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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체험 후기]
당신의 희생이 우리의 현재이자 우리의 미래였어요!
어제 아이들과 함께
일제 강압으로 건립된 감옥인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왔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서 불리던 노래를 들으며
이번 활동의 이야기를 조용히 열어봅니다.
“…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 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전중: 감옥 안 사람들
일곱: 허윤희, 권애라, 심영식, 신관빈, 임명애, 노순경 김향화,
일복:공작, 노동복
https://youtu.be/D-3uJcGSwvY?si=zCJ1R1VRJZh788Rx
1919년, 3·1 운동 이후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일본에 맞서 만세운동을 하다 잡힌 10대,20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8호감옥 안에서 직접 지어 부르고 서로에게 힘을 주던 노래였답니다.
차디찬 감방 안에서 혹독한 고문과 고통을 견디며
끝내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한 그녀들
.🚞🚋🚄🚅🚄🚎🚎🚅
🌿 3.21 토 8시37분 검단산역/마천역 지하철 출발!
오늘도 도와주러 오신 고마운 자원봉사자님들, 부모님들과 조를 짜서 친구들과 같이 평소처럼 신나는 마음으로 얘기를 하며 아이들은 간다
재잘재잘~~~
우리들의 나라, 자유의 나라 안에서!
웃고 장난을 치며
그렇게 도착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
해설사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하는 아이들, 해설사님.
형무소역사관에 앞서 주변 독립운동과 관련된 여러곳을 다니며 해설해주셨다
해설사님의 자세하고 실감있는 해설로 아이들이 역사 속으로 이제 걸어 들어갑니다.
#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주도하신 서재필 동상 앞에서 시작된 이야기 #
아이들은 처음, 서재필 동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해설사 선생님은 조용히 물으셨다.
“신문은 왜 필요할까요?”(독립신문)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
서재필은 단순히 글을 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무려 34번이나 국민 토론회를 열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세금은 어디에 쓰이는가?”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아이들은 처음 듣는 질문에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바로
“아… 국민이 생각하게 하려고요…”
ㅡ맞았어요.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바뀌고
생각하는 국민이 많아질수록
독립과 민권이라는 개념이 퍼지지요
하지만 그 움직임은 오래 가지 못했다.
ㅡ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는 고종에 의해 해산됐어요.
아이들은 이 지점에서 질문한다
"왜요? 고종 임금은 백성을 위해 있는 사람이 아니었나요?"
“ 백성이 깨이면 나라일을 감시할까봐 그런가"
ㅡ어린 친구들이 생각이 깊네
※ 서재필선생님은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가담했다가,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학사가 된 서재필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창간,운영하고 독립협회 활동을 했으나, 곧 미국으로 돌아가 평생 의사로 생활하며 독립자금을 도왔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 서대문형무소 앞, 이병희 지사의 발자국 #
🤦♀️📄여자아이 후기
"서대문형무소 앞에
발자국이 찍혀 있었어요.
나도 그 위에 발을 올려봤어요.
마음이 이상해졌어요
발자국 중 이병희라고 옆에 쓰여있는 분은
“고문이 무서우면 독립운동을 할 수 없다”라고 하셨대요.
나라를 위해서라면
무서워도 참고 나아가야 했다는 말이었어요.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더 마음에 남았어요.
해설사님의 뒤를 따라 걷는 독립문 일대의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고
해는 반짝이고 있다.
주말에 모인 등산객 어른들도 즐겁게 얘기하고 계신다.
# 감옥이 커진 이유 ,숫자가 말해주는 현실 #
해설사님이 처음에 “건물” 이야기를 하시는줄 알았는데 들어보니
사람 이야기 였다
남의 나라를 강제로 뺏은 일본에 저항하는 사람을 모두 죄수로 잡아가니
1908년 경성감옥 수감자: 약 500명이었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는 3000명 이상 (최대 3300명)이 됐다.
🙎♂️“왜 이렇게 갑자기 많아졌어요?”
🙍“독립만세를 했기 때문 아닌가.”
ㅡ 맞아요.그래서 일본은 감옥을 더 크게 지었지요.
232개의 독방
엄청난 추가 수용 공간 신설
정보 교환을 막기 위한 구조
도심 한가운데,
철도가 지나는 곳, 즉
사람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지어졌다.
이유는 하나였다.
“보여주기 위해서.”
공포는 눈에 보일 때 가장 강력하다.
“사람들한테 겁주려고요?…”
ㅡ맞아요
해설사님의 독립지사와 형무소 이야기를 열심히 기록하는 아이들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자리할까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지금까지 서대문형무소 주변에 있는 독립문과 독립지사들의 족적 등을 짚어가며 해설을 들었다
드디어 서대문형무소에!
현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보안청사(업무 공간),
옥사(감옥),
공작사(강제 노동 공간),
사형장, 그리고 유관순 열사가 수감되었던 8호감방 지하 옥사가 있었다.
보안청사의 어두컴컴한 입구에 들어서자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설명을 듣고,
기록을 보고,
모형 안의 공간을 들여다보는
아이들은 점점 말이 줄어들었다.
선열의 아픔과 빼앗긴 역사가 마음을 청사 안만큼 무겁게 하는 것 같다.
영상실에서는
한참을 조용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영상속 독립지사들 이야기 앞에서 떠날줄 모르고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해설사 선생님을 통해
‘의사’와 ‘열사’의 차이도 배웠다.
윤봉길 의사처럼 무력으로 항거하며 직접적인 행동으로 저항하신 분들을 ‘의사’라 하고,
유관순 열사처럼 고문과 희생을 견디며 맨몸으로 맞서신 분들을 ‘열사’라 한다.
그 차이를 배우며 불의에 그저 순응하지 않는
‘저항’이라는 말을 더생각해보았을 것같다.
# 부채꼴 감시 구조 — 한 명이 모두를 본다 #
중앙에 서면, 모든 방이 보이는 구조였다.
한 명의 간수가 전체를 감시하였겠구나
“숨을 곳이 없네…”
“항상 누군가 보고 있다.”
그 느낌, 항시 통제..
#실내 감옥과 고문실과 취조실도 보았다.#
식사: 틀밥, 가다밥
노동 도구와 식사를 등급별 차별을 하였다
“밥도 다르게 줘요?”
“벽관고문”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해?”
“그럼… 계속 버텨야 돼?”
이건 고통이 아니라
시간이 고문이 되는 방식이었다.
물고문
상자고문
지하 독방
아이들의 반응이 가장 강했다. “ 사람이 이런 고문을 생각하는 걸 보니 악마가 따로 있는게 아니야…”
3.3㎡ 공간은
2인용 감방으로 써있었다
실제는 20명 이상이 수감돼있고
어떤 날은 23명이 서서 밤을 지냈다
아이들이 멈춰 서서 직접 서서 하고싶다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이야기.
“입을 벌리고 발가벗기고 뛰게 했다.”
왜?
ㅡ허들을 넘어 뛰면
“몸(항문)속에 숨긴 쪽지를 떨어뜨리게 하려고.”
아이들의 표정이 시멘트처럼.
이건 감옥이 아닌데?
특히 지하 독방 앞에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빛이 없는 공간이었다,
“여기 들어가면… 무덤일 거 같다"
📄기록으로 보는 옥중생활
🗒📝✏️
감옥 안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좁은 공간에 갇혀
누워 잘 자리조차 부족했다.
몸을 겨우 구겨 넣어야 했고,
서로를 밀어 넣어야 겨우 눕는 상황.
그 과정에서
가슴이 눌리고, 숨이 막히는 고통을 겪는다.
감옥 생활로 인해
귀가 망가지고, 이가 부러지고,
몸 전체에 염증과 통증이 생기는 등
심각한 건강 악화을 누구나 겪는다.
잠을 자지 못해 모두
극심한 신경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편지에는
약을 살 돈을 부탁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도 담겨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타벽 통신도 배웠다.#
타벽 통보법은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감방과 감방 사이의 벽을 두드려
새로운 정보를 주고받는 암호 통신이라 했다.
한글 자음·모음을 순서대로 두드려 글자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감옥 내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 소식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걸려 모진 고문을 받고도 끊임없이 교신을 주고받았다하니 참 머리가 숙여질 뿐!
국내에서 잡힌 독립투사들은 어느 정도 타벽통보법을 알고 있어서 암호 전달이 되었지만, 해외에서 잡혀 송치된 독립운동가들은 방법을 모르기에 중간에서 암호 전달이 끊기곤 했다.
그래서 새로 들어온 지사들에게는 옆방 동지가 타벽통보법을 알려주기로 했다.
#7호감방에 도산 안창호, 6호감방에 독립운동가 김정련.선생님 실제이야기#
도산 안창호는 워낙 거물급이었기 때문에 감시가 심해서 옆방 김정련은 이를 알려줄 기회가 없었다. 한동안 도산 안창호과 김정련은 시멘트벽을 사이에 두고 그냥 지내야 했다.
어느 일요일 간수의 감시를 틈타 타공법을 말해주기 위해
높은 시멘트벽을 대변통을 밟고 올라갔다. 도산 안창호는 뭔가 소리가 나자 의아한 눈초리로 살폈다.
그 순간 김정련은 간수가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갑자기 심장이 멈추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놀라서 넘어지며 온 몸에 대변통을 실제 뒤집어썼다.
수상하게 여긴 간수가 감시구멍으로 들여다봤다.
김정련은 순간적인 임기응변으로 똥을 퍼서 감시구멍에 뿌리며 미친 척했다.
자신 때문에 안창호까지 끌려가서 뼈가 부러지도록 고문을 당하게 할수는 없었다.
결국 쇠방울과 수갑까지 차고 자신은 독방으로 격리되었다.
타벽통보법에 얽힌 안창호와 김정련의 일화를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실내해설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격벽을 볼 수있었다
하루종일 감방에 갇혀 쪼그려앉아있거나 작업하는 사이 나름 운동이라고 짧은시간 동안의 일과였다. 좁은 벽 사이를 혼자씩 걷게 했던 공간.
벽을 높게 나눠 독립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지 못하고, 눈도 못마주치게 만든 구조였다.
여기도 당연히 앞에서 딱 감시하는 구조였다. 모든게 숨막히는 시간.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말있못...
추모 공간 / 추모비
희생으로 독립을 우리에게 내주신 분들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둥근 돔안에는 수많은 이름이 써있었다.
아까 영상속 누군가 하신말씀
"그때의 고문보다 더 아픈 것은 기억하지 않는 것, 잊혀지는 것'
아, 그동안 그 이름과
그 삶을 우리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지내왔구나. 너무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다
사형장
독립운동가들이 마지막으로 끌려가
생을 끝내야 했던 공간이다
.얼마나 무섭고 슬픔에 찬 시간을 보내셨을까.
마지막 활동지에서는
아이들이 선택해보았다.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법을 따르며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위해 맞설 것인가.”
‘선택’의 무게를 직접 고민해보는 시간이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희생까지 감수하면서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들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떻게 이어져 있을까?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적은 마지막 문장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곳이다.”
그리고
태극기 앞에 섰을 때,
아이들의 얼굴은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아침과는 조금 다른 밝음이었다.
조금 더 단단해진 표정,
조금 더 생각이 담긴 눈빛.
체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영천시장에서 부모님이 주신 만 원의 행복으로!!
조별로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
떡볶이, 순대, 꽈배기, 기념품까지
자유가 있는 나라의 아이들은 행복했다.
# 아이들의 활동지 속 글이 떠오른다...
이날, 마음 속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어느 외국기자가 묻는다.
“죽을 걸 알면서 왜 나왔습니까?”
만세를 외치러 나온 어느 백성이 답했다.
“일본의 개로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겠다.”
"누구나, 어떤 모습으로든 독립운동을 했다"
🪻
역에 내려 자유와 평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오늘의 걸음이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 의미있는 큰 걸음이었기를 바래본다.
고맙고 자랑스러운 독립지사님들,
존경합니다 또 존경합니다!
지사님들의 뜻을 이어,
대한민국이,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누구에게도 존엄과 자유를 빼앗기지 않는 나라, 아이들이
되도록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 엄마와 이어가는 대화 ~!
“오늘 본 것 중에 제일 마음에 남는 장면이 뭐야?”
“그 사람들은 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것 같아?”
아이들의 배움은 집에서의 한 마디로 이어집니다.

첫댓글 뜻 깊은 3월에 우리 꿈동이들 역사 공부 한번 제데로 했네요~~ 수고하신 자원봉사자 여러분들, 선생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