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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
김미경 선배(서울연합회) 사도행전에서 보는 이름들과 소식들에 웃고, 울며 격려하고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
기청과 사도행전, 그리고 80년대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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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렇듯이, 나도 사춘기 시절엔 절제되고 틀에 박힌 학창시절을 보내며 20살만 되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꿈 많은 나의 20살 봄은 살벌했고, 꽃들이 만발해야할 5월을 우리는 최루탄 냄새와 피비린내를 맡으며 보내야 했다.
정치가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던 시절... 운동은 축구 배구 야구 마라톤 등 만 있는 줄 알던 나는 1980년 5월 17일 종로 대규모 집회를 계기로 삶과 생각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교회 선배의 부탁으로 정장을 하고 나간 5월의 종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고, 얌전하고 착실하게 생긴 나의 핸드백은 검문 한번 당하지 않고 내용도 모르는 종이뭉치를 넣고 종로를 가로 질렀다.
집회 막바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가는 검은 가죽잠바에 검은 가죽장갑을 낀 40대의 덩치들이 깡패가 아닌 형사들이라는 걸 안 것은 인파에 밀려 종로서적 2층으로 피신했을 때 밖으로 보이는 무서운 광경들을 보며 술렁대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였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모든 광경이 대한민국의 모습이며 나의 아름다운 20살의
5월이라는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눈물과 짐승처럼 끌려가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내 무능함에 대한 안타까움과 숨이 멎을 듯 두근대며 가슴에 강하게 느껴지던 통증을 28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어진 5월의 광주 항쟁은 우리의 젊음을 송두리째 내놓기를 요구했다.
들리는 소식마다 모든 이의 피를 끓게 했고, 부끄러움이 뭔지 모르는 죽음의 권세들은 사람들에게 알고 있는 것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잊으라고, 귀도 눈도 막고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음이라는 응징을 받게 된다고 협박했고, 많은 이들이 그 협박과 거짓에 타협하고 굴복하여 글로 말로 그들을 옹호했고, 눈 감고 귀 닫고 거짓 현실에 적응하며 열심히 살아갔다.
그 기억은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때론 부끄러움으로 때론 자책으로 그리고 때로는 슬픔으로 가슴에서 새록새록 되살아나며, 매년 5월만 되면 꽃내음과 더불어 붉은 5월의 상처가 나를 숙연하게 한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풀리지 않는 사회의 모순과 왜??라는 의문을 갖고 하나님은 과연 어디에 계신가... 하는 신앙과 현실사이에서 갈등했다.
당시 청년부 회장이던 이청산 목사의 권유로 기청연합회라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처음 참석한 회의에서 나는 내의도와 상관없이 서울연합회 회계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다.
호기심과 어쩌면 내가 느낀 모든 의문의 답을 얻을 수도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며 기청 활동을 하게 되었다.
서슬퍼런 80년대 초반, 말조차 맘대로 할 수 없던 그 시절,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나를 밀고하는 적이되는 사회 분위기에 나 같은 평범한 친구가 기청 운동을 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고,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도 내가 서대문의 한 교회로 성경공부를 다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속여 가며 기청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는 너무 젊었고, 내 젊음에 비해 사회는 너무 혼탁했고, 혼란스러웠고, 불신과 분쟁이 넘쳐났다.
기도를 할 때 마다 민중속의 예수님은 소리치셨고, 성경을 볼 때 마다 상처투성이 예수님은 내게 물으셨다. -정의가 무엇이냐???-
그 물음을 못 들은 척 하기에는 80년의 5월은 너무 잔인했고, 슬펐고,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했으며, 그 피의 댓가로 주님은 우리의 젊음을 원하셨던 것 같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온몸의 피를 흘리신 그대로...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뜻대로 우리에게 정의를 외치라고 명령하신 것 같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와 소식을 접할 수도 없던 그 시절 지방상황이나 벗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매체가 불확실 할 때 기청에서는 우리의 상황을 모두에게 알릴 수 있는 소식지 발간 이야기가 나왔고, 83년 아직은 언론도 사회도 자유롭지 못한 암울한 분위기에서 사도행전이 탄생되었다.
당시는 死徒행전인지 使徒행전인지 구분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글들과 말들이 감시당하고 문제되었으며 무언가 꼬투리만 잡히면 엮어서 잡아가던 시절 이었다.
선배들의 기치는 대단 했고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각오로 지면을 통해 시대를 비판했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실을 알리기에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때론 2달에 한번, 때론 매월, 정말 전할 소식이 많을 때는 매주, 시간과 경제적으로 힘들 때에는 발행을 위해 모금을 하기도 하며 노동자, 학생, 재야인사, 종교인등... 어느 곳의 무슨 사실이든 억압의 현장에 있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밤,낮 없이 고군분투 하였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보는 이름들과 소식들에 웃고 울며 격려하고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나오지 않으면 누가 문제가 되어 잡혀갔나... 혹여 경제적 어려움으로 발행이 중단 된 것은 아닐까...염려하고 다시 사도행전을 받아들게 되면 아하...하며 안심하곤 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표지의 므네므네드겔브라신(다니엘서5:1~30)이라는 코너를 통해 당시 우리의 가슴에 있던 울분이나 꼭하고 싶던 말들을 쏟아낸 걸 보면 선배들의 용기가 다시금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또한, 사도행전이라는 지면을 통해 세상을 향해 글로 소리치던 모든 분들의 높은 뜻이 불의에 소리칠 수 있는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런 생각도 해본다.
지금의 정치가들이 그 뜻을 안다면 읍소하고 반성할 계기가 되지 않을까...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위정자가 나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80년대 후반 결혼과 더불어 기청 활동을 잠시 접었을 때였다.
어느 날 불현듯 배달된 사도행전에서 낯익은 이름들과 소식들을 보며 반가움과 모두가 잘 지내는구나 하는 안도감에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을 잘 만나지 못하고 지금처럼 동지회가 구성되기 전에 사도행전이란 지면을 통해 예전의 동지나 선배들의 소식을 보고 느끼는 회환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처럼 결혼으로 인해 기청과 연이 끊어진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지면을 통해 예전의 동지들의 소식을 접하던 어느 때 서울동지회 구성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서울동지회 2대 회장을 맡으며 보고 싶던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 즈음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이름들이 낯설어지고 접하는 소식들이 젊어지면서 나는 우리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후배들의 시대가 시작되는 걸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후배들이 힘들어 하면서 버거워 하면서도 기청을 이끌어 가는 모습들을 대견하게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지켜보는 대 선배의 나이가 되어있다.
앞으로 후배들이 기청을 끌고 나가는데 지금보다 더 힘든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을 것이다.
사회적 상황도 호의적이지 않고, 기장내의 입지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며 경제적인 면도 예전보다 훨씬 열악할 수 있다.
그 현실에 후배들이 강하고 담대하게 기청의 깃발을 들고 앞서 나갔으면 하는 바램 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이 100호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200호, 300호의 역사를 계속 이어 갔으면 하는 생각과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진실을 알리는 마지막 보고가 되었으면 한다.
이 시대의 힘든 상황에도 일선에서 수고하는 후배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현실의 열악함에 무너지지 말고 더 나은 기청의 미래에 일조 한다는 생각으로 지치지 않기를 항상 기도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보다 많은 선,후배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면 하며 그 만남을 통해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합일점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더불어, 사도행전의 올바른 뜻을 이어가기 위해 정말 사도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기청 선,후배가 되었으면 한다.
<기청 선후배 어울림의 장에 함께하신 김미경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