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 확인한 영어 독서 수업 도전기
고등학생이지만, 수업 시간에 배우는 영어 교과서의 기본 단어와 구문 내용을 소화하는 것도 벅차하는 학생들이 있다. 하물며 수업에 영어 독서를 적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입시 위주의 재미없고 단절적인 교과서 수업을 탈피하고 싶었다. 영어 수업을 통해 의사소통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 창의력, 협업 능력 같은 미래 핵심 역량을 키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경기도 영어 독서 교육 모임 자료에는 우리 학생들 수준에 맞는 도서 목록과 수업 사례가 없었고, 일반고에서도 수준이 좀 있거나 외고 수준의 학생들이 읽어낼 수 있는 책들뿐이었다. 시험 삼아 영어책 30권을 보여주니, 예상대로 어려워서 못 읽는다며 처음부터 손사래를 치거나 제목과 작가 이름 찾는 것도 버거워하는 학생이 꽤 많았다. 한 반에 영어 독서 경험이 있는 학생은 한두 명 정도였다.
영어 교사들과 함께 우리 학교 학생들 수준에 맞으면서도 토론 주제가 될 만한 정의적 요소가 들어 있는 영미권의 6~10세용 영어 동화책 300여 권을 준비하기로 했다. 신학기 영어 독서 수업을 위해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 수업을 디자인하며 평가 계획을 세웠다. 우선 내가 2학년 전 반을 맡아 일주일에 2시간씩 독서 수업만 진행하기로 했다.
STEP 1 모둠 수업 통해 영어책 읽기에 도전하다
1학기 성취 기준은 친숙한 주제에 관해 듣거나 읽고, 중심 내용을 요약하는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업 목표를 영어책과 친숙해지기로 정했다.
각자 독서록 열 권을 작성, 그중 한 권을 정해 미니 북을 만들어본 다음, 모둠별로 한 권을 정해 영어 독서 발표 프로젝트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수행평가는 독서 논술 20점으로 독서록 15점, 미니 북 만들기 5점으로 정했다. 발표 프로젝트는 학생부 교과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이하 세특)에 기록만 하기로 했다.
책 읽기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학생들은 그림만 보고 내용을 유추해 학습지를 작성하게 했고, 옆에 붙어 읽어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책 내용을 모르겠다며 여
기저기서 불러대는 통에 수업이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되곤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점차 수업에 적응해나갔고, 모둠 내에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니 나는 관찰할 수 있게 됐다. 학생들이 책을 읽는 동안 모둠별로 독서록에 쓰는 내용을 점검하기도 하고, 함께 얘기를 나눌 정도로 제법 여유로워졌다.
그러나 기록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포스트잇에 써보고, 엑셀 파일에 적어보기도 했지만 곧 시들해졌다. 협동학습연구소 선생님의 ‘모둠 평가판(Team Evaluating Sheet)’을 활용해보기로 했다. 평가판에 학생들 이름과 캐리커처를 그리게 하고, 날짜와 간략한 기록을 남겨두었다가 세특란에 옮겨 적었다. 평가판에 모둠원이 한눈에 보이니 최대한 고루 관찰해 기록하게 됐고, 내가 기록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좀더 적극적으로 서로 협력하며 참여했다.
STEP 2 학년별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했다면…
이제 산발적으로 읽은 동화책 열 권을 정리해 자기만의 언어로 창의성을 발휘, 이야기를 써보고 발표할 차례다. 미니 북 만들기는 각자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을 골라 한 면당 여덟 문장의 글과 한 장의 그림을 포함해 6면짜리 작은 책을 만드는 것이다. 수업이 진행되는 3시간 동안 만들도록 했는데, 영어를 싫어해 독서록을 반만 간신히 채우던 남학생도 이 시간에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구글에서 번역 문장을 베껴가며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번역기 쓰는 것도 허용했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정말 즐거워했다.
수행평가는 제시한 조건만 충족시키면 기준에 따라 점수를 줬다. 영어 작문의 정확성, 구성의 창의성, 심미성을 고려해 학생들과 함께 우수 작품을 선정, 수행 평가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 기획과 작품 관리도 학생들에게 맡겼고, 이 과정은 고스란히 세특란에 담았다.
영어 독서 발표 프로젝트는 일단 모둠별로 계획서와 성찰 일지를 제출하게 했다.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한 달 전부터 수업 시간 10분 정도 짬을 내어 회의 시간을 주었고, 나는 수시로 피드백을 해줬다. 학생들은 모둠별로 책을 골라 연극, PPT나 UCC 제작, 기타 연주, 즉석 토론 진행, 게임이나 퀴즈 진행등 정말 창의적인 방식으로 발표했다.
자연과학반 여학생 모둠은 ‘Cloudy with a Chance of Meatballs(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이라는 책을 기상예보 형식의 UCC로 제작했는데, 햄버거 초콜릿 라면 우유 팝콘 등이 2 km 상공에서 초당 10 m의 가속도로 떨어진다면 어느 정도의 충격을 받을지 계산하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다. 마침 물리 시간에 충격량을 배우는 중임을 알게 됐다. 학년별 교육과정 재구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이다.
STEP 3 토론 수업까지 확장하다
1학기를 마치며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평가하고, 2학기 수업 방향에 대한 의견을 모아봤다. 영어 독서 수업이 재미있고 유익해 계속 이어가자는 학생들이 많았고, 팝송 수업이나 스크린 영어 수업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물론 어휘 공부나 수능 문제 풀이를 하자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독서에 바탕을 둔 토론 수업을 통해 논리적 사고력을 넓히고, 서로 배려하며 경청하는 태도를 키워보자고 제안했다. 고맙게도 학생들은 따라와주었다. 비록 영어로 완벽하게 하는 토론 수업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생각을 읽고 깊이 관찰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경청하면서 나와 다른 생각을 이해하고 타인을 수용하는 자세를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학교에 와서 잠만 자는 남학생이 있었다. 나 역시 1학기 수업에서 이 아이를 깨우기가 무척 힘들었다. 놀랍게도 토론 수업을 하면서 좀 더 자주 깨어 있는 모습을 봤고, 한 번은 모두가 7분을 기다린 끝에 이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감격스럽게도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모습에 모든 반 친구들이 기립 박수를 쳐주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STEP 4 교실 너머로 이어진 영어 자신감
영어 토론을 통해 아이들의 성숙한 모습을 보면서 좀 더 자신감을 키워주고 싶어 플래시몹을 기획했다. 수업 시간에 팝송 ‘Stronger’를 배우고, 플래시몹 TF팀을 구성해 안무와 대형 짜기, 반별 연습 계획과 실행을 학생 자치에 맡겼다. 2학년 플래시몹 소문이 학교 안에 퍼지자 1학년도 동참하게 됐고, 결국 교감선생님의 권유로 수능 장도식에서 선배들 응원 행사로까지 확대됐다.
수능 장도식 전날 1·2학년 420명이 체육관에 모여 단 한 번 연습한 것이 전부였다. 학생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줬고, 2014년에 입학해 3년간 참혹하고 어려운 학교 상황에서 꿋꿋이 견뎌준 3학년 선배들을 위해 눈물 나도록 아름답고 멋지게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날 플래시몹 장면을 드론으로 촬영해 유튜브에 올려 아이들이 오래도록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했다.
영어 독서 수업을 근간으로 평가와 기록까지 일체화하니 학생들의 가능성과 성장을 관찰하며 기록할 수 있었다. 아직 미숙하지만 아이들에게 배움의 시간과 공간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