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과 마지막
2024.11.24. 추수감사예배
제법 쌀쌀한 날씨지만 가까운 마음으로 이 먼 곳 시골 교회까지 귀한 분들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예배로 우리 몸 된 교회는 이날을 한 해의 마지막 시간으로 마무리 짓고 또 새해를 출발하는 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의 제목은 ‘처음과 마지막’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인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 시간이 근 사십 년 된 것 같습니다. 만으로 스물한 살 때 동네 교회에 나가서 그 1월달에 새벽기도를 가고 싶더라구요. 새벽 기도회에서 말씀을 듣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나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신 사건이라고 마음으로 믿어졌습니다.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는 다녔지만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영접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 제가 다니던 곳이 개척교회라 성도가 많지 않았지만 그 교회에서 제일 나중에 교회 나온 사람이 저였지요. 모태신앙을 가지신 분들이 많았고 기도도 유창하게 하시는데 저는 기도할 줄도 모르고 성경 순서도 잘 모르고 다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살아나셨다 지금 예수님이 천국에서 나를 보고 계신다’ 이 간단한 복음의 메시지를 붙잡은 것 같습니다. 그때 들었던 말씀 중에 신앙생활을 나중에 했던 저로서 참 위로가 되는 말씀이 있었어요. “박 선생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이 천국의 법칙입니다.” 이렇게 집사님들, 권사님들이 말씀해주셨던 것이 기억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처음 된 자들도 신실하게 길 가면 주님이 축복하시겠지만 마음이 교만한 나머지 주님 멀리하다 보면 꼬리가 된다는 뜻이겠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0장에 예수님이 천국을 설명하실 때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집 주인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면서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이른 아침, 아마 새벽 여섯 시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더 필요해서 오전 아홉시에도 또 정오 시간에도 또 오후 세시에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의 품군으로 부르셨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오후 다섯 시에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왜 여태 일하지 않고 놀고 있습니까?” “우리를 품군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여기 있습니다.” 아마 저같이 약하고 재주가 없는 사람을 일군으로 부를 사람이 거의 없겠지요. 그런데 그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여섯 시에 결산하고 품삯을 나눠주라고 청지기에게 지시합니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주는데 한 데나리온씩 줍니다. 오후 다섯 시에 왔기 때문에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하루 일당을 준 거예요.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너무 황송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넘쳤을 겁니다. 그것을 본 이른 아침에 왔던 사람들은 기대하기를 ‘저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저렇게 주는데 우린 더 주겠지’ 하고 생각을 했나 봐요. 그런 것을 광수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을 주는 거예요. “아니, 여보시오, 저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해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데 우리는 종일토록 이 더위와 함께 수고하며 견디면서 일을 했는데 우리를 저들과 동일하게 대하는 것은 옳지 않소” 이렇게 따지고 집 주인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집 주인이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하지요. “친구여, 내가 당신과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았소. 나는 불의한 것이 없고 약속대로 주었고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니 당신 것이나 가지고 가시오” 하고 돌려보냅니다. 아마 집 주인을 원망한 그 품군도 새벽에 처음 포도원 주인이 불렀을 때는 ‘야 오늘도 일할 거리가 생겼다. 정말 감사하다. 오늘도 나에게 공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당이 생겼으니 참 기쁜 날이구나’ 마음에 은혜와 감사가 넘쳤을 것입니다. 결산할 때 한 시간 일한 오후 다섯 시에 온 품군의 품삯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으로 마쳤을 텐데 포도원 주인과의 관계를 보지 않고 남의 행복 속에서 자신의 빈약함을 느끼며 상대적으로 불행을 느낀 것입니다. 남 볼 것 없지요! 나를 불러주신 저 포도원 주인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 긍휼의 풍성하신 포도원 주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생각하니 예수님 잘 모시고 약속된 천국을 향하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그 청년시절에 열심히 했습니다. 그 당시 전에는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 다니지 않는 청년들이 꽤나 있었어요. 그들을 동네에서 만나면 “요즘 자네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알고 있는데 나도 왕년에 그랬는데...” 하고 말하는 겁니다. ‘왕년에 그랬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처음과 나중이라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지만 내가 전에 죽었다는 말씀을 꼭 붙이셨습니다. 제가 이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나의 새로운 삶을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기독교의 상징이 아니라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믿어졌고 그때부터 저에게는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저는 예수님 믿는 것을 종교 생활한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나의 삶이 진정으로 시작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살다가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자” 말씀합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나의 믿음의 창시자요, 나의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순간순간 바라보자! 이 믿음은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나와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가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귀한 발걸음을 해 주신 분들, 종교적인 하나의 분위기로 봐서 교회에 오지 마시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시길 권합니다.
솔로몬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요즘의 표현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태어나보니 자기가 왕자였어요. 왕자로서 교육을 받았고 고생을 별로 안했어요. 하나님도 솔로몬을 사랑해주셨고 그를 통해서 성전을 짓게 해주셨어요. 자기 아버지 다윗을 만났기 때문에 솔로몬 시대 때에는 전쟁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솔로몬이 이방 나라의 여인들과 정략결혼을 하면서 하나님만 섬기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변절시켜서 이방 사람들처럼 우상숭배를 하는 길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세운 하나님의 나라인데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권한다니 말이나 됩니까? 솔로몬이 그 짝입니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고요. 우리 말에 ‘용두사미’가 있지요. 용 머리로 시작했는데 뱀 꼬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예수님은 솔로몬의 그 결과를 보시고 그의 부귀영화는 들에 핀 꽃보다도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유대 땅 베들레햄 시골에서 목동 생활을 했습니다. 아주 흙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지요. 그렇지만 그 마음은 주님을 사랑했고 부모 형제들도 몰라주지만 주님과 친밀한 사귐 속에서 주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그에게 출세의 길이 열렸지만 거기에 관심 없고요, 내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한 마리 양으로서 그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도 실수를 여러 번 해서 돌이키고 돌이켰지만 마지막 말년까지 주님께 충성하고 사랑 받고 감사를 올렸던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처음 된 자가 나중 되지 않고 마치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것처럼 신앙을 지킨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도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는데 빈틈을 두지 않겠다. 예수님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오늘도 예수님을 나의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주님을 모시겠다. 그리고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살아간다.’ 연세 드신 분은 그런 생각을 하시겠지만 젊은 사람들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거든 오늘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될 줄 압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무엘이예요. 어린 아이 때부터 이 땅을 떠나가기까지 그는 날마다 기도 생활을 쉬지 않았고 자기를 근거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깨어 살았습니다. 날마다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았기 때문에 그 영광이 주어진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식구님 여러분, 오늘 귀한 발걸음을 해주신 귀한 분들, 주님이 여러분들과의 관계 속에 그 무엇보다도 처음 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마지막 주님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을 미루지 마십시오. 믿음과 헌신을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초청되어오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뜨겁게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