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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 이유(李濡)
[본관] 전주(全州).
[영의정 재임기간] 제153대 영의정, 1712년 10월 25일~1713년 8월 24일.
[생졸년]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 수(壽) 76歲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의 후손이며, 이후재(李厚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형(李逈)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중휘(李重輝)이며, 어머니는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제153대 영의정(1712년 10월 25일~1713년 8월 24일)을 역임했다.
▲녹천 이유선생 초상화
▲녹천 이공 신도비
● 영의정 녹천 이공신도비명(領議政 鹿川 李公神道碑銘)
아! 한(漢)나라 조정에 현신(賢臣)이 많다고 일컬어지나 나라를 근심하고 공무에 힘쓴 자는 단지 채 정로(祭征虜) 한 사람이었으니, 애통해하는 그 임금의 말이 신하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근세에 보건대, ‘나라를 근심하고 공무에 힘쓴다〔憂國奉公〕’는 이 네 글자에 부끄럽지 않을 자는 오직 녹천(鹿川) 이 상국(李相國) 뿐이다.
공의 휘는 유(濡)이고, 자는 자우(子雨)로, 우리 세종대왕의 별자(別子) 광평대군(廣平大君) 휘 여(璵)의 후손이다. 증조 휘 후재(厚載)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완남 상공(完南相公) 이후원(李厚源)의 형님이다. 조부 휘 형(逈)은 장령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중휘(重輝)는 군수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모친 김 부인(金夫人)은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의 따님으로, 좌의정 청음(淸陰)선생 휘 상헌(尙憲)의 손녀이다. 공은 숭정(崇禎) 을유년(乙酉年, 1645, 인조 23) 5월 1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도량이 넓고 깊었으며 총명이 남달랐다. 판서공이 몹시 사랑하여 원대하게 되리라 기대하였다. 12세에 모친이 돌아가시자 어른처럼 집상(執喪)하였으며, 장성하면서 학업에 부지런히 힘써 문예를 일찍 성취하였다. 현종 무신년(戊申年, 1668, 현종 9)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분관되었다.
천거되어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가 친혐(親嫌)으로 시강원 설서로 옮겨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하였다.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고 중간에 시강원 문학과 병조 좌랑을 지냈다. 옥당에 천거되어 여러 차례 교리, 수찬, 부교리, 지제교를 지냈고, 사간원 헌납과 이조의 좌랑, 정랑을 거쳐 부응교와 사간으로 승진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678, 숙종 4)에 의정공[이중휘(李重輝)]의 상을 당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또 예문관 응교에 제수되었다. 조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가 반년도 못 되어 돌아와 응교에 제수되었다.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에 가례도감 도청(嘉禮圖監都廳)의 공로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나 아직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급이 환수되었다. 사복시 정에 제수되었다가 곧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임술년(壬戌年, 1682, 숙종 8)에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나가 민간에 이로운 것과 폐해가 되는 것을 힘써 살펴서 시행하고 혁파한 것이 많았다.
왕산탄(王山灘, 352Km나 되는 하천)가에 동창(東倉)을 세워 거주민들이 은택을 입었으며, 또 홍제원(弘濟院)에 공관을 세워 청나라 사신 응대에 편리하게 하자, 다른 고을에서도 따라 행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예조와 호조의 참의에 제수되었다.
명성대비(明聖大妃)의 초상에 공이 고부사(告訃使)에 충원되었는데, 당시 왜서(倭書)로 인해 변방이 걱정되어 자못 성곽과 해자를 보수하던 때였다. 공은 청나라에서 이 문제를 힐문할 것을 미리 염려하여 개인적으로 대답할 말을 준비하였다. 연경에 이르자 청나라 군주가 과연 이 일을 질문하였는데, 공이 즉시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사실 저들은 이미 영고탑(寧古塔) 수신(帥臣)의 상본(上本)을 통해 듣고서 시험삼아 물어본 것인데, 명확하고 솔직한 공의 답변으로 그 의심이 시원하게 풀려 질책을 면할 수 있었으니 청나라 사람들도 그 훌륭한 답변을 칭찬하였다. 처음 이 일을 논의할 때 김석주(金錫胄) 공은 지나친 우려라고 하였는데, 돌아올 때에는 “그 깊고 원대한 사려는 우리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찬탄하였다.
을축년(乙丑年, 1685, 숙종 11)에 조정에서 진휼하는 일을 논의하였는데, 이단하(李端夏) 공이 이 일을 맡을 사람으로 공을 천거하여 마침내 비변사부제조 겸 진휼청당상에 차임되었다.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체직되었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 승지가 되었다가 곧바로 또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구황(救荒: 흉년 따위로 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이들을 구제함) 정사에 마음을 다하니, 온 도의 백성이 그 은혜를 송축하였다. 체직되어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 즉 기사사화)에 화가 일어나 교외로 물러나 지냈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 환국 초기에 기용되어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평안도 관찰사에 발탁되었는데, 하직 인사를 올릴 적에 상께서 인견하여 면유(面諭)하였다.
또 서북 지방의 인재를 거두어 쓰라는 명이 내리자, 공이 가장 먼저 황순승(黃順承)과 이창겸(李昌謙)을 천거하였는데 모두 한 도의 명망 있는 인사였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 심한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었는데, 공이 적절한 방법으로 진휼한 덕분에 백성들이 살 수 있었다.
사소한 일로 파직되었다가 곧바로 서용되어 도승지에 제수되었는데, 공의 성적이 훌륭하다는 조정의 논의로 특별히 보릿가을까지 연임하게 하였다. 임기를 채우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다시 도승지에 제수되었다가 대사헌으로 옮겨 비국과 승문원 제조를 겸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77, 숙종 23)에 예조 참판을 거쳐 한성부 판윤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공은 좌윤으로 있을 때부터 송정(松政: 산림정책)에 마음을 쏟았다. 당시 걸인들이 성에 가득하자, 소나무를 벨 수 있는 허가서를 발급하여 그들의 생계를 돕고, 오래되고 썩은 소나무를 제거하고 어린 소나무를 보호하기를 청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입대(入對)하여 소나무 베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고, 또 송정을 범한 조정 관리를 논죄하여 처벌하니, 이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법을 어기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상께서 하교하기를, “아무개가 경조윤이 되니 송정에 매우 효과가 있다.”라고 하셨다. 청나라 사신이 이르자 원접사(遠接使)로 나갔다가 도중에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에 대신(臺臣) 박태순(朴泰淳)이 상소하여 연경에 구휼미를 요청하기를 청하자, 묘당에서 상의하여 결정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쌀을 싣고 오는데 사단이 거듭 일어나자 양사(兩司)에서 합계하여 대신(大臣)의 죄를 청하고, 공이 이를 봉행했다는 이유로 또한 파직하라고 청했으나, 상께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교외에 나가 사직하여 체직되었다가 얼마 뒤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들어가 숙배하자마자 단종부묘도감 제조(端宗祔廟都監提調)에 차임되고, 병조 판서로 옮겨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이해에 역병이 크게 창궐하여 백성이 거의 죽을 지경이었는데, 공이 시신을 매장하고 전염병을 치료할 방도를 아뢰고, 또 거느리고 있는 군문(軍門)의 장교를 선정하여 이들에게 각기 살피게 하니, 도성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기묘년(己卯年, 1699, 숙종 25)에 단종부묘도감 제조의 공로로 정헌대부에 오르고 지의금부사와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공이 병조를 맡은 뒤로 공도(公道)를 크게 넓혀 상벌이 알맞게 행해지니 군정(軍情)이 감복하였다. 이해 겨울에 조모 이 부인(李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공은 나이가 많고 지위도 높았지만 집상(執喪)이 더욱 확고하여 생강과 계피로 맛을 낸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장사 지내고는 그대로 여막에서 지내며 삼 년을 마쳤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공이 묘소 아래에 있을 적에 묘소의 산에 꽃이 많이 피었는데, 하루는 액례(掖隷)가 와서 꽃을 꺾어가면서 내명(內命)이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옛날 인조조에 상국 이시백(李時白)은 액례가 자신의 집에서 왜철쭉〔倭躑躅〕을 가져가려 할 적에 손으로 꽃떨기를 짓이기고서 간하였다.지금 내가 대간의 직임을 맡고 있으니 더욱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상소하여 완호(玩好)를 끊고 작은 일도 삼가야 한다고 경계를 올리니, 상께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칭찬하였다. 다시 병조 판서에 제수되어 군정(軍政)의 폐단을 극력 아뢰고 구포법(口布法)의 시행을 청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 28)에 판의금부사로 승진하였다. 상께서 계비(繼妃)를 책봉할 적에 특별히 공을 보국대부로 올리고 판돈녕부사에 제수하고서 이어 정사(正使)에 차임하였다. 공은 반드시 대신을 사신으로 보내는 전례를 들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또 특명을 받아 양역(良役)을 관리하고 해방(海防)을 감시하였다. 이조 판서로 옮겨 제수되고 수어사를 겸하였다. 양역을 변통하는 일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자,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기를 청하여 공이 민진후(閔鎭厚) 공과 함께 그 일을 맡았다.
공은 본래 성품이 온화하고 너그러우며 괴팍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조에서 인사를 주의(注擬)할 때에도 한결같이 공평하고 타당하게 행하여 시론(時論)에 거의 불평이 없었다. 정언 김만근(金萬謹)이 상소하여 이전의 일을 끌어와 공을 탄핵하는데 말이 매우 심하였다.
이에 공은 곧장 강교(江郊)로 나갔는데, 상께서 김만근을 고성 현령(固城縣令)으로 내치고 이어 비망기를 내려,
“이조 판서는 첫째도 공(公)이요 둘째도 나라이니, 그 환히 밝은 정성은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
라고 하셨다.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면유하시자, 공이 황공하여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뒤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열 차례나 상소하여 사직을 청했으나 상께서 윤허하지 않고 그때마다 연신 돈유하여 불렀다. 마침 상께서 원릉(園陵)에 행차하였는데, 공이 나아가 도로 왼쪽에 엎드리자, 상께서 주정소(晝停所)에 와서 기다리라고 명하셨다.
공은 “비록 이것이 특별한 은전이지만 거취를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는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대체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상께서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게 하자 부득이 들어와 숙배하였다. 상께서 명하여 인견할 때에 자신을 탄핵하다 쫓겨난 김만근의 석방을 가장 먼저 청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에 상께서 명(明)나라의 명운이 다한 해라고 하여 금원(禁苑)에 단을 설치하여 의종(毅宗)을 제향하였다. 이어 신종(神宗)에게 높이 보은하는 방도를 강구할 적에 공이 극진히 높이는 예를 써서 사직단의 제사 의식에 따라 제악(祭樂)을 쓰고 모혈례(毛血禮)를 행하기를 청하니, 상께서 그대로 따랐다.
을유년(乙酉年, 1705, 숙종 31)에 대신(臺臣) 강이상(姜履相)과 박휘등(朴彙登) 등이 도성을 수축하는 일로 죄안을 만들어 좌의정 이여(李畬) 공을 탄핵하였다. 이공과 같은 죄를 짓고서 죄를 면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고 공이 인혐하니, 상께서 억지로 나와 벼슬하게 하였다. 이해 겨울에 상께서 선위(禪位)한다는 하교를 내렸다.
공이 백관을 이끌고서 정청(庭請)하고 복합(伏閤)하고 거듭 입대하여 힘껏 간쟁하자, 상이 비로소 신하들의 청을 마지못해 따랐다. 얼마 뒤에 공이 명을 받들어 복상(卜相)하였는데, 상께서 일번인(一番人)을 등용하고자 했으나 공은 상의 의중을 따르지 않았다. 세 차례 가복(加卜)에도 모두 수용하지 않고 이어 엄중한 하교를 내리셨다.
승정원에서는 복역(覆逆)하고 옥당에서는 차자를 올려 명을 거두기를 청했으나, 상께서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한다며 꾸짖었다. 공이 교외로 나가 체직을 청하니 상께서 즉시 허락하였다. 규례에 따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에 성상의 즉위 30년을 기념하여 경하하고 연회를 올리는데, 상께서 공에게 술잔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공이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연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다시 도성을 나갔다. 여름에 상께서 별유(別諭)를 내리시기를, “지난가을에 머물기를 간곡하게 권했지만 경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부끄럽다. 경이 조정에 나온 뒤에야 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하고, 이어 함께 오라는 명을 내리자, 공이 어쩔 수 없이 다시 도성에 들어와 좌의정에 제수되고 내의원 도제조를 겸하였다.
공이 아뢰어 단종(端宗) 때의 충신인 교리 권절(權節)과 을사명신(乙巳名臣) 정황(丁熿)의 포증(褒贈)을 청하였다. 세자부(世子傅)로서 회강(會講)에 참석하여 환관의 화를 극력 말하였는데 말이 몹시 격렬하였다. 보덕 박행의(朴行義)가 진 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을 폄훼하자 공이 또 그의 그릇된 시각을 반박하였다.
가을에 대신(臺臣)에게 견책을 당하여 차자를 올려 인책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차자 가운데 ‘의심하고〔疑〕’, ‘노하고〔怒〕’, ‘비방한다〔訿謗〕’는 등의 말이 화평하지 못하다고 꾸짖으니, 공이 황공하여 사직 단자를 올리고 체직되었다. 이식(李鉽)의 옥사와 관련하여 적당하지 못한 비유를 쓴 탓에 성상의 뜻을 거슬러 도성을 나와 견책을 기다렸다.
마침 성상의 병환이 심해져 약원(藥院)을 옮겨 설치하였는데, 공이 이 소식을 듣고는 황급히 대궐로 달려갔다가 병환이 회복되자 도로 강교로 나왔다. 상께서 사관을 보내어 함께 돌아오도록 하자, 다시 명을 받들어 도성에 들어왔다. 대신(臺臣) 이동언(李東彦)이 부친상에 직접 반함(飯含)하지 않았다는 무고를 당하여, 상께서 극형을 쓰게 하여 얼마 뒤 옥중에서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께서 자못 후회하시어 대신들에게 이동언의 죄상을 공평하게 논의하게 하셨다.
이에 공이 헌의(獻議)하여 옥안(獄案)의 잘못된 단서를 낱낱이 논하는데 말뜻이 명백하니, 즉시 이동언의 억울함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키라고 명하셨다. 이전에 신완(申琓) 공이 북한산성의 축조를 청하자, 공이 명을 받들고 가서 그 합리성을 살핀 다음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효종께서는 일찍이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조지서(造紙署)의 입구를 막아 난리가 발생했을 때 이어(移御)할 장소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팎의 중성(重城)이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견고하여 남한산성에 비해 효과가 배 이상이 될 것이니, 국가를 온전히 보전할 계책에 이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북한산성을 내성(內城)으로 삼아 종묘사직을 옮겨 모시고, 탕춘성(蕩春城)을 축조하여 귀천(貴賤)의 부녀자들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축적한 양식을 모두 옮겨 들이게 한다면 수많은 적병이 쳐들어오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북한산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한데다 병사를 나누어 도성을 지킨다면 형세가 절로 강성해지고 근본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니, 반드시 먼저 붕괴될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또 10여 가지의 일을 조목조목 진달하니, 상께서 비답하기를,
“경이 원로대신으로서 진심으로 깊이 나라를 걱정하여 품은 생각을 차자로 올렸으니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라고 하셨다.
봉성(鳳城)을 조사하러 온 관원이 백두산(白頭山)으로 향하면서 우리나라에 길을 빌리고자 하자, 묘당에서 이를 허락하려 하였다. 공은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논하고, 이어 별도로 관원을 파견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일의 형세를 살펴서 편리하게 대처하기를 청하였다. 조정에서 이대로 모두 행하지 못했지만 식자들은 옳다고 여겼다.
처음 북한산성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 논하는 자들이 모두 도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도성을 수축(修築)하기로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론(異論)에 저지당하였다. 청나라의 자문(咨文)이 왔을 때에 또 북한산성 축조를 계획하고는 이어 의빈(儀賓)에게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성상의 뜻이 확고하게 정해졌음을 보이고 특명을 내려 공에게 주관하게 하였다.
공이 명을 받은 이후로 마음과 지혜를 다해 순조롭게 진행하여 국가 방어의 중대한 요충지가 되었으나 대중의 비방도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승진하여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령 서명우(徐命遇)의 상소로 무함을 당하여 도성을 나갔다. 상께서 누차 사관과 승지를 보내어 전유(傳諭)하여 속히 도로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더욱 간절하게 아뢰자 상께서 마침내 체직을 허락하였다. 공은 명을 받고서 곧바로 휴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오랫동안 머물며 병을 조리하였다. 또 간절히 치사(致仕)를 청하자, 상께서 손수 비답을 써서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성상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병을 무릅쓰고 대궐 아래로 나아갔다.
상께서 고례(古禮)에 따라 군신(君臣)의 복(服)을 행하고자 대신에게 물었는데, 공이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으로 대답하여 마침내 방상(方喪)의 제도를 정했다. 또 북한산성 축조의 편의를 논하여 21가지 일을 조목조목 기록한 책자를 올리고 다시 차자를 올려 시폐(時弊)를 힘껏 논하니, 상께서 모두 받아들였다.
금위영 도제조를 겸하였는데, 상께서 온천에 행행(行幸)하실 때 특별히 공에게 도성을 지키라고 명하였다.단의빈(端懿嬪)의 초상에서 복제에 관해 논의할 때 공은 본조(本朝)의 국제(國制)대로 행해야 한다고 대답하였고, 세자가 연복(練服)을 입는 것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자, 공이 연복으로 삼년상의 체모를 갖추는 것을 폐할 수 없다고 아뢰니, 모두 이대로 따랐다.
영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당시 북한산성의 일로 대관(臺官) 성진령(成震齡)과 유복명(柳復明)이 연이어 비난하는 통에 공이 본디 편안하지 못했는데, 민진후(閔鎭厚) 공이 또 글을 올려 탕춘성의 축조를 힘껏 논박하자, 마침내 명에 따라 조당(朝堂)에 모여 논의하여 축성하는 역사가 중지되었다.
공이 마침내 스스로 탄핵하기를,
“축성을 청하는 신의 상소가 묘당에 하달되었을 때에 여러 재신들에게 두루 보여 아무 이견이 없은 뒤에 시행하였습니다. 신이 마음과 힘을 모두 기울여 공역이 완성되어 가는데 이제 와서 중단시키고자 하니, 만약 중신(重臣)이 진작 한마디 하여 묘당에서 반대했다면 어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낭패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혼모(昏耄)한 까닭에 기미를 살피지 못하여 마침내 일을 그르치는 죄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는 모두 신의 죄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 도성을 나왔다가 어연(御宴)의 기일이 임박하였기 때문에 도로 들어왔다. 이해는 상의 춘추가 육순이 되는 해라, 태조(太祖)의 고사에 따라 기로소에 들어갔다. 친히 경현당(景賢堂)에 납시어 잔치를 베풀고 곧이어 기로소 신하들에게 금 술잔을 하사하고 또 기로소에 이원(梨園)의 법악(法樂)을 내리셨다. 공은 연회에 참석한 여러 공들과 함께 머리에 꽃을 꽂고 풍악을 울리며 술에 취해 부축을 받으며 나오니,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성상의 병환이 점점 위독해지자, 공이 밤낮으로 애태우며 매일 문안하는 반열에 나아가 추위와 더위를 무릅쓴 탓에 몸이 거듭 손상되었다. 가을에 갑자기 오른쪽 몸이 마비되고 말이 어눌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이후로는 계속 병석에서 지냈다.
경자년(庚子年, 1720, 숙종 46) 6월에 성상께서 승하하시자, 애통해하며 음식을 먹지 않아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듬해 7월 2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7세였다. 임종시에 반복해서 하신 말씀은 모두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었다. 여러 손자들을 나오게 하여 고하기를,
“내가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옛 서적을 많이 읽지 못했고, 또 사우(師友)를 따라 모시면서 견문을 넓히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평생의 한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를 경계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회를 중지하고 제사와 부의를 예제(禮制)대로 내리고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녹봉을 지급하였다. 광주(廣州) 광수산(光秀山) 선영의 해좌(亥坐)의 언덕에 예장하고, 정경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를 부장(附葬)하였다.
부인은 관찰사를 지내고 찬성에 추증된 진익(震翼)의 따님으로, 남편의 덕에 짝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수암(遂菴) 권 문순공(權文純公)이 부인의 묘지명을 지었다. 2남 2녀를 두었다. 현응(顯應)은 현감이고, 현숭(顯崇)은 군수이고, 사인(士人) 윤혜(尹寭)와 참군 원명일(元命一)이 그 사위이다.
손자 시중(時中)은 좌랑이고, 명중(明中)은 참봉이고, 최중(最中)은 진사이고, 존중(存中)은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교관으로 있다. 사위 윤혜의 계자(繼子) 상정(尙靖)은 판관이고, 원명일의 아들은 경조(景祚)이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선량하며 화락하고 단아하였으며 따스하고 너그러우며 겸손하고 신중하였다.
가정에서의 행실이 매우 훌륭하였다. 항상 선비(先妣)를 미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말이 미칠 때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자녀들이 어머니 곁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번번이 슬퍼하면서 “나만 홀로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즐거움을 얻지 못했단 말인가.”라고 탄식하였다.
계모 김 부인(金夫人)을 잘 섬겨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 차이가 없었다. 부인이 심한 고질병에 걸리자 공이 좌우에서 보살피며 마음과 힘을 다 쏟았다. 의원을 요청할 때면 말을 떼자마자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말씨가 정성스럽고 간절하였다.
또 약을 짓는 것이 정결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반드시 약방(藥房)에 찾아가 직접 약을 다듬어 올렸는데 여러 해 동안 변함없이 행하였다. 부인이 임종할 때 공을 돌아보며 탄식하기를, “모자로 지낸 20년 동안 두 사람이 모두 유감이 없다.” 하였다.
승중상(承重喪)에 거할 적에는 슬피 곡읍하는 모습에 옆사람들이 감동하였고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도 차마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였다. 선조를 받드는 정성도 극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동문(東門) 밖에 대군(大君)의 사당을 세운 뒤에 여러 선대의 선영에 비갈을 두루 세웠으며 다시 대군의 무덤 아래에 별도로 비석을 세워 각 파의 자손과 묫자리를 기록하였다.
형제들과의 우애도 매우 지극하였다. 둘째 아우가 풍비(風痹)를 앓자, 그를 위해 같은 마을에 작은 집을 사서 직접 수리하는 것을 감독하여 동생을 살게 하고서 공무가 없을 때면 매일 함께 단란하게 모였으며 맛있는 음식은 반드시 함께 나누었다.
막내아우 렴(濂)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더욱 잘 돌보았으니, 렴이 항상 말하기를, “우리 형님은 나와 실로 부자간의 은혜가 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를 잃고 가난하게 지내는 조카들을 가엾게 여겨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 풍족하게 길렀다.
이를 미루어 친척들에게도 정성을 다하여 병든 사람이 있으면 약을 보내주고 죽으면 장례를 보살펴주었으니 모두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는 마음의 발로였다. 어떤 문관이 죽을 때에 자신의 처자식을 부탁하자, 공이 이들을 더욱 돌보아 제사를 돕고 자식을 혼인시키는 등의 보살핌이 오래되어도 변치 않았다.
공은 항상 “사람을 죽이는 것은 노복이라도 절대 안 된다.”라고 말하였으니, 죄를 지어 매질하다가도 피를 흘리면 곧바로 그만두었다. 사납고 교활하여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반드시 쫓아내었다.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에 더욱 신중하여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어도 참고 또 참았으니, 점차 공부가 완성되어 집에 있을 때나 관직에 있을 때나 절대 지나친 행동이 없었다.
또 그 청렴한 절조를 항상 남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을 때 몸에 지닌 것이라곤 옷과 이부자리뿐이었으며, 큰 고을을 다스린 직후에도 자제들은 여전히 죽을 먹었다. 조정에서 벼슬한 50년 동안 전답을 늘리지 않았고 집도 보수하지 않았으며, 지위가 높아진 뒤에도 자신은 가난한 선비처럼 생활하였으니, 이는 본디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남을 대할 적에는 온화한 기운이 가득하였고, 몸을 나태하게 두지 않았으며 말은 반드시 신중하게 꺼내고 매사에 반드시 심사숙고하여 전혀 차질도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행하였으니 이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적었다. 폐단이 많은 정사를 개혁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는 것은 공에게 일상다반사와 같았다.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마음에서 조금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 어떤 때는 밥상을 대하고서도 밥 먹는 것을 잊고, 어떤 때는 촛불을 밝혀 밤을 새기도 하였다. 매번 방백(方伯)과 연수(連帥)에게 서신을 보내어 군인과 백성의 폐단을 듣고자 하였다.
하직 인사를 온 수령과 변장(邊將)을 만나면 반드시 그들이 다스릴 지역의 산적한 폐단을 기록해 보여주게 하였으며, 산천의 험지와 성지의 요새에 이르러서도 모두 눈에 선하고 마음에 환하게 알았다. 상께서 하문하는 것이 있으면 마치 모두 준비하고 기다린 것처럼 대번에 대답하였으니, 공이 국사를 자신의 임무로 삼은 것이 이와 같았다.
양역(良役)이 국가에 큰 폐해가 되자 헤아리고 강구하여 절목을 정하였다. 또 팔도의 환곡을 균일하게 적용하는 법을 정하여 묘당에 두니, 정연하게 조리가 있어 거행할 만하였다. 북한산성을 축조한 일은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이것으로 공을 비난하지만, 그 지극한 정성과 계획이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옛날의 이른바 “나를 알아주고 나를 죄준다.”라는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사관으로 있으면서, 주대(奏對)할 적에 상세하고 주밀하며 정성스럽고 간곡하던 공의 모습을 익히 보았으니, 대체로 오늘날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민익수(閔翼洙) 공이 또 일찍이 말하기를,
“이공이 우리 선친과 함께 국정을 다스릴 때 보낸 편지가 집에 가득 찰 정도인데, 나중에 세세하게 살펴보니 작은 쪽지에도 사적인 일을 언급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국사에만 정성을 쏟았다.”
라고 하였다.
아! 종신토록 집안일처럼 국가를 근심하였으니, 이러한 분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공이 돌아가신 이후 정미년(1727, 영조3)에 혜정(惠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경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중(時中)이 신도비를 세우면서 내게 명(銘)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기질을 보면 / 氣質觀人
강유가 각기 다르네 / 剛柔各殊
포용하고 너그러우며겸손하고 순종함은 / 含弘巽順
곤괘의 덕에 부합하네 / 坤德之符
저 편협한 자들은 / 彼哉褊隘
일개 소장부로다 / 一小丈夫
너그러이 남을 포용하니/ 休休有容
공이 이러한 사람이었네 / 公其庶乎
행실은 효성과 우애에 근본하였고 / 行本孝友
재주는 세상의 쓰임에 합당하였네 / 才合世需
만년에 임금의 지우를 입어 / 晩遇主知
국가의 요직에 올랐네 / 秉國之樞
국가를 위해 부지런히 힘써 / 勤勞王室
갈대를 가져오고 띠풀을 쌓았네/ 捋荼蓄租
밤낮으로 두루 헤아렸으니 / 早夜周度
장래를 위한 원대한 계획이었네 / 經遠之謨
나라를 근심하고 공무를 수행하니 / 憂國奉公
정성스러운 마음이 신뢰를 받았네 / 誠心攸孚
평탄하기 어려운 것이 일이라/ 難平者事
총애와 치욕이 잠깐 사이에 변했네 / 寵辱斯須
기어코 붙잡아두려 했지만/ 雖執仇仇
상유를 간절히 원하였네/ 願切桑楡
나아가나 물러가나 쉬운 일이나 험난한 일에도 / 進退夷險
한결같은 지조 변치 않았네 / 一節不渝
기로소의 성대한 연회 / 耆社高讌
백발에도 충심은 빛났네 / 丹心白鬚
황비에 해가 기우니 / 黃扉昃日
질장구 치고 노래하며 스스로 즐겼네/ 缶歌自娛
선왕께서 승하하시자 / 龍馭云遠
앞장서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네 / 恨不先驅
당화가 세상에 가득하니 / 黨禍溢世
만사가 슬프도다 / 萬事嗚呼
복이 있어 먼저 돌아갔으니 / 有福先歸
달사가 더욱 탄식하네 / 達士增吁
돈독하고 중후하던 그 기풍 / 風流篤厚
지금은 없다네 / 今也則無
광릉의 무덤에 / 廣陵之阡
우뚝한 비석 있도다 / 有屹龜趺
태사가 시를 지어 / 太史作詩
길이 전하기를 도모하네 / 不朽是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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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영의정 이공 신도비:
이 글은 이유(李濡, 1645~1721)의 신도비이다. 이유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이다.
[주02] 한(漢)나라 …… 하였다:
채 정로(祭征虜)는 후한(後漢) 때 정로장군(征虜將軍)을 지낸 채준(祭遵)이다. 채준이 죽자 광무제(光武帝)가 “어찌하면 채 정로
처럼 나라를 근심하고 공무에 힘쓰는 자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後漢書 卷20 祭遵列傳》
[주03] 송정(松政):
소나무 보호를 위한 산림(山林) 정책이다.
[주04] 상국 …… 간하였다:
이시백의 거처에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는 꽃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액례가 와서 성상의 명이라고 하면서 옮겨가려 하자, 이시
백이 꽃나무에 가서 뿌리째 뽑아 던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국세(國勢)가 조석(朝夕)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
주상께서 어진 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나무를 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차마 이 꽃나무로 임금에게 아첨하면서 나라가 망하
는 것을 볼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를 인조에게 아뢰었다.《顯宗改修實錄 1年 5月 3日》
[주05] 명(明)나라의 …… 해:
명나라는 1644년에 멸망하였는데, 그해가 갑신년이다.
[주06] 일번인(一番人):
당파나 이념이 다른 쪽의 사람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주07] 가복(加卜):
정승을 임명할 때 원임(原任) 의정(議政) 가운데 적임자가 없거나 수가 부족할 경우, 임금이 지목하거나 빈청(賓廳)에서 추천한 후
보자를 원단자(原單子)에 한두 명 더 추가하여 써넣게 하는 것이다.《六典條例 吏典 議政府 枚卜》《銀臺條例 吏攷 大臣》
[주08] 복역(覆逆):
명령 출납을 관장하는 승지들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왕명에 대해 출납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주09] 을사명신(乙巳名臣):
1545년(명종 1) 일어난 을사사화로 화를 입은 신하를 가리킨다. 인종이 죽자 새로 즉위한 명종의 외숙인 소윤(小尹)의 거두 윤원형
(尹元衡)이 인종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거두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대윤파에 가담했던 사림(士林)이 크게 화를
입었다.
[주10] 방상(方喪):
부모의 상을 입는 예로 임금의 상을 입는 것을 말한다.《예기》〈단궁 상(檀弓上)〉에 “임금을 섬기는 데는 직언(直言)으로 면쟁
(面爭)하고 숨김이 없어야 하며, 좌우에서 돌보면서 죽을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직임을 수행하고, 방상(方喪) 3년을 입는다.[事君
有犯而無隱, 左右就養有方, 服勤至死, 方喪三年.]” 하였다. 방(方)은 견준다는 뜻으로 바로 아버지의 상례에 견주어서 임금의 상
을 행한다고 한 것이다.
[주11] 단의빈(端懿嬪):
경종의 세자시절 빈으로 1718년(숙종 44) 세상을 떠났다.
[주12] 이원(梨園)의 법악(法樂):
이원은 장악원을 말하고, 법악은 어전악(御前樂)이다. 이원은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악공과 기생 300명을 뽑아 음악과 노래를
가르치던 부서이다.
[주13] 수암(遂菴) …… 지었다:
한국문집총간 151집에 수록된《한수재집(寒水齋集)》 권30에〈정경부인어씨묘지명(貞敬夫人魚氏墓誌銘)〉이 실려 있다.
[주14] 나를 알아주고 …… 죄준다:
《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나를 알아주는 것은 오직《춘추》이고, 나를 죄주는 것은 오직《춘추》
이다.[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 하였다.
[주15] 포용하고 너그러우며:
《주역》〈곤괘(坤卦 단(彖)〉에 “포용하고 너그러우며 빛나고 광대하다.[含弘光大]” 하였다.
[주16] 너그러이 남을 포용하니:
타인의 훌륭한 점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포용하는 것을 말하는데,《서경》〈진서(秦誓)〉에 “어떤 한 신하가 있는데, 그는 한결같
이 정성스럽기만 할 뿐 다른 특별한 재주는 없으나, 그 마음이 너그러워 남을 포용함이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남이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 자기가 지닌 것처럼 기뻐하고, 남에게 훌륭한 점이 있으면 자기 마음속으로 좋아한다.[如有一
介臣, 斷斷猗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17] 갈대를 …… 쌓았네:
《시경》〈치효(鴟鴞)〉의 “내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내 갈대를 가져오며 내 물건을 쌓고 모으느라 내 입이 모두 헌 것은 내게 아직
집이 없기 때문이라. 내 깃이 모지라지며 내 꼬리가 망가졌는데도 내 둥지가 위태롭거늘, 비바람이 뒤흔드는지라 내 급히 울부짖노
라.[予手拮据, 予所捋荼, 予所蓄租. 予口卒瘏, 曰予未有室家. 予羽譙譙, 予尾翛翛, 予室翹翹. 風雨所漂搖, 予維音嘵嘵.]”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나라를 위해 왕을 깨우치는 데 급급해 한다는 뜻이다.
[주18] 평탄하기 …… 일이라: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평탄하기 어려운 것이 일이다.[難平者事也]” 하였다.
[주19] 기어코 붙잡아두려 했지만:
《시경》〈정월(正月)〉에 “나를 원수마냥 붙잡아두고 나를 등용함에 힘쓰지 않는구나.[執我仇仇, 亦不我力.]”라고 한 데서 온 말
이다.
[주20] 상유(桑楡)를 간절히 원하였네:
인생의 만년을 잘 마치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장수 풍이(馮異)가 적미(赤眉)의 난을 토벌하는데 처음 싸움에서는 대
패하고 얼마 뒤에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격파하자, 황제가 글을 내려 위로하기를, “처음에는 회계에서 깃을 접었으나 결국에는 민지
에서 날개를 떨쳐 비상하니, 참으로 ‘동우에서 잃었다가 상유에서 거두었다[失之東偶, 收之桑楡.]’고 할 만하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後漢書 卷17 馮異列傳》
[주21] 황비(黃扉)에 …… 즐겼네:
질그릇 치며 노래한다는 뜻으로, 노년을 여유롭게 즐기는 것을 말한다.《주역》〈이괘(離卦) 구삼(九三)〉에 “기운 해가 걸려 있음
이니, 질그릇을 두드려 노래하지 않으면 대질을 서글퍼 함이다. 흉하리라.[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라는 말이 나
온다. 황비는 황각(黃閣)과 같은 말로, 한(漢)나라 때 승상(丞相)이 집무하는 청사의 문을 황색으로 칠했던 데에서 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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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李公神道碑。
嗚呼。漢廷號多賢臣。而憂國奉公者。獨祭征虜一人。其君哀念之言。至令羣臣懷慙。才難不其然乎。以余觀於近世。其無愧於此四字者。惟鹿川李相國乎。公諱濡字子雨。我世宗大王別子廣平大君諱璵後也。曾祖諱厚載。僉樞贈吏曹判書。卽完南相公之兄。祖諱逈。掌令贈左贊成。考諱重輝。郡守贈領議政。妣金夫人。同知光燦女。左議政淸陰先生諱尙憲之孫。公以崇禎乙酉五月一日生。幼而氣度沉遠。聰悟絶人。判書公甚愛之。期以遠大。十二歲丁母憂。執喪如成人。及長攻業勤劬。文藝夙就。顯宗戊申登文科。隷槐院。薦入翰苑爲檢閱。以親嫌移授侍講院說書陞司書。拜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間爲文學兵曹佐郞。薦玉堂屢爲校理,修撰,副校理,知製敎,獻納,吏曹佐郞正郞。陞副應敎,司諫。戊午遭議政公喪。旣吉又拜應敎。爲祖母乞養。爲成川府使。未半年還拜應敎。辛酉用嘉禮都廳勞陞通政。以未準格還收。拜司僕寺正。俄擢同副承旨。壬戌出爲楊州牧使。務察民間利病。多所罷行。立東倉於王山灘上。居民賴之。又立廨屋於弘濟院。以便策應北使。他邑亦效之。入爲禮,戶二曹參議。明聖大妃喪。公充告訃使。時有倭書。憂在邊圉。頗修繕城池。公預慮有詰問之擧。私講應對語。及至燕。虜主果以是發問。公卽據實以對。蓋虜已因寧古塔帥臣上本有聞。試以問之。而公所對明直。洞釋其疑。得免嘖言。虜人亦稱其善對。始議此事。金公錫胄以爲過慮。及還歎曰其深思遠慮。非吾輩所及也。乙丑朝廷議賑事。李公端夏擧公句管。遂差備邊司副提調兼賑恤堂上。拜江原道觀察使瓜褫。復入爲承旨。旋又出按湖南。殫心荒政。一道頌惠。褫拜大司諫。己巳禍作。屛居郊外。甲戌改紀之初。起拜兵曹參議。尋擢平安道觀察使。將辭陛。上引見面諭。且有西北人才收用之命。公首擧黃順承,李昌謙。皆一道之望也。時西路大飢。至於人相食。公賙賑有方。民得以不死。因微事罷。尋叙拜都承旨。朝議以公有成績。特命限麥秋仍任。秩滿拜大司諫。復拜都承旨。遷大司憲兼備局,槐院提調。丁丑田禮曹參判特授漢城府判尹。公自在左尹。已加意松政。時流丐滿城。請給帖許斫。以補生理。除去枯朽。護養穉松。至是入對。申嚴松禁。又論犯松。朝士抵罪。自後人人重犯法。上敎曰某爲京兆。松事殊有效。虜使至。爲遠接使。在途拜戶曹判書。戊寅臺臣朴泰淳上疏請請糶於燕。廟堂商確决定。及虜使領米來。事端層出。兩司合啓請大臣罪。以公奉行。亦請罷職。上終不允。公出郊辭褫。尋拜刑曹判書。纔入謝。差端宗祔廟都監提調。移兵曹判書兼知經筵。是歲癘疫大熾。民死亡且盡。公爲白掩骼療疾之方。又定所帶軍門將校各令察視。都下至今頌之。己卯用都監勞陞正憲兼知義禁府事同知成均館事。公自秉西銓。大恢公道。賞罰得中。軍情感服。是冬丁王母李夫人喪。公年位俱高。而執禮冞固。薑桂之資。不近於口。及葬仍居廬。以卒三年。服闋。還拜大司憲。公時在墓下。墓山多花。一日掖隷來取之。謂出內旨。公曰昔仁廟朝李相國時白。當掖隷之索取倭躑躅於其家。手碎花叢以諫。今吾方帶臺職。尤不可不言。遂上疏以絶玩好謹微獨獻戒。上奬以憂愛。復拜兵曹判書。極陳軍政之弊。請行口布法。壬午陞判義禁府事。上將冊繼妃。特陞輔國拜判敦寧府事。仍差正使。公以前例必遣大臣。辭不就。又以特命句管良役。監視海防。移拜吏曹判書兼守禦使。良役變通久未就。請設廳以釐正爲號。公與閔公鎭厚同管其事。公素性和厚。不喜矯激。臨政注擬。一循平允。時論多不平。正言金萬謹上疏。劾公拖引前事。語意至深。公卽逬出江郊。上黜補萬謹固城縣令。仍下備忘曰。吏判一則公耳。二則國耳。炳炳之忱。無愧古人。勉諭公還朝。公惶蹙不敢承命。俄拜右議政。十上章祈免。上不許。輒勤敦召。會上幸園陵。公進伏路左。上令來待晝停所。公以爲此雖異數。去就不宜自輕。謝病不進。人稱得體。及上遣承旨使之偕來。不得已入謝。上命引見。首請放還逐臣之論己者。甲申上以皇明運訖之歲。設壇禁苑享毅皇。仍講崇報神皇之節。公請用極崇之禮。倣社壇薦俎用樂。行毛血禮。上從之。乙酉臺臣姜履相,朴彙登等。以修築都城事爲案。劾左相李公畬。公以同罪倖免爲不安。引入。上勉起之。是冬有禪位之敎。公率百官庭請伏閤。再入對力爭。上始勉從羣請。旣而公承命卜相。上方欲進用一番人。而公不循上旨。凡三卜而皆不用。仍下嚴敎。政院覆逆。玉堂陳箚請收還。上以阿好責之。公出郊乞褫。上卽許之。例判西樞。翼年以卽位三十年。稱慶進宴。上命公進爵。公辭不獲入參。宴罷旋復出城。夏上別諭曰。去秋勉留勤懇。莫回卿心。至今愧恧。卿造朝而後予心可安。仍有偕來之命。公黽勉復入城。拜左議政兼內醫都提調。白請褒贈端宗時忠臣校理權節乙巳名臣丁熿。以世子傅入參會講。極言宦官之禍。語甚激切。輔德朴行義貶毁眞西山。公又辨論其非。秋被臺臣詆斥。陳箚引咎。上以箚中有疑怒訿謗等語。責以不和平。公惶恐尋單而褫。李鉽獄因引喩失當。忤上意。出城俟譴。會聖候添加。移設藥院。公聞之。蒼黃詣闕。曁復常。還出江郊。上遣史官使與偕來。復承命入城。有臺臣李東彥以父喪不親含。爲人所誣。上欲用極刑。尋瘐死。至是上頗悔。令大臣平議情罪。公獻議歷論獄案違錯之端。辭意明白。卽命雪寃復爵。先是申公琓請築城北漢。公承命往審便否。仍上箚略曰。孝廟嘗欲築北漢城。塞造紙署洞口。以爲臨亂移御之所。然則表裏重城。便作金湯之固。比之南漢不啻倍勝。國家萬全之計。孰過於此。今若以北漢爲內城。移奉廟社。築蕩春城。貴賤婦女。公私蓄積。並令移入。則敵兵雖多。無能爲也。旣據北山之險。分兵守都城。則形勢自壯。根本益固。必無先潰之憂矣。又條陳十餘事。上批卿以元老大臣。誠深憂國。有懷陳箚。感歎不已。鳳城査官向白頭山。欲借道於我。廟堂將許之。公箚論其不可。仍請別遣官勞問。觀其事勢。方便處之。朝廷不能盡用。而識者是之。初北漢議起。論者皆以爲都城不可棄。遂修築都城。未幾爲異議所沮。及北咨之至。又以北漢爲計。仍下御製詩于儀賓。以示聖筭牢定之意。特命公主管。公受命以來。殫竭心智。次第就緖。大爲國家保障之重。而衆咻猶未已。進拜領議政。無何被掌令徐命遇上疏構捏出城。上屢遣史官承旨傳諭。促令還入。公陳懇愈切。上乃許褫。公旣應命。旋請暇下鄕。久留調病。又懇乞休致。上手書寵答不許。値上候浸劇。力疾進詣闕下。上欲行君臣服古禮。詢及大臣。公以朱子定論爲對。遂定方喪之制。又進冊子論北漢便宜條錄二十一事。復上箚極論時弊。上並嘉納之。兼禁衛都提調。上幸溫泉。特命公留都。端懿嬪之喪議服制。公以國制對。有以世子行練爲疑者。公謂練具三年之體。不可廢。並從之。陞領中樞府事。時以北漢事。臺官成震齡,柳復明等相繼侵斥。公固已不安。而閔公鎭厚又上章力攻蕩春之築。遂命會議朝堂。停其築役。公乃自劾曰。臣疏之下廟堂也。遍示諸宰。皆無異議而後行之。臣費盡心力。功役旣完。而到今欲停罷之。若使重臣早有一言。廟堂防塞。則豈有公私狼狽之患哉。緣臣昏耄。未能燭幾。終陷於僨誤之科。此臣之罪也。仍出城。以御宴期迫還入。是年上春秋臨六旬。依太祖故事入耆老所。又親御景賢堂賜宴。耆老諸臣仍錫金杯。且命賜梨園法樂於本所。公與參宴諸公。揷花張樂。扶醉而出。一時榮之。聖候漸就危篤。公晝夜憂煎。日造起居之班。觸冒寒暑。積致傷敗。至秋忽覺右邊不仁。語澀神昏。自是連在枕席。庚子六月上昇遐。公哀痛廢食。疾勢加劇。以翼年七月二十九日卒。享年七十七。臨命諄諄。皆憂國語。進諸孫告之曰。吾早登科。不能多讀古書。又不能從事師友間。以廣知識。此吾沒身之恨。汝曹宜以此爲戒。訃聞輟朝。賜弔祭如儀。命給祿終三年。禮葬于廣州光秀山先兆亥坐之原。貞敬夫人咸從魚氏祔。夫人觀察使贈贊成震翼女。配德無違。遂菴權文純公銘其壙。男女各二人。顯應縣監,顯崇郡守。女士人尹寭,參軍元命一其壻也。諸孫時中佐郞,明中參奉,最中進士,存中進士壯元敎官,尹繼子尙靖判官,元之子景祚。公爲人端良愷悌。溫裕謙愼。甚有內行。常以不逮養先妣爲至痛。語及必泫然。見子女輩在母傍嬉戲。輒悲歎曰我獨何辜。不得此樂。善事繼母金夫人。愛敬無間。夫人嬰痼疾。公左右扶持。竭其心力。邀請醫人。淚隨言下。辭氣懇惻。又慮製藥不精。必步詣藥肆。手剉以進。累歲如一日。夫人臨絶顧公歎曰。爲母子二十年。兩無憾矣。其居承重喪。哭泣之哀。感動傍人。過其門者爲之躑躅不忍去。至於奉先之誠。靡不用極。旣營立大君廟於東門外。遍竪碑碣於累代先塋。復就大君墓下別立碑。記各泒子姓葬處。友愛深至。以仲弟患風痺。爲買小宅於一洞。親董修葺以處之。非有公故。日常團會。甘滑之味。必與共之。以末弟濂少失依怙。撫視有加。濂常曰吾兄於我。實有父子之恩。愍諸姪孤貧。分與俸祿而贍養之。推而及於宗戚。亦盡誠悃。人病則助之藥。死則恤其喪。無非出於惻怛之心者。有一文官將死。託其妻子。公爲加存恤。助其祭而婚其子。久而不替。常言殺人雖僮僕不可爲也。以罪杖之。見血則止。桀黠不從令者必逐之。尤愼於喜怒。有惡於意。忍之又忍。漸成工夫。在家在邦。絶無過擧。且其淸愼之操。常畏人知。使燕而歸。隨身惟衣衾。才經大藩。子弟猶食粥。立朝五十年。田園無所增。家舍亦不葺治。位崇高而自奉如寒士。此固人所難能者。而接人和氣藹然。惰慢不設於身。出言必愼重。遇事必爛熟思量。知其無一差失而後始處之。故鮮有敗事。至於革弊政恤民隱。是公平日茶飯。雖於家居之時。未嘗少忘于心。或對案而遺餐。或燒燭而達宵。每貽書方伯連率。求聞兵民弊端。如見守令邊將之來辭。必令錄示封內積瘼。以至山川險阻城池關隘。靡不瞭然於心目之間。上凡有所詢問。輒隨以應對。若皆準備以待者。其以國事爲己任如此。良役爲國中巨害。參量講究。定爲節目。又定八路糶糴均一之法。藏諸廟堂。井井有條理。可擧而行。若北漢事。世多以此咎公。然其至誠區畫。亶出爲國。眞古所稱知我罪我者矣。記余少時簪筆。慣見公奏對之際。安詳周愼。誠意懇欵。類非今人所可及者。閔君翼洙又嘗言李公與吾先人同秉國政。書牘幾乎溢宇。而後來細檢。雖赫蹏之微。無一言。惓惓者國事。嗚呼。終身憂國如家若此老者。何處得來。公歿後丁未。賜諡惠定。躋享于景宗廟庭。時中將竪大碑。來乞銘。銘曰。
氣質觀人。剛柔各殊。含弘巽順。坤德之符。彼哉褊隘。一小丈夫。休休有容。公其庶乎。行本孝友。才合世需。晩遇主知。
秉國之樞。勤勞王室。捋荼蓄租。早夜周度。經遠之謨。憂國奉公。誠心攸孚。難平者事。寵辱斯須。雖執仇仇。願切桑楡。
進退夷險。一節不渝。耆社高讌。丹心白鬚。黃扉昗日。缶歌自娛。龍馭云遠。恨不先驅。黨禍溢世。萬事嗚呼。有福先歸。
達士增吁。風流篤厚。今也則無。廣陵之阡。有屹龜趺。太史作詩。不朽是圖。<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