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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있었던 웃기는 얘기 하나. 유람선 위에서 마이크 잡고 안내하던 사람이 “오른쪽을 보시면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하다가 조금 더 가서는 또 “오른쪽을 보십시오. 삼형제바위가...” 하기에 오른쪽을 아무리 봐도 수평선만 보이고 정작 소개하는 바위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볼 수 있어서 모두들 이상하다 했더니, 알고 보니 평소 섬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던 유람선이 그 날은 반대로 왼쪽을 끼고 돌았는데도 안내자가 아무런 생각없이 늘 하던 대로 녹음기 틀어놓듯 똑같이 안내했던 것 같아요. 요즘 애들 말로 하면 개념 없는 자, 어른들 말로는 장인정신이 부족한 자 같으니라고... ㅉㅉ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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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유람선을 타고 섬을 한 바퀴 돌다가 북면 앞바다를 지날 때였는데, 한 마을에 교회가 20개 넘게 있는 것이었어요. 국내에서 교회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라기에 대충 보아도 평균 두 가구당 교회가 하나씩 되는 것 같았어요. 오징어잡이 나갔다가 죽는 사람이 많았던 옛날에 해신당을 곳곳에 지어 놓은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 장면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저렇게 많은 교회들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별 걱정 다해 봤어요.
2008년, 26년 만에 다시 가 본 울릉도
‘82년에 울릉도를 두 번째 갔다온 후 6년 남짓 의성에서 살다가 집도 절도 없이 서울 온 후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깍쟁이들 속에서 집 마련에다 처자식 부양하느라 바쁘게 살면서 울릉도에 대한 추억이 한 번씩 새록새록 되살아나긴 했지만 두 번씩이나 갔다왔기에 다시 갈 생각은 못했습니다.
과거 대입 학력고사가 있던 시절엔 국어 교과서 내의 지문이 출제되다보니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문학 작품은 수업 시간에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93년에 수능 시험이 생기자 교과서 외의 작품이 대부분 출제되니 나도 생소한 시들을 찾아내어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유치환의 시 ‘울릉도’였어요.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튀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하략)
이 시를 학생들에게 소개하면서 청마 선생은 울릉도를 가 보지도 않고 시를 썼다고 가르쳤던 기억이 납니다. 시의 앞부분을 보면 울릉도에 가서 풍경을 직접 보고 쓴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지도만 보고 쓴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0대 중반에 상경해서 바쁘게 사는 동안 무심한 세월이 야속하게도 마구 흘러 불혹의 나이를 지나 지천명고개를 훌쩍 넘어선 어느 날 울릉도를 다시 갈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2008년 5월에 한국청소년단체연합회에서 해군의 협조를 얻어 서울시내 교장 200여 명을 모시고 울릉도, 독도를 사흘간 방문하는 행사에 초청받았습니다. 이번에는 난생 처음으로 여객선이 아닌 군함(광개토왕함)을 타고 속초항에서 출발하여 군함 내부를 안내받기도 하고, 육군으로 치면 군사령관쯤 될 것 같은데, 동해 전체를 통할하는 별 두 개를 단 해군 1함대사령관이 나와서 환영 인사를 하는 등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공짜 여행을 하게 됐어요.
환영 인사를 하는 해군 1함대사령관 해군복 입고 기념촬영 하라기에 함상에서
26년 만에 다시 본 울릉도의 모습은 엄청 많이 변해 있었어요. ‘77년에 처음 갔을 때는 도동항에 여관이나 구멍가게, 식당 등의 수가 손꼽을 정도였는데 이번에 본 도동항은 여느 관광지처럼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어요. 호텔, 콘도를 비롯한 숙박 시설이 즐비했고, 케이블카가 생겨서 도동항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라가 울릉도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동에서 저동까지 해안을 따라 멋진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었고, 섬 일주도로가 저동과 천부 사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완공되어 자동차를 타고 관광할 수 있었습니다. 또, 벼랑을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올라가던 죽도에는 나선형으로 된 철제 계단까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두 가구당 하나씩, 총 20개 넘게 있었던 북면의 마을에는 교회가 서너 개만 남아 있더라구요.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도동 마을 선착장에서 바라본 도동항 모습
전에는 가 보지 못했던 성인봉을 처음으로 등산하고 나리분지로 내려왔다가 운 좋게도 독도를 밟아봤습니다. 독도까지 간다고 모두 섬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파도가 거의 없어야 접안이 가능한 데다가 워낙 독도땅을 밟으려는 사람이 많다보니 독도에 내려도 오래 있을 수 없고 30분만 있으면 다시 배에 올라타야 합니다. 또, 생태계 보호 때문에 섬을 둘러보거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도 없어서 결국 반경 100m 안에서 구경만 하다 왔습니다.
성인봉 정상. 흐린 날씨라 배경이 별로... 꽤나 고생하면서 닦았을 골뱅이 같은 일주도로
2009년, 네 번째 가 본 울릉도
3년 6개월 간 중화중학교 교장으로 있는 동안 90명 직원들과 참으로 정이 많이 들었답니다. 서울은 학교 규모가 커서 대부분의 교장들이 교직원이나 학부모들과의 갈등, 생활지도 문제 등으로 인해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힘든 경우도 많다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교장 생활을 별 어려움없이 꿈같이 보냈던 것 같아 지금도 그 시절이 많이 그리워집니다.
교장 1차 임기 만료가 얼마 남지 않아서 머지않아 이 학교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헤어지기가 무척이나 아쉬워서 8월 방학중에 부장교사들과 마지막 여행으로 울릉도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1년 만에 또 독도에도 올라 보고, 지난해에는 못 갔던 죽도를 32년 만에 다시 올라가 보니 전망대와 산책로, 찻집, 조각공원까지 만들어 놓는 등 관광지로 잘 개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 속에 싣기 위해 ‘77년도에 찍은 사진을 찾아보니 이런 우연이... 무심코 사진 찍은 장소가 32년 전 바로 그 장소였지 뭡니까. 조금 후에 두 사진을 비교한 게 나옵니다.
죽도로 올라가는 나선형 철제 계단. 이젠 옛날처럼 소가 죽어 나올 리는 없겠죠
돌아오는 날 갑자기 거세진 파도 때문에 배가 뜨지 않아 할 수 없이 예정보다 하루 더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발 묶인 하루동안 비 때문에 외출은 못하고 종일 여관방에서 고스톱만 수백 판 치다 왔습니다. 부장들이 처음에는 예우상 좀 잃어주는 듯하더니 그것도 몇 시간이 지나니 인정사정 없더군요. 다행히 문 밖을 나서면 곳곳에 현금자동지급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돈이 다 떨어져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중화중학교의 부장들과는 그 동안 여행을 참 많이 했었답니다. 방학 때마다 홍도, 흑산도, 거문도, 백도, 외도, 제주도 등의 섬은 물론 앙코르왓트와 하롱베이 등 해외까지 같이 갔었고, 강원도에서 래프팅까지 했을 정도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던 사람들이다보니 마지막 여행은 그 동안 부장들과는 함께 가 보지 못했던 울릉도를 택하게 됐어요.
거기서 교장, 교감, 행정실장, 부장 11명 등 간부 직원 14명이 헤어지더라도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어 죽을 때까지는 물론, 죽고 난 뒤에 저승에서도 자주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모임 이름은 중화중학교 부장 모임이란 뜻의 ‘중부회’로 지었답니다.
무척 많은 정이 들었던 교감 및 부장들과 죽도에서(부장 둘과 행정실장은 학교 지키느라 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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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장 중에 우리 사대 지리과 74학번 동기인 경북여고 출신 권덕자가 있습니다. 3년 전 송파구의 세륜중학교에서 연구부장을 하다가 근무 만기로 학교를 떠나야 하게 되자 근무 평정을 잘 받을 수 있는 학교를 찾던 그녀를 재경경북사대동창회에서 우연히 만나 우리 학교로 전입 요청해 와서 교무부장을 맡기고 3년 간 근무 평정을 직원 전체에서 1등 ‘수’로 줬더니 올해 교감 자격연수 대상자가 되었고, 내년쯤이면 아마 교감 발령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난 2년 6개월 동안 대학 동기끼리 한 사람은 교장으로, 또 한 사람은 부장으로 같이 근무하면서 그녀가 겪었을 불편함이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을 겁니다. 옆의 흑백사진은 '77년에 처음 울릉도에 갔을 때 죽도에서 만난 사람들과 찍은 사진인데 32년후 직원들과 무심코 같은 장소에서 또 찍었네요. 바로 위의 왼쪽 천연색 사진과 비교해 보면 같은 장소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바위를 깎고 다리를 놓으면서 무척 힘들게 만들었을 도동에서 저동까지의 해안 산책길
장가계 백룡엘리베이터가 연상되는 저동 철제계단 지리과 74학번인 권덕자 교무부장과
생각보다도 훨씬 큰 섬, 독도 독도에 올라 이 살기 좋고 행복한 우리나라 만세!!
권태유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빌며
울릉도로 발령이 난 권태유와 통화를 한 후 친구의 앞날에 무궁한 축복이 있기를 비는 마음으로 일과중에 조금씩 시간을 내어 이 글을 쓰다말다 하면서 여러 날 동안 가필을 했습니다. 권태유는 대학 시절 내내 가깝게 지냈던 좋은 친구 중 한 사람입니다. 아마 승진에 필요한 다른 점수는 거의 갖춰 놓았는데 도서벽지 가산 점수만 받으면 교감 자격연수를 받고 곧 승진이 가능하니까 울릉도를 지원해 간 것 같습니다.
승진하는 것이 꼭 행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관리자에게 요구되는 무거운 책무성은 승진에 따른 영예나 성취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습니다. 퇴직할 때까지 평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겠고, 승진하여 학교를 경영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에 어떤 삶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판단은 사람에 따라, 또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므로 그 판단은 훗날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는 이미 승진에 더 가치를 둔 것으로 보아 비록 가족들과 떨어져 몇 년을 살아야 하는 그 생활이 불편하더라도 감수하리라 믿으며 고생을 한 만큼의 보상은 분명 따를 것입니다.
권태유, 이 친구 대학 다닐 때는 함께 강의 빼먹고 내기당구, 고스톱, 카드 등을 하면서 내 돈도 무척 많이 따먹은 괘씸한 자입니다. 그 때 잃은 돈으로 서해안에 땅을 사 놓았더라면 지금쯤 내 인생이 바뀌었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3학년 때인가 권상호, 권태유, 장성진, 정연범(이상 가나다 순), 나 이렇게 5명이 포항 보경사로 캠핑가서 텐트치고 자던 중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껴 한밤중에 깨 보니 권태유 이 친구가 장시간 내 머리통을 베개삼아 베고 자고 있었는데, 그 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꼭 골치가 아파 오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적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으니, 러시아산이 아닌 진짜 울릉도산 오징어 몇 마리만 가져오면 내가 특별히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기로 하고, 친구의 앞날에 좋은 일만 있기를 진심으로 빌면서 몇 년 전 교육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도서벽지 근무자 승진 가산점과 관련된 한 에피소드를 가감없이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으려 합니다.
그 시절 일부 교직단체와 시민단체, 심지어는 교육부 공무원들까지도 도서벽지 근무자에게 승진 가산점을 주는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해 왔습니다. 당시 교육연구관(장학관)으로 업무 담당자였던 나는 이런 논리로 대응했습니다.
교직단체 : 도서벽지에서 근무한 경력이 교장직을 수행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도서벽지 근무에따른 승진 가산점을 폐지해야 합니다.
담당자 : 이 제도는 남들이 기피하는 도서벽지 근무자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도입된 제도로 어느 조직이라도 이런 보상 제도가 다 있습니다. 여건 좋은 학교에만 근무하다가 교장이 되는 것보다 여건이 열악한 지역의 학교까지 다양하게 근무해 본 경험이 왜 학교 경영에 도움이 안 됩니까? 그리고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 뭡니까? 나는 희생과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가족과 헤어져 열악한 지역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희생이자 봉사 아닙니까?
시민단체 : 그럼 굳이 승진 가산점을 줄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 이를테면 돈으로 보상하면 되지 않습니까?
담당자 : 현재 도서벽지 근무자에게는 월 5만원 내외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는데, 승진 가산점이 없다면 수당을 얼마나 줘야 도서벽지로 가려 하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월 몇십만 원씩 더 줘도 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몇백만 원씩 주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고, 또 다른 경우와의 형평성 문제도 있으니 그보다는 승진 가산점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유인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도서벽지 근무에 대한 인사상 혜택이 없다면 교육청에서 교사 발령을 내기가 무척 어려워질 것입니다. 중견교사들은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니 신규교사나 징계받아 좌천되는 교사들이 주로 갈 것이고, 그렇다면 거기 학생들은 지금처럼 우수한 중견교사들로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여성단체 : 남교사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도서벽지에 갈 수 있지만 육아 문제나 가정살림 등으로 여교사는 도서벽지에 가기 어렵습니다. 이는 헌법에도 보장된 남녀간 기회 균등의 원칙에 어긋나니 아예 도서벽지 가산점을 폐지해야 합니다.
담당자 : 교사 전보 원칙은 순환근무제입니다. 여건 좋은 데서 근무한 교사는 일정 기간 근무 후 여건 나쁜 곳으로 전보시켜야 하는데 만약 가산점을 폐지한다면 과반수가 여교사인 상황에서 많은 여교사들이 순환근무 원칙에 따라 강제로 도서벽지 학교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과연 여성들에 대한 배려 정책이겠습니까? 그보다는 현재의 가산점 제도를 그냥 두면서 남녀 불문하고 승진 점수를 따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사는 불편을 감수하겠다고 자원하는 분만 가도록 하면 지원자가 많아서 여교사가 강제로 도서벽지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므로 이것이 곧 여성 배려 정책이 되는 동시에 남녀 평등 원칙에도 부합한다고 봅니다.
각 단체 관계자들 : ( ....................... )
※ 이 이후 이 문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어요. 전국의 도서벽지 학교에서 지금 근무중이거나 가산점을 받아 최근 승진한 모든 분들 나한테 술 한 잔 사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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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ㅋㅋㅋ이영식씨 글은 언제 봐도 구수하니 재밌군요. 도서 벽지 가산점 혜택이 없어도 감사 드립니다. 꾸벅.
근데 사진이 하나도 안 보여요. 제 컴실력 때문인가요?
워드로 작성한 글을 오려붙이기해서 올리다보니 사진이 나오지 않은 것 같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새로 올렸으니 사진이 나타나 있을 겁니다. 워드 작성시에는 사진이나 설명을 바른 위치에 배치했었는데 카페에 올려보니 그 위치가 다르게 되어 이상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만나 보면 그대론데 사진으로 보니 우와!!! 세월이 많이 흘렀군요.
덕자는 새댁이 같이 조신하게 ㅎㅎㅎㅎ
영식장학관님! 그 때 그 시절 기억력도 대단하구만.... 관관 가이드로서의 재질이 더 뛰어난 것 같아 직업을 잘 못 선택한 같이 보인다. 농담이고, 다음 6월에 거제도에 와서 놀다가 가려무나!
이 부장님. 졌습니다. 나는 사진 하나 변변히 남은 게 없는데, 기억은 하얗게 바랜 지 오랜데... 졌습니다. 동기님들 잘 지내시지요?
미안하게도 이 글을 이제서야 봤네. 영식아, 네 글 정말 재밌게 봤다. 변함이 없구나. 어쩌면 기억력이 그렇게 좋으냐? 난 옛날 일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나머진 만나서 얘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