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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6 -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침략자 노르만족 바이킹과 싸우다가 카페 왕조로!
카롤링거(카롤루스) 가문의 프랑크왕국는 840년에 3대왕 루도비쿠스(루트비히 1세) 경건왕이 죽은후
세 아들이 내전을 치른 결과 843년에 베르됭조약으로 이탈리아, 동프랑크(독일) 및 서프랑크로
갈라졌으니 서프랑크(프랑스)는 샤를(카롤루스) 2세 치하에서 발전하다가 884년 카를로만 2세가
사망하자 이복동생 샤를 3세는 5살 어린아이였기에 왕위는 동프랑키아의 왕 카를 3세가 차지합니다.
888년에 카를 3세가 죽었지만 샤를 3세는 9살이었으니 왕위는 네우스트리아 후작인
로베르 가문의 외드에게 돌아갔는데, 892년부터 지지자들이 외드의 왕위 정당성
에 도전했고 893년에 랭스 대주교는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3세의 축성식을 거행
했는데 동프랑키아왕 아르눌프의 지원을 받은 외드는 샤를 3세의 세력을 압도했습니다.
898년 1월 로베르 가문의 외드는 정당성이 부족한지라 사망하기전 샤를 3세를 계승자로 지목하고
죽으니 19살 샤를 3세는 751년 초대 프랑크왕 피핀 3세로 부터 치자면 프랑키아 6대 왕위에
오르는데... 로타링기아 귀족들의 충성에 힘입어 강력한 왕권을 추진하였으나 지방 분권적인
귀족들과 충돌하고 취약한 왕권으로 노르만족 바이킹들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합니다.
10세기초 노르만 데인족의 롤로는 운명을 함께할 자들을 모아 잉글랜드를 급습했고 이듬해
프랑스의 리주를 약탈했는데... 이후 노르만족 바이킹은 600척의 배로 루아르강을
따라 낭트까지 올라가며 기옌과 앙주를 점령하고 주력은 센강을 따라 올라와 루앙을 점령
하고는 진군해 파리로 쳐들어가 시테섬에서 위그 카페의 증조부 강성공 로베르를 죽입니다.
샤를 3세는 911년 대규모의 노르만족이 침입하면서 파리와 샤르트르를 공격한 것이니 샤를 3세
가 이끄는 군대는 8월 28일 샤르트르 인근에서 승리를 거둔 후, 노르만족 수장인 롤로에게
센강 하구 지역 솜강에서 생마로 성문 까지를 정착지를 수여하며 브루타뉴도 노르망디공작
의 봉토로 내어 주는 대신 자신에게 군대를 지원하고 충성을 할 것을 제안하니.... 지방
분권화 되어 가는 왕국 내에서 샤를 3세에게도 강력한 군사 지원 세력이 등장한 것을 의미합니다.
롤로가 이끄는 노르만인 바이킹들은 샤를 3세와 충성신서를 맺고 생클레르쉬르앱트 협약으로
제안받은 곳에 정착했으니 노르만인들이 정착한 지역의 이름은 현재 ‘노르망디’ 라고 불리는
데.... 또한 롤로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샤를 3세의 딸 지젤(기셀라) 과 결혼하는데 롤로는
파리 귀족 로베르에게서 성을 받아 로베르라 칭하며 노르망디와 브르타뉴를 통치하니 도시
를 재건하고 수도원을 보수했으며 땅을 갈고 도둑을 없앴다고 하니 보기드문 훌륭한 왕입니다.
같은해 동프랑키아에 속했던 로타링기아가 샤를 3세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으니 동프랑키아
에서는 아르눌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4세가 동프랑키아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한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열여덟의 나이로 전사하니 이때 루트비히 4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프랑키아의 귀족들은 프랑켄 공 콘라드를 왕으로 선출하였습니다.
루트비히 4세 및 카롤링거(카롤루스) 가문에 대한 충성이 강했던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동프랑키아
왕국에서 이탈하여 자신들의 왕으로 같은 카롤링거 가문인 샤를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니
이렇게 루이 2세 당시에 동프랑키아에게 내주었던 로타링기아 지역은 다시 서프랑키아에 병합됩니다.
샤를 3세는 자신에게 충성을 보여준 이 로타링기아 제후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외드에게 쫓길 때에도 그를 보호해 준 세력이 서프랑키아에 속한 로타링기아
귀족들이었으니, 샤를 3세는 과거 메로빙거 왕조 당시의 프랑크 왕국의 영역만큼 영토를 확대합니다.
문제는 이때부터 로타링기아 귀족들과 왕비 프레데륀의 인척들이 그의 최측근을 이루면서 왕국 전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시작했으니, 메로빙거왕조 클로비스 당시와 일치하는 영토상의 정체성과
유일한 카롤링거 후손이라는 자부심, 서쪽의 노르망디와 동쪽의 로타링기아의 강력한 지지 등은 샤를 3세
로 하여금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추진하도록 했지만 이는 지방분권적인 귀족 세력들과의 충돌을 의미했습니다.
917년 왕비 프레데륀이 사망하자 샤를 3세는 작센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작센과 종족적 친밀관계
를 유지하고 있던 브리타니아 웨식스 왕국의 에드비주와 결혼하였으며 그리고 920년에는 대를 이을
아들 루이 4세가 태어났는데, 919년 비카롤링거 출신의 동프랑키아의 왕 콘라드가 사망하자 예전에
확장왕 카를 3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유일한 카롤링거 후계자로서 동프랑키아의 왕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동프랑키아의 제후들은 919년 회의를 소집하여 작센공 하인리히 1세를 동프랑키아의 왕으로
선출하니, 샤를 3세 이전에 서프랑키아 제후들에게 왕의 역할이 노르만인들의 방어에 있었듯이
이제 동프랑키아 제후들도 마자르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왕을 필요로 하였는데
샤를 3세는 작센공 하인리히 1세와 충돌하였고, 920년에 하인리히 1세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합니다.
이를 계기로 서프랑키아에서는 샤를 3세에 반대하는 제후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과거에 충성을 보였던 많은 제후들이 911년 이후에 전개된 측근 위주 정치 때문에 그를
신뢰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니.... 대표적으로 샤를 3세의 지지자였던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2세의 아들 라울은 외드의 동생인 로베르 1세와 동맹을 맺고 샤를 3세와 대립합니다.
921년에 라울은 로베르 1세의 딸 엠마와 결혼 하였으며 922년 부터 양측 사이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는데.... 하지만 샤를 3세는 라울과 로베르 1세의 군대에 밀려 로타링기아로 도주하였고, 이를 틈타
로베르 1세가 922년 6월 29일 서프랑키아의 새로운 왕으로 선포되고 랭스대성당에서 축성식을 거행후
병력을 증강한 로베르 1세의 군대는 923년 6월 15일 수아송으로 진격해 샤를 3세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전투 초반에 샤를 3세의 군대가 로베르 1세에게 치명타를 가하는데, 로베르 1세는 병사들 눈에 뛰도록
하얀 수염을 투구 밖으로 내 놓았으니 이게 표적이 되어 전사하고 말았지만 로베르 1세의 장남 위그
의 기지와 지도력으로 샤를 3세의 군대는 로베르 1세의 군대에 패배하고 말았으니 전장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샤를 3세는 롤로에게 노르망디군, 즉 노르만족을 이끌고 자신을 구원하러 올 것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 라울의 군대가 롤로의 군대를 가로막았고, 샤를 3세는 다시 피신해야 했는데
특히 롤로를 불러들인 것은 서프랑키아 전체에 그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키고 말았으니 노르망디
에 정착하기는 했지만 다른 제후들 사이에 수십년간 서프랑키아를 괴롭힌 노르만족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이방인 노르만족을 서프랑키아의 내전에 끌어들인 꼴이었기 때문입니다.
923년 7월 13일 서프랑키아의 제후들은 로베르 1세의 사위이자 부르고뉴 공작인 라울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그리고 바로 나흘 후인 17일에 도망다니던 샤를 3세는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의 두번째 왕비인 에드비주(에드비게)는 923년
샤를 3세가 포로로 붙잡히자 아들 루이 4세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영국의 웨식스 왕국으로 건너갑니다.
이후 샤를 3세는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의 볼모가 되었고, 에르베르 2세는 새로운 왕
라울에게 샤를 3세의 석방과 세력 규합을 암시하면서 자신의 정치력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었으며..... 그러는 사이 929년 10월 7일 샤를 3세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샤를 3세의 별칭인‘단순한’의 의미는 중세의 맥락에서 ‘순진한’ 또는 ‘바보 같은’ 의 의미가
아니라 ‘정직, 진솔, 솔직, 담백함’ 의 성격을 의미하니 그가 말년에 보여준 정치적 실패를
비웃기 위해 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솔직 담백한 성격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것입니다.
이러한 ‘단순성’은 이후 13세기 성자인 성 프란체스코를 수식하는 용어이기도 하고, 그의 생애를
그린 조토의 회화를 설명하는 용어이기도 한데.... 하지만 근대 이후의 많은 문헌들은
그의 정치적 실패와 폐위를 들어 ‘단순’의 의미를 ‘멍청함’으로 해석하여 이미지화하곤 했습니다.
로베르 1세는 네우스트리아 후작 로베르 강성공의 둘째 아들로 888년 형 외드가 서프랑키아의
왕위에 즉위하자 가문의 영지들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898년에 외드가 사망하고 샤를 3세
가 즉위한후 샤를 3세의 실정이 지속되자 그는 921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샤를 3세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고 922년 왕위에 올랐지만 샤를 3세와의 전쟁 도중 923년에 전사합니다.
로베르 1세는 923년 6월 15일 수아송으로 진격하여 샤를 3세를 공격했는데 전투
초반에는전사하면서 불리한 상황에 처했으나... 장남 위그의 기지와 침착한
지도력은 로베르 1세 세력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이후 서프랑키아의 대귀족
들은 로베르 1세의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라울 Raoul 을 왕으로 추대 하였습니다.
라울 Raoul 은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2세의 아들로 922년 샤를 3세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고,
923년에는 로베르 1세의 뒤를 이어 서프랑키아의 왕에 즉위했는데.... 프랑스 역대 왕 중에
유일하게 메로빙거, 카롤링거, 카페 왕조에 속하지 않는 다른 성씨의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울 즉위 초부터 노르만족은 샤를 3세를 지지한다며 침략해오고 아키텐 공작 윌리엄은 메로빙거왕조를
재건하겠다며 침입하며, 마자르족 헝가리인들은 상파뉴를 피괴하며 거기다가 샤를 3세를 볼모로 한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의 위협에 시달려 936년 초에 쇠약해 죽으니.... 위그 카페는 잉글랜드
와 노르망디 공작의 압력으로 영국 웨식스왕국에 피신한 샤를 3세 아들을 받아들이니 루이 4세 입니다!
라울은 921년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으니 카롤루스 왕조 초기부터 유력한 귀족인 보종 가문 출신으로
프로방스 지역에 부르고뉴 왕국을 세웠던 보종 5세가 큰아버지인데, 서프랑키아에서 부친인
리샤르 2세는 샤를 3세의 지지 세력이었으나.... 로타링기아 귀족들로만 구성된 측근 정치를
통해 구 지지 세력들을 소홀히 하자 로베르 1세와 연합해 922년 샤를 3세에 대한 봉기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같은 해 라울과 로베르 1세는 샤를 3세를 폐위시켰고, 로베르 1세가 서프랑키아의 왕이 되었지만
923년 샤를 3세와의 전투에서 로베르 1세가 전사하자.... 라울은 서프랑키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한편 샤를 3세는 그와 동서지간인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에게 붙잡힙니다.
라울은 메로빙거-카롤링거-카페 세 왕조에 속하지 않는 프랑스왕으로 기록되는데 라울이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 이유는 로베르 1세의 딸인 엠마와 결혼했기 때문이었으니, 물론 로베르 1세의
아들 위그가 왕위에 오를수도 있었지만... 여덟살이나 어린 위그는 영특하게도 왕위를 거절
하였고 자신의 영지 확장과 더불어 대귀족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쪽을 선택합니다.
라울은 외드나 로베르 1세와 마찬가지로 비(非)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혈연적 정통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왕국을 이끌어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서프랑키아의 귀족
들이 로베르 가문이나 부르고뉴 가문을 선택한 데에는 취약한 왕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지방
분권적인 세력을 보장받으려는 속셈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외침들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924년에는 전 왕인 샤를 3세에 대해 충성을 맹세했던 노르만족 바이킹인 노르망디 공작 롤로
가 뒤늦게 샤를 3세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거병하였는데..... 라울은 이에 대해 영토를 더
수여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한 평화조약을 통해 롤로의 거병을 간신히 무마시킬 수 있었습니다.
로타링기아(로렌) 지역을 되찾으려는 동프랑키아의 왕 하인리히 1세가 군을 이끌고 로타링기아를 공격
했는데, 라울은 하인리히 1세와 전투를 벌이기 보다는 평화협상을 통해 그의 첫 공격을 무마시켰으나
925년 하인리히 1세는 재차 공격을 시도하였고, 결국 손쓸 틈 없이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키아에 병합
되었는데 알사스~로렌지역은 훗날 보불전쟁과 1,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뺐고 뺏깁니다?
다른 한편 서부 지방에서는 924년 부터 노르만인들이 재차 서프랑키아를 위협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 라울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다가 이들이 루아르 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깊숙이
있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위협하자 본격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이들에 대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동쪽에서는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 출신인 마자르족(헝가리)이 동프랑키아를 지나 서프랑키아 동부 경계
까지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에 라울은 프로방스왕 루이 3세와 함께 랭스와 부르고뉴 등지에
침입한 마자르족을 격퇴시킬 수 있었는데 헝가리가 독일을 거쳐 프랑스까지 침입해 온게 놀랍습니다?
925년에는 랑 백작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때 라울의 지지 세력이었던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가 자신의 아들 위그와 오동을 위해 이 지역을 요구하기 시작
했으니..... 그리고 자신이 구금해 놓고 있는 샤를 3세를 협상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샤를 3세를 석방하겠다는 에르베르 2세의 협박 앞에 라울
은 928년 에르베르 2세에게 랑 백작령을 수여하였는데.... 하지만 929년 샤를 3세가 사망
하자 에르베르 2세는 인질을 잃었으니 더 이상 라울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기 힘들게 됩니다.
930년경 부터 라울은 왕국 전역에 걸쳐 자신의 왕권을 어느 정도 확립할 수 있게 되었으니 930년에는
롤로 다음으로 노르망디를 계승한 기욤(윌리엄) 1세가 라울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서북부 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931년 부터 라울은 네우스트리아의 후작 위그와 함께 에르베르 2세를
공격해 에르베르 2세와 그의 아들들에게 양도했던 영지들을 회복하고 935년 평화조약을 얻어냅니다.
이때에도 노르만인들과 마자르인들의 침략이 간헐적으로 지속되었지만 라울왕은 자신의 지지
세력들, 특히 부르고뉴 공작 세력 및 로베르 가문과 함께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으니 이로써
그의 치세 말년에는 9~10세기 동안 지속되던 내우외환이 어느 정도 잠잠해질 수가 있었습니다.
라울왕은 피부병에 시달리다 936년 1월 15일 사망하지만 아들이 요절했으니 동생이자
부르고뉴 공작인 위그가 왕위를 주장하였으나, 로베르 1세의 아들인 네우스트리아
의 후작 위그 대공은 2번 연거푸 자신의 왕위 계승권은 묻어둔채 웨식스에
머무르고 있는 샤를 3세의 아들 루이 4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강력히 천거 합니다.
위그 대공의 태도는 조조나 사마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처럼 섣불리 허명을 얻기보다는 서프랑키아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인내하는 전략으로 해석되는데... 루이 4세를 내세움으로써
다른 귀족들과의 마찰을 줄일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왕권을 취약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위그 대공에게는 왕이라는 허명보다 왕국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이 중요했습니다.
루이 4세 Louis IV 는 서프랑키아의 왕 샤를 3세가 반란군의 포로가 되자 어머니 에드비주를 따라
잉글랜드로 건너가 성장하였으며 936년 서프랑키아의 왕 라울이 죽자 네우스트리아 후작 위그
의 천거로 왕위에 올랐는데, 실질적인 권력은 위그 대공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치세
초기부터 로타링기아와 노르망디의 전통적인 지지 세력들을 규합해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동프랑키아왕 오토 1세와 위그 대공의 연합으로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으니 940년을 전후
로 오토 1세가 강성해진 위그를 견제하기 위해 반대로 루이 4세를 지원하면서, 루이 4세는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으나 954년 뜻하지 않은 낙마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루이 4세는 서프랑키아의 왕 샤를 3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가 두 살이 되던 922년에는
샤를 3세가 서프랑키아의 귀족들에 의해 퇴위당하고 923년에는 왕이 귀족들에게 포로로
잡히자 모후인 에드비주는 그를 데리고 친정인 영국의 웨식스왕국으로 피한 것이었습니다.
루이 4세가 2살 때에 도피한 잉글랜드는 오랜 기간 동안 분열되어 있던 앵글로~색슨 7개의
왕국들이 하나의 잉글랜드 왕국으로 통합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고, 드디어 924년 외가인
웨식스~머시아의 왕 애썰스탄(재위 924년 ~ 939년) 이 통일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애썰스탄왕은 샤를 3세의 왕비였던 에드비주의 오빠로 루이 4세에게는 외숙부가 되는데 929년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에게 붙잡혀 있던 부왕 샤를 3세가 사망했으나 부르고뉴
공작 라울이 서프랑키아의 왕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머무르고 있던 루이
4세가 왕위를 주장하기는 어려웠는데, 936년 라울이 사망하자 서프랑키아의 제후들은
네우스트리아 후작 위그 대공을 중심으로 잉글랜드의 루이 4세를 왕위 계승자로 결정합니다.
권력을 장악한 네우스트리아의 후작 위그 대공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겠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매사에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성격 탓으로 보이니... 위그는 부친 로베르 1세의 때 이른
죽음은 물론 다른 경쟁 귀족세력들의 압박으로 부터 정당성 없는 왕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허명에
불과하고 오히려 실질적인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봅니다.
936년 루이 4세는 서프랑키아로 건너와 열여섯살의 나이로 서프랑키아의 왕위에 올랐지만 잉글랜드에서
고(古)영어만 사용했던 루이 4세는 서프랑키아에서 통용되던 고프랑스어나 라틴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네우스트리아 후작 위그 대공이 후견인을 자처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때 터 위그 대공은‘프랑크인들의 공작’이라는 특별하면서도 공식적인 칭호를 부여받게
되었고, 마치 메로빙거 왕조 말기의 카를 마르텔과 같은 입지를 다지게 되었는데... 루이 4세는
자신이 위그 대공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게 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만은 않았으니,
이후 루이 4세는 위그 대공의 세력과 그의 후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는 지방분권화된 제후들 사이의 경쟁 관계를 이용해 위그 대공의 권력 확대를 저지해 보고자
했지만 이러한 방책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 궁극적으로 왕권 강화에 입각한 왕국의 통일과는
무관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전통적으로 카롤링거(카롤루스) 왕조에 충성
스러웠던 두 세력, 즉 로타링기아와 노르망디를 자신의 권력 강화의 근거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먼저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로타링기아(로렌)였으니..... 939년 이 당시 동프랑키아 왕국에
속하게 된 로타링기아 제후들은 카롤링거 왕조 대신 들어선 작센 제후 출신의 왕 오토
1세에 저항하였고, 아버지 샤를 3세에게 그랬듯 루이 4세에게도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제후들의 수장이었던 기젤베르트가 오토 1세와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자, 루이 4세는 기젤베르트의
부인이자 오토 1세의 누이 제르제르주와 결혼하고 로타링기아를 점령했으니... 로타링기아를 중심
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에 위그 대공과의 결렬을 의미했지만 940년 동프랑키아왕
오토 1세는 위그 대공과 협력하여 로타링기아를 공격하고 랭스까지 쳐들어외 루이 4세를 압박합니다.
이때 연패를 거듭한 루이 4세는 랑(Laon) 시에 고립되었고, 오토 1세는 서프랑키아 내분의 중재자
로서 루이 4세와 위그 대공 간의 평화를 중재하였는데, 위그 대공의 부인은 에드비주로 그녀는
오토 1세의 여동생이었으니.... 오토 1세의 누나 제르베르주는 루이 4세와, 여동생 에드비주
는 위그 대공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서프랑키아에 대한 오토 1세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집니다.
샤를 3세의 지지 세력들을 끌어모으려는 루이 4세의 시도는 노르망디로 향하게 되었는데
942년 12월 노르망디 공작 기욤(윌리엄) 1세가 암살당하자 아들 리샤르 1세는 열두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 4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노르망디를 장악하고자 했으니,
노르망디 귀족 에를뤼앙을 섭정으로 임명하면서 노르망디에 자신의 기반을 구축해 나갑니다.
하지만 945년 노르망디를 방문한 루이 4세는 위그 대공이 보낸 자객의 습격을 받았으니 에를뤼앙은
암살을 당했고, 루이 4세는 노르만족장 하이그롤트와 면담 장소로 향하다 위그 대공의 수하들의
매복에 걸려 체포되니.... 왕자들을 볼모로 한 루이 4세 석방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도중에
왕비 게르베르가의 오빠인 동프랑키아왕 오토 1세의 개입으로 위그 대공은 루이 4세를 복권시킵니다.
루이 4세의 왕권은 점차 유명무실해졌고 실질적인 서프랑키아의 최고 권력자는 위그 대공
이지만 위그가 메로빙거 왕조 말기의 카를 마르텔과 다른 점은 그의 권력이 어디까지나
동프랑키아의 오토 1세에 의존적이었다는 점이며.... 또한 최고 권력이라고는 하지만 지방
분권화된 서프랑키아에서 위그 대공의 권력이 작용하는 지역은 북부 프랑스에 국한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그 대공이 직접 왕위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다른 한편으로
오토 1세는 서프랑키아에 대한 전반적인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프랑키아의
분열을 이용하고자 했으니.... 그는 위그 대공의 세력이 루이 4세를 압도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948년을 전후로 위그 대공에 맞서 루이 4세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948년 오토 1세는 루이 4세와 위그 대공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기 위해 잉겔하임에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으니 여기서 왕권 자체가 지닌 불가침적 성격이 선언
되었고... 이를 어긴 위그 대공에게는 파문이 선고되었는데, 물론 위그 대공은 이에
개의치 않았고 루이 4세의 기반 수아송 지역과 로타링기아 지역을 약탈하고 다녔습니다.
그 이후로도 루이 4세는 서프랑키아 북동부 지역에서 자신의 기반을 확보하면서 위그 대공과
맞설수 있게 되었으니 950년 세력을 팽창하는 루이 4세에게 위그 대공은 화해를 제안
하여 평화조약이 성립되었고, 951년 루이 4세는 충성을 맹세한 오베르뉴 지역을 방문하던
도중 크게 아픈 적이 있은 때문에 열 살된 자신의 아들 로테르를 왕위 계승자로 확고히 합니다.
954년 9월초쯤 루이 4세는 랑에서 랭스로 이동하던 도중 숲속에서 낙마하여 사망하고
말았으니 루이 4세는 늑대 무리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을 보고 급히 도주했다고
하는데, 당대의 다른 기록은 루이 4세가 헛것을 본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니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왕위는 이제 열세 살이 안 된 장남 로테르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로테르는 루이 4세의 장남으로 954년 루이 4세가 낙마로 사망하자 열세살에 왕위를 계승했으니
치세 초기 통치는 위그 대공과 쾰른 대주교 브루노의 후견 아래 이루어졌지만, 성장하면서
독자적인 왕권의 확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니 서프랑키아 내 강력한 제후 위그 카페를 견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프랑키아로 부터 로타링기아를 획득하기 위해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칩니다.
로테르는 동생이 있었음에도 1살에 불과한지라 왕국의 분할 상속 논란을 피해간 첫번째
왕이 되었는데... 외드와 로베르 1세, 라울로 이어지는 비(非)카롤링거 가문의
왕위 장악은 분할 상속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되었으니, 물론 이미
취약해진 카롤링거 왕조의 왕권은 어린 로테르의 즉위와 함께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로테르의 초기 통치는 서프랑키아의 유력자인 위그 대공의 후견 아래 이루어졌는데 부왕 루이 4세와
위그 대공은 950년에 화해를 한 상태였던데다가 모후 제르베르주는 위그 대공으로 부터 로테르
왕위 계승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아키텐과 부르고뉴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을 허용하였습니다.
즉위 2년후 956년 위그 대공이 사망하자 후견인은 동프랑키아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오토 1세
의 동생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가 맡게 되었으니, 브루노는 동프랑키아와의 관계를 조율하면서
로테르의 통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갔지만 서프랑키아왕이 동프랑키아왕에게 종속되는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으니... 로테르는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고 동프랑키아로 부터 권력을 독립시키고자 합니다.
973년 로테르가 서른두살이 되던 해에 동프랑키아에서는 서프랑키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토 1세가 사망하고 아들 오토 2세가 동프랑키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하였으니
이제 서프랑키아에서 벌어졌던 지방분권화 경향과 제후들의 반란이 동프랑키아에도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로테르는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동생 샤를과 위그 대공의 아들인 위그 카페는
동프랑키아 반란 제후들을 지원하였고.... 샤를은 로타링기아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
하고자 했지만, 로타링기아의 강력한 귀족 아르덴 가문은 샤를의 로타링기아 진출을 위협적
으로 생각했고 곧 로테르와 맺었던 우호적 관계를 저버리고 오토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977년에는 로테르왕의 동생 샤를이 랑 주교 아달베롱과 함께 왕비 엠마의 부정한 행실을 고발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여 로테르는 동생 샤를을 무고죄로 왕국에서 추방하였습니다.
형제 사이 내분을 틈타 동프랑키아왕 오토 2세는 샤를을 로타링기아의 공작으로 임명하였고, 동생 샤를
은 오토 2세의 가신이 되었으니 즉 왕실의 명예 회복이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제 로타링기아(로렌) 지역을 둘러싸고 로테르와 오토 2세 사이의 대립은 점점 치열해지기 시작합니다.
978년 8월 로테르와 위그 카페가 동프랑키아측 로타링기아(아헨)에 침입하자 10월에는
오토 2세가 샤를과 함께 서프랑키아측 로타링기아(수아송, 랑)를 침공했으니... 이때
로테르는 자신이 머물던 랑의 궁전을 떠나 위그 카페가 장악하던 파리로 피신했고,
샤를은 스스로를 서프랑키아의 왕으로 선언하면서 오토 2세와 함께 파리를 포위 합니다.
하지만 파리 함락에 실패한 샤를과 오토 2세는 물러갈수 밖에 없었고, 이들은 곧 서프랑키아
군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로테르는 파리를 수호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패퇴시킨 왕으로서 서프랑키아 전역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지만, 위그 카페
또한 그 명성을 함께 나누어 가졌고 이는 궁극적인 왕권 강화로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979년 로테르는 샤를의 왕위 계승 도발을 방지하려 아들 루이 5세의 축성식을 거행하였고 980년에
오토 2세와 만나 로타링기아의 경계를 조정하고 평화조약을 맺었으니 오토 2세는 동로마제국이
장악한 이탈리아 남부로 진출할 계획이었지만 서부 경계의 불안정이 문제였으니, 로테르의 입장
에서는 오토 2세가 이탈리아에 신경쓰면 저지대 로타링기아의 샤를의 움직임을 막을수 있었습니다.
즉 로테르는 오토 2세와의 협정을 통해 오토 2세에게는 이탈리아 원정을 가능하게 해
주고, 동시에 자신의 왕권과 왕위 계승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는데.... 하지만
문제는 이 협정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낀 위그 카페가 로테르에게 불만을 갖고는
이탈리아 로마에 머무르던 오토 2세를 찾아가 동맹 관계를 맺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동프랑키아와의 갈등이 잦아들자 로테르는 위그 카페의 로베르 가문과 대결해야 했으니이를
위해 982년 앙주 백작 조프루아와 협력하였고, 조프루아의 여동생으로 제보당과 툴루즈
에 막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던 아델라이드와 아들 루이를 결혼시켰으니... 이렇게 해서
로테르는 북동부와 서남부에 자신의 기반을 두고 중간에 있는 로베르 가문을 압박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967년생인 루이 5세(15세)와 945년경에 태어난 아델라이드
(37세)는 나이차를 극복하지 못했고 984년 이혼하였으니.... 결국 왕실과의 관계를 통해
로베르 가문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앙주 가문은 다시 로베르 가문의 측근 세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983년 12월 오토 2세가 사망하자 동프랑키아 왕위는 그의 아들 오토 3세에게 돌아갔지만 오토 3세는
세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숙부인 바바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섭정을 맡았는데... 독일의
왕국 전역에서는 지방분권적인 제후들의 정치적 움직임들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틈을 타서 로테르는 로타링기아 장악을 다시 한번 시도하기 시작했으니 그는 몇 로타링기아 귀족
들로 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내는 한편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동생 샤를과도 화해를 했지만,
이 지역의 유력자인 아르덴 가문과의 알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로타링기아 장악에 실패하고 맙니다.
이후로 986년까지 로테르는 자신의 이름이 기원이 된 로타링기아를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세를 펼쳤으나 결국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특히 오토 가문과의 관계도
고려하면서 위그 카페를 자극하지 않고 로타링기아를 획득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결국 로타링기아를 공략중이었던 986년 3월 2일 로테르는 마흔다섯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니 그의 아들 루이 5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위그 카페의 꼭두각시가 되어 부왕
처럼 카롤링거 왕가의 권위와 권력 회복을 위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으니, 그러한 차원
에서 로테르는 서프랑키아에서 카롤링거 왕가의 마지막 불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이 5세는 986년 로테르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987년 5월 부왕에게 반항했던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에 대한 재판을 시행하기 위해 귀족회의를 소집한후, 회의 전날
위그 카페 영지에서 낙마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으니....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
에 왕위는 위그 카페에게 돌아갔고, 그는 마지막 카롤링거왕조 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로테르는 979년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기위해 루이 5세의 축성식을 거행했고, 982년 에는 서남부
지역을 지원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앙주 가문의 아델라이드와 결혼시켰으나 아델라이드는 두번
결혼한 과부로 전남편들의 영지들을 상속받아 제보당과 툴루즈에 큰 영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녀
는 15살인 루이 5세 보다 스무살 이상 연상이었으니 나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984년 이혼했었습니다.
986년 3월 왕위에 오른 루이 5세는 987년 5월 부왕 로테르의 로타링기아 원정 당시 로테르와 분쟁을
일으키며 오토 2세를 지지했던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을 재판하기 위해 콩피에뉴에 고위 성직자와
대귀족들을 불러 모았는데 회합 전날인 22일 위그 카페의 영지에서 갑작스럽게 낙마하여 사망
하니 암살로 의심되기도 하는데...... 이제 왕위는 오래 기다린 위그 카페로 돌아가니 카페 왕조입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서프랑크 왕국은 이후 카페 왕조로 바뀌면서 프랑스로 불리는데....
중세 프랑스 발루아 왕가와 부르봉 왕가를 거쳐 현재의 프랑스로 발전하는
초석을 닦았으니 대체로 오늘날 프랑스의 영토와 일치하는데 아키텐, 브르타뉴,
부르고뉴, 카탈루냐, 플랑드르, 가스코뉴, 일드프랑스, 툴루즈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프랑크라는 명칭은 유지되었는데 2백년후 1190년 까지도 카페 왕조의 군주들은 스스로를 프랑크인
의 왕이라 칭했다가 1190년 1월 1일부로 필리프 2세는 렉스 프랑코룸이라는 단어를 폐지하고는
로이 드 프랑스 (Roi de France) 라고 칭했으니 이후 부터는 프랑크가 아닌 “프랑스” 인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