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8:9~17)
바리새인이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의로운 자들이고
세리가 부적절한 짓을 하는 죄인처럼 보이지만
그런 이유로 상한 심령으로 자신을 낮춘 사람이다.
하나님은 의의 기준을 사람 마음의 중심에 두시는 분이시다.
치장된 겉모습에 결코 현혹되지 않으신다.
그리고
구원 여부도 주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은 당연하다.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의인과 죄인, 구원을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규정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무척 어리석과 황당한 일이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며 때로는 혐오까지 한다.
어떤 이가
너무나 Holy하게 보이든지
반대로 너무나 추악한 범죄자로 보이든지
이런 것이 그 사람의 의나 구원 여부의 주요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드러나느냐, 은닉되어져 있느냐의 차이지
사실 사람 중에
이생에서 어떠한 죄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난 이가 있을까?
다만
모두가 죄를 지으나
스스로 죄를 죄로 아파하며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인가,
아니면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은닉한 채로
스스로를 높이고 오만하며
타자를 정죄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종착역에 도달할 가능성이 많다.
세리는 세상에서 돈을 착취하는 죄를 저지른 죄인이나
그것이 잘못됨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의 기반이 조성되었고,
반대로 바리새인은 신성한 종교인으로
세상에서 인정받는 현상으로 인해
자신과 사람을 속이며 교만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권한을 찬탈하여
심판자 역할을 하거나
자신을 드높이는데 역량을 쏟을 존재가 못 된다.
그러기엔 직시해야 할
이생에서의 몸과 영혼의 고난,
반드시 씻겨져야 할 죄악이 만만치 않다.
그러니
나와 타자를 두고
선생, 심판자 노릇을 하거나
나를 높이거나 자랑하는 일 등은
가히 어불성설이다.
그저
어려운 인생 여정을 함께 걷는,
같은 입장에 선 나와 타자가 겪는 힘들고 어려운 사연을
서로 들어주고, 옆에 있어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최선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