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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담 호스티스08
제2장 저는 불량인가요!?
1. 일반 중학교 진학
중학교도 농아학교가 아니라 오빠도 다니던 보통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옆집에 사는 미유키와도 이번에는 같은 중학교입니다.
제가 다른 학군의 초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예전에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함께 다니던 친구나 그때까지 미유키를 통해 알게 된 동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과도 드디어 같은 중학교 친구로 사이좋게 사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단숨에 늘어난 친구는 제 귀가 불편하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사귀어 주는 마음씨 좋은 친구들뿐이었습니다. 저도 스스럼없는 그들과의 교제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습니다.
중학교에서는 저를 장애인으로 생각하지않고 차별 없이 대해주는 이런 친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싸움도 안심하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장애를, 주눅 들지 않고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악의가 없는 조롱을 당했을 때나 말다툼이 될 것 같을 때, 당시의 저에게는 결정적으로 해주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귀가 들리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남들이 알아 듣기 어려운 목소리이지만, 그렇게 말하면 상대방도 저도 웃어 버리며, 또 원래대로의 친한 사이로 되돌아 갑니다. 또 숙제를 잊었을 때에도 이 결정적인 말 한마디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아서 숙제가 나온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에게 변명을 하면 대개 용서를 받았습니다. "거짓말만 하는구나!" 하고 어이가 없어하던 미유키의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행동 범위도 넓어지고, 함께 여러 곳에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아도 저도 다른 중학생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애들이랑 스티커 사진도 찍고 오락실 가서 게임도하고 노래방 가서 노래도하고 춤도 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차별 없는 평범한 놀이가 매우 신선하고 즐거웠습니다.
"귀가 안 들리는데 노래방에 가?" 지금도 자주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노래방을 좋아하는 난청인은 꽤 있는 줄 압니다. 당연히 저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노래하는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 이런 노래가 있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가사를 읽거나 신나게 부르는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것입니다. 물론 저도 제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미유키와 다른 친구들에게 배웠습니다.
당시 제가 잘하는 레퍼토리는 "눈물을 주세요" 와 PUFFY의 "이것이 내가 사는 길" 이었습니다. 더욱이 "이것이 내가 사는 길" 은, 노래한다기보다는 다 같이 떠들어대며 노래방 안에서 춤만 췄어요.
참고로 지금도 노래방에 자주 갑니다. 호스티스를 하는 가게가 끝난 후에 2차로 고객님께서 데려가 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손님들 앞에서 당시와 같은 막춤(웃음)을 선보일 수는 없지요.
하물며 제대로 내 노래가 잘 불려지고 있는지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 제가 마이크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손님이나 2차에 함께 간 동료 여자애들의 노래를 잠자코 보고 있을 따름이며, 그 때 저만의 즐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래하고 있는 손님의 성대를 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성대를 만져보세요. 높은 소리를 낼 때와 낮은 소리를 낼 때는 성대의 떨림이 다를 것입니다. 어쩌면 성대의 돌기가 있는 남성 쪽이 그 차이를 알기 쉬울지도 모릅니다.
성대를 만져보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합니다. '이 손님의 목소리는 어떤 느낌일까' '이 곡은 어떤 멜로디일까'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노래방이나 음악을 전혀 즐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 주위에 청각장애인 지인이 있다면 노래방을 좋아하는지 물어보세요. 그리고 만약 그분이 노래방을 좋아한다면 한번 함께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 필담 호스티스 09
2. 죽이겠다! 어머니가 칼을 치켜들고...
즐거운 중학교 생활 중에 한편으로는 저를 괴롭히고 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불화였습니다. 원래 저의 부모님은 훈육에 엄격한 편이었어요. 중학교 입학 후부터 한층 더 엄격해졌습니다.
당시 나에게 내려진 귀가시간은 저녁 6시. 5분만 늦어도 얼굴에 멍이 들 정도로 심하게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귀가시간에 늦었다고 부모에게 맞고 다음날 얼굴이 부어 학교에 가니 바로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누군가와 싸움을 한 것으로 오해한 것 같았습니다.
"누구랑 싸웠어?"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부모님한테 맞았어요' 라고 제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선생님도 깜짝 놀랐어요. 중학생이 되어 친구들과 노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저는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어차피 5분만 늦어도 맞을 거면 더 늦게 들아가 버리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굣길에 친구들과 놀다 가는 것이 점점 습관화되어 간 것입니다. 귀가 시간이 밤 10시, 11시로 점점 늦어진 것이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수다를 떨거나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거나 게임을 하는 등 노는 것도 그때까지만 해도 중학생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모여 노는 중학생이 그렇게 품행방정할 리가 없었습니다.
차츰 선배나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몸에 좋지 않은 흡연과 음주까지 배워갔습니다. 물론 숨어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한 부모님은 격노했습니다.
"이게 뭐야!" 그럴 만도 합니다. 담배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사진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는 부모 앞이라고 해서 착한 아이로 가장하는 것도 귀찮아졌습니다.
다 이미 들켜버렸으니까요. 머리를 갈색이나 금색으로 염색해 보거나 치마를 짧게 하거나 저는 제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엉망진창, 완전히 불량학생이라고 불리는 외모였습니다. 당연히 선생님에게도 여러번 혼났습니다. 교복이 촌스럽다고 교칙을 무시하고 스카트를 너무 짧게 해서 등교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치마 길이를 그렇게 짧게 해 주실 리가 없지요. 저가 일부러 수선 가게에 가서 부탁해서 예쁜 미니스커트로 고쳐입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장 검사에서 걸리면 모처럼 돈을 들여 고친 치마는 몰수입니다. 또 새로 기장이 긴 촌스러운 치마를 구입해야 합니다. 도대체 몇 벌의 치마를 수선했다가 몰수당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만큼 여러 번 같은 치마를 사게 되면 부모님도 화를 낼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고, 부모님까지 몇 번이나 학교로 불려가서 선생님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격노했고, 저는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특히 어머니와는 치열한 싸움을 매일같이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해서 하고 있을 뿐,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데 뭐가 나빠!"
당시의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전혀 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금발로 하고 있어도 후배나 동급생을 괴롭히거나 남의 물건을 빼았거나 하는 등의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불량배나 건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아오모리 제일의 불량녀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제멋대로의 뻔뻔한 태도로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계속 반항하는 저는 부모에게 있어서는 '불량학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리에를 농아학교에만 보낼 걸" "교육을 잘못해버렸다."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항상 부모님은 이렇게 후회하는 말을 하곤 하였습니다.
"남부끄럽다!" 이말은 당시 어머니의 입버릇이었습니다. "리에가 계속 말을 듣지 않는다면 엄마는 자살해 버릴지도 몰라." 라고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온 적도 있었습니다. "이게 뭐야. 이건 그냥 나를 협박하고 있는 거 잖아!" 라면서 저는 점점 더 반항하기만 했어요.
치열한 싸움이 점점 심해지다가 어머니는 부엌 식칼을 들고 저를 쫓다가 넘어진 나를 올라 타고 목조르기를 하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계기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밤늦게 외출을 했다든가, 담배를 피웠다든가 하는 그런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화가 나서 식칼을 한 손에 들고 저를 향해 달려 왔습니다. 그 표정은 마치 아귀 같아 보였습니다.
"붙잡히면 정말 죽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잡히지 않도록 거실에서 부엌으로 온 집안을 도망다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언제까지나 도망갈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집은 넓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에게 왼팔을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다른 손에는 칼이 꽉 쥐어져 있기 때문에 그게 무서워서 무리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몸싸움을 하다가 그만 넘어져 버렸습니다.
동시에 제 배 위에 어머니가 지체 없이 올라 탔습니다. 그리고 손을 버둥거리며 필사적으로 날뛰는 저를 향해 서슴없이 칼을 치켜든 것입니다! "나 이제 죽는구나! 살려줘!" 저는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싶은 순간에 현관벨이 울렸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벨이 울렸다고 "느낌"으로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현관 쪽을 보고 벌떡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에서는 아까까지의 아귀 같은 표정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평소의 어머니 얼굴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칼을 부엌에 가져다 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님을 맞이한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돌변한 모습에 놀라면서 비틀비틀 일어나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미소까지 지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손님이 오셨으니 리에는 2층으로 올라가 있어라." 갑자기 변한 태도에 매우 놀라면서도 "다행이다, 살았다." 고 안도하며 뭐가 뭔지 몰르지만, 어쨌든 그 자리를 떠나려고 저는 잰걸음으로 내 방으로 도망쳐 달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정말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언젠가 엄마가 나를 죽이지나 않을까"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공포 드라마 속 등장인물 같은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입니다.
그 무렵엔 정말 집에 있는 게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웠어요. 그런데 그렇게 쫓기는 것보다 더 싫은 게 있었어요. 어머니가 소중한 제 친구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오빠는 머리가 좋고 학생회장을 맡는 우등생으로 부모로부터의 신뢰도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개구쟁이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빠의 금발염색 친구들도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습니다. 그 금발 머리들과 어머니는 상냥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제 친구들은 모두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게 저는 무엇보다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게 되고, 담배나 술 등에 손을 대서 나빠진 것은 모두 친구 때문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를 향해 비이성적으로 불평을 늘어 놓는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자는 소꿉친구 미유키일 것입니다. 제가 머리 염색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하고 있는 것은 모두 미유키의 영향이라고 어머니는 단정했습니다. "더는 리에와 붙어 다니지 마라!" 어머니가 미유키에게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가 지금까지 얼마나 미유키의 도움을 받아 왔는지 어머니도 알고 있을 텐데, 감정적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그런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분노의 감정이 가는 대로 어머니와 부딪쳐 또 크게 싸우게 되는... 매일매일이 그런 일의 반복이었었습니다.
"이런 집에서는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 저는 어느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에서 몇 주 단위의 가출을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가출은 제가 알바일을 시작했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바로 집을 뛰쳐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도 부모님과의 관계는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몸을 부딪치며 하는 큰싸움이나 식칼에 쫓기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부모님도 차츰 조금씩 포기하거나 묵인하는 일이 늘어난 것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계속 부모님의 태도에 반발을 해 온 저도, 최근에야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개구쟁이였던 당시의 자신의 사진을 보는 것이 매우 부끄럽습니다.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을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면 불량학생의 모습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만, 이제 저도 어른이 된 것일까요. 조금만 더 지나면 부모님이 그렇게 화를 내셨던 마음도 잘 이해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 필담 호스티스10
3, 학교 제일의 문제아.
중학교 2학년과 3학년 때는 학교에서도 무섭다고 소문난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물론 우리가 잘못했지만 수업 중에 시끄럽게 하거나 학교 규칙을 어기고 머리 염색을 하거나 매니큐어를 하고 있으면 의자를 던지는 등 몹시 화를 내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화난 선생님에게 머리를 잡혀 벽에 쾅쾅 부딪힌 적도 있습니다. 다른 친구가 만류하러 하다가 그 친구까지 선생님에게 당한 적도 있어요! 혼나면 혼날수록 선생님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이 반항기인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매일 장렬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흡연과 음주는 물론이고, 컬러풀한 머리색에 미니스커트로 등교하는 나는 당연히 학교에서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데, 뭐가 잘못됐어?" 스스로는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만큼 선생님의 주의도 건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런 뻐뻔스런 마음은 당연히 태도에도 나타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리에는 가장 신경쓰이는 학생이다." 그런 말을 선생님으로부터는 항상 들었습니다.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던 만큼 수업 중 모르는 것이 있어 옆자리 아이에게 물어 보기라도 하면 그냥 장난치는 것으로 오해하여 혼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아서 물어 본 것입니다." 반항기의 저에게는 그렇게 변명의 말을 하기도 싫었습니다. 그후 혼나지 않도록 수업 중 물어보지도 않고 조용히 있으면 모르는 것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점점 공부를 따라갈 수 없게 되어 중학교에서는 완전히 낙오자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수업은 지루했지만 학교 자체는 친구가 있기 때문에 매우 좋았습니다. 항상 방과 후에는 친한 친구들과 학교 뒷편에 모이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수다를 떨거나 장난을 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거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불량배들의 집합소처럼 생각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실에서 가져온 분필로 여렷이서 벽 한 면에 선생님 욕을 마구 써댄 적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낙서는 금방 발견되어 선생님한테 혼나고 벽이 깨끗해질 때까지 청소를 해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반항기가 한창인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우연히 항상 모이는 "불량자 모임 장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다른 친구와 놀러 갔는지 뭔가 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날 학교 뒤에서 작은 화재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원인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듣기로는 방화와 같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추우니까 뭔가를 태워서 따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 화재로 번진 것 같았습니다.
가까이에 있던 여러 사람이 바로 불을 껐기 때문에 다행히 크게 번지지는 않았습니다만, 바로 학교에서는 범인 찾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거기에 모여 있던 저도 당연한 듯이 불려 갔습니다.
나는 그날은 현장에 없었다는 것을 선생님께 전했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제가 없었다는 것을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평소 반항만 하던 불량학생의 이야기를 선생님은 전혀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저도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건으로 내게서 뭔가 물질적인 손실은 없었지만, 나의 말을 전혀 믿어 주지 않았던 일로, 완전히 학교가 싫어졌고 선생님이 싫어졌을 뿐 아니라 어른들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입으로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답답함도 거기에는 있었습니다.
[칼럼] "저한테 죽을 뻔했다고 지금도 여러 사람한테 말하고 있어요." 사이토 리에의 어머니.
초등학교 때는 '착한 아이'였던 리에가 중학교에 들어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에 부모님은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나쁜 짓을 할 아이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는데 늦게 귀가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진을 발견했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리에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일반 중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 것도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고민했어요."
그렇게 어머니가 말하듯 리에 같은 난청인의 경우 그 장애를 고려해 농아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그걸 굳이 일반학교에 입학시킨 게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부모님은 후회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시험이 있으니까 리에가 원하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적어도 중학교까지는 자유롭게 선택하게 해주고 싶었고, 다른 동갑내기 아이들과 같은 생활을 시켜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학교에 입학할 때, 리에의 장애에 대한 특별한 취급은 일절 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업에 카세트테이프 녹음기를 지참 수 있었다면 우리가 집에서 복습시켜 줄 수도 있었겠지만 특례는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위도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공부를 따라갈 수 없게 되어 리에의 성적이 떨어져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공부를 따라갈 수 없게 되어 수업에 뒤쳐져 고생을 한 것은 리에입니다. 리에가 일반학교에 갔으면 하는 우리의 생각은 단순한 부모의 이기심으로 장애를 가진 그녀에게는 부담이 컸을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은 그때의 기분을 그렇게 회상했다. 당시의 리에를 떠올려 보면 일부러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고 부모님은 말한다.
"담배를 피우는데도 집 안에서 숨어서 몰래 피우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어요. 학교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버젓이 사서 학교 선생님에게 들킨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바로 학교에서 호출을 받았죠."
그런 딸의 대담한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워 부모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매일 고민했다고 한다. 밤에 집을 빠져나와 놀러가는 리에를 어머니는 차로 뒤를 밟은 적도 있다고 한다.
“늘 어디를 가나 싶었어요. 그래서 마치 탐정처럼 차로 뒤를 따라갔습니다. 길이 울퉁불퉁한 곳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빛이 위아래로 흔들려 버렸고, 그래서 그 빛을 보고 리에가 눈치른 채버렸습니다. 그 순간 무서운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며 저를 쫓는 몸짓을 했습니다.
들켜서는 따라갈 수 없다고 포기하고 그날은 돌아왔습니다. 또 다른 날은 밤에 몰래 나가는 리에를 뒤따라 간 적도 있습니다만, 끝까지 따라가는 것은 한 번도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들만 납니다. 리에는 그 무렵 나에게 죽을 뻔했다고 지금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거든요." 어머니는 조금 쓸쓸한 듯 웃었다.
“분명히 호되게 꾸짖었고, 때린 적도 여러 번 있었어요. 그때는 저도 필사적이었어요. 그게 지나친 행동이 되어버린 거겠죠. 게다가 리에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여러 가지 불평을 했다고 지금도 리에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그것도 리에가 좀처럼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우리 아이가 혹시 그기에 오지 않았습니까?' 라고 걱정한 나머지 여러 가지 전화를 건 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이었던 것일까도 생각합니다만, 리에가 지금도 응어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지나친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리에가 어떤 식으로 이번 책에 써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리에가 느낀 솔직한 마음일 테니까요."
● 필담 호스티스 11
제3장 일하는 기쁨
1, 재미없었던 고교 생활.
중학교에서 완전히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 적도 있어서 고등학교에는 진학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옷을 너무 좋아해서 패션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복식 전문학교 입학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극구 반대하며 무조건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계속되는 설득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입학할 수 있는 학교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학교의 추천을 받아 무사히 현내의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이 결정되었습니다. 중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거의 없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고등학교에서는 금방 친한 친구도 생기고 귀여운 교복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해서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마음을 쉽게 버리지 못했고, 고등학교 생활은 즐겁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빠져나와 스티커 사진을 찍으러 가거나 오락실에서 놀거나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체육과 컴퓨터 외는 수업에 출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부모까지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에게 호출을 받는 형편이었습니다. 물론 부모로부터도 굉장히 혼나고, 점점 의욕은 저하되기만 했습니다.
제대로 학교에 다니던 입학 직후에는 부모님께 매일 2천엔 정도 용돈을 받고 그날 점심과 필요한 것을 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용돈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가장 슬펐던 것은 제일 좋아하는 옷을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이때의 저에게는 아르바이트 경험도 없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15살의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어찌할 바를 몰라 좋아하는 옷 가게를 그냥 어슬렁거리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도둑질과 아르바이트
그러던 어느 날 중학생 때부터 자주 쇼핑을 하던 아메리칸 캐주얼 옷 가게에 갔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보기만 할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갖고 싶었던 옷을 손에 들고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가방 안에 넣어 버렸습니다.
물론 도둑질이 나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죄책감도 없고 우발적이라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버린 죄였습니다.
계산이 끝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가게 밖으로 나가면 옷에 붙어 있는 도난 방지용 태그에 반응하여 가게 안의 벨이 울리는 것 정도는 귀가 들리지 않는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버저가 울리겠지" 그런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훌훌 가게 밖으로 나온 겁니다. 저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금세 가게 안에 버저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바로 가게 주인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 쫓아왔습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인정하고 변명하지도 저항하지도 않고 그대로 붙잡혔습니다.
그 순간조차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이 없어서 혼나 버린다든가, 어떻게 되어 버린다든가, 무섭다는 감정도 일절 생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때의 자신의 행동이나 감정은 잘 모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가?" 마치 남의 일 같은 바로 그런 느낌입니다. 그대로 가게 뒷마당으로 끌려가 바로 경찰에 신고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찰분이 올 때까지 주인이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주인은 중학생 때부터 쇼핑을 하러 온 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하게 화내지도 않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도 15세 때 도둑질을 한 적이 있으니 네 마음은 안다. 너는 분명 나쁜 아이가 아닐 테니, 그저 우발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이 해 버린 잘못을 깨닫고 큰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무슨 일을 저질러 버렸나 하고 진심으로 공포감이 자신을 덮쳐 온 것입니다. 주인에게 필사적으로 사과를 하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는 의외의 것을 나에게 물었습니다. "제대로 학교에 가고 있니?" 솔직히 거의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렸어요. 그랬더니 더 놀라운 제안을 해주었습니다.
"앞으로 제대로 학교에 가고, 게다가 네가 원한다면 겨울방학에 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돼." 도둑질을 한 범죄자에게 설마 그런 상냥한 말을 건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때는 그저 사과와 감사의 말을 반복하여 주인에게 전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어떤 처벌을 받을까' 하고 저는 끌려간 경찰서에서 제가 저지른 죄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중 주의를 받은 것만으로 집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는 이런 후회는 하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두 부모님도 경찰서의 호출을 받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황급히 저를 데리러 와 주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에게 아무리 혼나도 "나는 나쁜 짓은 하지 않았어!" 라며 정색을 하고 버티던 저입니다만, 도둑질은 분명히 악이며 죄를 추궁당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 그렇게 제 자신에게도 굳게 맹세를 하고 며칠 후 주인에게도 다시 한 번 사과 편지를 썼습니다. 그 후로는 주인과의 약속을 지켜 학교에도 다니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난 후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 예의 주인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저의 아르바이트에 대해 물어 보셨습니다! 그래서 매우 기뻐하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저에게 일에 대한 제한도 두지 않고 무엇이든 시켜 주었습니다.
옷을 제대로 접는 것부터 시작해서 접객이나 계산대 다루기까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내가 잘못한 일을 하면 호되게 꾸짖었고, 그 이외의 때는 나를 따뜻하게 지켜봐 주었습니다.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다른 점원에게 큰맘 먹고 "주인은 도둑질을 한 나를 왜 고용했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계속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리에가 나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옷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귀가 들리지 않아도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어."
내성제신 주인은 스스로 그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점원이 넌지시 알려 주었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한 나날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대로 고등학교로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1년 동안 고등학교를 휴학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끝나도 그대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일할 거면 부모님께도 돈을 드려라." 라고 주인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받은 아르바이트비에서 매달 3만엔씩 내겠다고 했더니 부모님은 눈물을보이며 기뻐하셨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이렇게 기뻐해 준 적은 없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가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길 잘했다고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처음 일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실수도 하고 말았습니다. 불과 15살의 저는 아직 어려서 일하는 것에 대한 진지함도 부족했습니다. 친구들과 너무 놀아서 지각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숙취 상태로 출근하기도 하는 등..."
"설령 술에 취했더라도 가게에는 제대로 출근해야지!" 하고 출근했다. 그럴 때도 주인은 알아듣게 꾸짖어 주었습니다.
한번은 지각을 해서 호되게 꾸중을 듣고 순순히 사과하지 않자 주인이 "그만둬!"라고 해서 자기가 잘못한 것도 잊고 오는 말에 가는 말로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그냥 나와 버렸어요. 하지만 곧 후회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각을 한 자신이 나쁜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일하게 해주세요." 다음 날 고개를 떨구며 사과하러 간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 그 가게는 여러 가지를 공부하게 된 소중한 장소입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점원이 그 가게에 있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것입니다만, 그런 식으로 현지에서는 조금 소문이 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청각 장애인이 접객을 하고 있는 것은 특히 아오모리에서는 드물었던 것입니다. 귀가 들리지 않고 접객도 익숙하지 않았던 저의 점원 모습은 지금도 자신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을 때 계산대의 조작을 잘 몰라서 근처의 가게에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식은땀이 나요.
그런 미덥지 않은 점원이었지만, 단지 매일이 매우 즐겁고, 일하는 것의 충실감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일 많은 분들과 접하는 접객업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칼럼] “생각났어요. 저도 그녀 정도의 나이 무렵에, 자주 나쁜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을." 옷가게 전 주인 오무로 히로키 씨.
"리에가 중학생 때 자주 친구들과 가게에 쇼핑하러 온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쇼핑하러 와 있는 모습을 보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과 즐겁게 쇼핑을 하는 리에는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이 활기차고 밝은 중학생이었습니다.” 그 후 한동안은 오무로 씨는 리에의 모습을 볼 수 없없다.
"어느 날 가게의 도난 방지용 버저가 울려 그 직전 가게를 나간 아이를 뒤쫓았습니다. '버저가 울려서 그러는데 가방 안을 보여줄래?' 라고 말을 걸었는데, 그 아이의 반응이 보퉁 사람과는 좀 달랐습니다. 제 말을 모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바로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예전에 가게에 자주 왔던 그 중학생이 생각났어요."
하지만 그때의 리에는 옛날 리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활기찼던 아이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패기 없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옛날의 쾌활한 모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게 아무래도 궁금해서 경찰이 올 때까지 일단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어요." 듣고보니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것, 집에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런 리에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냐고 권유했습니다. 당시 일하던 종업원들은, '왜, 도둑질을 하고, 게다가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 따위에게 일부러 아르바이트를 시킵니까' 라고 불안스럽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아이 정도의 나이 때 나도 자주 나쁜 짓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당시 저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들을 만나면서 저도 변할 수 있었어요. 그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가게를 갖기까지 되었으니까 언젠가는 저도 다른 사람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그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리에를 그냥 모른 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도착한 경찰관에게는 도둑질 건은 괜찮으니 가출한 리에를 제대로 집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뒤 부모님이 함께 가게에 사과하러 와주셨어요. 그때도 리에와의 사이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는 듯한 부모님의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두어서는 않돼겠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습니다. 몇 달 뒤 리에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기 직전에는 여동생을 잘 부탁드린다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리에의 오빠까지 일부러 인사하러 와줬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일하는 것을 반대하던 다른 종업원들과도 금방 마음을 터놓았고, 리에는 서서히 가게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제대로 일해 줄지 처음에는 솔직히 불안했어요. 그래도 일하기 시작하니까 열심히 해줬어요. 조금이라도 안면을 익힌 사람에게 리에는 함박웃음으로 인사를 했어요. 그런 애교가 많은 점이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것 같앟습니다. 가게의 직원뿐만 아니라 근처 가게 사람들의 평판도 좋았어요. 그리고 남자 손님 중에는 리에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오무로 씨 자신도 완전히 웃는 얼굴을 되찾은 리에와 함께 일하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고 말한다.
"리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 외에는 다른 젊은 직원들과 별반 다른 게 없었습니다. 늦잠을 자서 지각하거나 하면 나도 편애하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꾸짖었었습니다.” 리에는 자주 장래 희망을 말했다고 한다.
"장애인용 직업훈련을 받고 작은 세계에 틀어박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비장애인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 그런 리에의 꿈의 발판을 마련해 준 오무로 씨이지만 접객업을 리에에게 권유한 것을 조금은 후회도 하고 있다고 한다.
"리에가 일하기 시작한 지 2년 정도 만에 옷가게는 경영 사정으로 접기로 했어요. 계속 저의 가게에서 일하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리에가 물장사의 길로 진출한 것은 자신이 접객업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접객업 쪽으로 권하지 않았다면 다른 청각장애인과 같은 직업에 취업해서, 그 나름의 삶을 즐기며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