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문득 내게로 온다 '블로그에서 퍼옵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라는 시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 것은, 몇 년 전 학교 화장실에서였다. 전국의 화장실 문마다 붙여 놓은 좋은 시와 좋은 글들, 원초적 배설을 편안히 하고 있는 내 눈 높이에 그 날 이 시가 있었다.
첫 느낌은, 짧지만 임팩트하네, 였다.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문둥이라, 그 절절함이 가슴에 전해져 오는 듯 했다. 문둥이의 한과 설움을 정말 잘 형상화하였다 싶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문둥이를 노래했으되 문둥이는 아니군.’
‘애기 하나 먹고’,
문둥이들이 자신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린아이의 간을 빼먹는다는 속설을 시인은 작품에 차용했다. 이 표현으로 인해 이 시는 더욱 미학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문둥이가 실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쓴다면 이렇게 표현할까, 한센병 환자들은 이 시를 좋아할까 싶었다. 아이를 잡아먹는다느니, 전염이 된다느니, 그래서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며 평생 숨어 지내야 하는 그들이 담담하게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니었다.
서정주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큰 산맥처럼 그 존재감이 우뚝 서 있는 시인이다. 오죽하면 시 잘 쓰는 이에게 그의 호를 딴 ‘미당문학상’을 줄까? 그러함에도 나는 그의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일제 시대 때 친일행위를 했다는 평생의 꼬리표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에 나타나는 관념적 성향 때문이다. 문둥이의 한과 설움에 대한 표현이 돋보이되, 그 자신이 문둥이는 아닌 그 간격을, 시인은 자신의 관념으로 채우고 있다.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세련되게 표현했다 할지라도 문둥이에 관한 한, 그는 관념적이다.
한하운이라는 시인이 있다. 부잣집 장남으로 태어나 부러울 것이 없는 미래가 보장되었을 터였지만, 10대에 발병한 나병으로 평생을 문둥이로 살았다. 유랑생활과 투병생활을 거치며 50대에 삶을 마감한 그 한과 설움을 시로 토해 낸 시인이다.
나 / 한하운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을 두고 나눠도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이올시다. 벌이올시다
미학적 표현이나 시적 세련미는 미당에 비해 처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둥이에 관한 한, 나는 서정주의 시보다 한하운의 시가 더 좋다. 진실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관념이 끼어들 여유가 없다. 질박한 표현 너머로 온몸으로 부딪쳐 살았을 그 서러운 일생 전체가 전해져 올 뿐이다.
교회에 오지 않았으면 나는 옳은 말 많이 하며 살았을 것 같다. 있어 보이는 말, 심오한 말을 하며 그 말이 나인양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관계 속에서 검증되지 않고 남을 살리는 데도 무익한 많은 말들을 늘어놓으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소박해도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작으나 진실한 말을 하는 이 삶이 만족스럽다. 더 이상 존재와 표현 사이의 그 간격을 나의 관념으로 채울 필요가 없다.
내가 만난 하나님이 헬라인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 감사하다. 제한된 시공간 속에서, 구체적인 인간사 현장 속에서 매일매일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만나는 이 삶이, 나는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