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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 西溪 朴世堂
1623년 서인(西人)이 주도하고 남인(南人)들이 협력하여 이루어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조선 후기 사상계(思想界)는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주자학(朱子學) 이외의 사상(思想)이나, 주자(朱子)의 주석(註釋)을 따르지 않는 해석을 극렬하게 배척되었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용어는 주자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에서 나왔지만, 실제로는 반대 정파(政派)를 탄압하는 무기로 활용되었다. 박세당(朴世堂)은 조선 후기 사상계가(思想界) 점차 경직화(硬直化)되어가는 시기에 독자적(獨自的)인 학풍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정치적으로는 소론(少論)의 핵심으로 활약하였다.
박세당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 잠수(潛瘦)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손꼽히는 ' 반남 박씨 (潘南 朴氏) '는 박세당의 10대조인 박상충(朴尙衷)에 이르러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박상충은 정몽주, 이색 등과 더불어 고려(高麗) 말 신진 사대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출생과 가문
박세당의 부친 박정(朴炡)은 16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한 공(功)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훈되었고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졌다. 박정(朴炡)은 양주(楊州)윤씨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세규(世圭)는 요절하였고, 세견(世堅), 세후(世帿), 세당(世堂)이 뒤를 이었다. 박세당은 4남이었지만, 형(兄)들이 후사(後嗣)가 없었기에 가문(家門)의 실질적인 계승자가 되었다.
박세당은 1629년 8월 19일 남원(南原)에서 태어났으나, 4세 때 부친이 죽고, 7세 때에는 큰형이 사망하면서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모(祖母)와 모친을 모시고 피란길에 올라 원주, 청풍, 안동 등지를 전전하였다.
그가 17세에는 '의령 남씨'의 딸과 결혼하여 관례대로 처가살이를 하였다. 그후 10여 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다가 벼슬길에 오르고 나서야 처가(妻家)를 나와 따로 살림을 꾸몄다. 처가살이 기간 동안 박세당은 처남(妻男)인 남구만(南九萬)과 깊이 교유하였다. 박세당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두 아들은 소론(少論)의 핵심으로 활동하다가 정쟁(政爭)으로 부친보다 일찍 사망하여 박세당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박세당의 집안은 서인(西人)에서 소론(少論)으로 이어지는 가문(家門)의 핵심이 되었고, 소론(少論) 인사들과의 혼맥(婚脈)도 두드러졌다. 박세채(朴世采)는 박세당의 8촌 아우이었고, 박세당의 셋째 형인 박세후(朴世帿)는 윤증(尹拯)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의 사위가 되었다. 아들 박태보는 윤증(尹拯)의 대표적인 제자가 되면서 윤선거(尹宣擧) 집안과의 두터운 교분을 이어갔다. 조선 후기 소론(少論)의 핵심인 박세당, 박세채, 윤증은 혈연관계와 사제관계가 중첩되면서 소론(少論)의 정치적, 사상적 입지를 굳혀갔다. 윤증(尹拯)의 문집인 ' 명재유고 '와 박세당의 문집인 ' 서계집 '에는 윤증과 박세당이 서로에게 보낸 서신이 각각 22편, 26편이 수록되어 두 인물간의 친분을 확인할 수 있다.
박세당 유적지
이성계(李成桂)가 한양에 도읍터를 잡는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 금강산(金剛山) 봉우리이었던 ' 수락 (水落) '과 ' 불암 (佛岩) '이 한양의 남산이 되고자 한걸음에 달려왔으나 ' 산 같지도 않은 ' 산(山)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산은 보아가지도 못하고 지금 그 자리에서 한양을 등지고 있다. 수락산과 불암산에 얽힌 전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수락산(水落山)의 산세(山勢)가 한양을 등지고 앉아있는 형국이어서 ' 반역산 (叛逆山) '으로 보았다고 한다.
의정부(議政府) 장암역에서 바로 오르는 석림사(石林寺) 계곡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端宗)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살라 버린 후 숨어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조서 후기 실학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은 김시습(金時習)의 뜻을 이어 이곳에 청절사(淸節祠)를 짓고, 실학(實學)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다. 박세당 고택(古宅)이 지금도 남아 있고, 그의 묘(墓)도 바로 근처에 있다. 원래는 큰 저택이었으나 6.25 한국전쟁 때 소실(燒失)되어 사랑채만 남아 있다.
박세당의 묘
박세당(朴世堂)의 집 근처를 흐르던 개울은 원래 동계(동계)이었지만, 그의 호(號)가 서계(西溪)이었기 때문에 서계(西溪)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은거(隱居)의 뜻을 표방하여 잠수(潛水)라 하였고, 개울가 언덕은 잠구(潛丘)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묻힐 곳은 낙구(樂丘)라 하였는데, 결국 박세당은 이곳에 묻혔다.
박세당이 74세가 되던 1702년, 그야말로 박세당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즉 이경석(李景奭)의 비문(碑文)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이미 10년 전에 저술항ㅆ던 그의 ' 사변록(思辨錄) '이 새로이 문제가 되었다. 즉 '사변록'의 반(反) 주자학적(朱子學的)인 태도가 새삼스럽게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죄목으로 지탄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생애는 이제와는 정반대의 국면을 접어들게 되니, 정치적인 대박해(大迫害)에 의하여 마침내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박세당의 최후
이경석(李景奭)은 병자호란 때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전도(三田渡)의 비문(碑文)을 지은 사람이다. 이경석(李景奭)의 후손으로부터 비문(碑文)의 찬저(撰著) 청탁을 받은 박세당이 이경석(李景奭)의 행적과 인품을 논하던 곳에서 이경석과 송시열의 관계를 말하며 은연중에 송시열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 비문(碑文)은 마침내 당시 노론(老論) 계열 당인(黨人)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이미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죽었으니, 당시는 송시열계인 노론(老論)이 대부분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때라 비문(碑文)에 대한 반발은 대단하였다. 다음해인 1703년, 당시 박세당의 나이 75세가 되던 해 김창협, 김창흡 형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상소(上疎)가 있었고, 급기야는 ' 사변록 '까지 소급해 문젯거리로 삼게 된 것이다. 그는 '주자(朱子)를 모욕했다 '는 죄명을 어더서 삭탈관직되고, 옥과(玉果)로 유배(流配)의 명까지 받게 되었다.
이에 박세당의 제자들인 이탄, 이익명, 이인엽 등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는 원인이 오직 ' 이경석의 비문(碑文) ' 가운데 몇 구절에만 있음을 강조하고, 특히 박세당의 40여 년에 가까운 선비로서의 지조와 70여 세의 고령(高齡) 및 노환 그리고 둘째 아들 ' 태보(太輔) '의 충절을 들어 유배(流配) 만은 거둘 것을 상소하였다. 이러한 소청이 주효하여 박세당은 석천동(石泉洞)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그해 8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박세당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일생을 통해서 고루하고 진부한 전통에 대항해 반성적, 자각적인 삶을 살다간 지조있는 선비이었다.
박세당은 32세가 되던 1660년에 증광(增廣)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였고, 11월에 전적(典籍 .. 성균관의 정6품 관직)이 되었다. 박세당이 과거(科擧)에 급제한 때는 1659년부터 시작된 기해예송(己亥禮訟)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정치적, 사상적 대립이 치열하였던 시기이었다.
당쟁의 칼날
예송(禮訟)논쟁에 대하여 박세당은 ' 오늘날 전례(典禮)를 다툼으로 인하여 종통(宗統)이 밝지못하다는 설을 고집하는 자들은 아마도 불인(不仁)함이 심할 것이다. 아마도 상대를 공격하려고 고의(故意)로 빌린 설(說)일 것이며, 상대를 배제하려고 고의로 빌린 명칭일 것이니, 그 마음씨가 또한 험악하고도 위험하도다 '고 하여 예송논쟁이 정쟁(政爭)으로 비화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박세당은 32세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성균관, 홍문관 등을 거쳐 관직생활을 이어갔지만 40세를 기점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수락산(水落山) 남쪽 골짜기 석천동(石泉洞)으로 내려와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관직에 응하지 않았다. 직접 농사(農事)를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 색경(穡經) '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박세당은 수락산(水落山) 일대에서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을 다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논어, 맹자, 중용, 대하, 상서, 시경을 주해(註解)한 ' 사변록 (思辨錄) '이었다.
이 사변록(思辨錄)은 주자(朱子)의 주석(註釋)을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가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공격을 받게되는 대표적인 저술이 된다. 저술활동에 매진하는 기간에도 조정에서는 박세당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제수했지만, 박세당은 모두 거부하였다. 관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사림(士林)에서 박세당의 위상은 날로 높아졌으며, 특히 소론(少論)의 구심점이 되었다.
송시열과 반목
박세당의 관직생활은 32세 때의 늦은 과거(科擧) 급제로 시작되었다. 그의 관리 생활 중 주목할 것의 하나는 그가 36세 때, 즉 병조정랑, 홍문관교리, 경연시독관을 지낼 때, 청(淸)나라 사신 영법 사건으로 말미암아 송시열(宋時烈)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일이다.
원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그 피해(被害) 가족으로 관직에 있던 인물들은 청나라 사신이 올 때 해직(解職)을 청원해서 청나라 사신(使臣)을 피하는 것이 통례이었다. 당시 교리(校理) 김만균(金萬均)도 피해 가족이었으므로 청나라 사신이 오게 되자 이를 피하려고 면직을 소청(疎請)했다. 그러나 도승지 서필원(徐弼原)이 관행과는 달리 그를 파직시켜 버렸다. 이때 대부분의 신하들이 '서필원'을 탄핵하였으나 박세당은 오히려 서필원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청나라 사람들이 아무리 원수같다고 할지라도, 이미 임금이 그들을 영접하기로 한 이상, 이러한 자리를 피한다는 것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박세당은 대청(對淸) 정책에 있어서' 온건론자 '로 간주되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숭명배청론자(崇明排淸論者)들로부터 ' 오사(五邪 .. 다섯 명의 사악한 무리 .. 박세당, 조언기, 박증휘, 오시수, 윤심) 중 한 사람이라는 치욕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 박세당과 송시열 사이는 이미 이때부터 반목(反目)이 생겼다고 할 것이며, 이후 서로 간의 감정의 앙금은 평생 가라앉지 앉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변록 思辨錄
박세당의 여러 저작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변록(思辨錄 .. 일명 통설(通說)이라고도 한다)임은 물론이다. 그의 학문적인 특징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날 뿐 아니라, 그 유명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풍파를 일으킨 대표 저서가 바로 ' 사변록 이기 때문이다. 사변(思辨)이란 두 글자는 중용(中庸)의 ' 신사지 (愼思之) 명변지 (明辨之) '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인데, '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하게 변별한다 '는 의미이다.
박세당은 40세를 전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수락산(水落山) 아래에 있는 석천동(石泉洞)으로 퇴거하면서 강학(講學)과 고전(古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숙종(肅宗) 6년인 1680년 그의 나이 52세 때부터 1693년 그의 나이 65세에 이르기까지 나타난다. ' 사변록(思辨錄) ' 또한 이 기간에 이루어진 작품이다. 총 분량 14책(冊)에 달하는 대규모이다.
사변록(思辨錄)의 내용은,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사서(四書)와 상서(尙書), 시경(詩經)을 박세당 나름대로 주해(註解)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해(註解)가 매우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이다. 사실 '사변록'에 나타난 박세당의 경전 해석을 현대적 시각으로 볼 때는 별달리 문제 삼을 바도 없지만, 당시로 보아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과감한시도이었다.
박세당은 경전(經典)에 대한 종래의 어떠한 기존 해석에도 구애받지 않으려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특히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의 경우에 두드러진다. 그는 대부분의 고경(古經)들이 진시황(晉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禍)를 겪고, 결국 다시 복원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으로 인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전부터 의미와 맥락이 통하지 않는 착간처(錯間處)들이 존재했으며, 정자와 주자 이후에도 그러한 부분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음을 직시하였다.
그리하여 박세당은 나름대로 의미와 문맥(文脈)을 비롯하여 장절(章節)의 편차(編次)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에서 전통적인 시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가 심지어 당시 학계(學界)로부터 거의 절대시되던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견해까지도 비판을 가하도록 한 것이다. 주역(周易)은 착수도 못하였고, 시경(詩經)은 미완성(未完成)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생각도 들지만, 이미 완성된 것만으로도 한국 사상사(思想史)에서 차지하는 ' 사변록 '의 지위는 공고하다고 한다.
박세당은 그의 아버지가 부사(府使)로 있던 전라도 남원(南原)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계속되는어려움을 겪는다. 그가 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진 병자호란(兵子胡亂)으로 곳곳을 전전하다가 14세에 이르러서야 고모부를 스승으로 학문을 닦ㄱ;
서계유묵 西溪遺墨
보물 제16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계유묵(西溪遺墨) 3첩(帖)은 박세당(朴世堂)의 필적으로, 문인(門人) 이정신(李正臣)에게 써준 것이다. 상첩(上帖)은 이정신(李正臣)의 시(詩)를 차운(借韻)한 자작시와 자연에 대한 사랑과 혼탁한 세상과 멀리 한 중국의 시문(詩文)이다. 중첩(中帖)과 하첩(下帖)은 각각 29통과 25통의 간찰로 이정시(李正臣)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중첩(中帖) 가운데 1통은 사위 남구만(南九萬)에게, 하첩(下帖) 가운데 6통은 아들 박태보의 간찰이다.
박세당이 활동한 17세기 후반은 서인(西人)에서 분열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정치적, 사상적 대립이 특히 치열하였던 시기이었다. 이 시기 ' 반남 박씨 (潘南 朴氏) ' 가문은 소론(少論)의 중심이었고, 박세당(朴世堂)은 그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당쟁(黨쟁)의 칼날이 결코 그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경석 신도비명 李景奭 神道碑銘
숙종(肅宗) 28년인 1702년, 박세당은 이경석(李景奭)의 후손으로부터 신도비명(神道碑銘) 찬술(撰述 .. 책이나 글을 지음)을 부탁받고 자신의 마지막 글을 지었다. 이경석(李景奭)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나고 항복의 상징인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다는 이유로 송시열(宋時烈)로부터 가혹한 비난(非難)을 받았고, 노론(老論) 세력에게는 최고의 경계(警戒) 대상이었다.
송시열은 이경석(李景奭)을 ' 절의(節義) 없는 사람, 청나라에 아첨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소인배 '라고 비하하였다. 송시열, 그에게는 명나라에 아첨하는 것은 당연하고, 청나라에 아부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나보다. 그렇다고 이경석(李景奭)이 자진하여, 마음으로 그 글을 지은 것이 아니고, 모든 신하가 모두 핑계를 대며 거부하고, 인조(仁祖)가 간청하여 어쩔 수 없이 작성한 비운(悲運)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박세당은 이경석(李景奭)을 ' 나라를 위해 가문(家門)을 잊고 임금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은 충신 '으로 평가하여, 그가 청나라의 압박 하에 그리고 다른 신하들의 보신(保身)으로 부득이하게 비문(碑文)을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
박세당(朴世堂)이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찬자(撰者)로 결정되자, 노론(老論)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박세당을 주시하였다. 박세당은 이전부터 송시열(宋時烈)과 악연(惡緣)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종(顯宗) 대에 공의(公義), 사의(私義) 논쟁이 제기되었을 때, 박세당은 송시열의 사의론(私義論)을 비판하며 공의론(公義論)을 옹호하였고, 이것은 송시열의 깊은 반감(反感)을 샀다. 송시열 일파는 박세당을 삼간오사(三奸五邪) 중 한 명으로 지목하였다.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지을 당시 송시열은 이미 죽었지만, 그 문인(門人)들은 여전히 정계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세당(朴世堂)은 소신껏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찬하였다. 박세당은 '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노성(老成 .. 많은 경험을 쌓아 세상일에 익숙함)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고 하였으니, 노성(老成)한 사람의 중요함이 이와 같다. 노성(老成)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일 가운데 이보다 더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없고,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데에 과감한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과보(果報)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라고 글을 짓는 시작부터 송시열(宋時烈)을 노성(老成)한 사람, 즉 이경석(李景奭)을 업신여긴 자로 규정하였다. 이어서 비명(碑銘) 마지막에...
효봉수성 梟鳳殊性
재노재진 載怒載瞋
불선자악 不善者惡
군자하병 君子何病
아명재석 我銘載石
인기래경 人其來敬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 /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 군자(君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 나의 명문(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라고 하여, 올빼미를 송시열(宋時烈)에게, 봉황(鳳凰)을 이경석(李景奭)에게 비유하면서 이경석을 군자(君子)라 칭송하였다. 노론(老論)은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욕하였다며 분노하였고, 1703년 봄에 성균관 유생(儒生)들은 박세당을 배척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유생(儒生)의 배후에는 박세당을 제거하려는 김창협, 김창흡 등 노론(老論)의 핵심부가 있었다.
노론은 이경석의 비문(碑文)뿐만 아니라 사변록(思辨錄)의 저술에도 깊은 불신(不信)을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의 주자(朱子) 절대주의를 계승한 노론(老論)들은 주자학(朱子學)의 이론 체계에 도전하는 '사변록(思辨錄)'의 간해을 좌시할 수 없었다. 1703년 노론 세력은 박세당의 '사변록' 편찬 사실을 접하였고, 결국 박세당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이경석 신도비명에서 송시열을 모욕한 사실에 더해져서, 노론은 박세당이 '사변록'을 저술한 ' 불순한 인물' 임을 크게 부각시킨 것이다.
결국 노론(老論)은 박세당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처벌하고, '사변록(思辨錄)'을 흉서(凶書)로 규정하여 소각(燒却)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다. 결국 숙종(肅宗)은 ' 사면록 '과 ' 이경석 신도비명 '을 불태우도록 명령하였고, 박세당은 ' 공인(公認)된 '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었다. 노론(老論)이 정계와 사상계(思想界)를 주도하는 정국에서 소신있는 학자의 양심을 보인 박세당의 행동은 ' 불순 '으로 밖에 치부될 수없었다.
감언지사 敢言之士
박세당은 그의 길지 않은 관직생활 동안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았다. 현종(顯宗)이 온천욕(溫泉浴)을 유난히 좋아하여 막대한 경비(經費)가 소요되고,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자, 박세당은 즉시 임금에게 온천욕(溫泉浴)을 자제할 것을 건의한다. 그는 또한 임금과 대신(大臣)들의 직뭍만을 거론하는가 하면 양반들의 무위도식(無爲徒食)을 비판하였다. 백성의 80%가 평민 또는 천민(賤民)이고, 나머지가 양반인 상황에서 놀고 먹는 양반들을 ' 좀벌레 '라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거리낌 없이 직언(直言)을 잘 한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를 감언지사(敢言之士)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관념적인 성리학(性理學)이 주도하던 시절에 박세당의 반(反) 주자학적인 학문적입장은 그 빛을 말하지 못하였지만, 박세당은 결코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반대세력으로부터 사람됨이 치우치고 어긋나며 집요한 병통(病痛)이 있다는 혹평(酷評)을 받았다.
그러나 박세당은 새언에 스스로 지어놓은 묘표(墓表)에서 자신의 생애에 대한 강한자부심을 들내고 ㅇㅆ다. ' 차라리 외롭고 쓸쓸하게 남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살아갈지언정, 이런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런 세상을 위하여 좋게 좋게 지내면 되지 않느냐는 자들에게 머리를 수그린 채 뒤따르는 짓거리는 결코 하지 않겠다 '고 작성하여 놓았다. 결국 병자호란에 이어 계속되는 당쟁(黨爭)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살았던 박세당(朴世堂)은 선현(先賢)의 학설을 무조건 따르던 기존의 학문적 풍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경전(經典)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사상(思想)의 자주성(自主性)을 주창한 시대를 앞서간 지성인이엇다.
박세당 장원급제
박세당은 아버지가 부사(府使)로 있던 남원(南原)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계속되는 어려움을 겪게된다. 그가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이어진 병자호란으로 곳곳을 전전하다가 14세에 이르러서야 고모부를 스승으로 학문을 닦기 시작한다.
그후에도 과거공ㅂ에 전념하여야 했음에도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형이 줄이어 죽음에 이르니, 박세당은 나이 32세의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과거(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증는 대신 그는 첫 시험에서 장원급제하였으므로 특별히 정6품인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위 사진은 시권(詩券)이다. 시권(詩券)은 과거시험의 답안지이다. 시권(詩券)은 원래 응시자에게 반환되지 않으나, 합격자에 한하여 돌려 주었다. 박세당의 이 시권(詩券)은 장원급제자의 그것으로는 유일(唯一)한 것이다. 오,탈자(誤,脫字)를 수정하거나, 감독관의 검열(檢閱) 표시가 남아 있는 등 과거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락산 석천동에서 찾은 소박한 삶
1666년 5월 부인 " 남씨 '가 사망하자, 박세당은 이듬해 ' 광주 정씨 '와 재혼(再婚)하였다. 1668년 박세당은 관직(官職)에서 물러난 후 양주(楊州) 수락산 석천동(石泉洞)으로 들어갔다. 수락산(水落山) 일대에는 부친 박정(박政)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功)을 인정받아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면서 받은 사패지(賜牌地 ..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벼슬아치에게 임금이 내려준 논밭)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성장한 박세당이 수락산(水落山)을 찾은 것은 그의 나이 마흔 되던 해이다. 불혹(不惑)의 그가 다난(多難)했던 세상을 등진 것은 조강지처를 여윈 충격과 수락산의 명경지수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실 서계종가(西溪宗家)가 위치한 수락산 석천동(石泉洞) 일원은 그의 부친이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이었다.
또한 그가 흠모하던 '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이 300여 년 전 수락산의 주인 노릇을 한 적이 있기에 박세당의 수락은거(水落隱居)는 운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시습(金時習)의 아호 ' 동봉 (東峯) '또한 수락산에서 연유하며, 박세당은 서계(西溪)라는 호(號)로 그를 기렸다.
수락산은 일찍부터 삼각산, 도봉산과 함께 서울 외곽의 명산으로 선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유산(遊山)의 명소이었다. 또한 박세당에게 수락산 서쪽 자락 석천동(石泉洞)은 일상의 공간을 뛰어넘어 군자(君子)의 이상향(理想鄕)을 실현한 경영의 장(場)이 되었다.
회일봉(回日峯), 영월봉(迎月峯), 토운(吐雲), 서하(栖霞), 수옥정(漱玉亭), 난가정(欄柯亭) 등등 수락산천의 봉우리와 골짜기마다 박세당의 숨결이 서린 작명(作名)에서 그가 얼마나 수락산을 사랑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세당은 이곳 수락산에 은거하던 시기, 석천동은 문학과 학풍을 선도하는 공간으로 이름을 떨친다. 그가 석천은거(石泉隱居)를 결행한 가장 큰 이유는 당쟁(黨爭)이라는 어지러운 속세(俗世)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학문적 내실(內實)을 다지기 위함이었는데, 그를 따라 석천동에 입문(入門)하려는 제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수락산에서 맺어진 김시습과 박세당
수양대대군(首陽大君 .. 훗날의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과거(고거) 시험공부를 하던금강산에서 듣게된 김시습(金時習)은 3일을 통곡한 후, 모든 책을 불 살라버리고, 머리를 깎은 뒤 세상을 등지고 숨어든 곳이 바로 수락산(水落山)이다. 김시습(金時習)이 수락산의 주인(主人)이 되어 동쪽 봉우리를 의미하는 동봉(東峯)을 자신의 호(號)로 삼은 지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수락산의 주인(主人)은 박세당(朴世堂)으로 바뀐다.
김시습의 동쪽과는 반대로 박세당은 서쪽 계곡, 즉 서계(西溪)를 호(號)로 삼아 김시습의 동봉(東峯)과 조화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박세당은 김시습을 흠모하여 그를 기념하는 영당(影堂 .. 위 사진)과 사찰을 건립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위 사진은 박세당이 김시습을 흠모하여 충렬사를 짓고, 그 앞에 정자를 세웠는데 지금은 그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때문에 강학(講學)의 공간으로 궤산정(櫃山亭)과 관란정(觀瀾亭) 등의 정자를 세웠으며, ' 아홉 길 높이의 산(山)을 쌓는 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는 교훈을 주기 위해 ' 삼태기 궤(櫃) '자를 쓴 궤산정 아래에는 ' 서계유거(西溪幽居) ' 석천동(石泉洞) ' 취승대(聚勝帶) ' 등 그의 친필(친필)이 남아 있다. 박세당이 가장 즐겨 찾은 명소는 너른 바위에 올라 주변 경관을 둘러보기 그만인 취승대(聚勝臺)이었을 것이다. 천하의 비경(秘景)을 모두 모은 아름다운 장소라는 뜻의 이곳은 박세당의 자연관과 고매한 인품이 잘 드러난다.
박세당은 수락산 기슭 서계(西溪)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랑했다. 아예 호(號)를 서계초수(西溪椒搜)라 하였고, 서계의 골짜기 이름을 석천동(石泉洞)이라 하였다. 그의 ' 석천동기(石泉洞記) '에는 석천동에 얽힌 사연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석천동은 잠수(潛搜 ... 박세당의 호)가 사는 곳이다. 잠수(潛搜)가 조정에서 시종(시종)으로 벼슬한 지 10년이 되었는데, 어느 날 병(병)으로 물러나 선부봉(仙鳧峯) 아래에 은거하고는 사는 곳의 샘물을 ' 석천(석천)'이라 이름하고, 이어 그 골짜기를 '석천동'이라 이름하였다. 이 지역이 도성(도성)의 동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또한 그 산등성이를 ' 동강(東岡) '이라 하고, 시내를 ' 동계(東溪)'라 하였으며, 또 이곳에 잠수가 산다고 하여 그 물을 잠수(潛水)라 하고, 언덕을 잠구(潛久)라 하였다.
석천(石泉)이라고 이름한 까닭은 산속의 모든 샘물이 모여 이 시내가 되었고, 온 산이 모두 바위인데 시냇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바위를 따라 오르내리며 담(潭)이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석천(石泉)이라 이름한 것이다. 맑은 샘물이 바위 위로 흐르고 하얀 바위가 샘물에 씻겨 샘물은 바위 때문에 더욱 맑고 바위는 샘물 때문에 더욱 희니 아름답고 즐거웁도다. 잠수가 사는 곳이며, 잠수는 날마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아침저녁으로 수석(水石) 사이를 소요하는데, 질병과 우환이 있지 않으면 이곳에 거닐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즐거워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는 자라 하겠다.
박세당의 집 근처로 흐르던 개울은 원래 동계(東溪)이었지만, 그의 호가 서계(西溪)였기 때문에 서계(西溪)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은거(隱居)의 뜻을 표방하여 잠수(潛水)라 하였고, 개울가 언덕은 잠구(潛丘)라 불렀다. 그는 자신이 묻힐 곳을 낙구(樂丘)라 하였는데, 결국 그는 이곳에 묻혔다.
박세당 사랑채
박세당이 당쟁(黨爭)에 혐오감을 느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원래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사대부가(士大夫家)의 규모이었으나, 6.25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燒失)되고 현재는 바깥 사랑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동쪽의 수락산(水落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향집에서 왼쪽을 향하고 있다. 보통 좌향(左向)의 배치에서는 남향이나 남서향, 남동향을 따르는 것에 비하여 이 가옥은 방향보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연지세(自然지勢)에 따라 배치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노강서원 鷺江書院
박세당은 조선 사상계(思想界)의 지평을 넓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주류(主流)이었던 노론계(老論系) 인사들은 그에게 ' 사문난적 (斯文亂賊) '이라는 붉은 낙인을 찍어주었다. 그러한 송시열(宋時烈)도 인정한 소론(少論) 출신의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박세당의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이다.
박태보 朴泰輔
박태보(朴泰輔)는 박세당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이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를 맺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하여 여러 차례의 상소(上疎)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비(是非)를 가리는 데은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非理)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치 않았다.
노강서원(鷺江書院)은 박세당의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의 충절을 기리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 노강(鷺江) '이란 의미는, 해오라기가 있는 강(江), 곧 노량(鷺梁)을 뜻한다. 왜 서원의 이름이 노강(鷺江)일까 ? 1689년 숙종(肅宗)이 후궁 장희빈(張禧嬪)이 왕자를 낳자 세자(世子)로 세우고 계비(繼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고 노론(老論)을 실각(失脚)시키고 소론(少論)으로 바꾸었다.
이때 소론(少論)의 핵심 인물인 박태보(朴泰輔)가 이를 반대하는 여론을 주도하고 목숨을 건 상소(上疎)를 올렸다. 결국 ' 박태보 '는 숙종(肅宗)의 분노를 사 벌겋게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국문(鞫問)을 당한 뒤 초주검이 되어 유배(流配)에 올랐으나 노량진(鷺梁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훗날 나라에서는 박태보(朴泰輔)의 학문과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는 동시에 시호(諡號)를 문열(文烈)이라 하고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이 서원(書院)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노강서원(鷺江書院)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이었으나, 6.25 한국전쟁 때 그만 소실(燒失)되고 말았다. 1968년에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