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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가 만난 그리스도 – 박성일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사실적 설화(a true myth)라는 거야. 우리에게 닥치는 효과는 다른 설화들과 비슷할 수 있어. 하지만 거대한 하나의 차이가 있는데, 실제로 역사 속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거지. 그러므로 내가 다른 설화를 대하는 것과 동일하게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설화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지. 여기서 한 가지 마음에 둘 것이 있다면, 다른 설화들은 인간의 설화에 불과하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설화라는 거지. 즉 이교도의 설화는 하나님이 그 시인들의 상상력을 통해 마음에 그려진 이미지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그림자를 보여 주려고 하신 거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실재적인 것들(real things)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자신을 표현해 주신 것이라는 뜻이야.
*자, 이제 복음에 대한 이야기로 한 단계 더 들어가 보자. 설화가 일반적 사고를 뛰어넘는다면, 성육신 사건은 설화마저도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사건은 설화적 신비를 지녔으며, 동시에 역사속 사실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설화가 사실화(fact)되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고대의 죽임당하는 신에 대한 설화가 지속적으로 설화적 신비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전설과 상상이라는 위의 영역에서 내려와 역사의 땅 위에 상륙한 것이다.
루이스는 성육신이라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의심 없이 믿었다. 복음서가 증거하는 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현실 속으로 들어온 실제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스도 사건은 유대 나라가 로마 제국에게 점령당한 시대, 아구스도가 그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일정한 날짜와 일정한 장소에 순서대로 나열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의 전개 가운데 등장해 그 후로 또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이끌어 낸 거대한 사건이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모르는 고대 설화에 등장하는 볼더(Balder)나 오시리스(Osiris)를 설화의 영역에 그대로 둔 채, 그리스도는 역사의 현장으로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로마인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있던 그 역사적 현장에서 죽임당하셨고, 또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러나 사실화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설화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인정해야 하며, 동시에 그 사건의 설화적 특질을 다른 설화들에 대한 것과 같이 상상력의 두 팔을 벌려 맞아들여야 한다.
루이스가 강조한 것은 반드시 이 두 가지가 다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후자에 대한 경험이 영적으로 매우 유익하다는 것, 아니 필수적이라고 루이스는 강조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사실적으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 사건의 실재를 인식적으로나 설명적으로만 알아서 그리스도 사건의 신비적 의미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라고 재차 확인했다.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설화적 신비의 차원에서 경험하며, 그것으로부터 생명의 양분을 공급받는 것을 의미한다. 혹시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사실로 인정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적 용어와 예식과 성례, 기독교의 이야기 등을 통해 설화적 신비를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명을 공급해 주는 어떤 실재를 애절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 본질의 내적 갈망 때문이다.
동정녀가 잉태해 아기를 낳았을 때 위대한 설화가 사실화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너무나 딱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실화된 그것이 바로 설화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그 설화적 특질을 그대로 지닌 채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높고 높은 분이시지, 절대로 낮은 분이 아니시다. 그리스도는 볼더보다 위대한 분이시지 더 작은 분이 아니시다.
루이스는 우리의 신학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설화적 광채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교도의 신앙 속에 등장하는 구원자들의 모습에서 혹시 그리스도와 흡사한 부분이 발견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그러한 흡사함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선한 꿈과 기대를 실현시키신 궁극적인 성취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원형(original)이시다. 다른 모든 흡사한 것은 그분의 그림자이며, 반사체이고, 복사본(copy)이다.
루이스는 하나님을 '설화 창작자'(mythopoeic)라고 불렀다. 모든 좋은 설화는 창조주의 마음을 비춰 낸 것이라고 믿었다. 만일 하나님이 이처럼 설화를 창작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을 바라는 우리는 당연히 설화를 느낄 줄 아는(mythopathic)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진정한 하늘과 땅의 결혼이다[온전한 설화와 온전한 사실(Perfect Myth and Perfect Fact)].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순종뿐 아니라, 놀람과 희열을 요구하신다. 우리 앞에 온전한 설화와 온전한 사실로 다가오신 그분 앞에 우리는 학자, 도덕가, 철학자가 될 뿐 아니라 아울러 무지한 자, 어린아이, 그리고 시인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루이스는 기독교는 반드시 기적이 전제되어야 하는 종교
라고 강조했다. 루이스의 판단에 의하면, 불교나 심지어는 이슬람교도 그 중심에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만 그들의 종교적 주장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반면, 기독교는 기적을 동반하는 초자연주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신앙 체계다.
기독교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연적 기적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중심에 하나의 위대한 기적이 있다. 그 기적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 창조되시지 않은 영원한 존재가 지극히 낮아지심으로 오신 사건이다. 그분은 자신이 창조한 우주, 그 자연 속으로 인성(human nature)을 지니고 들어오셨다. 그리고 죽기까지 낮아지신 후 다시 높아지셨고, 자신의 높아지심과 함께 죄로 망가져 버린 자연도 함께 높아짐으로 이끄셨다. 이것을 루이스는 총체적으로 '성육신(The Incarnation)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그리스도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루이스의 생각은 성육신 사건의 문자적 의미가 기독교에서 제해진다면 그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일 수 없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기독교의 모든 기적 중에 성육신 사건은 중심이 되는 기적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모든 기적은 성육신 기적을 예비하거나, 드러내거 나, 또는 이 기적을 근거해서 파생된 2차적 기적들이다. 모든 기적의 적합성 또는 신빙성은 이 위대한 기적과의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건을 부인하면서 다른 기적을 논하는 것은 덧없는 일이다.
*첫 번째로,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의 결과는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축소하고 그 내용만을 강조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 또는 용기와 단호함 등을 좋은 본으로 생각하고 따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여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매료된다. 특히 산상수훈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윤리 사상, 하나님 의존적 사고 등에 초점을 둔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유대교 랍비 전통에 서 계신 분이고, 그 누구보다 위대한 선생이시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종말적 선포에 관심을 두고, 그분이 어떻게 종말적 공동체를 이 세상에 남기셨는지, 그리고 그 성공과 실패 여부에 논쟁을 집중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어떤 방향이든지 그리스도 사건을 축소시키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복음서가 증거하는 그리스도는 총체적 관점에서 봐야 하며, 독자가 자신의 필요나 관심에 따라 선택할 자유가 없다. 다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취사선택하지 않고 종합해 그 결과를 조화롭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역사적 기독교가 믿고 증거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의 결과, 무엇보다도 그분의 자기 선언을 모두 합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곧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이다.
만약 예수가 단순히 선한 선생 또는 종말론적 선지자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의 자기 주장은 과대망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정신병자이거나, 최악의 경우 의도적으로 어마어마한 거짓을 일삼는 악한 이단 교주다. 만일 그렇다면 스케일상으로 봤을 때 그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예수님의 깊고 명쾌하고 지혜로운 도덕적 가르침과 신학적 통찰력, 그분이 보여 주신 가장 위대한 인간성(진, 선, 미), 그리고 그분의 자기 선언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자아 이해, 이 모든것의 간극을 좁히고 이질감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이 스스로 주장하신 대로 참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육신 사건이 놀랍고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 사건을 근거로 그동안 자신이 경험하고 삶 자체로 느끼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이해를 더 깊고 넓게 확장시킬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반겨야만 하는 현실 이해의 열쇠다. 우리가 음미해야 할 루이스의 명언이 있다.
"태양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태양 그 자체를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태양 빛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사건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더욱이 그리스도 사건이 다른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조명해 주는데 있다는 의미다.
*성육신 사건이 조명해 주는 것은 첫째로, 초자연이 자연 속으로 들어오는 원리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셨는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육신 교리가 주장하는 내용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다'라는 것이다.
스스로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는 영이신 하나님이 자연적 생물체인 인간과 한 인격체를 이루셨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은 하나님과 자연의 공존과 결합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결합이 영원히 깨어지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인간 되심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온전한 인간이시며,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만일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초자연과 자연이 함께하는 경우를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면, 성육신 교리가 상당히 추상적이고 이질적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인 자신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현실이 있다. 모든 인간은 자연 이상의 것, 즉 초자연을 내포한 존재다. 인간의 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인간 이성의 근거가 단순히 자연에서 발생했다고 봐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것은 루이스가 ⌜기적⌟에서 강조한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루이스가 이해하는 대로, 인간의 이성 자체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자연은 그 자체를 초월하는 의도나 목적 없이, 그저 아무런 질서 없이 떠도는 물질로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자연으로 형성된 이성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이성은 무질서의 결과물일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자가 자기 이성의 논리를 사용해 "모든 것은 무질서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적이다.
루이스가 본 인간의 이성은 자연적 활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연 이상의 현실이 육체라는 자연과 결합되어 있다. 이 결합은 아주 구체적이고 견고해서 결합된 존재를 단수인 '나'로 부른다. 우리는 각각 이성을 지닌 생물체로서의 경험을 매일 하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초자연과 자연의 복합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쉽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인간 자신의 모습을 통해 성육신을 온전히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한 인간 안에 공존하는 이성과 육체의 관계 정도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성육신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적어도 인간 안에 드러난 초자연과 자연의 공존 또는 결합을 경험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성육신 사건이 아주 생소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더 높은 힘을 지닌 것은 더 낮은 자리로 내려올 수 있다'는 중요한 원리를 통해 성육신과 인간의 구조를 연결해서 설명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오셨다. 한 인간 안에서 인간의 영은 자연적 생물체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의 이성적 사고는 우리의 감각과 감정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어른의 마음은 아이가 느끼는 감정에 동조할 수 있다. 인간은 그가 아끼는 애완동물의 느낌을 동감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입체와 평면의 관계, 생물과 미생물의 관계, 철학자와 애완동물의 관계와 같다. 위가 아래의 것을 수용할 수는 있지만, 아래가 위의 것을 담아 넣을 수는 없다. 이 세상 무엇이든지 위의 것은 아래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위의 것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소설에서 잃어버렸던 문서들, 즉 이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결정적인 단서는 무엇인가? 성육신은 곧 낮아짐과 다시 높아짐의 이야기다. 낮아져서 죽음에까지 내려갔다가 부활의 반전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서 루이스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그가 이해하는 부활은 단순히 죽은 몸에 생명이 돌아오는 그 순간만을 말하지 않는다. 부활은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신 사건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전부를 의미한다. 부활의 새벽에 일어난 사건은 낮아지고 낮아지셨던 그분이 다시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인생 가운데 존재하는 거대한 전환점이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십자가 사건보다 훨씬 이전, 그분의 잉태되심에서부터 추적할 수 있다. 탄생 이전 여인의 배 속에서 미생물로 존재하시던 시기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 출발점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십자가 사건 이후 무덤 속에 놓인 무생물(시체)이 되시기까지 지극히 낮아지셨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생명체의 흔적조차 없어진 한 줌의 흙으로, 생명과는 거리가 먼 물체로 변하셨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왜 이렇게 낮아지셔야만 했는가? …
그리스도가 이처럼 세상 속으로, 그 바닥까지 내려와서 건져 내신 것은 바로 인간의 진실된 인간성(true humanity)이다. 라브리공동체의 창시자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이를 가리켜 '인간의 인간다움'(mannishness of man)이라고 불렀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 본연의 위대한 모습이다.
그리고 루이스가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성 회복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성과 함께 끌어올리신 것은 모든 자연 세계다. 결국 인간 구원은 자연 구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된 세상의 대표자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의 타락이 곧 창조 세계의 타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홍성사) 첫 장에서 언급했듯이,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복음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약을 먹거나 의사를 찾아가지 않는다. 다음장에서 더 깊숙이 다루겠지만, 죄라는 것은 가벼운 상처가 아니며 병으로 따지자면 며칠 잘 쉬고 나면 낫는 감기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죄는 인간됨의 뿌리부터 흔들어 놓은 지극히 근본적인 문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죄가 이처럼 심각한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인간됨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값비싸고 고귀한 물건에 난 흠집은 작아도 크게 확대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별로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중고차를 누군가 긁어 놓았다면 크게 개의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큰 맘 먹고 막대한 투자를 해서 새로 장만한 고급 승용차를 누군가 슬쩍 긋고 갔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흠집의 크기 문제이기 전에, 무엇에 흠집이 났는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그만큼 고귀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런 인간을 썩어짐으로 떨어뜨린 죄의 등장은 인류 최악의 비극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바로 이 비극적으로 망가진 인간성을 다시 존귀로 끌어올리신 장본인이다. 이를 위해서 그분은 가장 낮아지셨고, 이후 우리를 끌어올리기 위해 다시 높아 지셨다.
우리에게는 이 같은 성육신의 이미지가 전혀 생소하지 않다. 왜
냐하면 이미 자연 세계의 원리 속에 낮아짐과 높아짐의 패턴이 깊
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식물 세계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씨앗은 우선 땅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고, 내재된 생명의 힘으로 다시 흙을 뚫고 자란다. 우리 인생의 많은 일은 우선 죽음과 같은 경험,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강하고 아름답게 거듭난다.
성육신의 교리, 그리스도 사건의 교리는 자연 세계의 법칙에 매우 잘 맞아 들어간다. 사전에 조율이 있지 않았나 의심이 들 정도다. 여러 설화 속에 등장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무엇보다도 농경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은 자연종교들의 패턴, 즉 겨울이 지나면서 죽었던 땅이 봄이 되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신들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 등 그리스도 사건과 유사한 내용이 단지 우연일 뿐인가? 루이스는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주님은 농사 이미지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마다하시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농경 이미지를 통해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셨다(요 12:23-25). 또한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빵)'이라고 설명하셨고, 포도 열매로 빚은 포도주를 자신이 흘리는 대속의 피에 대입하셨다. 그리스도는 루이스가 발견했던 것 이상으로,
그리고 우리의 우려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자연의 이미지들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명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는 자연 현상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시지는 않았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는 창조주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있으며,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다. 하나님은 자연을 지으셨고 그분의 돌보심 아래 풀과 나무와 곡식들이 자라난다. 하늘의 새들도 먹이시고 들판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다. 그리고 자연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껏 반영한다. 하늘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광활한 땅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신 것이 분명하다. 자연 종교는 이 부분에서 오해한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자연의 대적자도 아니시다. 그러므로 자연을 그저 허상이요, 악한 것으로 보려는 반자연 종교도 오류다.
그리스도 사건과 자연 현상의 연관성은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가 고대의 자연 종교를 의식하시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루이스는 한 가지 이론을 제시했다. 시간이 흐르는 방향과 상관없이 자연 종교가 신비하게 여겼던 자연 현상은 그리스도 사건의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이 원형이고, 자연 종교가 보여 준 것은 희미한 반사체 정도다. 자연 종교가 지녔던 신비는 원형인 성육신 사건을 희미하게 비추어 낸 것일 뿐이다. 사실 가히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러므로 원형이신 그리스도가 자연 종교에서 빌리거나 가져오실 것은 전혀 없다. 이는 마치 사진으로 보이시던 그분이 직접 나타나셨기에 더 이상 사진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곡물은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초자연적 실재에 비교했을 때 아주, 엄청나게 뒤떨어진 모조품에 불과해진 것이다. 루이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
다.
"진정한 하나님이 임재하신 자리에 그 하나님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이전에 있었던 그림자를 닮은 실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가 성육신 사건에서 만난 하나님의 방법은 놀라울정도로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선, 성육신을 준비한 구약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 민족 중에 단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 민족조차 모두가 보편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사건들을 통해 키질을 당하듯 구원에 이르는 자들과 구원에서 이탈하는 자들로 나뉘었다.
그리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쓰러졌다. 가나안에 이른 자들 중에서도 일부는 바벨론에 유배를 당했다가 돌아왔고 그 땅에 남겨진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선택받은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영원히 주변인으로 전락했다.
결국 남은 자는 누구인가? 루이스에 의하면, 성육신 사건이 눈앞에 떠오른 순간에 남은 자는 결국 조용히 기도하며 순종한 어리고 연약해 보이는 한 유대인 여성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남은 자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항복과 순종을 이루어 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이처럼 선택의 과정을 통과하는 길은 점점 더 협착해지고, 결국은 창끝의 뾰족한 지점에 이르는 것과 같다. 성육신 사건은 선택적 사건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야기에 나타난 선택의 원리는 불공평에서 멈추지 않는다. 선택을 받은 사람은 놀라운 영광으로 공평하지 않은 초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잠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놀라운 영광은 동시에 놀라운 부담을 동반한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은 그들의 고난과 슬픔을 통해 세상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택받은 자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선택이기보다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그를 통해 모든 나라와 민족이 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선택을 받은 여인은 어머니로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 역시 '슬픔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바로 그분이 고난에 있어서도 가장 으뜸이 되셨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성육신 사건이 조명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불공평한 선택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그리스도 사건이 없다면 어떤 사람들은 건전하지 못한 특권 의식으로, 어떤 사람들은 파괴적인 피해의식으로 치닫게 된다. 균형이 깨져 버린 특권의식이 초래한 잘못된 결과로 인간 사회에 독재와 압제라는 부정적 현상이 나타났다. 권력을 부여받은 자가 아무런 도덕과 양심의 제재 없이 그 권력을 자기 임의대로 휘두른 결과다. 반면, 선택에 대해 바른 책임감을 지닌 사람들에게 지위나 힘, 재물이 부여된다면 그 결과 겸손과 값진 섬김이라는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루이스가 상상하기도 싫은 세상은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도 강한 사람도 없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오직 보편성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근성도 있지만,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 보려는 경향도 있다.
*기독교는 두 가지 종교를 다 거부한다. 절대로 스토아 철학자처럼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죽음은 소름 끼치는 현실이고 존엄스럽지 못하다. 그런데 동시에 죽음은 위대한 선이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죽음에 대해서 단순히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아주 색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아울러 기독교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처럼 무조건 남보다 더 강해지고 더 똑똑해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는 모든 인간이 하나같이 아무런 차이 없이 똑같아지는 날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기독교는 내가 타인의 착취자로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생충처럼 행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오직 나 홀로 잘 살아가는 꿈을 꾸도록 장려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들의 거룩한 섬김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요구하고, 아울러 나 자신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법을 배워 나가도록 한다.
그러므로 루이스는 성육신 사건 또는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위대한 기적이 이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 세상에 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믿었다. 이것이 상실되고 빠져 버린 세상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가장 중요한 페이지의 문서를 잃어버린 소설이나 가장 중요한 주악상을 분실한 심포니 악보처럼 말이다.
성육신 사건이 인류 역사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모든 일이 그 사건을 기준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위대한 기적, 성육신 사건은 인류 역사의 문고리다. 그리고 성육신 사건의 결과는 현세뿐 아니라 새롭게 빚어질 새로운 세상을 통해 더욱 위대한 빛을 발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셨고, 구속하신 자연을 그분의 어깨에 짊어지고 다시 솟아오르셨다.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성경이 증거하듯이 우주의 여름에 거두어들인 첫 열매다. 그리스도가 이미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후에 그분을 따라 부활할 것이다. 베드로는 불과 잠시 물위를 걸었지만, 하나님이 온 우주를 새롭게 하시는 날, 새로 태어난 자연 세계는 영화롭고 거룩한 존재로 나타날 인간들에게 전심으로 순종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저 한 인간으로만 본다면 우리에게 선택지는 많지않다. 그리스도는 미치광이이든지, 아니면 극악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한 최악의 인간일 뿐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마음이 없다면 유일한 다른 선택지는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분이 주장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판단한 대로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예수를 정신 나간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고, 그를 악한 자라고 규정하고 당시 총교 지도자들과 무리가 했듯이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중간 지대는 없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나름 괜찮은 사람', '시대에 보기 드문 훌륭한 랍비'라는 말 정도로 부드럽게 넘어갈 수는 없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아니라면 그를 대적하고 거부하고, 그가 죽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곧 하나님이 오신 것이다. 그분을 대적해 일어난 반란군이 점령하고 있는 세상에 왕이신 그리스도가 직접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다.
*그가 제시한 '대속적 참회론'의 출발점은 죄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죄인은 자기 스스로 존재적 의미를 찾아보겠다고 마음 먹고 있다. 그는 자기가 자신의 소유자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은 단순히 '상태가 호전되어야 한다는 부족함을 느끼는 존재' 정도가 아니다. 그는 반란군이고, 반드시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야 하는 자리까지 왔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지금까지 고집했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처음으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항복(surrender), 즉 '자기 길에서 완벽하게 돌아서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회개'라고 부른다. 회개는 단순히 조금 풀이 죽은 모습으로 자기가 한 일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정도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인류가 수천수만 년 동안 스스로 훈련시켜 온 교만과 자기 뜻을 고집하는 자세를 꺾고 되돌리는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죽음을 통과하는 일이요, 자아를 죽이는 영적 행위다.
회개가 이처럼 근본적인 변화라면, 진실로 선한 사람에게만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사실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이다. 온전한 사람만이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온전한 사람은 회개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반면 악한 사람은 회개를 할 능력이 없다.
회개가 없는 구원은 없다.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고, 당연히 하나님은 그분께로 돌이키는 사람을 용납하신다. 그리고 회개란 바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그 자체다. 그러므로 죄인은 반드시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죄인의 죄, 즉 반항과 반란을 일삼는 마음 그 자체가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죄인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어린아이에게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칠 때 부모는 연필을 든 아이의 손을 잡고 대신 글씨를 써 준다. 이렇게 아이는 부모의 손에 붙잡혀서 글씨 쓰는 법을 익힌다. 우리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생각할 힘을 주실 때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넣어 주실 때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도우시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힘과 생각과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회개는 어떠한가?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측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내용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하나님은 본질상 회개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항복하는 것, 잘못을 뉘우치는 것,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애통하는 것, 복종하는 것, 그리고 죽는 것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절실히 필요한 회개는 하나님 편에서는 전혀 하실 필요도 없고, 하실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면 어떻게 될까? 고난에 노출되어 있고 죽을 수 있는 인성과 온전하신 하나님의 신성이 결합해 한 사람을 이룬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분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지 않을까? 그분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항복시키실 수 있고, 고난을 겪고 죽으실 수 있는 인간이시다. 아울러 그분은 그 일들을 완벽하게 수행하실 수 있는 온전하신 분, 즉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일을 수행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야만 한다. 우리에게 회개란 일종의 선한 죽음이다. 이런 죽음을 죽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실제로 죽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죽음에 참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을 수 있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 사건의 의미다.
*구원의 서정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 성령 안에서 거듭남,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된 회심, 양자 됨,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의 단계로 구성된다. 이렇게 구원론이 구성된다.
우리의 구원의 서정은 그리스도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어 내시고 경험하신 구원의 요소들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the union with Christ)은 그분의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요 15:5).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이 내 안에 주신 믿음이 지속적으로 작동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교통(the commurfion with Christ)이라는 성도의 삶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과연 그리스도가 회개에 참여하셨는가? 그리스도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를 전파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실 때 요한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라는 말씀으로 요한을 설득하셨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중보자로 받으신 회개의 세례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받으신 세례는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다(막 10:38: 눅 12:50).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이라는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세례에 동참해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는다(롬 6:3).
"그리스도는 언약의 대표자로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이 해야 할 회개에 참여하셨고, 이후 온전한 회개의 열매를 맺으심으로 온전한 회개를 성취하셨다."[12]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속에는 그리스도가 언약의 대표자로서 죄인을 위해 참된 회개를 이루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루이스가 선호한 대속적 참회론이 나름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근거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권고했다.
그리스도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고, 우리가 그분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면 성경이 말하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라는 말씀이 성취된다. 한분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거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일한 모습 으로 바뀐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둠에 있던 사람들이 빛 앞으로 나오면, 그 빛에 비친 각자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소금이 적절히 뿌려진 음식은 소금 맛이 나는 것이 아니라, 각 식재료의 고유한 맛이 더욱 강조되어 드러나는 것이 원칙이다.
소금을 쳐야 음식이 제 맛이 나듯,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나님이 의도하신 각자의 본래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덜어 내고 더욱 그리스도로 우리를 채울 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더욱더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만드신 우리 자신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루이스의 깨달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다. 그리스도가 저자가 되어 창조해 내신 인물들이 역사라는 드라마 속에 있다면, 각 인물들은 자신의 역할을 저자의 뜻대로 잘 수행해 내야 한다. 그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찾아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 스스로 참된 자아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 자랑스럽게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나의 인생, 그리고 그 앞에 줄지어 발생했던 사건들, 내가 시작하지도 않았고 멈출 수도 없는 수많은 사건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현상일 수 있다. 나의 소원은 타인의 강요에 의해 내 안에 의식화되어 버린 생각일 가능성이 많고, 나의 정치적 신념이라는 것도 정치가들이나 권력자들이 선동한 결과일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사실 나의 진정한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 머릿속에 형성된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 및 경제적 영향의 산물일 수 있다.
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돌아갈 때, 우리가 아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인격 앞에 내어 놓을 때 우리는 드디어 우리 자신의 참 인격을 가질 수 있다. 루이스는 그리스도께 항복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독창적이지 않다는 점을 감지했다.
"독재자들, 정복자들의 모습은 예측이 쉬울 만큼 동일하다."
하지만 거룩한 성도들의 모습은 영광스러울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되는 새 사람은 무한하신 창조주의 개별적 작품처럼 풍성하고 다양하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 사람 곧 참 사람으로 변해 간다.
설교자 루이스의 복음 초청을 들어 보자.
"너를 포기하라. 그리하면 너의 진정한 자아를 찾을 것이다. 너의 생명을 버리라. 그러면 너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 죽음 앞에 복종하라. 즉 네 야망의 죽음, 매일 마음을 지배하는 소원들의 죽음. 그리고 마지막 너의 온몸의 죽음, 이 모든 것에 대해 너의 존재의 남은 한 톨까지 내어 주라. 그러면 영생을 찾을 것이다. 아무것도 뒷전에 숨기지 마라. 그분 앞에 내어 놓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너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네 안에 아직 죽지 않은 것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끝내 네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면, 결국 네 안에서 미움, 고독함, 절망, 분노, 망가짐, 그리고 썩어짐만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라. 그리하면 너는 그를 찾을 것이고, 그와 함께 모든 선한 것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