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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奇大升)의 자경설(自敬說)
기대승(奇大升)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조선 유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퇴계와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1527~1572)
고봉선생은 도학에 투철한 학자로, 지난날의 잘잘못을 상기하면서, 스스로 공경(自敬)하는 마음을 묶어서 글로 남긴 것이 자경설(自敬說)이다.
자경설(自敬說)-기대승(奇大升)
고인(古人)들은 모두가 과거의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하였으니, 대체로 과거의 실수를 마음 아프게 여기고 앞으로 잘하려는 생각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성인(聖人)과 현사(賢士)들이 뜻을 붙여 공부하던 것인데, 나만 어찌 유독 그리하지 않겠는가. 가영(歌詠)하던 나머지, 19년 전의 일부터 차근차근 서술하려 한다.
(古人莫不訟前咎以自箴 蓋悼前之失 而起後來善思也 是皆聖人賢士之所寓意用功者 吾何爲獨不然 歌詠之餘 丕遠惟十九年前事)
나는 가정, 정해년(1527)에 태어났으니 그해가 곧 대행왕(大行王)-중종대왕 22년이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모(王母-조모)를 여의었고, 7-8세쯤 되어서는 어머니마져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를 의지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고생하시면서 길러주셨다. 나는 어려서 질병이 많아 죽다 살아났는데, 오늘에 이르러 아득히 그 일을 생각하니 슬프기 그지없다. 아! 백성으로서 곤궁하기가 누가 나보다 더했겠는가. 가끔 어릴적 일을 생각해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으나 또한 한두 가지 생각나는 것도 있다.
(予生於嘉靖丁亥 乃大行王中宗大王之二十二年也 生一年 失王母 及齔而失慈天 惟嚴君是依 劬勞鞠養 少多疾疹 在死而生 至于今日 昧昧思之 懷慟窮天 嗚呼 天民之窮毒者 孰過於予哉 時念少時事 多不復記憶 亦有一二可想者焉)
계사년에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고, 다음해인 갑오년 7월에 망극의 비통함을 당하여 이로 인해 학업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다시는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도 집안에 큰일을 당하셔서 글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을미년에 효경(孝經)을 읽고 글씨도 배우고 또 소학(小學)을 외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 겨울에 작은 누이가 역질(疫疾)로 죽었다.
(癸巳歲 始受學于家庭 明年甲午之孟秋 丁窮天之慟 因決捨其業 不復以問學爲事 蓋家君亦以新遭大變 未嘗爲誨 歲之乙未 讀孝經學書 又誦小學 庶幾有望於不自棄 何意天未悔禍 鬼亦不弔 於丙申之冬 小妹以疫疾逝焉)
아버지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됨으로 인하여 산사(山寺)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도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꽤 진취의 희망이 있었다. 그해 겨울부터 정유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서울에 가신 후로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초에는 스스로 분발하여 서당(書堂)으로 가서 대학(大學)을 다 배우고 이어 한서(漢書) 및 한문(한유의 문장)을 읽고 나니 그해가 벌써 저물었다. 인하여 집에 내려와 근친(覲親)하고 또다시 올라가서 맹자(孟子) 및 중용(中庸)을 읽었고 항상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짓고 또한 다른 저술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학성(學性)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을 읽고 또 고부(古賦)를 읽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었는데, 그때가 무술년이었다.
(家君以患禍荐臻 避處山寺 予亦隨去 讀書習字 頗有進就之望 自其年冬月 至于丁酉之秋 家君在寺 秋晩 以上洛故還家 予時尙記憶也 家君上洛後 予以居家不愜於心 十月之初 自矜奮 往書堂受大學畢 繼讀漢書及韓文 歲已晩矣 因下家覲親 且復上焉 讀孟予及中庸 常與儕輩聯句 亦不無述 人皆稱有學性焉 讀眞寶前集 又讀舌賦 連誦不已 時則戊戌年也)
이때, 나의 외조모의 외조부의 첩(妾)이 가문의 지위 때문에 항상 여러 손자들을 사랑하여 돌보았다. 나의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일찍이 그 집에서 자랐고, 나의 형도 그 집에서 자랐는데, 우리들이 어머니 여윈 것을 불쌍히 여겨 매우 극진히 돌보아주었다.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듣고 보는 것이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항상 나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으라.……." 하였었는데, 그해 봄에 별세하였다. 가화(家禍)가 갑자기 닥치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어 고문진보 후집을 수백 번 읽고 나니 때는 7월이었다. 그대로 다음해 10월까지 읽어 마치고 나니, 그 해가 바로 기해년이었다.
(是時 予之外王母之外王父之妾 以家門之位 常愛恤諸孫 予之慈天 少嘗育於其家 舍兄亦育於其家 以予等之失慈 眷顧甚至 年八十有餘 而聽視未嘗少衰 常撫余而言曰 必爲大人 着力讀書云云 其年春逝焉 家禍卒迫 烏得無慟哉 讀後集數百遍 時則七月也 直至明年十月告畢 己亥年也)
이때 선배(先輩)들이 감시(監試-성균관에서 뽑는 생원진사시)를 보기 위해 서당에 모여 글을 읽고 글을 짓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는데, 나도 그것을 따라 배웠더니 또한 어려울 것이 없었다. 가송(歌誦)에 대해서는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시부(詩賦)는 오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비록 법도에는 맞지 못했지만,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10월 그믐께 아버지에게 사략(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여 3개월에 걸쳐 끝내고 나니, 해로는 경자 년이요, 달로는 정월이었다. 그 후 점차로 우매함이 트이고 학업이 진취되어 갔다. 이어서 논어(論語)를 수학하여 가을에 이르러 끝마쳤다.
(時先輩以監試之望 萃于書堂 讀書著文爲業 余亦從而學之 亦無難者 歌誦不隨乎時 詩賦惟其所欲 雖不能中於法度 人或謂之能焉 當十月之晦 受史略於家君 三閱月而畢 歲則庚子 月乃元也 其後稍稍蒙拔而業長矣 繼受論語 至秋而畢)
그해 봄에 외숙부(外叔父)께서 문과에 급제하고 가을에 이르러 성묘(省墓) 하러 이곳에 오셨다. 외숙부께서는 내가 닦은 학업을 살펴보시고 또 그 당시 배우고 있던 것을 강론하시면서 나에게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러자 서울의 친척들이 내가 장차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내가 저술한 글들을 요구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글을 다 모아서 친척들에게 부쳐 주었다. 이로 인하여 나의 상자 속에는 그 전에 지었던 초고(草稿)가 전혀 없게 되었다.
(是年春 外叔父擢第 及秋掃墳到此 考其已往之業 而講其當時之學 勉其有成也 於是 京中親戚 聞其將有成也 徵其文 余卽盡以取爲之付與 由是箱笥無昔時稿矣)
그해 겨울에는 서전(書傳)을 읽어 모두 외었다. 다음해 가을에는 시전(詩傳)을 읽고 이어 주역(周易)을 읽었다. 경자 년부터 신축 년까지 사이의 8개월 동안과 신축 년부터 임인 년까지 사이의 10개월 동안을 합해서 계산하면 모두 18개월이요, 햇수로 따지면 1년 반 남짓이 되는데, 그동안 뜻이 해이해지고 성질이 게을러져서 글을 입으로 읊지도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비록 수시로 느껴 분발하여 기세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역시 할 수가 없었다.
(其冬 讀書傳 皆成誦 明年秋 讀詩傳繼讀周易 自庚子至辛丑凡八月 自辛丑至壬寅之春凡十月 合數之 爲月者十有八 而爲年一度半强 志頹性懶 口不詠心不惟者殆半之 雖時有感奮作氣 勢亦不能矣)
대체로 아버지께서는 내가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항상 수강(授講)을 엄하게 하지 않으시고, 훈계하고 권장하는 일도 소홀히 하시었으며, 때로 방탕하게 노니는 일이 있어도 심히 책망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안일을 내내 누릴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이 때문에 나이가 장성해질수록 학문은 더욱 떨어지고, 해가 오랠수록 뜻은 더욱 해이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보잘 것 없으니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신축 년 봄에는 외종조모(外從祖母)가 서거하였다. 외종조모께서는 항상 우리 어머니를 양사(養嗣)로 삼아오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들을 마치 자식처럼 여기시어, 추울까 염려하여 옷을 입히시고 주릴까 염려하여 밥을 먹여주시었다. 소자(小子)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오직 외종조모가 내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때 이르러 별세하시어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시니, 이 원통함을 어찌 다 이르겠는가. 하늘이여, 귀신이여! 지난해에는 우리 어머니를 빼앗아가고 이제는 또 우리 외종조모를 빼앗아가니, 하늘이여, 귀신이여! 어찌 나에게 이처럼 모진 고초를 내린단 말인가!
(蓋家君以其少有知也 常弛其授講 簡誨而疏勸 時有所遊放 不究切之 余以其安逸爲可恒也 是以年壯而學益頹 歲久而志益弛 以至於今泯泯也 可勝歎哉辛丑之春 哭外從祖母媽常以余慈天爲養嗣 及慈天棄世 視余等猶子 念寒而衣 念饑而食 小子何知 惟媽我母 至是捐世 終天永辭 此怨曷崩 天乎鬼乎 昔年奪吾母 今又奪吾媽 天乎鬼乎一何毒我之極耶)
아버지 봉양하는 일을 비롯하여 많은 식구들과 어머니 여윈 우리 두 형제에 이르기까지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옷이 해지거나 하면 어디에 의뢰하여 공급할 것인가? 제쳐 두고 거행하지 않은 뒷일은 누구에게 고(告)할 것이며, 어리석고 용렬한 종아이들은 누구에게서 명령을 받아 일을 해나갈 것인가? 밤낮으로 학문을 계속하여 출세하기를 바라던 것도, 이제는 조부모를 영화롭게 봉양하는 데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 아 슬프고 슬프다!
(自需給高堂 養以及百口之人 與吾輩二哀之小子 食有所不贍 衣有所不完 奚所資而取焉 後事之擺脫而不擧者 誰與告之 迷僮劣婢 於何聽受而共業焉問學之日 繼夜望顯揚者
無所事於榮養 嗚呼哀哉)
이해 늦은 봄에, 서경부(西京賦)를 지었다. 모두 1백 30구(句)다. 용산(龍山)이 이 글을 보고 평론하기를 그 글을 읽어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니, 의당 그 성문(聲聞)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전파하겠다. 생각이 멀고 기(氣)가 장대하며, 말이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설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다만 이것은 조그만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문득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여름에는 일찍이 서정부(반악이 지은 문장 이름)를 차운(次韻)하여 지으려 했다가 미처 짓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春暮作西京賦 凡百有三十句 龍山評之曰 讀其詞 想其人 宜其聲之久播於人 思遠而氣壯 語高而辭達 雖間有生澁 特是小疵 一蹴便到古作者列 況其外之科乎
其可賀也已云云 於夏 嘗次西征賦 未及就而置焉)
다음해 봄, 이해 가을에 과거(科擧)가 있어서 시험 삼아 시부(詩賦)를 지어보았다. 그러나 학문의 근원이 거칠고 생각이 꽉 막혀서 끝내 편(篇)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슬퍼하기를 "나는 다행히 천지 사이에 두 가지 낙(樂)을 얻었으니, 질병과 곤궁의 걱정 없고 농사짓는 괴로움도 없다. 그런데 포기하고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이 세상에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하고, 인하여 개탄스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수일 후에 선배들이 서당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가서 그들과 함께 있었다. 역시 거기서도 글을 열심히 짓지는 않았으나, 시험 삼아 조정몽주부(吊鄭夢周賦)를 지었는데, 이때는 붓끝이 저절로 막힘이 없었으니, 끝내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明年春 以秋有觀光之望 試作詩賦 學源鹵莽 思致泥澁 竟不能成篇 因竊自悲 幸生天地間 得二樂焉 旣無疾病厄窮之患 耒耟耕穫之勤 棄而不學 則無復有所事於一世 仍慷慨不能語 旣數日 聞先輩集于書堂 往從之 亦未嘗勤做 而嘗作吊鄭夢周賦 筆端自爾無澁 竟不知何故也)
5월에는 제생(諸生)들이 모두 돌아갔다. 나도 역시 집에 내려와 하루하루를 부지런히 하여 하루 사이, 한번 읊는 동안에 옛것을 익히고 연구하여 부(賦)를 모두 10여 수 지었다. 시험 삼아 의정부부(議政府賦)와 고소대부(姑蘇臺賦)를 모두 1백여 구(句)씩 지어보았는데, 그제야 비로소 옛날 배웠던 것을 회복하여 거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기대가 있게 되었다 가을에 이르러 시험에 응시했으나 끝내 이룬 것이 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기(志氣)가 쇠퇴하여 끝내 한 생각도 마음에 가짐이 없이 그럭저럭 그해를 마치면서 보던 것은 오직<대학(大學)>한 책뿐이었다.
(夏之仲 諸生皆歸還 僕亦下家 爲一日之勤 一日之間 一哦之頃 而溫故賦凡十餘首矣
嘗作議政府賦姑蘇臺賦 皆百餘句 始復其故所學 庶有不棄之期焉 及秋擧於試 卒無成 莫恥之甚而志氣頹墮 竟無一慨念到胸次 優游卒歲 挾大學一部而已)
그 후 파방(罷榜)되었다는 기별을 듣고는 열흘 동안 산사(山寺)에 올라가 있으면서 원부(元賦)의 초(抄)한 것을 외우곤 하였다. 그러나 하해(河海)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한갓 근원 없는 두절된 연못가에 머뭇거리며 큰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여 소견이 커지지 못했으니, 아무리 속을 태우고 길이 생각을 해도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직무에 종사도 해봤지만 역시 남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의의(疑義)를 지은 것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였으므로, 일득(一得)이 있으리라 생각했었지만 끝내 얻지 못했다. 운명이니 어쩌겠는가?
(及聞罷榜之奇 旬日於山寺 誦元賦抄 然未識沿河之步 而徒趦趄於斷潢 海未卽而見未克大 勞思長懷 亦末如之何也已 從事於有司 亦無聞焉 然作疑義甚好 人皆許之 意其一得 而竟不得 命也可如何
내가 책을 싸들고 산재(山齋)로 가 있는 동안, 때는 이미 초여름이 되었다. 목사(牧使) 이공 홍간(李公弘幹)이 제생(諸生)들을 불러 모아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므로, 나도 좇아가서 함께 어울려 지내며 세월을 보내고, 6월 그믐에는 파접(罷接)을 하고 돌아왔다. 그 후 8월 초하루에는 목사가 다시 생도 10여 명을 모아놓고 소학(小學)을 강의하였으므로 나도 거기에 끼었다. 인하여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리고 분주히 맡은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길이 또 매우 멀고 험하여 한번 출입하기가 힘들어서, 쉬었다 하면 4-5일씩 쉬어버림으로써 학업이 폐해지고 뜻이 해이해지니, 그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가고 오고하는 가운데 언뜻 세모(歲暮)를 만났으니, 옛사람이 이르기를 "세월은 말 위에서 다 보내고, 시서는 상자 속에 챙겨 두었다.“고 했다. 그렇지 않은가?
(負級山齋 時已夏孟 牧伯李公弘幹召諸生講于校 余亦從而蹁躚 奄冉日月 六月之晦 罷接而還 越八月初吉 牧伯更集十餘輩講小學 余亦齒焉 仍登名校籍 奔走率所職 路又極遠惡 一出入 息輒四五日 業廢而志弛 其爲弊也可勝言哉 道途之中 忽見歲暮 古人云 日月馬上過 詩書篋中藏 不其然乎)
다음해 갑진 년엔 목사 송공 순(宋公純)이 유생(儒生)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 되었으면 곧 학업성취도의 여하를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이를 인하여 맹자(孟子)를 읽어 3월 그믐에 끝내고 한문(韓文-한유의 글)을 읽다가 4월 보름에는 용산 선생(龍山先生)을 찾아뵈었다. 5월에는 장차 도회(都會)에 가려고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께서 민암부(民嵒賦)를 지으라고 명하시었다. 부를 다 지으니, 선생께서는 매우 칭찬하였다. 한문(漢文)은 제문(祭文)만을 읽고 돌아오니, 5월도 이미 그믐이 되었다.
(明年甲辰 牧伯宋公純 選儒生求益者 俾之講誦 必書其時 時已久 卽考其所就之如何 余因是讀孟子 三月之晦 畢讀韓文 四月之望 祗謁龍山先生函丈焉 午月 將赴都會 見于先生 先生命作民嵓賦 賦成先生亟稱之 讀漢文止祭文而還 月已晦矣)
6월에는 도회에 갔다가 그믐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가을에는 재차 용산 선생께 가서 또 한문을 읽다가 보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달부터 8월 말까지는 더위에 지쳐 마냥 누워서 책상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9월 초에는 용산 선생께 가서 문선(文選)을 강독하다가 열흘 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초하루에 용산 선생께 가서 상서(商書)의 대문(大文)을 읽다가 1-2권을 못다 읽고 돌아오니 그때가 16일이었다. 세월이 하도 빨라 해는 곧 지려고 하니, 머리 돌려 천지를 돌아보니 또 세모를 만났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六月 往都會 晦則刀頭 秋初 再往龍山 又讀韓文 望後還家 自是月至入月之終 困暑長臥 對案而已 九月初 往龍山講文選 旬時還家 十月之吉 又往龍山 講商書大文 未畢一二卷而還 月已生魄 烏飛鬼走 又見歲暮 回首天地 日欲晼晩 更何辭哉)
처음에 생각하기를, 수년 이래로 게으르고 방일함이 고질이 되어 학업은 진취되지 못하고 나이만 많아진다고 여겨 마음에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겨울철이나마 학업을 부지런히 닦으려니 하였으나 뜻이 견고하지 못하고 그동안의 습관을 고치지 못하여 놀면서 헛되이 세월만 보냈을 뿐이었다. 아, 내가 태어난 날이 정월 초하루 기묘일 이었는데, 지금 벌써 1백 10번째의 기묘 일을 맞게 되었다. 유학(儒學)을 공부한 날도 꽤 오래 되었고 세상에 태어난 햇수도 적은 햇수가 아니건만, 포기해버리고 자립할 것을 미처 꾀하지 못했으니, 심하다, 나의 무지함이여! 역시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이었다.
(初謂自數年來 惰放成痼 學未克就 而年且壯 甚軫于懷 庶冬朔勤修 而立志不固 結習未除 玩愒流光 虛度日月而已矣 嗚呼 余生之歲正月己卯朔 今已百有一十己卯矣 業儒之日 不爲近矣 降生之載 不爲少矣 棄之而未嘗及謀所立 甚矣 余之無知也 其亦不善變矣)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분하고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슬프고 괴로운 생각에 못 이겨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사리를 헤아리고 자신을 헤아려보니,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여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나간 일들을 편차하여 행해온 일들이 어떠했는가를 추적해서,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한편으로는 권면을 하니, 또 스스로 좋지 않은 때에 내가 태어났음을 슬퍼하는 바이다.
(追思之 可爲扼腕痛心 故自此以來 慨懷勞思 中夜起坐 度時揣己 悲來塡膺 言之不可已 乃編次往事 跡其所踐之如何 一以爲戒 一以爲勸 而又自悲我生之不辰也)
아마도 이 말은 모두가 지난날의 사소한 일로써 잘못을 경계하고 공부에 진취하지 못했던 일이니, 대체로 기억하여 잊지 않을 뿐이요, 말의 이외에 논할 바가 아니다. 비록 그러하나 그것을 항상 나의 이목(耳目)에 접(接)하게 하여 옛날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지금의 성취 없음을 돌아보면서 개연히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감격하고 분발하는 데에 또한 반드시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 밖의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마음속에 이미 익히 계산되어 있으나, 그것은 쉽게 붓으로 다 쓸 수가 없으므로 마침내 다시 말하지 않는다.
(抑是言也 皆前日小小之事 靡有警過失造工夫者 蓋記不忘耳 非所與論於言之外也 雖然 使之常接乎吾之耳目 思昔伊艱 顧今無成 慨乎其存乎心而不舍 則其於感勵激發之效亦未必無少補云耳 其他事意 心計已熟 固未易與泓穎謀也 遂不復言)
대부분의 위인이나 학자들의 초년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했음을 우리들은 많은 그들의 전기에서 알 수 있다. 하늘은 한 그루의 큰 나무를 키우려함에 그 주위에 많은 작은 나무를 제거하거나 무시하듯이, 사람에게 있어서도 큰 인물을 배출하려할 때는 심한 매질로 단단한 의지를 키워서 스스로 극복해서 자립하도록 이끌어준다.
고봉(高峰)선생이 그분의 아호처럼, 학문과 인격이 최고봉(最高峰)에 오르기까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초가 있었다. 선생의 이 자경설(自敬說)을 읽으면 고마웠던 주위의 모든 분들과 스스로를 지극히 낮춰서 겸손하되, 그 많은 현실적인 역경들에 대하여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사람은 세상이 아는 것 밖에 스스로 권면하고 절차탁마하는 심성의 수양이 내심 존재해서 이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리라.
첫댓글 자신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계으름과 실의를 묘사한 대학자의 고매한 인품이 나타나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