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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학으로부터 본 중국문화
류건덕
작가소개: 복단대학외국문학전업 졸업. 1990년 영국켄프리치대학박사학위 획득.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외국문학연구소 부소장, 연구원, 박사생도사, <<외국문학동태>> 주필 력임. 문집<<참새>> <<사상체계파괴잔편---영미문학과 사상사론고>>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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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가 말하는 외국문학으로부터 본 중국문화는 대체로 두가지입니다. 한가지는 외국문학작품속의 중국사람의 형상에서 보아낼수 있습니다. 외국문학에서 그들의 일반적인 문학작품에 언제부터 중국사람을 비교적 많이 취급했는가 하면 대략 18세기부터입니다. 18세기 1762년에 영국에서 소설 한권이 출판되였습니다. 작가는 골드스미스라고 하는데 그가 쓴 소설이 아주 유명합니다. 제목은 <<세계공민>>입니다. 바로 이 책은 후에 영국문학가운데서 경전으로 되였습니다. 때문에 18세기 영국문학에 어느 한 중국의 지혜로운 사람이 등장한 소설이 바로 이 <<세계공민>>이라는 책입니다.
18세기 초에 불란서에 한 계몽철학가가 있었는데 아주 유명했습니다. 이름은 몽테스키외라고 부릅니다. 이 몽테스키외가 책을 썼는데 <<페르샤신찰>> 혹은 <<페르샤사람의 편지>>라고도 합니다. 몽테스키외가 이 책을 쓴 시기는 바로 1709년부터 1720년까지였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이 책에서 여러번 중국을 말했고 중국인구가 많은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그때 중국은 이미 유럽과 래왕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초엽에 불란서 파리에 한 복건성 사람이 살고있었는데 그는 복건에서 불란서에 건너간 화교였습니다. 이 화교의 이름은 황가략인데 고증을 거쳐 몽테스키외가 이 화교를 몇번 만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하여 몽테스키외는 그를 통하여 중국을 알게 되였고 그 내용을 책에 써넣었던것입니다.
18세기 유럽에서 중국의 당시 문화소개는 아주 많았습니다. 례를 들면 여러분이 읽은적 있는 볼테르의 주요한 저적가운데서 <<풍속론>>은 아주 많은 편폭으로 중국인사회를 반영했고 공자, 유교를 말했습니다. 그럼 볼테르와 비슷한 시기 당시 유럽의 많은 문인들 정계요인이나 황실성원들을 포함하여 그들은 모두 중국문화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때 한가지 문화현상이 일어났는데 바로 중국바람이였습니다. 불란서 문자로 <<Chinoiserie>>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중국바람이라는 뜻인데 당시 유럽생활의 각 분야에서 표현되였습니다. 례를 든다면 원림설계부문에 특별히 많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런던에 가면 거기에 유명한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서 중국식 보탑을 볼수 있습니다. 이 보탑은 바로 18세기에 세운것입니다. 하여 그때는 실내장식이라든가 여러 면에서 중국바람이 류행했습니다.
그러나 18세기가 지나면서 유럽사람들이 진짜로 중국에 대한 구체적인 접촉이 있으면서부터 중국의 형상은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실제상 18세기 하반기에 우리들이 다 알고있는 영국경제학가 아담스라는 사람이 <<국부론>>에서 말한바 있는데 그는 책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중국이 부유하다고 지나친 상상을 한다고 썼습니다. 그는 영국의 상선을 타고 광동에 왔는데 항구에서 많은 중국사람들이 바다에 몰려들어 물우에 떠있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모자를 가지고 서로 빼앗으며 싸우는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사람에 대해 다른 견해가 생겼습니다. 원래 인상과는 다른 견해말입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중국사람의 형상이 점점 좋지 않은데로 바뀌여갔습니다. 아편전쟁이후 외국사람들은 한면으로는 장사를 하고 한면으로는 침략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 중국의 형상이 좋지 않게 변해갔습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에는 점점 딱딱하고 멋없는 형상으로 되여버렸습니다. 바로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이지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영국사람이 쓴 글에서 중국사람은 뾰족한 산양수염을 한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후 이것이 영화에도 나왔는데 그 중국사람은 술수가 많고 또 어떤 때에는 성실하지도 않으며 아주 고약하여 늘 나쁜 짓을 하는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보기에는 사실상 의식형테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런 형상에 대하여 지금 우리에게 아주 많은 비평문장이 있는데 실제로 그 배후는 의식형태를 표현한 언어입니다.
20세기 말기에 와서 중국사람의 형상은 갈수록 풍부해졌습니다. 미국에 가있는 적지 않은 화교작가들말인데요. 미국 화교들이 미국에서 창작을 한다면 어떤 좋은 점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좋기는 중국제재를 쓰는것인데 이런 작가들은 중국문자를 모릅니다. 그것은 그들이 제2세 혹은 제3세대되는 이민후예들이기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얻어들은것과 미국도서관에 있는 영문참고서를 보고 중국생활을 추측하여 글은 씁니다. 하여 그들이 쓰는것은 주로 중국사람이 미국에 이민한 경력입니다. 때문에 이런 책들이 미국사람들에게는 흥취를 느끼게 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은 이민국가이기때문입니다. 중국사람에게는 흥취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책에 흥취가 없습니다. 몇몇 화교작가가 아주 유명한데 바로 담은미가 쓴 소설<<희복회>>가 소문났지요. <<회복회>>에서 미국의 화교들인 중년부녀들을 취급했는데 그들의 혼인이 다 불행한것으로 썼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책은 보통 미국사람들의 구미에 맞습니다. 그들은 중국에 대해 구체적인 료해가 없어 중국사회가 아주 암흑하고 압박이 심하다고 여기고있습니다. 하여 혼인이 다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다른 한 작가는 탕정정이라 하는데 그도 중국사람에 대한것을 적지 않게 썼습니다. 그들의 작품속의 중국사람의 형상은 다 좋지 않습니다.
미국의 화교작가들중에 비교적 유명한 작가인 조건수가 있습니다. 그는 남성입니다. 미국의 화교작가들이 주로는 미국시장에 맟추어 글을 쓰기때문에 중국의 부정적인 면을 씁니다. 그래서 성공을 한다는데 이런 성공은 다른 사람의 대가로 얻은것입니다. 대가를 낸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가능하게 중국의 문화이겠지요 그리고 중국사람 더우기는 중국의 남성이지요. 때문에 이 조건수는 여러 녀류작가들사이게서 격렬한 론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조건수는 태도를 바꾸어 말하기를 중국의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음험하지 않으며 그래도 관공같은 인물도 있고 장비같은 인물도 있는데 그들은 아주 골기 있다고 하면서 중국사람의 형상을 개변하려 했습니다. 문학작품속의 형상은 제가 방금 말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형상학이라고 말하는데 전문 이 형상이 어떤것인가를 관찰합니다. 중국사람의 형상은 어떤것인가, 그들은 그러루하게 봅니다. 주요하게 문학작품에서 중국사람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외국문학으로 보는 중국문화인데 이것이 그중 한 부분입니다.
책 몇권은 아주 잘 쓴것이 있습니다. 제가 추천하겠습니다. 원래 남경대학에 로교수 한분이 계셨는데 범존중이라 합니다. 범교수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을때 르네상스시기와 그후의 작품에서 중국을 썼으며 또 중국문화가 영국문학에 어떤 영향을 일으켰는가를 썼습니다. 범존중교수가 30년대초에 쓴것입니다. 또 전종서선생은 영국류학시기 옥스포드대학에서 론문 한편을 썼는데 이 론문에서 연구한것이 바로 17,18세기 영국문학에서의 중국사람과 중국문화입니다. 아쉽게도 번존중선생의 이 저작은 중국어로 번역된 역본인데 원본은 영문입니다. 영문은 외연사, 북경외국어대학 외국어교육출판사에서 출판했습니다. 여러분이 외국어를 알면 읽어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이 화제를 말했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강의할것은 좀 다른것입니다. 저는 외국작품속의 중국사람 형상이 어떻다는것은 직접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오늘 말하려는것은 지금 중국문화를 강조하는 면에서 많이 모자란다는것입니다. 전문 외국문학을 강의하는 교원이나 외국연구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모자란다는것입니다. 우리가 외국문학을 볼때, 그것이 많은 면에서 중국과 어떤 차이점이 있으며 우리가 자기의 중국문화를 인식하는데 어떤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가를 의식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관심이 부족합니다. 외국의 책을 읽는다고 하면, 청나라말 일부 관원들이 런던이나 파리에 파견되여가서 국내에 보고서를 써보내는것처럼 매일의 견문을 쓰는것과 같습니다. 저는 외국책을 읽는다는것이 청나라 관원들처럼 런던이나 파리에서 일기를 쓰고 그들이 사회를 관찰하는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청나라말 관원들은 외국에 갔는데 이는 중국사람으로서 제일 처음 외국에 나간것이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글을 쓰면서도 중국의 문화틀을 갖고 외국사회를 관찰했다는걸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이 쓴 일기를 보면 비록 쓴것은 런던이나 파리의 정경들이지만 그들의 시각이 어떠했는지. 어째서 여기에 100명이 있다고 보았는지, 어째서 두세사람의 얼굴만 보였는지, 그런것 왜 특별히 심각한 인상을 주어 글을 쓰도록 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관심의 초점이 바로 중국문화이며 자기가 생존하는 환경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례를 들면 장덕일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번역가입니다. 그가 런던에 가서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큰길거리나 작은 골목을 다녀보아도 어린애를 버린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런것은 영국사람들은 전혀 생각해낼수 없는것이여서 영국사람 누구 하나 쓸수가 없습니다. 영국사람은 거리에서 아이가 버려진것을 못 보았다고 쓸줄 모릅니다. 하지만 중국사람은 그것을 썼습니다. 그런데 중국사람이 그것을 쓴것이 단지 영국을 묘사한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많은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그 일기를 쓴 작자는 그의 모체문화속에 존재하는 일상생활에서 보여지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말하고있기때문입니다. 이런것을 읽으면 우리의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무엇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청나라말기인 19세기말에 중국의 도시에는 가능하게 어린애를 버리는 현상이 보편적이여서 거리에서 흔히 보였기때문일것이였습니다.
그들은 또 이상한 일들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례를 들면 어느 한 영국사람이 길에서 말을 때렸는데 이 말은 석탄을 운반하는 말이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혹독하게 때려 검거되였지요. 경찰이 그 영국사람을 붙잡아 두 주일 구류하는 벌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들을 많이 적었는데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는 아주 신기하고 천방야담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말은 원래 짐을 나르는 동물인데 어째서 마부가 말을 심하게 때렸다고 붙잡아가기까지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글에서 알게 됩니다. 사실상 빅토리아시기의 영국에서 19세기말에 벌써 학회를 성립하여 동물에 대한 잔혹한 행위를 방지하고 엄금하는 법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국사람은 이런 현상을 이상하게 여기는데 이것은 중국에서는 이런것들을 보는것이 습관되였다는것을 설명합니다. 하여 중국에서는 이런 일을 책에 쓸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쓰지 않습니다. 사실 중국사람들은 많은걸 썼습니다. 우리가 외국문학을 볼때 언제나 경각심을 갖고 본다면 그 책의 감각이 이상하기도 하고 중국사람과 다르다는것을 보아낼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잠시 멈추었다가 생각해봅시다. 이런 감각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것이 사고를 거쳐 자기의 모문화에 대해 더 심각한 견해를 가질수 있는가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실 외국문학이 중국에 금방 들어왔을때 일부 사람들은 관심이 아주 많았습니다.
(2)
19세기말 20세기초에 중국은 두차례 아편전쟁을 겪었고 또 갑오전쟁을 경과했습니다. 그후 소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중국문화에 병이 생긴것 같다고 하면서 반성을 했습니다. 1900년좌우부터 1920년 긴 시간동안 중국사람들은 중국의 문화가 무예숭상주의가 아니고 아주 나약하다는것을 의식했습니다. 바로 로신선생이 이런 감촉을 느꼈습니다. 모주석은 1910년에 체육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국외와 접촉해보니 외국사람들은 움직이기 좋아하는 민족이고 중국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외국문학을 볼때 문제를 갖고 보면 자기의 문화에 모자라는 점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기실 외국문학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한 면으로 외국문학을 거울로 삼아 자기를 비춰보며 눈은 바로 박혔는가, 얼굴은 어떤가를 살펴봅니다. 때문에 외국문학은 사실상 중국문화를 개조하는 공구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100년이 지난 다음에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원래 외국과 거래할때 이를테면 양무운동이라든가 그 후에 총을 사고 대포를 사고 또 무한에서 저절로 철공장을 꾸려 배를 만든다든가 하면서도 말합니다.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문학에 대한 번역입니다. 이것은 우리 소유의 중국문화를 개조하는데 영향력이 특히 큰것입니다. 오늘 제가 책 한권을 가져왔는데 <<흑노우천록>>입니다. 이 책은 미국19세기 중엽에 출판된 소설인데 작자는 스타부인입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 소설이 미국에서 노예제를 철페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1901년 우리 나라 번역계의 로선배인 림금남선생이 이 책을 중문으로 번역했습니다. 그가 중문으로 번역할때 목적이 미국문학을 소개하려는것이 아니고 미국문학소개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문화를 개변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사실 중화민족은 1900년좌우에 어떤 상태에 처해있었느가를 의식하게 합니다. 때문에 림금남선생이 이 책을 번역할때 책머리에 서언을 쓰고 뒤면에 또 글을 썼으며 가운데는 또 립언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사실 번역이 아니라 고쳐쓴것과 같습니다. 아주 많은 부분을 고쳤습니다. 그가 <<흑노우천록>>에서 두 인물에 주의를 돌렸는데 하나가 바로 탕무아저씨입니다. 이 소설의 영문제목은 <<Uncie,Tom`s.Cabin>>입니다. 이 탕무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는 아주 경건한 기독교신자입니다. 그리고 백인주인을 보면 굽신거리지만 .사람은 아주 성실합니다. 하지만 반항할줄 모르며 갖은 고생을 다 하고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노예주를 떠나버린다든가 도망친다든가 하는걸 못합니다. 이것이 한 흑인노예입니다. 그리고 또 한 흑인노예가 있는데 이름은 죠지라고 부릅니다. 죠지는 젊은 로동자인데 총명하고 머리를 잘 쓰며 기술도 좋습니다. 그리고 대담하게 반항합니다.
때문에 림금남선생은 이 책 번역에서 죠지라는 인물형상을 돌출시켰습니다. 그가 어떠어떠하게 용감하다고 했고 어떤 장면은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가 한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강을 건넜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때 미국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지만 미국 북쪽에 있는 카나다에는 노예제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죠지는 카나다에 가서 자유를 추구합니다. 림금남선생은 이 장면에 대한 번역에서 죠지를 아주 용감하게 형상했습니다. 림금남선생은 죠지의 이런 기질이 중국사람에게는 없는 특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럼 그가 당시 외국문학을 번역하고 이 책을 번역하는데 또 어떤 중요한 사상이 있었겠습니까 그때 많은 화교로동자들이 미국에서 기시를 당하고 까닭없이 붙잡혀가고 구류당했습니다. 그때 미국에는 화교를 배척하는 법안을 내왔습니다. 하지만 그때 화교들은 미국사회의 건설에 아주 큰 작용을 했으며 이러한 공헌은 너무나 큰것이였습니다. 이를테면 화교로동자들은 미국을 가로 지르는 철도를 부설했는데 지금은 이러한 공적을 인정합니다만 그때는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아주 불안해했습니다. 그것은 화교로동자들의 리익이 침해를 당했고 인격존엄이 담보를 받지 못했기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중국정부는 너무 나약하여 미국정부와 교섭할 엄두조차 못 냈습니다. 그래서 림금남선생은 이 책을 번역하는걸 통하여 결사적으로 중국문화를 개변하려 했습니다. 어떻게 개변할수 있는가 하는데 대해 말했는데 그는 중국 사람들이 아주 많은 면에서 19세기중엽 흑인노예보다도 더 불쌍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것에 대하여 그는 번역원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국력이 너무 약하다.>> 그다음 <<국가요직에 있는 자들은 겁나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국가 관원들이 외국정부와 교섭을 두려워한다는것입니다. 그는 <<또 사람을 통하여 이런 일을 기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실 글을 쓸줄 하는 사람이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화교로동자들의 고난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림금남선생은 이런 상황이 기실은 흑인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림금남선생은 이 책의 번역에서 죠지의 이야기를 쓸때 많은 부분에 중국사람들의 귀속말을 더 넣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귀속말은 지금 와서 읽어보아도 아주 재미 있습니다. 이 작품속의 죠지는 카나다에 온지 얼마 안되여 자기의 지식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불란서로 류학하는데 파리대학에 들어갑니다. 파리대학에서 4년 공부한다음 어디로 갈것인가 미국에 가면 어떨가 하고도 생각했습니다. 후에 죠지는 자기가 흑인이기에 아프리카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미국대륙에 있는 많은 흑인동포들을 단합하여 아프리카에 가서 자기의 나라를 세우자고 했습니다.
이런 나라는 사실상 존재하는데 바로 지금 아프리카의 리비리아입니다. 리비리아 이 나라는 국기가 미국국기와 아주 비슷한데 당시 흑인노예들이 아프리카에 건너가 세운 나라입니다. 그다음 죠지는 자기의 벗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의 리상을 이야기합니다. 죠지의 리상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림금남선생이 많이 고쳤는데 사실 번역이라기보다 고쳐썼다고 해야 더 적절합니다. 림금남선생은 시시각각 중국의 당시 국제형세하에서의 처지를 념두에 두고 썼습니다. 작품속의 죠지는 반드시 자기의 나라가 있어야 하며 자기의 법률을 내놓고 많은 사람들이 토론하여 신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백인들이 흑인을 죽이는걸 가만두지 말아야 하며 백인들이 흑인종족을 소멸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흑인은 사실 중국사람입니다. 그가 말한 공법공리란 말은 바로 나라가 있으면 모든것이 있게 되므로 오직 나라만 있다면 그다음 권리는 얻을수 있고 이래야만 모든 일을 할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림금남선생은 이 책의 첫머리에 쓰기를 1901년에 광서황제와 자희태후가 아직 서안에 있을때 이미 북경에 돌아올 준비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때 리홍장이 8국련합군과 조약을 체결하고 있었는데 자희태후와 광서황제는 조서를 내려 변법을 단행했습니다. 1901년부터 1911년 이10년은 바로 중국당시 개혁개방의 보조가 아주 컸습니다, 보조가 갑자기 너무 커서 청조는 인차 붕괴되였습니다. 이 변법을 내오고 아주 많은 면에서 이를테면 과거제도페지라든가 하는것은 그 사회에서 받아낼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변혁은 너무 큰 충격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최후에 나라는 분렬되여 몇십년동안 군벌할거상황을 조성하였습니다. 림금남선생은 1901년에 광서황제와 자희태후가 변법을 일으킨 소식을 듣고 아주 흥분했습니다. 하여 그는 <<사람마다 낡은 종이를 버려라>>고 했는데 그것은 묵은 책더미에 파뭍혀있지 말라는것이였습니다. <<부지런히 공부하라 내 책이 천박할지라도>> 내가 번역한 책이 통속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개를 북돋우며 애국보족하는데는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기개를 살리고 나라를 사랑하며 종족을 보존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시기동안 외국문학은 중국을 비춰보며 중국사회를 개조하는 도구로 되였습니다.
그럼 로신선생은 어떠했을가요 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림금남선생과 취지가 같습니다. 로신선생이 당시 일본에서 류학할때 장편 <<마라시력설>>을 썼는데 1908년에 썼습니다. 이 문장 역시 적지 않은 정도로 일본학자의 어느 한 문장에 대한 번역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이 문장이 완전히 그의 문장인지를 몰랐고 또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로신선생은 그 글에서 반역정신을 제창했는데 모로라는 인물은 바로 마귀반란자입니다. 그럼 로신선생이 바이런, 쉴러 그리고 베테페이등 인물형상을 통하여 반역정신을 선양하려 했는데 사실 그도 반란파의 편에 섰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아주 급진적인 반란파입니다. 20년대에 와서 그는 영미문학은 모두 시시껄렁한것들이고 심심풀이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쓰려면 볼멋이 있는걸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볼멋이 있는것이 어떤것이겠습니까 바로 로씨아문학입니다. 그는 중국과 로씨아는 문자지교를 건립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때부터 무장투쟁에 관한 소설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다. 이것이 후에는 중국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후에도 계속되였지만 3,40년대에는 한면으로 좌익지식인들이 로씨아와 동유럽의 문학을 번역했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림금남의 방향으로 나가면서 영미문학이나 일본문학 그리고 기타 문학을 번역했습니다.
50년대에 와서 우리는 서방의 진보적문학을 번역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쏘련의 <<뜨락또르운전수>와 같은 사회주의건설문학을 많이 번역했습니다. 때문에 이 외국문학은 중국문화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릴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외국문학을 보면 한면으로는 림금남선생이 말한 과감히 반항한다는것과 같은 점인데 림금남선생은 례를 잘 듭니다. 그는 중국사람은 유사덕처럼 나약하다고 했습니다. 기시를 당해도 가만있고 대항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제가 보기에는 천박한 부류입니다. 그외 허다한 문화적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관찰이 부족합니다. 이런것들은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는 원래 사회과학원에서 사업할때 사람들은 지식인이 이렇고저렇고 하면서 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나는 지식인이 아니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왜 지식인이 아닌가고 했습니다. 그후 저는 실언한것을 느끼고 제가 지식인이라는걸 승인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식인이 아닐때 많은 지식인들이 원망을 터뜨리기 좋아하기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지금도 이런 습성이 있는데 이런 습성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저들의 불만은 우아한것이고 시적이라고 여기면서 불평만 해대는것뿐이라고 여기면서 언제나 자기의 불행만을 하소연합니다.
하지만 제가 존경하는 어떤 사람들은 종래로 자기의 불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병이 나도 여기저기에 알리지 않으며 사람을 붙잡고 여기가 아프고 저기가 쑤신다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중하며 군중들더러 원망을 터뜨리게 합니다. 자기가 대접받지 못한다고 원망하는 자중할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총적으로 이런 현상을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데 원망하는 습성이 아직도 있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외국문학에서는 이러한 실례들을 많이 본것 같지 않은데 더우기 영국문학에서 저는 이런 력사가 아주 적다는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중국문학을 본다면 모두 주제사상에서 보통 인재가 기회를 못 만났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중국문학사를 보면 허다한 시인들이 인재가 기회를 못 만났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안 좋기때문이라고 하고 만약 인재가 기회를 만났다면 세상이 좋다고 합니다. 가령 한 사람을 천리마에 비유한다면 사실 이 천리마는 뛰여보지도 않아 잘 뛰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문화에서 기회를 못 만났다거나 시대를 잘 못 만났다고 말하면 이것은 좋은 뜻이지 나쁜 뜻이 아닙니다. 시작품에서 보면 나라에 보답하려 해도 할 길이 없는걸 통탄하고 꼭 재상이 되여야만 나라를 위해 보답할 길이 열렸다고 합니다.
어느 누가 군자라고 하면 그는 군자로 됩니다. 이런것들은 오랜 뿌리깊은 관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문학에 대한 평론을 어떤 때에는 보기 싫어합니다. 바로 누가 기회를 못 만났다면 우리는 그를 동정해야 하는것 같아서 말입니다. 만약 그가 큰 관리가 되였다면 좋다고 하고 이 사회가 좋다고 여깁니다. 그들의 이런 평판들을 저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영욕관으로 기준을 정합니다. 자기의 위치가 높으면 맹교와 마찬가지고 장안에 가서 과거급제를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주 창궐한데 자기의 생사가 달린 목적을 이루면 가문을 빛내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한달음에 장안의 꽃들을 다 보지 못 하는것을 한스러워합니다. 그럼 우리가 좀 더 멀리를 소급해봅시다. 굴원같은 사람을 볼때 우리는 굴원을 당연히 애국시인이라고 하고 그의 작품을 읽기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떤 때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영국문학이나 로씨아문학에 잘 보이지 않는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굴원은 자기흔상주의가 심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런 생각이 드는데 한 성숙된 사람은 자기의 시각으로 문제를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도 문제를 봅니다. 이를테면 어린이는 사탕을 못 가졌다고 울고 란동을 피우다가 사탕을 주면 울음을 그칩니다. 그럼 어른도 사탕을 좋아하지만 자기를 억제하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합니다. 가진 사람이 먹고 좋아하면 나도 기뻐합니다. 그렇게 어른은 어린이나 환자 그리고 약자들에게 양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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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굴원을 볼때 어떤 때에는 그가 어딘가 자기관심자라고 느껴집니다. 물론 지금 어떤 연구에서 굴원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라고 하지만 그건 관계치 말고 그가 자기의 영욕을 기준으로 했다는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중용을 받아 나라에서 권세가 큰 대신이나 되였다면 그는 세상이 좋다고 했을것입니다. 하여 굴원의 작품에는 자기긍정 자기가송같은 성분이 특히 많습니다. 그뒤로 내려오면서 우리 중국문학이 중국문화를 포함하여 이런 전통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할라치면 물건을 빌어 마음을 표현합니다. 굴원이 바로 물건을 빌어 감정표현을 잘 합니다. 례를 들면 자기를 착한 새나 향기로운 풀로 변하게 하는데 결국에 이런 새나 풀은 모두 자기자신에 대한 반사형상이였습니다. 그후 중국문학에는 이런 현상이 아주 많았습니다. 례를 들면 <<애련설>>같은것이니다.진흙속에서 나왔지만 더러워지지 않는다는둥 하는 것들인데 돌아보면 모두 자기흔상입니다. 또 례를 들면 아주 많은데 우리가 말하는 소나무 매화 그리고 참대의 절개 모란 백양 이런것들을 쓴 사람들은 사실상 모두 자기를 표방하여 쓴것입니다. 이런것들은 그 자체의 특성은 없고 거기에 부여된 도덕상의 내용이 실제로 자기자신이 되여 만들어진것입니다.
저는 외국문학에 이런것들이 있는가를 찾아보고싶지만 발견하기가 아주 힘들거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흥취를 느낀다면 불란서 르네상스시기 산문작가 몽텐의 문장을 보십시오. 그의 문장은 아주 유모아적인데 유머는 일종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유머나 이 미덕이란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글 쓰는 사람이 글과 자기사이에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자기에 도취되지 않으며 자기가 착오를 범할수도 있다는걸 스스로 발견하며 자기에게 작은 허영심이라도 있으면 경각심을 가집니다. 때문에 한 면으로 그에게는 하나의 귀띰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다른 한 면으로 이 목소리뒤에 또 한 목소리가 있는걸 발견할수 있는데 자기와 거리를 유지하라는 목소리와 자기와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라는 목소리입니다. 이런 사람의 생활을 살펴보면 아주 정취가 있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길것이며 또한 자기의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가능하게 어떤 물질적향수를 완전히 초탈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것들로 일체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에게 영예나 치욕이 닥치면 차분하게 받아들이는데 이건 아주 좋습니다.
중국문화는 지금에 와서 아주 큰 개변을 가져왔지만 아직도 자기위주관념이 있습니다. 더우기 중국문인들은 자기가 소속된 계층을 욕하면 안전하다고 여기고 자기를 이 계층에 들여놓고 자기가 청고하다고 자처합니다. 외국문학에서는 이런걸 얼마 못 보았는데 중국문학과 많이 다릅니다. 그 례로 제가 여러분에게 한단락 읽어드리지요. 어느 문장인가 하면 영국소설 <<간첩>> 인데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출판했습니다. 작자는 캉라더입니다. 캉라더는 필란드사람인데 18살에 영국에 갔습니다. 그후 영국에서 영어로 소설을 썼고 소설속에 많이는 정치제재를 다루었습니다. 소설에서 그는 19세기말 20세기초가 무정부주의라고 했습니다. 무정부주의자는 어떤 모양이겠습니까 무정부주의는 중국에서 20세기초 몇년에 아주 성행했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무정부주의자였습니다. 국민당시기에 독권은 암살에 의거했습니다. 채원배 역시 당시 상해에 암살조직을 세웠습니다. 암살이란 무엇인가 무정부주의자들은 암살이 우두머리를 죽이는것이라고 여깁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 그들의 행위는 테러주의입니다. 그것이 사회에 적극적인 의의는 없습니다. 총살을 하고 청나라 관원을 죽인것이 례컨대 광동광서총독을 죽인것이 백성들에게 어떤 후과를 가져왔습니까 결국에는 몇십년의 군벌내전이였습니다. 바로 백만 천만에 달하는 중국의 우수한 청년들을 전쟁에서 죽게 하였거나 또 기타 이러루한 동란속에 죽게 하였습니다. 이건 아주 나쁩니다.
무정부주의는 그 시기 서방에서도 류행했습니다. 첫시작은 로씨아에서부터였습니다. 여러분이 뚜르께네브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보았다면 이책에 나오는 한 인물이 바로 바자로브인데 이 바자로브의 구호가 모든것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랭정한 눈길로 세계를 보며 외과수술칼로 개구리를 해부하듯이 사회를 해부하려 듭니다. 이때 그가 해낸 일은 아주 급진적이고 위험했습니다. 캉라더의 <<간첩>>에도 한 인물이 있는데 키는 키지 않고 생김새도 잘 나지 못했는데 그에게는 교수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주 총명하다고 여기며 영국이라는 사회에서 반드시 아주 높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어느 기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을뿐입니다.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기술학교교육을 받았다고 하면 이는 비교적 낮은 차원입니다. 그후 그는 염료공장에 가서 실험실에서 일합니다. 그는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폭약과 뢰관을 제조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는 폭약과 뢰관을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테러행위를 합니다. 경찰도 그를 보면 무서워합니다. 그것은 그가 언제든지 그를 붙잡는 사람과 함께 죽을수 있기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고 원망합니다.
다음 캉라더는 이 소설에서 이렇게 쓰고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교수는 아주 자신만만하며 자기의 우점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사회가 그에게 공정한 대우를 줄수 없습니다. 바로 사회가 그에게 불공평하여 원래는 그가 더 좋은 일을 할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캉라더는 계속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이 공정한 원칙에 표준이 있는가 참을성있게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절로 인재가 기회를 못 만났다고 할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말해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저절로 어떻게 사회가 자기에게 불공평하다고 말하겠습니까 교수는 천재입니다>>. 캉라더는 작품속의 인물이 키는 작아도 몸에 거대한 힘을 갖고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에게 천재가 있다는데 이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운명에 순응하는 위대한 사회미덕이 모자랍니다. 이런 말은 중국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이 교수 역시 문화인이여서 자기가 많은 지식을 배웠다고 여깁니다.
제가 보기에 기도라는것은 이상한것입다. 새로운것을 만난것같기도 한데요. 그것은 제가 16,7살때 이상한 시를 쓰기 좋아했고 사회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자기가 어떻게 되여 대학에도 못 갔고 그래도 별문제 없으며 이런 사회를 보고 좋다고 여겼습니다. 일종 사회미덕인데 위대한 사회미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회미덕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세에 순응하는가 운명에 따르는가 하는것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뒤에는 가능하게 어떤 종교적요소가 있을것같습니다. 단언할수는 없지만 이런 종교사회는 이미 소유한것에 대하여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이런 관념일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외국문학을 볼때 어떤 야심가들은 오직 우로 바라오르기만 바랍니다, 례로 발자크의 소설에는 19세기 당시 불란서사회에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많은 일을 하고 많은 말을 하지만 원망같은것은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 좋지 않은 개인야심가여서 많은 일들을 할때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원망같은것은 하지 않고 원망을 미덕이라 하지 않습니다.
중국고전문학이나 어떤 글은 지금까지 늘 물건을 빌어 감정을 표달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형중에 자기관심적인 특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자기관심에 대해 주의해야 합니다. 시간이 길어지면 안 좋습니다. 저는 외국문학을 늘 보는데 외국문학에서 물건을 빌어 자기감정을 표현하는것을 못 보았습니다. 이른바 뿌쉬낀이 바다를 노래하고 또 팽스가 장미꽃을 노래한것은 그들이 자기가 사랑한 사람을 비유한것이지 중국작가들처럼 모란으로 자기를 나타내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재미있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데 제가 방금 말한것은 실제 례를 든것이구요 중국의 전통문학에서 물건을 빌어 자기를 표현한것을 아주 많이 볼수 있는데 허다한 시가 다 이렇습니다. 바로 질풍근초나 백설청송같은것은 다 자기를 추어올린것입니다. 이런 단어들을 자주 듣게 되면 싫증을 느끼고 자기를 올리추는 사람은 어린애같이 자기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자기의 작은 울타리에서 뛰쳐나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좋아지니까요.
그럼 다른 문학작품을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여러분은 20세기초 체코문학의 명작인 << 훌륭한 병사 쇄커>>를 알고있겠지요. 이 작품의 작자는 하세크인데 그는 일찍 문장을 써서 가장 위대한 작가는 하세크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는 어떤 문인들을 풍자한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을 풍자하는것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여겨 자기를 풍자하고 자기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문장의 제목은 <<가장 위대한 작가>>입니다. 이 문장은 아주 재미가 있는데 그는 자기에게 아주 많은 우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자기에 대하여 제일 잘 알고있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이런 단락이 있는데 이 문장은 대략 2,3천자쯤 됩니다. 제가 좀 읽어드리겠습니다. <<나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쓰는 사람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고 있을것이며 다음번 제국선거때 이미 몇개 현에서 추천한 나를 꼭 오헝제국의회에 들여보내야 한다. 그때의 체코는 오헝제국의 한부분일것이다.>> 그는 자기처럼 이렇게 우수한 사람은 이미 여러사람에게서 추천을 받았고 꼭 의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이 제국좌담회에서 고상한 의원은 틀림없이 자기이고 의회의 기타 살람들은 모두 소인이며 자기가 들어가야만 고상한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내가 다시 한번 해석할것 없이 내가 말한 이 사람은 가장 고상한 사람인데 바로 내 자신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그는 << 내가 또 한마디 선언하는데 내가 쓴 이 문장까지도 나의 위대하고 고상한 거동가운데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 작가인 내가 꼭 의원으로 당선되여야 하며 그래야만 이 사회가 좋아지고 이 모든 의원들이 고상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정서입니다.
어떤 때 저는 자신을 돌아보기도 합니다. 저는 로신선생을 아주 탄복합니다. 그가 쓴 많은 문장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광인일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검다고만 했기때문입니다. 오직 자기만이 빛나는 별이고 아름답다는것이지요. 이런 정서는 무서운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이나 사물을 대할때 어떤 작은 일에서나 자기를 위한 일을 하는것은 아주 보편적인것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다 할줄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은 모두 취해있고 자기만 깨여있다고 여길것입니다. 굴원은 늘 이런 심태입니다. <<광인일기>>에서처럼 그는 자기를 사회와 대립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온통 암흑하고 자기만 한점 밝은 빛이라고 여깁니다. 후에는 이것이 자기흔상으로 변화하는데 이것은 좋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좋아보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 세대보다는 낫고 그들은 유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유머를 잘 몰랐는데 지금 그들에게는 유머가 있습니다. 유머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자기와 거리를 유지하는것인데 이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제가 주의를 돌린것은 외국문학으로부터 중국문화전통을 보면 이 측면이 바로 문인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글을 써서 원망을 토로하는것인데 불평이 있으면 소리치고 자기의 원망을 외칩니다,
(4) 그리고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것은 이번에 올림픽을 치렀는데 우리 모두 개막식을 보았습니다. 개막식에 주요하게 표현한것은 중국문화성취입니다. 바로 4대발명이지요. 이 개막식은 물론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 특점은 바로 소리. 빛, 전기 그리고 웅장한 장면인데 이것으로 성공한것입니다. 장면이 아주 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계적인 동작을 했는데 그들은 아마 일년 아니면 더 많은 시간동안 련습했을것입니다. 그래서 세인들을 놀라게 했고 중국은 이렇게 위대하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중국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이후 30년, 50년이 지나면 진짜 힘센 사람이 희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꼭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힘이 약한 사람은 자기가 힘이 세다고 자랑하고 힘이 센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힘 센 사람은 큰 소리가 없지만 일단 한마디 하면 책임을 지며 아주 드셉니다. 저는 미국외교정책의 비평자인데 만약 미국정부가 말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며 아주 견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때 한 국가가 자기의 성과를 어떻게 보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외국문학을 보는 가운데서 한번은 2001년 노벨상을 받은 나이보얼의 저작을 본적 있습니다. 이 저작은 <<하만>>이라 하는데 저는 문득 어떤 촉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촉동인가 하면 바로 한 문화가 어떻게 자기의 성과를 보아야 하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이 <<하만>>에서 무엇을 이야기했는가에 대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한 아랍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장사를 하다가 그곳에 정착하여 이슬람교인이 되여가지고 세세대대로 살아갑니다. 그는 자기 집의 력사와 인도양의 력사는 모두 유럽사람들이 쓴 책에서 알게 되였다고 합니다. 그는 아랍사람은 당년에는 위대한 모험가이고 작가이며 수부는 지중해에서 삼각범선을 띄웠는데 이런 범선이 그후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는데 밑받힘이 되였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항해안내원은 다가마를 데리고 동아프리카에서 칼카타에 도착했습니다. 저 역시 행표라는 이 단어를 최초에 사용한 사람이 페르샤상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말하는것은 모두 유럽사람이 쓴 책을 보았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만약 유럽사람이 없었다면 자기들의 과거는 없어졌을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모래톱에서 어민의 발자국이 사라지는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기네가 유구한 력사가 있지만 력사감각은 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만약 어느 누가 이런 력사를 써서 비교하지 않았다면 자기들의 력사는 없었을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책에서 말한것은 지중해의 삼각범선입니다.
이 아랍인은 계속하여 자기의 생활방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련의 작은 일들에서 새로운 사유를 계발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계발받은것은 그 지방의 우표라고 합니다. 그가 사는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영국집정당은 아름다운 우표를 많이 발행했습니다. 우표의 도안은 모두 본 지방의 풍토인정을 그린것이였고 그중 한장에는 아랍독노범선이라고 이름한 우표입니다. 이 범선을 노 하나뿐인 돛배인데 그것을 그린 우표속에 외국인의 모습이 있는것 같았는데 이것이 제일 눈길을 끌었습니다. 만약 이 독노범선을 보지 않았다면 범선에 대하여 별다른 생각이 없었을것입다. 그것은 날마다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다보니 자기의 문화를 모르고 세계문명에 대한 공헌도 모르기때문입니다. 범선을 보아도 늘 보아오던것이여서 례상사로 여깁니다. 그러나 영국인이 발해한 이 우표로 하여 이 범선에 주의를 돌렸습니다. 이 부분이 아주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왜서인가 하면 거기에서 국가라는것을 생각하게 하기때문입니다. <<하만>>은 아프리카 국가가 현대화진척 과정에서 직면한 각종 장애와 곤난을 썼습니다.
그 다음 한 지도자가 원견성있게 멀리 내다보고 2000전에 이 국가를 어떠어떠한 나라로 건설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나라의 사회는 아직도 매우 흐트러져 있습니다. 세계문명에 대한 발전행정에 명석한 파악이 결핍합니다. 때문에 그후 개혁에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아랍인이 세계문명에 대한 공헌을 쓰면서 한 두 단락의 이야기가 저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이런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는데 례를 들면 우리의 4대발명같은것은 중국의 자랑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 무엇인가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것이 모자랍니다. 바로 저절로 이것을 자랑하지 못한것입니다. 중국은 세계문명에 이 4대발명으로 공헌했습니다. 당시 중국책만 본 사람은 모릅니다. 영국의 학자인 리웨써가 중국의 4대발명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가 어느 때에 말했는가 하면 항일전쟁시기에 중국에 와서 말했습니다. 그는 중국인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말했습니다. 비교적 높은 위치에서 문제를 볼줄 아는 사람만이 여러 곳을 돌아보고 거기에 어떤 새로운것이 있는가, 그것이 세계문명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지적합니다. 이건 아주 어려운 일인데 이런 능력이 우리에게 모자랐고 이 점을 몰랐습니다.
어떤 일은 맹목적으로 나가는데 혹시 심괄이 쓴 <<몽계필담>>을 보면 거기에 나오는 발견은 많은것들이 우연하게 마주친것이지 목적의식적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례를 들어 한 사람이 페니실린을 발명한것은 우리가 어떤 발효물질로 병을 치료한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때문에 발명에 대하여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저의 생각에는 외국문학을 읽어보는 과정에 보통 심사숙고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나라나 자기의 발명창조에 대하여서는 흥미진진해 합니다. 독일사람은 독일이 세계문명에 어떤 공헌을 했는가에 대해 말이 없고 불란서사람이나 영국사람 혹은 미국사람도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종래로 이 분야의 통계를 하지 않았고 말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후에도 자기가 세계에 어떤 공헌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어떤 공적에 대하여 반영해야 되지 않는가고 말합니다. 이 소설에서 말한것은 이 영국사람이 아랍의 노가 하나인 범선의 력사적의미를 보아냈다는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는 모르고있습니다. 그리고 나이보얼은 어떤 면을 비평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당지의 아프리카 사회가 틀린다고 했습니다. 그는 식민지당지의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한다는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맥빠진 소리도 했지만 그가 말한것은 아주 의의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가 문명속에 있으면서 그 문명이 어떤 특색이 있는가를 본인은 모른다는 말입니다.
당시 30년대에는 중국의 어느 한 과학가도 세계에 발명을 발표한것이 없었습니다. 모두 리웨써같은 사람이 말해서야 중국에서 발명한것이 어떤것들이라는걸 알게 되였습니다. 물론 리웨써는 어떤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 혹시 우리도 이런 발명이 있다고 말할수 있으며 완전한 중국의 발명이 아닐수도 있다는데서였습니다. 무엇으로 그후에 고등보에서 인쇄한 글자가 기필코 중국 필승한테서 별려간거이라고 증명하겠습니까? 필승의 인쇄술은 중국에 진짜로 영향을 주었겠는가? 혹시 별로 큰 영향을 일으키지 않았을수도 있는데 역시 론쟁이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한 민족의 자신감을 확립하는가 하는데 관계됩니다. 한 민족이 진짜로 강대하다면 반드시 각종 발전의 맥락을 투철하게 볼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발명에서는 이 나라가 우세고 저 발명에서는 저 나라가 우세라는것을 보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아주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누구를 보면 자기의 제일 중요한것을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릴때 우표수집하면서 서로 바꾸기도 하고 누가 자기에게 없는 우표를 보여주면 자기는 제일 좋은 우표를 다 보여주는것처럼 말입니다. 다 내놓은 다음에야 대방의 우표가 대단히 많은데 자기에게 보여준것은 다만 백분의 일밖에 안된다는것을 알게 됩니다. 대방은 그렇게 많은 우표를 갖고있으면서 조금만 보여주고 자기는 밑천을 다 보여준것에 아주 맹랑해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 나이보얼의 제3세계사회의 문화에 대한 견해를 사실상 많은 면에서 우리가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 하나의 작품을 썼는데 <<인도3부곡>>입니다. 그 작품에서 사람을 아주 가슴 아프게 하는 현상을 썼는데 중국사람이 볼때 그런 현상은 중국에도 일찍 있었기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허나 나이보얼이 말하려 한것은 이 사회에는 민족적 국가적응집력이 없다는 일종 자학의식입니다. 그가 말한 1857년부터 1858년까지 인도사회에서 그자신의 선조는 인도인이였기때문에 인도의 력사에 대해 특별히 주의를 돌렸습니다. 1857년에 인도의 어떤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인도는 영국동인도공사의 한 부분이였는데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사소한 일때문이였습니다. 그것은 영국사람들이 그들에게 신식총을 사용하게 했는데 이런 총 탄알집에 있는 곽을 입으로 물어열었습니다. 그 곽에 윤할유를 바르는데 돼지기름이나 소기름입니다. 인도교인이나 이슬람교도들은 이발로 그 곽을 물어여는것을 견결히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영국군관을 쏴죽여서 이 반란의 불길은 만연되였습니다. 영국사람들은 진압하기 시작해했습니다.
영국의 <<태오시보>>라는 신문에서 기자를 파견하였습니다. 이 기자는 인도에 온뒤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기자가 영국에서 파견되면 일기를 적어야 합니다. 나이보얼은 영국의 낡은 서점에서 그가 쓴 일기를 샀는데 아주 정교하게 인쇄제작된것이였습니다. 나이보얼은 이 기자가 19세기 중기에 어느 한 곳에 가서 그곳 의 풍물을 묘사하는 능력이 아주 좋다고 느꼈습니다. 마치 자기 집에서 쓴것 같았답니다. 나이보얼은 인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나갔지만 바로 간디같은 사람도 자기가 생활했던 사회를 잘 묘사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문학연구에서 습작은 일종 권력이고 힘입니다. 하나의 과제를 관찰하여 그것을 써낼때는 권리를 행사하는 시기입니다. 이를테면 작은 곳에서 살던 사람이 큰 곳에 가면 눈이 부셔서 이 큰 곳을 형용할수가 없는것과 같습니다. 나이보얼은 이 워랜라쌀이라는 기자가 인도와 와서 제집에 온것처럼 능란하게 글을 썼다는것입니다. 이 기자가 처음 인도에 왔을때 수웨즈운하가 아직 개통되지 않았는데 그가 인도에 와서 어떻게 영국의 부대를 따라서 인도의 반역부대를 진압하였다는것을 썼습니다.
이 기자는 이곳에서 이상한 일들을 발견했는데 반역부대를 진압하러 라크노라는 도시에 갔는데 길에서 영국군관에게 많은 인도하인들이 저녁이 되면 정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천막을 치고 먹는 정식에는 료리 한가지라도 모자라면 안되고 술은 꼭 잘 갖추져야 하는데 흰술이나 포도주나 혹은 다른 술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형식은 그대로 진행됩니다. 더 이상한것은 길에서 인도사람들이 끊임없이 불어나는것인데 담가를 들거나 짐을 메는 하인부대들이 영국부대를 따라 함께 인도인을 진압하러 가는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대에는 많은 시커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인도의 시커편 저부성 북쪽에서 살았는데 거쿨지게 생겼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천을 감고 다니는데 크로즈까지 온다음 영국군은 그들이 싸움을 잘한다는걸 알고 은근히 근심했습니다. 그들이 싸우기 시작하면 리규처럼 칼을 무섭게 휘두릅니다. 기자는 결국 이 민족은 자각의식이 없고 그 어떤 응집력도 없다는것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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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자는 두가지 사회를 보았는데 나이보얼에게 이 두가지 사회에 대한 감촉이 아주 깊었습니다. 하나는 해외에서 소수의 영국인이 부대를 조직하는데 그렇게 적은 영국인에 의거하여 방대한 인도의 인력자원을 움직이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아주 거대하고 산만한 인도사회였습니다. 이 인도사회는 중심이 없고 민족과 나라라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후에 이런 일은 끝났습니다. 1858년에 이르러 진압되였습니다. 그럼 이러한 일은 실제로 19세기 중국에서도 있었습니다. 많은 회억록에서 발견할수 있는데 제2차아편전쟁때나 8국련합군이 침략했을때 바로 이런 외국부대가 중국연해지구에 와서 중국민공을 아주 쉽게 모집했습니다. 급급히 그들은 많은것을 얻어가고 운반해가려고 그랬는데 이런 일은 외국사람 저절로 한것이 아니고 우리 중국사람이 했습니다. 8국련합군이 쳐들어왔을때 중국인들로 결성된 <<화용단>>이라는 부대가 있었는데 이 부대가 전투에서 아주 용맹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들의 사진을 보면 입은 옷이 영국인이 내준것이였습니다. 영국인은 그들에게 전투는 어떻게 해야 하며 묘준은 어떻게 하고 기관총은 세사람이 어떻게 조종해야 한다는 등을 가르쳤습니다. 이런것들은 당시 인도사회와 아주 흡사한데 바로 민족의 응집력이 없는 나라라는것을 말해줍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이 로신선생으로 하여금 1914년 결연히 의학을 포기하고 문학에로 전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문장으로 중국사람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려 했습니다. 림금남선생은 <<흑노우천록>>같은 작품을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걸 알려주려 하였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외국작품을 읽을때 좀 더 신경을 쓴다면 많은것을 발견할수 있으며 자질구레한 사건일지라도 감수가 다를것입니다. 물론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사건을 간단하게 좋거나 나쁘다고 론할것이 아니라 좋고 나쁜것이 한데 엉켜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국이 이렇게 모래알같이 흩어졌기때문에 남을 침략하려 하지 않는것을 좋은것이라 한다면 그들에게는 강력한 자각의식이 없는것이며 세계사람들을 교육하려 한다거나 하는 충동이 있을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문화에는 침략본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남을 개조하려 하는데 이런 념원이 있으면 좋은 점이 바로 강력한 향심력이 생기는것입니다. 이런 향심력이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이것이 어떤 때에는 아주 소심하게도 느껴집니다.
중국문화에는 지금에 와서 반드시 다른 문화와 비교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말을 하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진정한 대국에 어울리기에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태연자약하지 못한데 마치 제가 어렸을때 우표바꾸기를 할 때처럼 단번에 제일 좋은 우표를 내보이고 대방의 우표대가는 조금만 꺼내놓은데 대하여 아주 놀라워한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듬직해야 합니다. 그런다면 사람이나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더 잘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의 생활에서 체현되였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변화되고 있고 대화하는 방식도 변화되고 있습니다. 례를 들면 우리가 원래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금지해야 하는가를 지금은 아주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어째서 완곡하게 말하게 되는가 이 완곡한 과정이 사실 우리가 대외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배워온것입니다. 내가 원래 할 말은 이런데 그것을 완곡하게 말하니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기분이 좋습니다. 만약 우리가 줄곧 중국의 문화권안에만 있으면 습관되여 완곡해질수 없습니다. 례를 들어 한 아이가 무대에서 노래 한곡 부르고 한곡 더 부르고싶어 합니다. 이때 어서 내려오라고 하고 잘난척 하지 말라고 한다면 곁에서 듣는 사람도 아주 난처하고 불편합니다. 그 자리에서 아이를 훈계하면 다른 사람도 거북합니다. 하지만 잰. 오수딩소설 <<오만과 편견>>에서의 주인공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는 <<노래를 잘 불렀어요. 더 부르고 싶지요? 그런데 다른 녀사들에게도 노래 부를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가요 자, 박수! 다음분 나오세요.>> 이런 일이 아주 많지요.
우리의 중국문화가 원래는 이러한 점에 확실히 많은 중시를 돌렸습니다. 하지만 근 백년래 백화운동이 활발하게 발전됨에 따라 무감각하게 변화했습니다. 점점 되는대로이고 언어도 거칠게 변했는데 이 사회가 마치 베아링에 윤활유가 없는것처럼 운행하면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부속품이 인차 마사지고 다음에는 이 기계가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언어를 좀 개진한다면 이 사회에 많은 윤활유가 있는것처럼 그전과는 달라질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외국문학의 애독자이고 역시 중국문학의 나팔수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외국문학을 많이 볼것을 아주 제창하며 외국문학을 볼때 많이 비교하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비교할것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임의로 례를 들면 중국의 문화에는 원래 애정이야기의 주인공이 다 장원이나 글을 읽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가 방금 말한것과 같이 우리 민족이 비교적 연약한것과 관계있습니다. 그러나 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안나 카레니나를 보면 그는 우룬스끼라는 군인을 좋아합니다. 그럼 19세기 독일의 소설가 팡다너가 쓴 유명한 소설 <<아페 부리스터>>에서 여주인공 역시 소위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중국문화에서 군관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원래 훌륭한 남자는 군대에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관공이나 장비같은 영웅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모두 가정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영예는 장원에게 주는데 이 장원은 시험을 쳐서 합격되면 사회의 인물로 생할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작품은 바로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 장원이 성공했고 큰 출세를 했다는데 그칩니다. 그가 사회를 위해 어떻게 복무하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것이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여 출세하는것과 같지 않습니까 어쨋든 출세하여 목적을 이루었으니 금의환향하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이런한 관습이 외국문학과는 감각이 다릅니다.
우리는 늘 정치적제재를 보는데 인물형상이 어떠합니까 그 인물이 역할은 하면서 물론 개인의 포부를 갖고 사회를 위해 어떻게 봉사하는가, 이러한 봉사의식이 어떠한가를 보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국의 문화에는 이러한 봉사의식이 약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출세한 사람이라면 혹은 지식인이라면 얼마든지 공중봉사를 할수 있고 이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하여 그들은 관원을 공무원이라 부릅니다. 공무원이란 이름은 영어로 하인이라는 뜻입니다. 일종 봉사의 관념이 들어있습니다. 때문에 큰 일이 있으면 지식인이 여러가지 일들을 합니다. 제1차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때 영국의 아주 훌륭한 지식인들이 정보기구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지식인이 너무 적어 실력을 보존해야 했기에 대학을 전이시켰습니다. 대학생을 전쟁에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는 이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외국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너무 큽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이 외국에 가볼 기회가 있다면 아주 놀라워할것입니다.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때 대학에서 아주 많은 우수한 학생들이 죽었다는데 대해 말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질책합니다.하지만 그들이 그 사회에서 지위가 높았지만 전쟁터에 나간것을 감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제가 제일 강조하기싶은것은 지금 이 사회가 이미 아주 큰 변화를 일으켰고 아울러 새세대들이 아주 탄복할만 하다는것입니다. 지금 대학에는 많은 지원자들이 나왔고 그들은 일을 하는것이 사랑의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공부할때는 사랑의 마음이란 단어를 말할줄 몰랐습니다. 날마다 투쟁을 강조하고 공부를 잘 한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앞날에 머리를 썼습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은 새기상이 있습니다. 자기의 민족적단결의식이 있습니다. 중국이 어떤 국제적사건에 직면하여 불공정한 대우를 받으면 함께 뭉쳐서 일어납니다. 이를테면 올림픽홰불이 국외에서 전달될때 어떤 곳에서는 중국사람들이 모여서 올림픽홰불행진활동을 방애하는것을 항의했는데 그들이 모일때 뻐스표나 기차표는 다 자기절로 샀습니다. 이런것들은 국가민족의 의식이 날로 강화되였고 사회도 더 자신감이 있고 너그러워졌다는걸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발전과정에 아직도 커다란 장애가 있습니다. 그길목은 문학과 관계됩니다. 그것은 중국사회가 아주 오랜 시기동안 농경사회였는데 그 농경사회의 습성을 어떤 외국사람들은 깔보고있습니다. 그들은 중국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안락한 생활에만 만족하고 민족자강의 능력이 모자란다고 여겼습니다. 더 강한 민족이 이런 민족과 경쟁할때 이런 중국의 민족은 쉽게 무너진다는것이였습니다.
실제로 다행인것은 중화민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1949년이후 점차 나아지게 되였는데 바로 우리에게 강한 정부가 있었고 이 정부와 사회사이에 서로 호응이 이루어졌습니다. 더우기는 이 몇년래 이 방면의 진보가 더욱 큽니다. 하지만 우리게게 아직도 많은것이 수요되는데 바로 우리의 이 사회가 어째서 자발적인 흥취가 모자라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진정으로 모자라는것이 창신능력입니다. 우리의 사회가 총적으로 말해서 너무 실용적이고 너무 공리적입니다. 설사 올림픽에서 무언가 체현하기는 했다지만 우리들이 각자마다 과외애호를 가져야 하며 이런 애호를 여러 령역에 리용하면서 자기의 대가를 너무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꼭 금메달을 따서 장려로 집 한채 가져야 한다거나 코치도 집 한채 타야 하며 자기도 고향에 돌아가면 어떤 상금이 있을지 또 곽영동한테 가면 그가 금괴를 주지 않을가 하는 생각은 안 좋습니다. 이러면 풍기가 나빠집니다. 결과적으로는 원래 좋은 일을 시작했다가 그 성질을 점점 변화시키는데 이런 변화는 이 사회총체적경쟁력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또 수요되는것은 제가 외국문학을 읽었을때 감촉이 아주 깊었는데 제가 우에서 말한 캉라더의 많은 소설에 영국의 바다를 쓴것입니다. 캉라더는 해양소설을 쓰고 배우의 생활을 썼는데 배우의 생활은 아주 규률적이라고 했습니다 배는 하나의 작은 천지이고 배우의 사람들은 아주 큰 향심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달이나 두달이상 항해하면서 망태기가 될수 있고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문학에서 바다에 대한 장면을 보면 이런것이 거의 없습니다. 외국문학에는 바다가 비교적 많습니다. 하마로부터 시작하여 <<오디쎄이>>까지 다 바다로 나갔습니다. 또 아주 많은 전설에서 보면 그 례로 신마더의 전설에서 그느 줄곧 서쪽으로 항해했습니다. 어디든지 관계하지 않고 바다로 가기만 했습니다. 물론 중국의 정화도 바다로 나갔지만 정화는 그후 우리 문화의 유기적조성부분이 되지 못하고 이미 파뭍힌 과거로 되였습니다. 우리 문화본신이 이렇습니다. 영국문학을 보면 여러분의 감촉은 더 깊을것입니다. 영국문학 <<로빈손 크르소>>에서 로빈손의 세계는 바다입니다. 그는 바다의 외딴섬에 갔습니다.
또 디포를 봅시다. 그에게 바다에 관한 소설이 아주 많은데 바로 이런 해양문화입니다 우리의 혈맥속에 해양문화인소를 어떻게 많아지게 할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 중국현재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바다는 비유에 불과한데 우리가 <신주7호>>를 하늘에 올려보냈습니다. 이런 정신은 마찬가지입니다. 태공에로 발전하고 바다에로 발전하려는 꿈이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이 있어도 마다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바다로 나가 실험을 하며 혼자서 범선을 몰고 지구 한바퀴를 돌수는 있습니다. 신문을 보면 늘 이런 소식을 알게 되는데 어느 외국의 한 기인이 그랬습니다. 또 영국의 한 녀성이 혼자서 범선을 몰고 어쨌다는가 하는 것들을 말입니다. 중국사람은 이런 일을 한적이 없습니다. 만약 중국사람이 이런 일을 하기 시작했다거나 많은 것을 계획하고 어떤 모험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아주 많은 활력과 무진장한 힘이 생기게 됩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13억인구가 합쳐서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가석하게도 우리는 지금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학생들이 어떤 모험적인 계획같은것이 아주 적습니다. 2년전에 북경의 몇몇 사무일군들이 신강에 갔는데 한 녀사가 불행하게 길에서 사망되였습니다. 후에 신문에서 사론을 발표하여 여러분에게 안전이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영국이나 미국, 불란서에서 해마다 대학생들이 이런 일에 죽는 일이 있는데 사론을 발표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런 민족의 힘을 우리는 따라배워야 합니다. 다만 나라에서 몇백만 혹은 몇천만을 투자하여 한 운동원을 3살때부터 훈련시켜 최후 금메달을 따게 하는것도 의의가 있지만 이 의의는 과감한 모험과는 차이가 아주 큽니다. 때문에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영국의 시 한수 읊어드리겠습니다. 제목은 <<해일>>입니다. 우리가 열이 날때가 있는데 그것을------리라리고 합니다. 지금 많은 열이 많은 친구가 있는데 음악을 좋아하고 작사악을 좋아한다든가 하는 친구들 말인데요. 영국의 30년대시인 쓴 시입니다. 이 발열친구가 사랑한 대상은 바다였습니다. 나는 꼭 바다로 나갈것이다. 더 나가서 외로운 바다로 외로운 하늘을 향하여 내가 요구하는것은 아주 높다란 배이고 계명성이 배길을 안내한다. 나의 키잡이는 빠작빠작 소리를 울리며 바람은 노래같은 소리를 내고 흰 돛은 펴서 펄펄 날린다. 해면에는 희읍스름한 안개가 덮히고 회색나는 아침은 서광을 맞는다. 이것이 제일절입니다. 그 다음은 이렇습니다. 또 어떠한가 줄달음치는 조수가 나를 부른다. 나는 바다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야성의 소리이고 역시 친절한 부름소리이다. 이 부름을 나는 듣지 않을수 없다. 내가 요구하는것은 바람 부는 날씨인데 바람이 있어야 돛을 올리고 전진할수 있으며 흰 그름도 날아옐수 있기때문이다. 배가 항행할때 파도가 이는데 물결이 운 날려가고 갈매기가 멀리서 울어댄다. 이런 시들은 영국에서 흔히 보게 되는것들입니다. 이 시는 아직도 긴데 다 읊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가 중국문학에는 없습니다. 저는 젊은 세대들이 외국문학을 읽을때 우리 중국문화에 이런 성분을 보태주어 그것이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크나큰 축복으로 될것을 희망합니다.
[인터넷길림신문] |
첫댓글 읽어볼만한 문장이네요. 중국 비평가들의 저력이 느껴집니다.
짬짬이 읽으렵니다. 늘 수고 많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