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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寨構(구채구) 여행기
구채구는 중국발음으로 주짜이꺼우(九寨沟,Jiǔzhàigōu)로 사천성 북부에 걸쳐있는 명승지다.
이곳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1970년대에 이곳에서 일하던 티베트인 삼림 벌채 노동자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하는데
다만 풍경만 좋을뿐 워낙 오지에 사람조차 살 수 없는 곳이라서 사람의 눈에 뛰지 않았을 것이다. 하기사 넓디넓은
중국의 땅 중에 이렇듯 우연히 발견 된 곳이 어디 이곳뿐이랴?
저 유명한 시안(西安)의 진시황 병마용갱 도 1974년도에 농사꾼이 우물을 파다 우연히 발견한 것 아니던가 ?
그러고 보면 세상 일이란 이렇듯 우연이 필연처럼 나타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은 흔하지 않다.
우리가 구채구 여행을 계획한건 작년 부터인데 인원모집이 그다지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15명정도는 되리라 여겼던 것이 9명 밖엔 못 채웠고 그나마도 출발 6일전에 한사람이 지병문제로 취소를 하여 만 부
득 8명이 가게 되었다.
혹자는 중국을 땅이 넓고 이민족이 많으며 풍경이 좋은 나라로만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거기에 더 보탤 것이 한둘이 아니다.
중국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요 문화와 역사의 나라이며 그야말로 관광자원이 억수로 많은 나라이다.
우리가 가는 구채구가 속해 있는 사천성(四川:쓰촨)은 삼국지의 촉나라(蜀) 지역이요 당시의 도읍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성도
(成都: 청뚜 Ch'eng-tu)로서 오늘날의 쓰촨성 성도가 된 것이다.
아무튼 그 외지고 벽진 곳에서 조조의 거대한 위나라와 맞싸우느라 제갈량(諸葛亮)인들 오죽했으면 죽기기를 쓰고 싸우다
전쟁터 오장원에서 죽었을까 이 말이다.
이미 제갈량은 그 험한곳에서 지키기는 유리하나 천하를 도모하기에는 어렵다는 걸 익히 알았건만 끝끝내 기산((祁山)에 일
곱 번 출정하여 눈물겨운 전쟁을 치룬 역사의 발원지가 성도라 하면 이해가 가겠는가?
마속으로 하여금 가정에다 이러이러하게 군사를 둔 치라 일렀건만 그 군령을 어기고 패전하여 국력이 급전직하로 기울어질
때 자신이 가장 총애했던 그 출중한 인재 마속을 울면서 목을 첬으니 세상은 그 일을 泣斬馬謖(읍참마속)이라 했다.
제갈공명은 그런 인물이었다.
중국대륙이 실크로드를 개척해서 서역과 교역을 하였음은 우리가 일찍이 중등시절에 익히 배워온 바인데 그런한 연유로 이
곳 사천(四川)땅은 감숙성과 청해성과 더불어 중국대륙 서부의 최전방이요 역대 전쟁지역으로서 수천년을 이민족과 싸워온
피와 시신으로 뒤 덮힌 땅이라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는 곳이다.
저 유명한 고선지 장군도 바로 이곳을 지나 신장위구르지역에서 싸웠고 漢,唐왕조가 모두 이곳을 지키고 빼앗기 위한 전쟁
을 계속해 온 땅이다. 또한 이곳에서 부터 중앙아시아 일대에 서식하던 말들이 모두 명마로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모두 이
를 차지하기위한 정책을 국력을 기울이다시피 했는데 그것은 곧 군사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중국은 서역을 통해야만 중앙아시아를 넘어 인도, 중동, 유럽과의 교역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 생명길을 지키고 확보하는 것, 그 길이 바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이며 이를 개척하고 수호하기위해 수백만의 군사가 죽
어갔으니 북동쪽에서 우리 민족과 싸워온 중국의 역사는 어찌 보면 가벼운 역사요 조족지혈에 불과할 뿐이다.
중국은 대략적으로 북방은 시경(詩經)을 남방은 초사(楚辭)를 문장의 벼리로 삼는데 전자는 공자(孔子)가 후자는 굴원(屈原
)이 집필했거나 수집한 중국 최고의 문학서라 할 것이다. 즉, 공자는 노나라 사람이요 굴원은 초나라 사람으로 남북이 갈린
다
또한 북방은 광활하고 거칠어 인간성이 호방하여 영웅이 많이나고 남방은 산이많고 따스해서 사람이 재주가 많고 영악하여
사업가나 장삿꾼이 많은 지리적 특성이 있다한다.
중국의 역사는 대략 이렇게 논한다.
고대 하-은-주-진-한나라까지 내려오던 왕조가 한나라 말기에 조조가 위(魏)를 세웠고 조조의 모신 사마휘의 손자 사마염
이 나라를 빼앗아 진(晉)을 세웠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북방의 이민족에게 나라를 잃고 동쪽으로 피신하니 이것이 바로 동진
(東晉)이요 도읍이 난징 즉 양자강변의 남경이다.
이때부터 남북방이 조각조각 갈라져 5백여년을 거처 隨-唐나라가 통일하기까지의 역사를 어찌 다 말하랴.
하여간 역사는 그 시대를 일컬어 위진남북조시대 오호십육국시대라 칭한다.
참고로 우리 고구려가 허구헌날 싸운 나라는 漢(한)나라요 그 이후 북조의 왕조들과 隨(수),唐(당)과 싸운 것이다.
이제 이만큼 했으니 역사 이야기는 여기서 접고 본격적인 관광 이야기를 해야겠다.
2016.5.20.(금) 출발 하는날 아침부터 푹푹찌는 더위다 정부는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뉴스에 파리를 출발 카이로로 가던 이집트 여객기가 66명을 태운체 지중해에 추락했다고 발표 하였는데 테러 가능성이 높다
하며 이로 인해 공항의 검문검색이 한층 강화 되어 예정시간보다 30분 앞당겨 5시로 미팅시간을 당겨 달라하여 긴급히 회원
들에게 알렸다.
박정애 친구가 수원으로 온다하여 월드컵 갈비로 1시까지 와서는 이하순,이용천,박정애,이종국 4명이 점심식사후 호텔캐슬
옆 리무진 터미널로가서 이용자 남편을 만나 짐을 넘겨받고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헤서 윤병주,김덕호,이종벽,이용자 친구들과 합류하여 중국 성도행 아시아나기에 올랐다.
오랜만의 해외 여행이다.
한껏부푼 마음은 비록 캄캄한 밤중을 나는 기내이지만 창공을 박차는 대붕의 기분에 견줄까 그런 마음인데 밤 11시경에 성
도(城都)공항에 내렸고 곧바로 현지가이드 정복길씨를 만나 안내를 받았다.
그는 어머니는 조선족이고 아버지가 한족이라는데 형이 한국에 살고있고 조선족으로로 신고되어 있으며 자신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한족으로 남아 있다한다. 내년쯤에는 한국을 꼭 한번 가보고싶다 했다.
일찍이 사천땅은 2008년도에 대지진이 있었는데 그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곳이 문천(汶川)으로 공식집계된 인명피해가 사
망이 7만, 부상자가 3십7만4천이요 실종자가 1만8천 여명인데 사실은 그 이상의 피해가 났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의 보
도란 자타가 공인하는 정부당국위주의 통제된 언론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런 곳을 가 본다니 마음 설레이고 궁굼함이 가중되는 기분이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성도(城都) 쌍류(雙
流)공항에 내렸고 한밤중에 8명이 숙소 한곳에모여 환담하고 술한잔 하니 그때가 밤 2시여서 이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 잠
을 잣다.
관광 첫날은 무후사(武侯祠)로 갔다. 이곳은 일찍이 제갈공명(諸葛亮)을 모신 사당이다.
무후란 서촉(西蜀) 조정이 내린 시호(諡號)로써 정작 논하자면 충무후(忠武侯) 사당이란 말이 된다.
제갈량은 지금으로부터 1,800여년전의 인물이지만 천하가 모두 존경하는 전략가요 명석한 정치가이며 충신인데 약 1,300
여년전 두보(杜甫)가 안사(安史)의 난을 피하여 이곳 성도로 왔을 때 그는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만고
충신 제갈량의 사당 앞에 엎드려 한편의 시를 지어 읊으니 천하에 절창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도록 뭍 위인열사들로 하여금
함께 눈물짓게 한다.
蜀相(촉상) / 杜甫(두보)
丞相祠堂何處尋 (승상사당하처심) 승상의 사당을 어디에서 찾으리요
錦官城外柏森森 (금관성외백삼삼) 금관성 밖 잣나무 우거진 숲속이라네
映階碧草自春色 (영계벽초자춘색) 섬돌에 비친 푸른풀은 봄볕을 띠는데
隔葉黃鸝空好音 (격엽황리공호음) 나뭇잎 사이 꾀꼬리 소리만이 공허하구나.
三顧頻煩天下計 (삼고빈번천하계) 삼고초려에 감읍하여 끝없는 계책을 다하얏고
兩朝開濟老臣心 (양조개제노신심) 2대를 섬겨 창업과 번영을 꾀했으니 노신의 충심이러라
出師未捷身先死 (출사미첩신선사) 군사를 일으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長使英雄淚滿襟 (장사영웅루만금) 길이 천하영웅들로 하야금 소매로 눈물 적시게 하는도다.
두보의 대표적 작품인 이 시는 전형적인 七言律詩(칠언율시)로 森, 音, 心, 襟이 모두 정해진 押韻(압운)으로 또한 모두가
一聲(일성)에 平聲(평성)에 해당하는바 과연 詩聖(시성)이란 칭호가 名不虛傳(명불허전)인가 하다.
세상의 인심이란 황제였던 유비보다 제갈량을 더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돌아 간지 이미 오래다.
두보의 시중에는 잣나문지 측백나무인지 표현을 했지만 무후사 경내에는 대나무 기타 여러 종류의 관목들로 우거져 있는걸
보면 천여년전 과는 좀 격세지감이 있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漢小烈帝(한소열제) 유비의 능을 둘러보고 三義祠(삼의사)를 둘러보았다.
당초 유관장 3인이 유비의 집이 있던 涿縣(탁현) 樓桑村(누상촌)에서 도원결의 하고 몸을 일으켰다.
무후사 제갈량의 사당에 들르니 기산에 출정할때 2대황제 유선에게 표를 올렸던 저 유명한 出師表(출사표)가 벽면에 음각돼
있는데 그것은 송나라 명장 岳飛(악비)가 쓴것으로 전출사표의 내용으로 천하에 명문장이다.
그런 정황들을 소설 삼국지 속에 쾌속의 필름을 돌려가며 둘러보고 옛 거리를 재현시킨 금리거리로 나아가 구경도 하고 꼬
치구이도 맛을 보았다.
곧이어 구채구로 이동하는 데 길이 엄청나게 밀린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주말에 명승지를 찾아가는 마음이야 무에 다르랴!
요즘 체리가 한창이라 그걸 따러가는 사람이 유독 많아 길이 밀린다는데 체리를 사서 먹어보니 먹을만 했다.
우리가 탄 전용버스는 성도시내에서 土龙路 - 天河路를 달려나가 고속도로에 진입 汶川을 향하고 달렸다.
12시경에 岷江(민강)을 건너는데 물살이 급한게 양자강의 상류요 지류란다.
본래 중국인들이 큰 내를 이름 할적에 양자강을 “江”이라 호칭했고 황하를 “河”라 불렀다.
그러므로 揚子江이 黃河보다 크다는 뜻에서 長江(장강)이라 부르는 것이니 그 의미가 깊음을 알 것이다.
심심풀이로 이야기한 江과 河에 대한 설명은 이만 접는다.
지독하게 밀리는 지루함을 술을 마셔가며 달랬는데 우리 버스기사 참으로 성미 꽤나 급해서 경적 많이 울리고 요리조리 급
회전도 많이 하더라.
그 눈물의 고장 汶川에 들려 체리.바나나,자두를 사먹고 8년전 쓰촨 대지진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라는 설명을 들으
며 자연조화의 위대함에 경외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곳 원주민들은 羌族(강족)이라 하며 그 옛날 중국에 내침해 왔던 오랑캐의 일부가 남아 정착한 민족으로 주로 산
간,고원에 정착해 살며 인구는 약 30만이 넘는다한다.
중국이 고대로부터 주로 오랑캐를 일컬을 때 南蠻, 北戎, 西羌, 東夷라 하는데 이 강족이 바로 그중 하나이며 동이는 바로 우
리나라 민족이다.
험준하기 이를데 없는 岷山은 최고봉이 7,700m에 달하는데 모두가 天山의 일맥으로 岷江이 발원한단다.
점심때 김치찌개가 나와 바이쥐우(白酒)2병을 100위안에 사서 함께 마셨더니 한결 노는 기분이 났다.
밤 10시경 구채구에 도착 호텔에 투숙했다.
5월 22일 이날은 비가왔다.
나와 룸메이트 이종벽이 조금 늦게 버스에 올라 구채구로 갔는데 그곳에서 나와 김덕호 친구가 일행들과 떨어져 한참만에
합류했다.
온통 우산을 들고 있는터에 한발자국 앞도 볼수가 없었고 그때 가이드는 일행을 우측으로 돌려나간걸 우린 직진했고 그걸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튼 중국인 관리요원에게 우리 가이드와 전화연결을 해주어 바로 찾을 수 있었고 마침 김덕호 친구가
여행일정표를 갖고 있었기에 전번을 알 수 있어 다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말로만 듣던 구채구 경내에 들어섰다.
비는 오지만 수정폭포, 오화해, 진주탄 폭포를 보는데 탄성이 절로 나온다.
물빛이 푸른 물감을 쏟아 부은 듯 하기도 하고 어느 것은 노랗고 또 어느 것은 갈색을 띤다.
아마도 눈이 녹아내려 오며 물속에 분포한 여러 광물질들이 반사되어 내는 물빛이라는 말이 옳은 듯하다.
오는길에 雪茶(설차) 전문매장에 들렸고 천석장욕 발맛사지 1만원추가 각질 써비스를 받았더니 시원했다.
그리고 저녁에 공연을 구경갔는데 강족들의 차마고도와 전쟁을 내용삼은 극과 당태종의 문선공주가 토번국으로 정략혼의
희생이되어 출가하는 극을 보고 또 문천대지진의 참상과 극복을 주제삼은 극을 보았다.
알고보면 이곳 사천땅은 중국의 邊塞(변새)에 해당하나 서역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하여 실크로드의 관문이 되어 天山北路(천산북로)와 天山南路(천산남로)의 징검다리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토번이던 오랑캐 강족이던 중국과 마찰이 없을리 있었겠는가 ?
당나라 晩唐때 잠삼이 지은 변새시의 내용은 자못 황량하고 처연함이 압권인데 이곳 변방의 풍광을 배경삼음이 과연 그러했
을것이고 궂이 저 嘉峪關(가욕관)의 사막과 설산의 대칭이 아닐지라도 시심은 그러함이 가함에 나는 강력 동의 하는 바이다.
또한 그 문화가 찬란했던 당왕조 시절보다도 더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전에도 한나라 무제가 하도 변경을
침략하는 흉노를 달래기 위해 정략적으로 시집보낸 王昭君(왕소군)도 천하의 절색이 었는다데 중국의 골치아픈 변경이 바
로 이런곳이었다니 자못 이해가 간다.
지금도 중국은 신장위구르지역 문제를 라싸를 정점으로 이곳까지 한 묶음으로 연계시켜 국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북삼성인
흑룡강,요녕,길림성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북공정과 함께 말이다.
이교도라 하는 라마교도와 회교도가 가장 많은 곳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 말도 이만 접는다.
극 관람후 야크고기로 특식을 요청해서 나가서 먹고 숙소로 돌아와 당일의 저녁값, 극장값, 내일의 전신맛사지 값을 모두 치
루고 나니 약 20만원정도 남았다. 그곳 현지에선 무조건 위엔화의 교환가치를 한화 200원으로 치는데 중국 돈을 그만큼 환
전 아니한게 손해다. 독주를 마셔 그런가 속이 않좋다.
5월 23일 맑은 날씨다.
오늘은 黃龍으로 간다. 춥다하여 옷을 껴입고 등산복 자켓을 입었다.
가는 길에 安龙超市(안농차오시) 편백나무제품 매장에 들렸다. 超市(차오시)는 수퍼마켓을 뜻하는 말이다.
황룡에 이르러 두통약과 산소를 전원 구입해서 나누어 주고 정상까지 케이블카 타고가서 약 7km를 걸어서 가는데 종국이
중간에 사잇길로 내려가게 하고 나머지만 정상코스를 돌아 내려갔다.
그곳 역시도 설산에서 눈이 녹아내려 곳곳에 沼(소)를 이루고 계단식 潭(담)을 이루었는데 奇異(기이)함을 더한다.
산소를 여러번 들이마시고 걷자니 조금 견딜만했으나 워낙 멀어서 그런가 힘들었다.
귀환길은 황룡에서 버스로 1시간정도를 달려 천주사현에서 맛사지 받고 松潘古城(송번고성)을 지나갔다.
그곳 고성 역시 유서깊은 역사의 현장이라 보고가고 싶은데 윤병주가 그냥 가자하는 바람에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茂县(무현)으로 달린다. 가는 길 내내 민둥산 같은 거대한 산들이 내어준 산자락 끝으로 강을 따라 달린다.
무현의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풀고 나머지 돈을 처분할 의론을 하니 참깨를 사주기로 결정, 쫑파티는 6월4일 12시에 이종국
이 점심을 내기로 했고 동창회 정기모임은 7월2일 7시로 결정했는데 모두 장소는 수원월드컵갈비다.
5월 24일 조식후 우리들이 탄 전용버스는 茂县(모현)을 출발 汶川(문천)을 지나 成都(성도)를 향해 달렸다.
오는 도중에 가이드가 석가장이라는 호텔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는데 깡패 사장과 군벌간의 세력다툼에서 절대적 우위를
실증시킨 군장의 이야기는 과연 중국다운 일화 아니랴.
성도 톨게이트에 들어설 때 길 바닥에 一路平安이란 입간판을 여러개를 쭈욱 세워놇은게 인상적이었다.
성도에서 우측방향 雙流机场(쌍류비행장) 방면으로 靑水河(청수하) 이정표가 눈에 띈 때가 10시 7분경이다
버스는 다시 승기로를 달리고 성도제1고속도로 至 낙산,신진,아안 방면으로 질주했다.
이따금 眉山(미산) 이정표가 있는걸 보면 혹시 峨嵋山(아미산)은 아니던가 궁굼 했는데 모를 일이다.
한참후에 아미산,낙산이 함께 표기된 출구로 나와 우회 직진해 곧 낙산에 도착 햇다.
소형보트를 타고 낙산대불을 강에서 바라본다. 당나라때 90년에 걸처 완공했다는 거대 석불입상은 산의 바위를 다듬어 만든
걸작이다. 정말이지 몇시간을 달려와 고작 10분을 보자고 하는 일이라니 좀 아쉽지만 어쩌랴. 부처님을 뵙는 일인데 ~ 그래
그런가 윤병주가 돈을 더 주고 강 한바퀴를 더 돌고나왔다.
돌아올 때 대나무 제품 매장에 들렸고 참깨 매장에 들려 5kg, 35,000짜리 1포대씩을 사 나누어 가졌다.
저녁식사 후 변검쑈를 보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공항에서 출국때 아주 잊지못할 낭패스러운 일을 당해 창피스럽고 후회막급하다.
가이드가 누누이 말하기를 자기가 주는 단체비자(A4용지 1장)를 여권과 함께 제출하면 된다며 당부했다.
다시 묻기를 이거면 되느냐 하니 재차 그렇다며 걱정말고 안녕히 가시라 하여 나도 안심하고 모든 소지품까지도 캐리어에 넣고 출국을 시도했으나 아뿔사.... !
중국 공안이 나를 멈춰 세우고 말인즉 정본을 달라한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 아시아나 항공 여승무원을 붙잡고 사정을 말하니 그가 통역을 해주고 이미 작별한 정복길 가이드를
들어오라 했다. 자세히 말을 들어보고 자초지종을 살펴보니 가이드가 준건 사본이고 정본은 내 캐리어 가방 속에 둔 것인데
일이 이리된 것이다. 부랴부랴 중국 공항직원이 내 짐의 보관증을 달라더니 비행기 짐 싣는 곳으로 달려가 가까스로 내 캐
리어를 찾아와 지퍼를 여니 그곳에 단체비쟈 정본이 있다. 다행이었다.
그게 없었다면 8명 모두가 억류되어 나오지 못할 뻔 한 사건으로 참으로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그 소요된 시간이 무려 1시간은 되었나싶은데 일은 직사하게 해 놓고 막판에 우수꽝스럽게 일이 꼬여 모양을 그슬려놓는 바
람에 아주 맛이 씁쓸한 여행이었다.
그냥 그 정본을 꺼내서 가지고만 있었더라도, 가이드가 그것이면 다 된다는 말만 안했어도 이런 개망신을 당할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한데 온 친구들 한데 체면구기는 일이 되고 말았으니 후회스럽다.
결과가 이렇게 되고 보니 차라리 아니한 일만 못한 건 아닌지 자존심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제 다시는 할리도 없는 총무가 무슨 이유를 대랴.
애당초 나는 이 여행기를 동창회 카페에 올리려 했었다. 하지만 아니하겠다. 이렇게 다짐했는데 어이하랴.
저 司馬遷(사마천)은 죽음보다도 더욱 견디기 힘든 궁형(남근절단 형벌)을 당하고도 오히려 史記(사기)를 완성시킨 위인이
다. 내 무엇이 더 이상 두렵고 부끄러울 이유가 있겠는가?
내게 잘못이 있다면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게 말못이요 더 나아가 내 스스로 미리 챙기지 아니한 잘못이 있으니 그게 실
수라면 옳은 지적이지만 양심을 부끄럽게 한 일은 아니기에 핑계겸 항변이요 그런 까닭에 이 여행기를 당당히 카페에 올리
겠다는 나의 辨(변)인 것이다.
오늘 새벽에 귀가해서 모든 회계정리를 하고보니 잔액 28,234원이 남아 지출증빙서를 마감 지었다.
거듭 여행에 동참해 주었던 8명의 친구들과 그 밖에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신 동창여러분들께도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이 여행기를 하루를 묵혀 두었다가 각고의 망설임 끝에 싣는 바이다.
2016년 5월 25일
문정중학교 제17회 동창회 총무 李江村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