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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2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Good Bye List’ - 4. 행함이 없는 믿음
본문 : 야고보서 2장 17절(14~17절)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새번역>
야고보서는 신약성경 27권 중 20번째 순서로 등장하는 성경입니다. 분명히 27권의 신약 성경에 들어갈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에 정경으로 포함이 되어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서가 신약 27권 중 한 권으로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의아해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사도 야고보도 아니고 상대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은, 복음서에서는 주로 예수님을 핍박하던 이였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썼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딱 두 번만 이름이 나올 정도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큰 이유였습니다. 또한 주로 하는 이야기가 도덕에 관한 것, 즉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음을 강조하는 복음을 중심으로 성경을 배워 왔던 사람들의 눈에는 야고보서가 율법책으로 보일 때도 많았습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바울의 ‘이신칭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도대체 야고보서가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틴 루터의 후배로 20세기 독일의 신학자였던 마틴 디벨리우스는 야고보서에 ‘신학이 없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었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자면,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은 성경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야고보서에 대해서 폄하하고 싶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멋있고 복잡한 말로 반대하고 있더라도 이유는 아주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 새번역>
이 말씀이 소위 ‘꼴도 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너무 싫기 때문입니다. 왜 싫은지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행함 없이 ‘믿음’만 가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은 믿음으로 굳건해 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행함이라는 녀석이 자꾸 끼어들어서 내 믿음이 죽은 믿음으로 변할 수 있다고 정죄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영지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였는데 이 영지주의자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서, 육신적으로는 어떻게 살아도 구원과 관계없다고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솔깃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영지주의가 초대 교회에 도덕적으로 심각한 폐를 끼치고 있던 시기이니 더더욱이나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중세 교회에까지 이어졌고, 어찌 보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행함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믿음’에 대한 설교가 주를 이루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둘째, 솔직히 행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만 원하지 행함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수많은 사도들처럼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만을 가지고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행하기 시작하면 진짜 십자가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행함은 힘들기보다는 귀찮기 때문이고, 행함은 나를 위해 써야 할 나의 노력을 다른 것을 위해 써야 하고, 쓰고 싶지 않은 시간과 돈과 열정을 소모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교회에 틀어 박혀서 성경책만 읽으며 천국 갈 날을 기다리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지금도 믿음지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굳이 유럽에 있는 수도사들을 찾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도 세상을 떠나 기도원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고, 그 곳에서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 곳에서만 복음이 있다고 생각하며, 집도, 가족도 내팽개치고,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그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실천하러 산을 내려가셨다는 구절은 도무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할 때면 딴청을 피우며 그 사마리아인이 오지랖이 넓고, 시간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폄하하기 바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몇몇 믿음지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기도원에 틀어박혀서, 실상은 말씀이 아닌 설교를 듣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기도가 아닌 주문을 외고 있는 것이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은 충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행함이 필요하지 않은 영역에 살고 있으니 행함은 점점 불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행함을 공격해야 하고, 야고보를 공격해야 하고, 심지어 성경인 야고보서를 공격해야만 자신들의 믿음 지상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네. 사실입니다. 행함은 쉽지가 않습니다. 행함은 부담스럽습니다. 행함이야말로 십자가를 지는 것 같고, 나를 부인해야 하는 것 같고, 다 버리고, 당연히 목숨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실제적 삶인 것 같아서 두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분위기가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믿기만 하면 됐지 교회는 왜 가고, 예배는 왜 드리고, 기도는 왜 해야 하며, 봉사는 쓸데없는 일이고, 구제는 아까운 일이 되어 버리면서, 그래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이라는 엄청난 불신앙의 소유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팩트 체크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야고보는 모든 사람이 피하고 두려워 할 만 한 어마무시한 엄두도 못 낼 행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 행함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그런 분위기로 말씀을 가려 버린 것입니다. 말씀은,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이야기하는 행함은 아주 작은 부분에서의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될, 마땅히 할 수 있는 행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 모두는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가 든 예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2장 15~16절, 새번역>
이 구절을 쉬운 성경을 통해 더 쉽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 된 사람이 옷이나 먹을 것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몸을 따뜻하게 하고 먹을 것을 좀 많이 드십시오”라고 말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 쉬운성경>
지금 야고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사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즉, 지금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동역자들 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동역자 중 형제나 자매라고 부르는 사람이 옷이 없어 헐벗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서로를 향해 답변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옆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분이 발가벗고 있고, 밥도 못 먹은 채 굶주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무관심한 채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지금은 설교 시간이니 그런 모습을 보고도 설교에만 집중하면 되겠습니까?
정말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까? “형제자매님, 옷도 없고 배도 고프시지만 그래도 평안히 가십시오. 옷은 없지만 저기 분리수거장에서 신문지나 박스로라도 몸을 따뜻하게 하시는 게 어떠세요? 추우시면 제자리 뛰기라도 하시면 몸에 열이 좀 날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다 배고픈 존재 아니겠습니까?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배부르다 생각하시면 배가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라는 것을 주면 먹을 것을 주는 편의점이 이 근처에 있으니 가서 배부르게 먹으면 될 것 같습니다.” 정말 이렇게 말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입고 있던 외투라도 벗어서 덮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장에 컵라면이든, 빵이든 사다 허기를 해결해 주지 않겠습니까? 그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야고보는 지금 이런 예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절대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초대교회는 중산층에 속한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충분히 나눌 옷과 음식이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실제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동역자들이, 같은 교인들이 당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황당해 보이는 예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이 말만 하고, 정작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행함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은, 얼마든지, 누구든지 실천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 교회 안에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고보는 이런 행함조차 없는 믿음을 어떻게 믿음으로 불러 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저라도 그 시절 그 모습을 보았다면 분명하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 새번역>
믿음을 중시하던 이들은 구약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잘 서술하여서 믿음의 기초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던, 야고보서를 읽기 직전까지, 바로 전 순서이기도 한, 너무도 사랑하는 히브리서의 이 말씀은 까먹었거나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해석을 자신이 편한 대로 해석하다보니, 하고 싶지 않은 행함에 대해서는 일부러 읽지도 않았고, 무시하는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행함이 없는 믿음’도 너무 좋게 써 준 것입니다. 사실은 행하려고 하는 마음조차 없는 믿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이 기록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 새번역>
믿음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던, 분명히 믿음과 행동이 하나였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이 행함으로 어떻게 완전하게 되었는지, 믿음은 반드시 행함과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행하려고 하는 마음조차 없던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과 행함, 행함과 믿음은 두 가지의 명제가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믿음은 행함을 포함하고 있는 동사이고, 행함은 믿음을 포함하고 있는 명사입니다. 우리는 믿음은 명사, 행함은 동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동명사가 되는 것입니다. 따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한 가지 단어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결코 떼어 놓고 써야 할 말이 아니라 반드시 함께 사용해야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바친 행위, 라합이 정탐꾼들을 믿음으로 살려 보내준 행위, 이 외에도 수많은 믿음으로 한 행위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재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현재 오늘 우리에게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 삶과 Good Bye, 작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행함은 하기 싫다는 생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게으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도록 작별의 순간을 더 빠르게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빠른 작별을 위해 중요한 화두인 사랑과 관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024년 우리 교회의 표어는 바로, ‘사랑과 관심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이 표어를 정할 당시만 해도, 믿음과 행함은 분명히 하나였습니다. 그런 한 해로 만들어 갈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사랑과 관심이라는 믿음의 영역이, 실천이라는 행함과 잘 연결되어 이어져 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과 관심이라는 영역조차도 도달하지 못했을까요? 실천을 하려면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사랑과 관심이 없어서, 내 옷을 벗어주고, 먹을 것을 대접하고, 말뿐이 아닌 실천이 어려운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사랑과 관심은 있는데, 충분한대, 실천하고 싶은 행함의 마음은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서 헐벗고 있는 형제나 자매가 보이십니까? 아니면 자신의 삶만 보이십니까?
내 옷을 벗어 주거나, 나누어 줄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런 마음이 있다면 된 것입니다. 마음이 있다면 벗어 주시면 됩니다. 나누어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따뜻하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서 허기를 느끼고 있는 형제나 자매가 보이십니까? 아니면 오로지 나의 채움만을 위한 삶이십니까?
내가 먹을 것을 나누어 함께 드실 마음이 있으십니까? 콩 한 쪽 나누어 먹으면 서로 배고프기만 하니 아예 한 쪽 전부를 기꺼이 내어주시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있다면 된 것입니다. 수저를 하나 더 놓으면 됩니다. 내가 반만 먹으면 됩니다. 넉넉하다면 지갑을 열면 됩니다. 넉넉하지 않다면 내가 먹을 것을 나누면 됩니다. 그렇게 배부르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알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나를 통해 그에게 흘러가 따뜻해지고, 배불러짐으로 그 이도 다시 점차 평안을 찾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의 아주 작은 행함을 통하여서, 내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나온 그 실천을 통하여서 진짜 평안을 빌어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소용이 있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35~40절, 새번역>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행함을, 행함이 있는 믿음을 이렇게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내 작은 믿음을 가지고 아주 작은 실천을 하더라도 그 일이 하나님께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반드시 이 마태복음 25장 본문과 함께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죽은 믿음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숨 쉬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동역자 여러분! 아직 망설이고 계십니까? 뭔가 ‘거대한 행함’이라는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계십니까? 부담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운 행함이라고 배워오셨습니까?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결코 야고보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실천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모두가, 누구든지, 언제라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있는 쉬운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믿음과 행함이 필요합니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 되어 있던 모든 지난 삶이여! GooD ByE! 그러므로 이 말씀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살아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1장 22절, 새번역>
결단 찬양 - 사랑을 구하는 사람 + 사랑의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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