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소유
인종차별적 환상소유는 나와 같은 유럽의 백인들이 사실상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자유와 개인의 지위를 보장하는 공공 사회기반시설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지중해에서 익사하고 망명기관에 사물처럼 수용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규정되지 않은 이동성을 범했다. 그리고 이동성이 보장되는 곳에서는 가용성이 감소하지 않는다. 이민자들은 잠재적인 침입자로 발견될 것이다. 물론 여긴 너희 나라가 아니지. 이민자들의 모든 삶의 표현은 정주자들의 환상소유를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동시에 흑인인 독일인, 이슬람이거나 혹은 스스로 이슬람인이라고 생각하는 독일인,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교육시설에서, 그리고 경찰로부터 백인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인종차별을 겪은 모든 사람들이 증언할 수 있고 많은 백인 독일인들이 늘 세상에 이야기하고자 했던 이 ‘다름’은 단순한 경시나 서열화가 아니다. 어떤 한 인간을 인종차별주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를 어느 날 쓸모 있는 재산이 될 잠재적인 사물 또는 도둑으로 보는 것이다. 이 사람이 체류하는 곳, 그가 행하며 요구하는 것은 갑자기 상대 백인들의 관심사로 돌변한다. 백인의 환상소유는 이렇게 드러난다. (...)
폭력은 정당하게 제재되었을 때 계속해서 발생한다. 맹목적이고 즉흥적인 무절제로 발생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명백하게 가부장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 행위의 본보기를 따른다. 독일에서는 사흘에 한 명 꼴로 여성이 자신의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게 살해당하고 있다. 2017년에는 보호기관을 찾은 난민들은 칼과 막대기, 총기 등으로 하루 평균 326회 공격을 당했고, 망치로 얼굴을 가격당한 사례도 있었다. (...)
77억 인구가 사는 세계에서 우리가 홀로 남겨진 감정을 느껴야만 한다니 뭔가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소수의 사람들 속에서 답답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고독할 수 있다. “인간이 타락하고, 예속되고, 버려지고, 경멸받는 존재가 되는 모든 조건을 철폐하는 것”이라는 우리 임무에 대한 마르크스의 공식에서, 고독은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신호 중 하나로 나타난다. (...)
지구온난화는 사물지배 재앙의 생태학적 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파시즘과 같은 적극적인 사물지배 정책이 아닌 자원을 활용한 소극적인 사물지배 정책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지구, 동식물, 대기를 죽은 물질로 다뤄 왔기 때문에 많은 종들, 심지어 인간도 이제 죽을 운명에 처한 이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이 피해의 책임이 있다. (38~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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