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계백장군의 혈통을 보자면, "달솔" 이라는, 최상급 좌평이 아닌 2등 벼슬이었던 것으로 보아 직계 왕족은 아니었지만,
따로 성씨를 표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백제 왕족의 성씨인 부여씨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어떤 분은, 동시대 왜국 (지금의 열도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으나)에서 후지와라 가문을 돕던 사에끼(佐伯)라는 사람이 계백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뭏든 계백의 친척은 매우 많았을 것이므로 계백의 가족이 다 죽었다고 가문이 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달솔이던 계백이 좌평인 의직, 상영을 이끌고 나갔던 것으로 보아 그의 능력이 출중했던 것이 사실이나, 그 전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성품이 강직하여 위에서 별로 좋아 안 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계백장군을 생각하면...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어렵습니다...
>폴권님께서는 계백장군의 기록을 어찌 보시는지요...
계백이 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님께서 계백장군의 입장이라면 어찌 하실런지요... 그저... 자식들 도피시키고... 창을 꺼구로 들고 신라에 투항하실런지요...
>그래서... 자식의 유전자를 남기기위해서... 그러실런지요...
글쎄요. 저는 자식을 낳아 본 적도 없고 만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숙명론을 아는 사람이면, 백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삼국유사에 보면 백제가 망하기 전 암여우가 용상에 올라갔다고 했는데 이는 의자왕의 어머니인 신라의 선화 공주가 정권을 탈취했다는 뜻으로도 볼 수있다고 함),
의자왕이 충신 성충, 흥수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나 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제를 망하게 하는 데는 대신 "임자" 라는 사람의 공이 컸는데, 임자는 신라의 간첩 "조미압" 에게 포섭되어, 신라를 위해 일을 많이 했으나,
백제 멸망 후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거된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간첩질도 어려운 것입니다. 숙명론을 아는 사람이면 한번 배신할 수 있는 자는 또 배신할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살아남기는 그렇게 어려운 겁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다 보면...
>님도 섬뜩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어느 쪽을 님의 주관에서 선택하실지 궁금하군요...
>삼가... 꾸뻑...
제갈씨 집안은 그 수는 많지 않으나, 우리 나라(반도) 에까지 퍼질 만큼 사는 곳이 넓습니다.
이는, 제갈씨의 가훈인, 가문을 분산시킨다는 정책 때문입니다.
제갈양의 형 제갈근은 오나라에서, 제갈양 자신은 촉에서, 동생 제갈균 (제갈탄으로 개명함) 은 위나라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제갈탄이 사마의와 마음이 맞지 않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기 전, 아들 제갈정을 오나라로 보내, 혈통을 다시 분산시켰고, 오나라가 진나라에게 통일되자 제갈정은 진의 귀족이 되었습니다.
또한, 제갈근은 차남 교를 촉으로 보내 제갈양의 양자로 삼아 자신의 혈통을 분산시켰고, 그래서 제갈근의 장남 제갈각이 반대파에 의해 참살되었을 때도 자손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갈양의 아들인 제갈첨도, 그 자신과 장남은 촉이 망할 때 전사했으나 차남은 역시 진나라 때 벼슬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로도 제갈씨들은 그렇게 살아 오다가, 당나라 말기에 정국이 혼란해지자 일부가 신라 땅으로 넘어왔고, 제씨, 갈씨, 제갈씨 등 이런 식으로 다시 갈라지면서 수는 적지만 반도에까지 자손들을 남기고 있는 겁니다.
화교들도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장남은 가업을 잇고, 차남 이하는 다른 나라로 보내어 독립시키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에 있는 먼 친척에게 보내 일을 배우게 하거나 그런다고 들었습니다.
아뭏든 살아남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인구가 1650년에 2천 5백만이었는데, 1850년에도 거의 같은 수치였습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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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장군과 임자
P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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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2.0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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