰 호숫가 전망대에서 라면을 먹기로 했다. 요즘 아침마다 윤샘과 김사장님의 요리로 호강을 하는데 오늘은 점심도 두 분이 해결해 주기로 했다. 그림 같은 파웰 호수를 바라보며 먹는 떡라면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다들 배고픈 참이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세상에 이처럼 전망 좋은 식당에서 식사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식사를 마치고 브라이스 캐년으로 향했다.
- 돌의 향연 브라이스 캐년 -
브라이스 캐년에 도착해 썬쎗 포인트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썬쎗 포인트(sun set point)는 말 그대로 석양에 보아야 제 맛이라고 윤샘이 일부러 이렇게 시간을 맞추었다. 역시 가이드의 달인답다.
석양을 받아 불타는 돌들의 향연은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다. 브라이스는 여기를 발견한 사람이름이다. 처음 여기를 보았을 때 그는 얼마나 황홀했을까? 나바호 트레일과 퀸즈 가든을 걸었다.
브라이스 캐년은 여성스럽고 내일 갈 자이언 캐년은 남성스럽다고 한다. 가는 송곳처럼 가냘픈 돌기둥은 손가락만 스쳐도 곧 무너질 듯하다. 큰 돌을 이고 있는 가는 목은 발길로 한 번 차면 목이 똑 부러질 것 같다. 그야말로 돌들이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것 같다.
두 절벽 사이에 걸린 다리(two bridges)를 보고 더 내려가니 퀸즈가든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틀어 여왕의 정원을 향해 갔다. 곳곳에 아직 눈이 남아 있어 스틱을 짚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윤샘이 준비해준 아이젠은 배낭 깊숙이 잘 간직했다.
여왕님이 어디 있나 잘 찾아보라고 하여 주위를 열심히 살피며 걷는데 앞사람이 안내판을 보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퀸즈가든에 대한 설명이 있다.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여왕의 조각상과 여기 있는 여왕 모습의 바위 사진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볼 수 있게 하였다. 정말 보면 볼수록 멋진 망토를 걸친 빅토리아 여왕의 당당한 모습을 닮았다. 여왕님까지 알현하고 땅거미가 지는 오르막길을 올라오니 날이 다 저물어 캄캄한 밤이 되었다. 달빛에 야간 산행까지 하며 깜깜한 밤에 숙소인 루비스 인에 도착했다.
미국 캐년 ( 3월 16일 )
- 천사들이 하강한 자이언 캐년 -
자이언(ZION) 캐년은 성경의 시온을 뜻하는 단어라 시온성 같은 낙원을 연상했는데 남성미를 자랑하는 우람한 산이다. 누가 시온이란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혹시 유대인들이 너무도 아름다운 이곳이 시온 같다고 하여 붙인 건 아닐까?
바위를 뚫어 만든 진입로부터 우리를 압도한다. 국립공원 안에서는 셔틀버스를 타고 움직여야한다. 우리는 엔젤스 랜딩( angel’s landing) 포인트가 있는 그로토 트레일을 걷기로 했다. 2번 정류장에서 타서 6번 정류장에 내리니 계곡에 막 새싹이 돋기 시작해 말 그대로 초록의 낙원에 온 듯하다.
계곡에 걸린 다리를 건너니 평탄하고 넓은 길이 나타난다. 길옆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눈길을 끈다.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장엄한 계곡이 발 아래로 펼쳐진다. 조물주는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이토록 아름답고 기가 막힌 작품을 만들어냈을까? 자연이 이토록 아름다운 걸 보면 그 분은 분명 아름답고 선한 분 일거다. 커브를 하나씩 돌아설 때마다 새로운 절경이 나타나 우리 발걸음을 붙잡는다. 아기를 배낭 위에 업고 올라오는 엄마도 있다. 참 이 아기는 엄마 잘 만났다. 걷기도 전에 산에 오르니 말이다.
굽이굽이 몇 굽이를 돌아가니 능선에 닿는데 빨래판처럼 얇은 암석이 켜켜이 쌓인 위에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다. 앞의 봉우리를 보니 수직에 가까운 절벽으로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줄 지어 오른다. 어찌나 가파르고 길이 좁은지 곳곳에서 체증이 일어나 서서 기다려야한다. 아차 실수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판이니 절벽 쪽으로 바짝 붙어서 내려오는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곳곳에서 일방통행을 해야 하니 교통체증이 심해서 윤 선생님이 적당한 간격으로 끊고 통행을 시켜준다. 윤 선생님은 가이드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교통정리도 잘 한다. 절벽에 기대어 아래를 보니 아득한 절벽 밑에 구불구불 셔틀 버스가 가는 게 장난감 자동차처럼 보인다.
곳곳에 매달린 밧줄을 잡고 안간 힘을 쓰다 보니 어느 덧 엔젤스 랜딩봉이다. 정상아래 쪽에는 누군가 돌을 쌓아 무수히 많은 탑을 만들어 놓았다. 돌 쌓기 좋아하는 건 동서양 사람이 다 같은 모양이다. 무언가 간절한 소원을 빌려는 마음 때문일 것 같다. 돌탑 사이에 앉아 계곡을 내려다보니 과연 천사가 내려왔을 것 같은 아름다움이 묻어있다. 가슴 가득 말 그대로 강 같은 평화가 흘러넘친다.
내려오면서 안내판을 보니 2004년부터 6명의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과 강풍이 불거나 비나 눈이 올 때는 올라가지 말라고 적혀있다. 우리는 쨍쨍한 햇볕과 바람 한 점 없는 날을 만났으니 누군가 삼 대에 걸쳐 덕을 쌓았나보다.
절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굽이굽이 내려오는데 한 청년이 앞질러 가며 내 셔츠가 멋지단다. 자기도 이런 셔츠 좋아한다고 브라이트(bright 빛나는, 멋진)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내가 한 십 년만 젊었어도 한 번 시도해 볼 텐데 손자뻘이라 마음을 접었다.
내려오면서 다시 돌아봐도 역시 자이언은 멋진 남성이다. 그 품에 한 번 안겨본 건 천운을 타고 난 것이다.
-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 -
자이언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뙤약볕에서 바위를 잡고 한 바탕 씨름을 하고 났더니 졸음이 몰려온다. 윤샘이 졸까봐 말을 걸어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속수무책이다. 윤샘은 졸음을 쫓아보려고 음악을 튼다. 심수봉의 ‘사랑 밖에 난 몰라.’가 나온다. 이 노래를 듣자 원장님이 아까가 생각난다고 한다. 갑자기 아까가 보고 싶다. 윤샘이 아까가 누구냐고 묻자 쿠바 가이드 아가씨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면서 원장님 왈 “쿠바 여행사 사장은 정말 같은 남자로서 참 부럽다. 어떻게 끼니때마다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오냐?” 한다. 그것도 모두 미인이다. 그랬다고 사장님이 남자답고 멋지게 생긴 것도 아니다. 조용한 선비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강남 제비 같기도 하다. 그런데 무슨 여복이 그리도 많은지 미인들이 줄지어 대기 중인 것 같다. 열 계집 싫다는 남자 없다는 속담처럼 남자 마음은 모두 같은가 보다.
라스베가스에 도착해서 맛난 뷔페도 먹고 화려한 분수 쇼도 보았다. 우리가 묵을 호텔에 가니 체크인 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어찌나 긴지 공항에서 체크인 할 때처럼 굽이굽이 돌아간다. 라스베가스가 처음이라는 원장님 말을 듣고 또 한 번 놀랐다.
호텔 로비는 각종 도박 기구가 가득 차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걸 보고 원장님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머리를 갸웃거린다. 이렇게 흥청망청 하는 나라가 어떻게 망하지 않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명수씨가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다.
“원장님 그런 걱정 마세요.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모여와 돈을 뿌리는데 왜 망해요.” 과연 명답이다. 그래도 원장님은 이게 소돔과 고모라지 어디 현실 세계냐고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도 처음 여기 왔을 때 소돔과 고모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지 의문이다.
여기는 어떻게 하던지 도박에 빠지게 하려고 밤 열시에서 아침 일곱 시까지 와이파이도 안 된다. 로비가 도박장이니 도박장을 거치지 않으면 방에도 갈 수 없다. 중간 경유지라서 오긴 왔지만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미국 캐년 ( 3월 17일 )
- 죽음의 계곡 데쓰 밸리 -
아침에 보는 라스베가스는 화장기 없는 여인이다. 어제의 그 화려함은 다 어디로 가고 어둡고 칙칙한 맨 낯이다. 아침 식사하러 가는데 트럼프 건물이 보인다. 멋대가리 없게 네모반듯한 빌딩인데 이마에 트럼프라고 대문짝만하게 써 붙였다. 건물도 주인을 닮은 듯하다.
식사 후 데쓰 밸리(death valley)로 갔다. 가는 길에 윤샘이 2주 전에 여기 갔는데 노란 꽃이 만발했다는 것이다. 엘리뇨 현상으로 많은 비가 내려 25년 만에 처음으로 꽃이 피었는데 아직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과연 가는 길에 노란 유채밭 같은 벌판이 나타났다. 우리가 탄성을 지르자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본론은 시작도 안 했다고 하여 부푼 가슴을 안고 데쓰 밸리로 달렸다.
우선 단테스뷰 전망대로 갔는데 단테가 누군지 몰라도 아마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이지 싶다. 여기서 바라보는 데쓰 밸리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다. 하얀 소금으로 이루어진 호수가 발아래 펼쳐지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올챙이처럼 구불구불한 꼬리를 단 하얀 웅덩이도 신기하기만 하다.
데스 밸리는 청교도들이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인디언들이 그리고 가지 말라고 거기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무시하고 들어갔다가 몰살을 당한 곳이라 한다. 하긴 물 한 방울 없는 소금밭이니 어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하얀 호수는 죽음의 계곡이 아닌 낙원을 연상시킨다.
옆의 작은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앙증맞은 노란 꽃과 보라색 꽃들이 수줍은 듯 피어있어 죽음의 계곡이 아닌 생명의 계곡이란 생각이 든다. 도대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천국일까 지옥일까? 어떤 때는 천국 같이 아름다운데 어떤 때는 지옥처럼 괴로운 곳이다.
- 자브라이스키 전망대 -
자브라이스키는 광석을 캐던 곳이라는데 바위가 광물 때문인지 검은 색, 회색, 황토색 등 기기묘묘한 색의 층을 이루어 마치 외계의 행성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다들 마술에 걸린 듯 자리를 뜰 줄 모른다.
- 소금 염전 -
겨우 현실로 돌아와 수면 아래 86미터에 위치한 소금 호수로 내려갔다. 하얀 소금 위를 걷는 사람들이 천국을 향하여 걷는 무리 같다. 마냥 걷다가는 그대로 육신을 떠나 천국으로 들어갈 것 같다. 길 가에 있는 소금 결정을 떼어 맛을 보니 짜면서도 달달한 기운이 느껴진다. 한 없이 가다가는 일사병에 걸려 아주 가버릴 것 같아 중간쯤에서 되돌아왔다.
소금 염전을 떠나 조금 가니 노란 평원이 나타난다. 여기가 노란 꽃이 지천이었다는데 거의 다 지고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윤샘은 절경을 보여주지 못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우리는 마음으로 다 보인다고 하였다.
거기서 조금 더 가자 갑자기 모래사막이 나타난다. 하얀 모래밭에 고사목이 뒹굴고 있다. 묘한 아름다움이다. 웬 꼬마가 나무 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기에 우리도 기어 올라가 폼을 잡았다.
모래사막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카페 안에서는 134°F 56.7°C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라고 쓴 셔츠를 팔고 있다. 분명 이곳은 적도보다 더 뜨거운 곳이다.
미국 캐년을 마지막으로 이번 여행을 마쳤다. 이번 여행은 어느 때보다 즐겁고 신나고 다양한 여행이었다. 단지 백내장 수술로 실핏줄이 터져 처음부터 끝까지 한 쪽 눈으로 본 반쪽 구경이었다. 기행문을 쓰는 이 순간도 한 쪽 눈을 가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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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롯데방에 올려주셔서 여러사람이 읽으니 좋네요. 생생한 글, 여행한 것 같아요
사진이 좋은데 어딘지 몰라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