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룡산, 화왕산 > 불뫼의 드넓은 초원 그리고 바람의 풀 억새
1. 일자: 2024. 9. 28 (토)
2. 산: 관룡산(754m), 화왕산(756m)
3. 행로와 시간
[옥천주차장(10:50) ~ 관룡사(11:20) ~ 용선대(11:37~47) ~ 관룡산(12:33) ~ (임도) ~ 드라마촬영장(13:30) ~ (억새평원) ~ 화왕산(14:05) ~ (3코스) ~ 도성암(15:10) ~ (가야왕릉) ~ 자하곡 주차장(15:34) / 10.82km]
옛 사진을 보니 그땐 11월 이었다. 메모를 뒤적이다. 출처불명의 기록도 찾았다.
'화왕산의 본디 이름은 불뫼이다. 암봉을 인 정수리 일대가 불꽃처럼 솟아 올랐으며, 서쪽으로 트인 낙동강 벌판을 품는다. 관룡산과 더불어 ㅁ자에서 밑받침을 떼어낸 형국이다. 낙동강 들판을 한눈 아래 내다보는 그 놓임새로나, 철옹성같이 꽉 짜였으면서도 정상 일대에 태고의 정밀이 감도는 그 앉음새로나, 삼지, 화왕산성, 진흥왕척경비 등으로 지리, 역사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이 산은 명산의 기준으로 높이만을 치세울 수 없는 본보기인 셈이다.'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억새 고원이 매우 인상적이던 산이다. 그곳에 다시 가려 한다. 당시는 우포늪과 연계 산행이었지만 오늘은 오직 관룡산과 화왕산 만을 위한 여정이고, 코스도 들날머리가 변경되었다.
< 옥천주차장 ~ 관룡산 >
10:50 옥천주차장에서 길은 시작되었다. 도로를 2km 걷는다. 산사로 향한는 등로는 지루하진 않았다. 선선한 바림이 느껴지고 길가에 뒹구는 낙엽을 보며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그 난리를 피우던 폭염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나 보다.
관룡사 경내로 들어선다. 키 큰 대나무숲 앞에 돌로 축대를 쌓은 작은 문을 지난다. 그 모양과 주변 분위기가 산사의 품격을 짐작케 한다. 용선대를 향하는 사찰 뒷길의 정취도 그만이다.
관룡사에서 0.5km 거리를 20분에 걸어 용선대에 도착했다. 부처는 멀리 창녕땅을 굽어보고 있다. 석불 뒤로는 관룡산의 암릉과 저 멀리 화왕산의 억새밭이 희미하게 존재를 드러낸다. 바라보는 풍경에 막힘이 없다.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용선대를 지나자 등로는 가팔라진다. 좌우에 출입을 금하는 금줄이 쳐있다. 벼랑에 선 소나무가 멋진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풍경에 차로 지나온 길과 마을이 드러난다.
험한 바윗길이 한동안 계속되더니 조금씩 순해지며 관룡산에 닿는다.
< 관룡산 ~ 화왕산 >
관룡산을 지나며 길은 몰라보게 순해진다. 넓어진 비탈을 따라 한참을 내려선다. 임도 옆 정자에서 잠시 쉬어 간다.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이들과 교차한다. 곧 펼쳐질 억새의 향연에 설렌다. 경험을 해서 미리 안 다는 건, 기대치를 높인다.
햇살 살 드는 임도를 따라 오르자 돌로 쌓은 성곽이 나타나고 석문을 지나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억새 평원이 드러난다. 여름 꽃들이 질 때 홀로 피어나서 바람 속에서 꽃씨를 퍼트리는, 생김새는 초라하고 색깔은 희뿌옇지만 그 억새가 온 산등성이를 휘갑는 풍경은 가히 압도적이다. 발길은 억새 능선을 따라 쌓아올린 성곽 옆 길을 오른다.
바람이 분다. 억새는 바람의 풀이라 했다. 흔들리는 꽃씨 하나하나가 가을 빛을 품고 반짝이고 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연신 삼각대를 세운다. 억새의 색은 다 같은 게 아니다. 거리와 고도에 따라 그리고 주변의 식생과 어우러져 누구나 흉내내지 못할 광활하면서도 눈맛이 살아나는 색의 향연을 그려내고 있었다.
12:05, 화왕산 정상에 올랐다. 12년 만이다. 희미해진 옛 기억에 새 사진을 입힌다. 정상 언덕에 서서 한참을 서성인다. 풍경 맛집을 그냥 스쳐 지나갈 순 없다. 그런데,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아직 볼 게 많은데... 마음이 급해진다. 제 3등산로로 방향을 잡는다.
< 화왕산 ~ 자하곡 >
키 크고 잘 생긴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하산 길 초입, 잠시 걷다 팻말에 이끌려 찾은 전망대에서는 화왕산 정상이 다른 각도로 조망된다. 북서 방향으로 멀리 우포늪의 물길이 보이고, 그 너머로 넘신거리는 산줄기에는 가야산, 황매산 그리고 더 멀리로 지리산이 조망된다. 화왕산의 또 다른 매력을 경험한다.
제 3등산로는 다른 두 곳에 비하면 쉽다 하지만 돌투성이의 험로가 계속되었다. 가야 왕릉을 안내하는 설명판을 지나며 등로는 순해진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아이러니하다. 힘에 겨운 길을 걷는데도 정신은 맑아진다. 광활한 먼 풍경을 보았더니 일상에서의 일들은 단지 '고만고만한 범사'로 여겨지고, 선 굵은 본질이 그려진다. 더 너그러워지고, 많은 일들은 나의 변화로부터 시작됨을 깨닫는다.
다시 솔숲이 근사한 언덕 위에 선다. 소나무 기둥 사이로 도성암의 사찰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고요함에 이끌려 경내에 들어선다. 전각도 좋아지만 그 뒤로 병품처럼 서 있는 소나무의 군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화왕산의 매력은 억새 만이 아니었다. 도처에 보물 같은 풍경들이 넘쳐나고 살아 있었다.
< 에필로그 >
도성암을 지나자 창녕여고 부근 주차장까지 도로가 이어졌다. 대부분의 상가는 문을 닫았지만, 사람들로 북쩍이는 언뜻보아도 멋져보이는 카페들도 여럿 있다. 그 중 한 곳 뒤로는 가야의 왕릉 군이 부드럽고 풍만한 곡선을 그리며 산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 또한 감동이었다. 이곳을 다시 찾을 이유가 생겼다.
귀경 버스가 출발하려면 1시간 이상이 남았다. 오기 전 눈여겨 둔 음식점으로 향한다. 국밥 한 그릇을 시켜놓고 사진을 정리한다. 갈무리해 둔 2012년 11월 사진을 지운다. 새 것들을 훗날의 추억을 위한 증표로 저장해 둔다.
식사를 마치고도 시간 여유가 있다. 오늘 산에서의 일들을 복기해 본다.
좋았다. 옛 기억과 기대가 산 길과 산정에서 확인되어 좋았다. 그리고 화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드넓고 광활한 풍경은 억새 산행의 매력을 색다른 시각에서 느끼게 해 주어서 최고였다. 역시 억새는 바람의 꽃이었다. 흔들려야 그 존재가 드러난다.
버스가 서울로 향한다. 막 추수가 시작된 논은 황금색 일색이다. 분주한 손길들이 멀리서도 목격된다. 이 가을의 풍요는 유독 심했던 여름 더위를 이겨낸 결실이라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다음 주에 예보된 태풍이 우리를 빗겨가기를 기대하고, 또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