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정의의 방정식 /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정의와 공정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등장했다. 정의와 공정은 사회통합의 필수적 전제 조건이기에, 갈가리 찢기고 분열된 오늘의 우리에게 ‘정의사회 · 공정사회’의 요구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또 한편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주는 슬픈 현상이기도 하다.
정의와 공정에 모두 들어 있는 바를 정(正)자는 한 일(一) 밑에 멈출 지(止)를 쓴다. ‘한’은 하나라는 숫자의 개념만이 아니라 ‘큰, 모든, 완전한’의 뜻과 함께 ‘하늘’의 의미를 품고 있다. 정(正)자를 파자(破字)하면 “하늘(一) 아래 멈춘다(止)”는 뜻이 된다. 하늘처럼 높은 가치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바른 일이다.
흑인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시절 넬슨 만델라는 사악한 백인정권하에서 무려 27년의 세월을 감옥에 유폐되었다. 어찌 ‘정의로운 보복’을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않았으랴? 그러나 후에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백인들에 대한 보복정책 대신 ‘화해와 용서’라는 경이로운 유화정책을 펴면서 만행을 저지른 백인들에게 참회의 기회를 주는 한편, 용서와 관용의 대사면을 선포했다. 사면권은 모름지기 이렇게 쓰는 것이다.
만델라는 멈출 줄 알았다. 정의보다 더 높은 가치 앞에서 ‘정의로운 응징’의 채찍을 거두는 겸손을 알고 있었다. 그 겸손이 남아프리카에 오늘의 평화를 가져온 것이다. 당연히 만델라는 노벨평화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그러나 나는 노벨상이 만델라에게 영광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델라가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오히려 노벨상의 가치만 한층 더 높아졌을 뿐이다. 지난날 북아메리카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었고 인도에 마하트마 간디가 있었다면, 이 시대에는 저 남아프리카에 넬슨 만델라라는 고결한 영혼이 숨 쉬고 있음을 나는 역사와 신 앞에 감사한다.
정의의 참뜻이 보복이나 응징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정의는 궁극적으로 ‘상생(相生)의 평화’를 지향해야 하며, 그것은 오직 관용의 손길로써만 가능하다. 물론 관용은 턱없이 헤픈 용서를 의미하지 않으며, 진정한 참회를 전제로 한다. 그 참회에 용서로 대답함으로써 화해와 상생의 평화를 이뤄낸 것이 만델라가 실천한 ‘사랑의 윤리’였다. 그것은 또한 ‘의인과 악인의 밭에 비를 골고루 내리는’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인간의 정의는 ‘죽이는 정의’요, 하늘의 정의는 ‘살리는 정의’다. 살리는 정의 앞에서 죽이는 정의는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 나는 이것을 ‘사랑과 정의의 유일한 방정식’으로 늘 외우며 잊지 않기로 하고 있다.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내로라하는 저명인사들이 인격과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고 줄줄이 낙마했다. 청문회를 겨우 통과해도 명예에 손상을 입기는 마찬가지다. 공직을 맡겠다고 나선 이들의 자업자득이겠지만,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공직자의 적격 여부를 가려내야 할 공개청문회가 그토록 냉혹한 ‘인격 심판’에까지 나아가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법관이 공개법정에서 피고인을 그렇듯 모질게 신문했다가는 당장 사표를 써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남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일들을 수도 없이 저지르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 실존의 슬픈 현실이다. 누군들 한 톨의 흠도 없이 순백(純白)의 삶만을 살아왔을까? 테레사 수녀조차 “내 안에 간디와 히틀러가 함께 들어 있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날카로운 도덕의 잣대로 인간 본성의 취약한 부분을 마구 찔러대는 것처럼 야박하고 부도덕한 행태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선 때문에 더 악해질 수 있다.” 도덕적 오만을 꾸짖는 신학자 자크 엘륄의 경고다. 도덕군자의 몸짓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부끄러운 윤리적 딜레마를 속 깊이 감추고 있기 일쑤다. 관용을 모르는 도덕은 그 자체로 부도덕하다. 성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보다 ‘용서하지 못한 죄’가 더 무겁다고 선언한다(마태18).
도덕이 권력과 결합하면 ‘도덕적인 공정사회’가 아니라 ‘원리주의적인 공포사회’를 불러온다. 모든 신정정치(神政政治)의 속성이자 비극이다. 도덕과 함께 관용이, 정의와 함께 사랑이 요구되는 이유를 로마의 법언(法諺)은 이렇게 제시한다.
“극단의 정의는 극단의 불의다 (Summum ius summa injuria).”
첫댓글 오늘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균형잡힌 시각과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는 칼럼입니다.
법조인 중에서도 이런 식견을 가진 분이 있다는 게 반가워 이분의 칼럼을 유심히 읽게 됩니다
도덕이 권력과 결합하면 ‘도덕적인 공정사회’가 아니라 ‘원리주의적인 공포사회’를 불러온다...좋은 칼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청문회 방송을 보면서 질문자들의 오만한 태도가 더 분노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정의와 사랑, 관용... 참 어려운 문제임이 틀림없다 싶구요. 우리 사회는 언제쯤
적어도 남을 나와 같은 인격으로 대할 줄 아는 사회가 될까요...
건승하십시오! 무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