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레빗 편지 2087호(2011.5.9.) 월요일자 김리박 시조와 함께 나간 나팔꽃 사진은 메꽃이었음을 바로 잡습니다. 이 지적을 해주신 분은 독자 박춘근 님이십니다. 내친 김에 메꽃과 나팔꽃에 관한 박춘근 님의 재미나고도 상세한 독자편지를 받았습니다. 오늘자 독자편지를 통해 여러분들도 잘못 알고 있던 '메꽃과 나팔꽃'에 대한 확실한 공부를 해보시기바랍니다. 박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에 글쓰는 사람으로서 힘이 절로 샘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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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란 님이 짓고 홍난파 님이 곡을 붙였다는 ‘햇볕은 쨍쨍’의 가사입니다. 위 가사 가운데 2절 2행에 나오는 '메'가 메꽃입니다. 곧 '멧뿌리'는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쪄 먹던, 훌륭한 구황작물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보니 주차장 바로 옆 화단에 연분홍 메꽃 세 송이가 활짝 피었습니다. 아직 메꽃이 모두 피진 않았지만 녀석은 교정 곳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누가 잡초라고 뽑아버리지만 않는다면 머잖아 우리 교정은 메꽃으로 뒤덮이겠지요.
메꽃과 헷갈리기 쉬운 녀석이 나팔꽃입니다. 얼레빗 편지 2087호(2011.5.9.)에 나팔꽃이라고 잘못 설명한 사진 역시 메꽃입니다. 메꽃과 나팔꽃은 먼저 꽃색이 다릅니다. 메꽃은 흰색이거나 연분홍색입니다. 그러나 나팔꽃은 남색, 보라, 빨강, 분홍 등 꽃색이 다양합니다. 둘째로 잎 모양이 다릅니다. 나팔꽃은 심장 모양이거나 세 갈래로 깊게 갈라지지만 메꽃은 세모꼴 모양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는 혀를 쏙 내밀어 보라고 합니다. 메 잎 모양이 마치 혀 모양과 비슷하기 때문인데 그때마다 ‘메롱’이라고 했더니 제가 아는 아이들은 메꽃을 안답시고 제 앞에서 ‘메롱’ 하며 놀립니다. 그때마다 짐짓 화를 낸 듯한 표정을 지으면 슬금슬금 뒷걸음치며 도망 가다가 이내 ‘메롱꽃!’이라며 활짝 웃습니다.
한편, 바닷가에서 백사장 근처에서 피는 갯메꽃은 잎 모양이 둥근 심장 모양에 가깝고 잎이 아주 도톰합니다. 피는 시기도 다릅니다. 메꽃은 벌써 피었지만 나팔꽃은 이제 싹이 나올 즈음입니다. 아직 우리 학교에서는 제 눈에 띄진 않았습니다. 나팔꽃은 ‘모닝글로리’라 하여 아침에 잠깐 피는 꽃이지요. 하지만, 메꽃은 온종일 피어 있답니다. 나팔꽃은 먹을 수 없으나 메꽃은 먹을 수 있고, 나팔꽃은 씨앗으로만 번식하는 한해살이풀이나 메꽃은 뿌리로 번식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더 많은 메꽃은, 귀화식물인 나팔꽃과 달리 우리 꽃입니다. 메꽃을 보며 우리 아이들끼리 ‘메롱’ 하는 모습은 참으로 정겹기까지 합니다. 모두가 살갑고 정겨운 이웃을 꿈꾸면서...
독자 박춘근(서울 대조초등학교 교사)
※ 넷째 단락 여섯번째 줄 "도망 가다가"는 일부러 띄어 썼습니다. 대량메일에서는 성 적이거나 광 고성 또는 속된 말을 쓰면 발송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농제는 농업신인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드리던 국가 제례의식이다. 제사 뒤 임금이 동쪽 교외 적전(籍田 : 임금이 몸소 농민을 두고 농사를 짓던 논밭)에서 오추례(五推禮)를 시행하여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경적례(耕籍禮) 또는 적전례(籍田禮)라고도 부른다. 선농제 기록은 『삼국사기』에 선농과 중농, 후농의 제사 기록이 처음 나온다. 선농제는 유교 국가의 임금들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천적인 권농책(勸農策)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에서 일찍부터 시행되었다.
선농제는 고려시대엔 음력 1월의 길해(吉亥: 길한 해일)에 지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1월엔 추워서 파종할 시기가 아니라며 경칩(驚蟄) 뒤의 길해로 그 시기를 바꾸었다. 조선시대 선농제는 태종 16년(1416)에 제단이 축조되면서 새 제도가 마련되었으며 세종 12년(1430)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등재되었는데, 그 규모는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으로 고려 때보다 규모가 축소되었다.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선농친제(先農親祭)는 성종대에 처음 행해졌으며 이후 중종, 명종, 인조, 숙종 등 역대 왕들이 직접 농사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선농제를 지내고 나서 임금을 비롯한 조정중신은 물론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함께 밭을 간 뒤 백성을 위로하려고 소를 잡아 국말이 밥과 술을 내렸다. 이 국밥을 선농단에서 내린 것이라 하여 선농단, 선농탕, 설롱(렁)탕으로 변한 것이 오늘날의 설렁탕 유래로 전해진다. 임금이 친히 지내던 선농제사가 사라지자 민간단체인 선농제향보존위원회서 그 뜻을 이어 선농제 제향을 지내고 있는데 올해도 2011년 4월 30일에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선농단에서 제향을 지낸 뒤 참가한 시민들이 설렁탕을 나눠 먹으며 선농제의 의미를 새겼다.
* 독자 육철희 / 선비문화학회 사무국장, 신시민운동연합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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