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뜻을 따라(갈 1:1-5)
할렐루야! 한 해의 반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우리 효성선교교회와 가정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참 더운 날씨이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시원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1월 1일부터 시작한 에베소서 강해를 지난 주일을 마지막으로 마쳤습니다. 오늘부터는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요즈음 부쩍 이단의 세력들이 활기차게 활동하는 것을 보고,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의 책”이라고 하면, 로마서인데, 로마서에 견줄만한 책이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에 비하면 짧은 편지이지만, 이 구절 구절에 내포된 깊은 뜻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주옥과 같은 것들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경 강해자인 존 스토트는 그 강해서 제목을 「Only One Way」(오직 한 길)이라 붙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의 길이지, 여러 길이 아닌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성경 중에서 한 책을 택해서, 계속 강해를 하는 것은, 말씀을 준비하는 사람이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계속 강해하다 보면, 우리가 보통 무시해 버리기 쉬운 성경 구절을, 더구나 좀 까다로운 구절에 ,주의를 집중시켜,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까? 엄격히 말해서, 기독교가 아닌 이단들도, 성경을 가지고, 자기 주관대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을 계속 강해하게 되면, 자기 주관대로, 여기서 한 구절, 저기서 한 구절 따다가, 자기 사상을 변증하는 따위의 오류는 범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가 전하고 싶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바르게 전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성경 전체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를 가지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구절, 때로는 글자 하나하나를 해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씀 전체에 내포되어 있는 사상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비록 오래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우리의 상황에 놀랍게도, 적절한 말씀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래된 편지이지만, 그 글에는 언제나 새로움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모두 잡아다가 처벌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과 위임장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에 가던 사울,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삶의 방향이 180도 변화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가던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예수를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 갇힐 때까지, 약 30년 동안의 기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로마 제국을 두루 다녔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유명한 전도 여행 중에, 그는 복음을 전하며, 갈라디아, 소아시아 그리고 북부 헬라인 마게도니아와 남부 헬라인 아가야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 저기 다니며, 교회만 세운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설립한 교회를 방문하여, 그때에 받은 인상과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꼭 편지를 써 보내서, 교회를 감독하며, 지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러한 편지 가운데 하나인 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최초의 편지라고,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참고 서적을 보면, 사도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행 때, 선교했던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아, 루스드라, 더베, 이 네 도시를 가리킨 것으로 봅니다. 사도행전 13-14장을 읽어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도시마다, 교회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3절에 보면,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렇게 불려지는 보편적인 교회가, 지방 교회들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종파가 아니라, 회중으로 나뉘어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새영어성경 번역에 보면 “갈라디아에 있는 그리스도의 회중들에게”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미 갈라디아 사람에게 보낸 편지의 처음 부분에서, 바울은 항상 되풀이하는 두 가지 주제, 그러니까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갈라디아에 있는 몇몇 도시들을 방문한 후, 그가 창설한 교회들은, 거짓 선생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 거짓 선생들은, 바울을 비난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와 복음에 대하여,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주장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구원을 얻는 데는,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서에서, 바울이 주장한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반대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5:5절을 보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바울이 전한 복음에 반기를 들고, 나아가서는,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도 흔들어 놓으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라는 작자가 누군가?”라고 하면서, 교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무엇입니까?
“바울이란 사람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의 하나가 아님에 틀림이 없다. 또한 우리가 알기로도, 어느 누구에게 사도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적이 없어. 바울이란 자는, 자칭 사도라 하는 사기꾼일 따름이야.”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날카로운 공격의 화살을 직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첫 머리에 바울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은혜의 복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아멘.
거짓 선생들이, 그를 적대하여, 그들의 말한 바로 그 칭호를 바울 스스로 주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이 말은 이미 명백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그 말이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도’는 특별한 신분으로서, 자신보다 높은 분으로부터 주어진 임무와 권위를 향유하는 전달자를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특별한 대표자나 파송자에 대하여, 사용한 칭호입니다. 보다 광범위한 제자의 무리로부터, 주님은 열두 사람을 택해서, 사도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들을 전도하도록 내보냈습니다.
마가복음 3:14-15절에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선택되고 부르심을 받고 임명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도록 자격이 부여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실하게 그 사도직을 감당했습니다.
중국 송나라에 사마광(司馬光)이란 유학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유안세(劉安世)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안세란 제자가 스승 사마광에게 “수만 개의 한문자 중에서 우리의 좌우명이 될 수 있는 글자 하나만 골라 주십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생활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글자가 있다면 무슨 글자입니까?”라는 물음입니다. 이때에 사마광은 ‘誠’이라는 글자, 즉 ‘정성 성’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그러면 그 성이란 글자는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간결하고 명쾌하게 “不妄語(불망어)”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성이라는 글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실이 무엇입니까?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허망한 말, 허망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성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수행할 때에 절대로 속임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성실히 자기의 맡은 사도직을 감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점의 거짓도 없었습니다. 본대로 증거했고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사람 앞에 진리를 선포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예수님을 통해서 배웠다면 거짓된 욕망과 부패한 옛사람을 버리고 마음과 정신이 새롭게 된 새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말하기를 “너희들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에게 진실로 말하라”고 말합니다.(엡 4:20-25)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너희가 진정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게 아니었다면 뭐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았겠습니까? 바울의 가슴속에는 사도의 가르침을 절대 기준으로 삼고 오직 그 가르침만을 따라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꿈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그가 사도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를 세워야, 진정한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가야, 진정한 성도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를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는 것이기에, 교회와 성도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아멘.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그는 서슴지 않고, 인사말에서 자기 자신을 먼저 말하고,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하지 않는 칭호를 자기 자신에게 사용했습니다.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은 “형제”이라고 불렀고, 자기 자신은 “사도”라고 칭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성격에 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실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절에는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라고 해서,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실을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 자신의 사도직이 결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진술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자신의 사도됨을 말했습니다. 가령 유대의 공의회인 산헤드린이, 그들의 공적 대표들을 임명하는 것과 같이, 그가 열두 제자나 예루살렘교회나 안디옥교회 같은 인간의 집단에 의하여, 사도로 임명된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도, 사도의 임명에 관여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사도직 임명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간적이 아니고, 전적으로 신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바울을 사도로 택하시고,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직분에 바울을 임명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사명을 주신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셨고,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실을, 자신의 사도직에 있어서 필수 조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2절에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1)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8-9절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왜 이와 같이 그의 사도직을 변호하였습니까? 그는 단지 인간적인 허영으로 우쭐해진 허풍선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서 도전했기 때문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가 전했던 복음이 위험한 궁지에 처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에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아니었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그의 복음을 분명히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도 바울이 변호하려고 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고수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사도 바울이 쓴 모든 편지 서두에는, 이와 같은 인사가 있습니다. 같은 은혜와 평강의 메시지를,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이고, 의미 없는 말이 아닙니다. 평범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은혜와 평강”이란 말에는, 깊은 신학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란 말은, 바울의 구원의 복음을 요약한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헌신짝 버리듯이 던져버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엄청난 축복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축복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하며 돌아섰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6:24-2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셨고,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항상 은혜와 평강이 흘러나야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말하는 것인데,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선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며 자신의 죄를 씻어내는 역사가 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모든 분쟁과 갈등이 없어져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샬롬”이라는 인사는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분쟁이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15세기 이태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2세 때, 밀라노의 로드비치 공이 와서 예수의 최후의 만찬 모습을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혼신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를 중심에 놓고 제자들을 좌우로 여섯 사람 씩 배열했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친구에게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가 그림을 보더니 아주 감탄했습니다. 제자들을 예수님 좌우로 잘 배치했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예수님 손에 든 은잔이 가장 아름답다고 칭찬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빈치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붓으로 그림을 X자로 지워버렸습니다. 이에 놀란 친구가 “왜 아깝게 그림을 망쳐놓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이 다빈치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중심이 은잔이 되어버렸으니 실패작이다,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고 은잔이 중심이 되면 불행해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재물의 은잔, 명예의 은잔, 욕심의 은잔을 바라봅니다. 그 은잔에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고 몸부림칩니다. 결국 예수님은 엑스트러가 되고 내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떠난 자의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와 평강이 어디서 옵니까? 성부와 성자로부터 함께 흘러나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위대한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며, 그 사건에서 그의 평화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아멘.
사도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선언하셨는데, 여기 4절에서는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 몸을 드림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과시나 영웅주의의 한 예가 아니라, 죄에 대한 희생이었습니다.
로마서 5:6-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약에서 속죄제와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속죄제며, 오직 그 제사에 의해서만,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사하여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진리는, 여기에서 설명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편지 후반 3:1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ㅂ)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는 실제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범죄로 말미암아,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주님이 친히 짊어지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해석하기를 “이 말씀은 결국 자기 의에 지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내린 뇌성벽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음을 보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해야 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교도소의 교도관으로 있는 박효진 장로님이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라는 책을 읽다보면 ‘구로동에서 발생했던 끔찍한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청년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예수의 청년 태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드디어 사형집행 날이 되어 소장은 그에게 “법무부 장관님의 명령에 따라 오늘 사형을 집행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태호 청년은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여 인사하면서 밝은 표정으로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고운 얼굴로 사형을 당할 만한 살기어린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미리 임종예배를 드린 후 마지막으로 눈물을 그렁그렁 맺힌 상태로 한 마디 유언을 남겼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범죄세계에 뛰어들어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오다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버리겠다고 마음먹었는데..서울 구치소에 와서 사형이 확정되고 난 후 저는 너무나 소중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때부터 저는 남몰래 참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손에 억울하게 죽은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왔는데, 이제 하늘나라에 가면 그분들의 유족을 위해서도 기도하겠습니다.”
“저의 마지막 유언은 우리 서울 구치소에 있는 모든 형제와 자매들이 다 제가 만난 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한번 저와 꼭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살인자 태호가 아니라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여러분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집행관이 그의 얼굴에 흰색 두건을 덮었고, 밧줄이 목에 감기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고 찬양했습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세대의 우리를 구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J. B. 라이트훗 감독은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구한다, 회복한다”라는 동사가 이 서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일종의 회복이며 예속 상태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기독교는 실제로 구원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4절에 보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패하여 악의 노예로 살아가는 죄인을 건집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건졌습니다. 주님은 소망 없고 좋은 관계를 맺을 능력도 없는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여기서 ‘건지다’는 말은 장소나 위치가 바뀐 것이 아니라, 어떤 권세에서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다시 살려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 감옥에 갇힌 요셉을 건졌습니다. 바로의 통치에서 요셉을 건져 그를 통해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건졌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건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이 갇힌 감옥에서 건졌습니다. 우리는 악한 권세와 타락한 문화에 맞서보려고 하다가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단의 권세로부터 건져 악한 권세에 빠진 이들을 건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주님의 몸을 십자가에 던지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만을 건져내기 위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 힘들게 살고 있는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을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합니까? 곳곳에는 무신론이 창궐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나마 갖고 있던 작은 신앙마저도 팔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1900년에 강화읍 교회에 김씨라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자식 없이 혼자 살았지만, 부자인 터라 복섬이란 여종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팔십이 넘어 교회에 나가면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마태복음 18:18절을 읽다가 갑자기 눈이 멈췄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이 가슴에 팍 박혔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였습니다. 자기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복섬이를 풀어주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는 주일 오후에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복섬이를 방안으로 불어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읽다가 우리는 한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있는 한 형제인데, 내가 어찌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겠소?” 또 “내가 복섬이를 몸종으로 부리는 것이 땅에서 매는 것인즉, 그렇게 하고도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겠는가?” 하면서, 김씨 부인은 문갑에서 복섬이의 종 문서를 꺼내고는,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복섬아, 지금 이후 너는 내 몸 종이 아니다. 너는 이제 자유 몸이 되었으니 내 집을 나가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란 복섬이가 부인에게 매달렸습니다.
“마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제발 나가라고 하지만 말아 주세요.” 이
말은 들은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복섬이를 양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유를 누린 주인이 종을 자신의 딸로 삼은 것입니다. 종에서 양녀가 된 복섬이는 정성을 다해 김씨 부인을 섬겼고, 김씨 부인은 늘그막에 얻은 딸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도 예수 안에서 자유 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으셨습니다.
신앙의 상징은 열정입니다. 열심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너무나도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열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슨 일에든지 열정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에도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에도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열정적 사랑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살아가는 기쁨이 있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가며 생활의 보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열정을 다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고야 마는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5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자유를 주셨습니다. 아직도 자신의 얄팍한 생각과 눈에 보이는 권세에 의지하여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불평과 자기연민과 분노와 뜬소문에서 자유롭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악한 세대에서 건져 자유를 주실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자유의 선물로 받은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